
사채업자인 두석(성동일)은 몇 십 만원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발적으로 채무자의 딸인 승이(박소이)를 ‘담보’로 잡아 온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인지 막상 데려온 승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 그러는 동안 채우자였던 승이의 엄마는 불법체류혐의로 강제소환되고, 덜컥 승이를 맡게 된 두석의 아이 돌보기가 시작된다.
본성은 악하지 않은 사채업자가 담보로 맡은 어린 아이를 온갖 정성으로 키우려고 애쓴다는, 있을 법 하지 않은 동화 같은 이야기다. 어린 승이 역을 맡은 아역배우의 연기를 보는 맛으로 본다고 하는 게 일반적인 감상인 듯한데, 정말 찰떡같이 배역에 맞춰 연기를 해 낸다. 사실 성인 승이 역의 하지원은 그냥 특별출연 정도인 듯한데, 주연 목록에까지 올라있는 건 홍보용이었을까.

사실 영화의 초반에 벌어지는 사건은 범죄다. 사유가 어찌됐든 아동 유괴는 그냥 대충 퉁치고 넘어갈 수 있는 식의 실수나 해프닝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감동 비슷한 감정을 주는 이유는,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가 결국에는 일종의 ‘가족’으로 변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으로 이루어지는 보통의 가족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함께 먹고,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족’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가족도 존재하는 거니까.
오직 ‘나’의 ‘자아실현’이 인생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숭배되는 시대에, 나를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행위는 미련해 보일 수도 있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두석은 그런 인물이다. 무심한 얼굴로 은근히 챙겨주는 소위 츤데레. 우연히 맡게 된 어린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뛰는 그의 모습은 자연히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는 일이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혼자 있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온갖 귀찮은 일들에 말려들어가게 될 테니까.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게 미덕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영화 속 두석과 같은 사람을 만나는 건 뉴스꺼리가 될 정도다. 요즘엔 이런 일은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는데, 그런 드라마가 여전히 시청률이 나오는 건, 어쩌면 우리가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인가”라는 질문에, “네가 이웃이 되어 주라”고 대답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너와 나를 구분하고, ‘우리’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차별을 당연시했다(물론 이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그 시대 일반적인 윤리적 관점이었다). 상대를 이런 저런 기준에 맞춰 구별하고, 그 틀에 맞지 않으면 배제하고 혐오하는 사회 속에서, 그분이 제시한 윤리는 매우 색달랐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가 아닌데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 나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어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 우리는 이런 사람을 찾지만, 해답은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영화 속 두석처럼 어딘가에서 사그라지지 않고, 좀 더 많이 칭찬받고 칭송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것이다. 좋은 꽃은 잘 가꿔지는 정원에서 자라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