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불신 -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현상의 이면
홍섭근 지음 / 테크빌교육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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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 나라의 시민으로서 공권력의 무능을 탓한다. 치안이 불안하면 경찰의 탓을, 판결이 엉망이면 사법부 탓을, 정치가 엉망이면 정치인 탓을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교육도 엉망이기에 교사와 학교 탓을 한다. 해당분야에 무능함이 있다면 그건 그 부분의 구성원 문제이기도 하며 또한 구조적 문제일 수 도 있다. 교육의 실패는 무엇 때문일까?

 정답은 아마도 둘다 일 것이다. 교사와 그들을 둘러싼 교육계의 구조 둘다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의 시민들은 주로 교사를 탓한다. 다른 분야에 비해 교육계에 대한 비판에서 구조탓을 하는 것은 좀처럼 보질 못했다. 왜 일까? 아마도 우리가 모두 자라나면서 잘못된 교사를 한번쯤은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한번 쯤 부당한 대우를 당했고, 언어폭력을 당했으며, 신체폭력을 경험하고, 혹은 성폭력에 비리도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외환 위기 이후 전체적으로 어려워진 고용시장에서 교사들이 공직이기에 예전의 위치를 지킬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와 내 자식이 교육에서 실패한 경험때문 일 것이다.

 그런데 이중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잘못된 교사에 대한 추억은 온당치 못한 면이 있다. 위에 언급한 우리가 한번쯤 경험한 나쁜 교사는 사실 70-90년대 근무한 교사로 교직 정년이 62세인걸 감안하면 2-30년이 지난지금 대부분 끝물이거나 정년퇴임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만나고 비판하는 교사들을 우리와 같은 피해자들이 자라나 교사가 된 사람들이다. 그리고 교직은 오랜 자정노력과 김영란 법등으로 촌지나 각종 비리로부터 상당히 투명해졌으며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각종 폭력도 거의 사라졌다. 물론 일부 사립학교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거기에 교대의 입학 점수는 1등급이 아니면 노려볼 수 없을 정도이며 중등교사의 임용고시 경쟁률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단순 점수로만 따지면 역대최고, 혹은 지구상 최고의 학력집단을 교육계에 투입한 셈인데. 그 효과를 좀체 체감할수 없는 것이다. 그 원인을 따지고 오늘날 교사가 이처럼 불신 집단이 된 것에 대해 다룬게 이 책이다. 설이 길었지만 본론을 따져보자.

 

 교사 권리는 없고 의무만 무한한 집단

 사실 한국사회에서 교사만큼 사회적 위치가 급변한 집단도 찾기 힘들다. 시골 마을에 교사가 발령나면 지역 유지가 나와 맞절하며 감사와 존경을 표하던 시절에서 지금은 학부모가 자신의 아이앞에서 선생의 욕을 대놓고 하는 시점이 왔다. 이는 민원이 중시되며 일어난 일이다. 과거 군과 관이 중시되는 독재, 권위주의 정권에서 사람들은 관과 군에 시달려 왔다. 문민정부 들어 이것을 해체하고자 군관민을 민관군으로 격을 바꾸었고, 이 때부터 관에서는 민원을 최우선시하게 되었다. 이는 현재의 학교도 마찬가지여서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학부모의 민원이다.

 민원을 우선시 하는 것은 시민의 권리와 복지를 증진시키는 좋은 점이 있었지만 현재는 부작용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합리적이지 못한 사유나 근거없는 민원, 악의성 민원을 공공기관이나 학교에서 거부하지 못함으써 소모적 소송에 시달리거나 업무에 심대한 지장을 초래할 정도의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예로 한 아이가 주말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격분한 학부모는 분노의 배출구로 학교의 교통지도를 문제삼았고, 학교와 교사가 아이의 교통지도를 잘 하지 못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취지로 소송을 걸어 패소할때까지 무려 3년간 학교와 교사를 괴롭혔다. 아마 해당 학교의 교장과 담임교사는 3년간 제대로 업무와 교육을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며 이는 필시 다른 아이들에 대한 피해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하여튼 현재 법원의 판결 경향과 사회적 시선은 사실상 학교와 교사에 아이들에 대한 무한 책임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 책임을 주로 교육이 아닌 주로 안전이나 다른 부분에서 따진다는 것이다. 어떤 학부모도 아이가 성적이 부진하거나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학교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희안하게 이건 자기들 책임이라고 제대로 생각한다. 오히려 학교에서 다치거나 폭력사건이 일어나거나 하는 일에 격분한다. 이상한 일이다. 학교는 교육기관이지 보육시설이거나 안전보장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와 교사는 이 분야의 전문기관이 아니기에 이 부분에 취약하다. 사실 한국만큼 아이의 모든 안전과 보호에 학교에 무한책임을 묻는 곳은 없다.

 이처럼 학교와 교사에 대한 교육외적인 부분에 대한 무한 책임의 요구는 교육의 저하를 불러온다. 다소 어처구니 없게도 교육과 안전은 반비례한다. 안전과 그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요구할수록 교사와 학교는 교육활동에서 극도로 위축되며 면피성 문서 작성과 메뉴얼에 집착한다. 이는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다. 사회와 정부는 이런 요구를 하면서도 인력 충원과 지원은 없고 업무만 주기에 결국 교육에 투입될 자원이 소모된다. 이는 공교육의 저하와 자연스레 연결된다.

 일부 학부모의 태도도 상당히 문제다. 시장에도 블랙컨슈머가 있는 것처럼 학교에도 블랙학부모가 있다. 이들은 학교나 교사가 민원의 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감정배출구나 하수구로 이용한다. 갖은 트집으로 악의성 민원을 걸고, 담임교체를 요구한다. 문제는 교육기관이 이를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않아도 되는 제도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학교는 대표성이 전혀 없는 이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흔들리느라 에너지를 소모하고 이 역시 다른 학생들에 대한 피해로 이어진다. 학교의 관리자 역시 보신주의로 어처구니 없는 학부모의 민원에 담임교사를 사과시키거나 오히려 학부모의 편을 들어 문제를 진화시키려 한다. 당연히 이런 학교와 교장 교감의 태도는 블랙학부모의 강화제로 작용한다. 남을 괴롭힐 수 있는 권력의 맛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개선 방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교사가 우선 정신을 차릴 것을 종용한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교육법을 알고, 전문성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집단이기에 교사는 이 부분에 취약하다. 그리고 교사들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교육정책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다른 어떤 분야와도 다르게 교육계의 최상위에는 교사가 없다. 경찰청의 최상위에도, 소방재청의 최상위에도 경찰과 소방관이 있음에도 말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교육계의 최상위에는 행정관료와 교수들이 있다. 마치 경찰청의 최상위에 다른 일반 행정직과 경찰행정학과 교수가 있는 격이다. 이렇다 보니 교육부와 상급기관에서 양산하는 정책이 현장과 동떨어져 교육성이 떨어지고 무리한 요구가 된다. 지난 수십년간 하향식 교육정책은 수백조의 예산을 써오고도 어느 것 하나 성공한 바 없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그리고 교사 집단의 세분화도 요구한다. 이미 한국은 인구와 감소화로 과밀학급이니 콩나물 교실은 옛말이 되었다. 인구감소로 정부가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OECD대비 교사 1인당 학생수가 선진권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는 갈수로 심화 될 것이 뻔하다. 때문에 교사의 증원없이도 교사들의 세분화가 가능하다. 모두 수업하는 교사에서 생활전문교사, 수업교사, 교무기획으로 업무를 담당하는 교사로 세분화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외국에서는 교사는 수업만 하며 생활지도는 관리자나 전문상당교사나 경찰관이, 안전은 다른 기관에서 책임져준다. 이 같은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향후 잉여가 생길 교사집단을 세분화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수업보다는 행정업무를, 그리고 아이들을 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교사가 있기에 이 같은 분업화는 생각보다 성공적일 수 도 있다.

 학부모의 변화도 요구된다. 학교와 교사를 자신의 감정 배출구이자 하수구로 이용하는 것을 멈추고 교육3주체의 하나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학교에서 학교폭력 사건이 벌어지면 가해자의 학부모는 처벌에 불만을 느끼고 소송을 걸기만 할 뿐 가장 책무자임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에 대한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교사 집단에 대한 비판서처럼 여겨졌지만 실상은 대변서나 발전서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물론 비판도 강하게 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저자가 지금 학교교육의 실패와 원인을 결국은 교사보다는 그들이 교육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와 정부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학부모나 교사, 일반 시민이라도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추천한다.

 

공교육, 교사불신, 홍섭근, 혁신학교, 학교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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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미래 - 디지털 시대,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관한 모든 것
존 카우치.제이슨 타운 지음, 김영선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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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빨간 머리 앤을 보면 길버트와 앤이 옥신각신하는 장면이 나온다. 배경이지만 주목할 것은 학교다. 각자 칠판이 있고 선생님은 전체강의보다는 학생 각자를 가르친다. 지금보다 훨씬 오래전이지만 지금은 이상적으로 여기는 개별화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학교는 원래 이랬다고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무르익으며 과학적 관리론으로 유명한 타일러가 나온다. 그는 숙련공이 많은 권한을 누리고 게으름을 피며 자본가와 맞먹는게 보기 싫었다. 그래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업무 단계를 쪼개어 철저한 분업이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단위시간내에 생산성으로 노동자를 평가하고 급여를 주기 시작했다. 햄버거집에서 햄버거를 만들던 요리장인이 더이상 필요없어지만 요리에 요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햄버거를 만들게 된 것.

 이 과학적 관리론은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 저임금의 분업이 가능한 노동자를 요구했고, 이에 학교는 평균을 상정하고 전체를 강의하는 형태로 변환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제목이 공부의 미래임에도 현재에도 교육에서 오래된 개념인 개별화를 강조한다. 더불어 맥락있는 학습과정에의 능동적 참여와 사회적 실천, 그리고 미래기술과 공부가 결합되어야 함이 이 책의 주장이다.

 학습은 사실찾기와 암기. 이해로 이루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는 모두 중요한데, 최근 기술발달로 사실찾기와 암기는 과거에 비해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남은 건 이해인데 이해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요 실제 맥락에서 이를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학습은 사실 자체를 아는게 아니라 그 사실을 어떻게 활용하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 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학습을 위해 적절한 공간을 강조한다. 먼저 쏜다이크의 공간 개념을 갖고 온다. 쏜다이크는 3가지 공간을 제시했는데 모닥불 공간, 물웅덩이 공간, 동굴형 공간이다. 모닥불 공간은 전체학습의 형태로 모닥불을 피우고 족장이 옛날 이야기를 하는 것과 비슷한 공간이다. 일제식 책상배열보다는 원형이 좀더 낫다고 주장한다. 물웅덩이 공간은 협력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학교교육에서 가장 약한 공간으로 교실이든 도서관이든 학교 어느 공간이든 협력이 일어날만한 공간배치는 극히 적다. 동굴형 공간은 혼자시간을 보내며 조사검토 및 생각계획을 하고 학습한 것을 되새기는 곳이다. 저자가 제시한 4번째 공간은 산꼭대기 학습형 공간이다. 배운 것을 실제로 해보는 공간으로 실제 배운 것을 이해하고 활용하며 시행착오를 겪으며 목표를 향하기에 산꼭대기형이다.

 공간 다음은 학습형태인 도전기반 학습을 제시한다. 도전기반 학습은 학생들과 관련성이 있으면서도 학생의 동기를 유발하는 수단으로써 개인 및 집단으로 하여금 도전을 제기하도록 하는 탐구기반 학습이다. 교육계에서 유명한 프로젝트 학습과 매우 비슷하지만 몇가지 차이가 있다. 바로 사회적 실행이 이루어진 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도전인 셈인데 기술을 강조해서 학습자가 단순한 콘텐츠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나 창작자가 되도록 하는게 목표다.

 마지막으로 이런 적절한 공간과 학습형태가 이루어지도록 지원하는것이 중요한다. 그래서 제안한게 21세기 형 ABC 다. A는 acess 접근으로 뛰어난 교사와 훌륭한 학교, 혁신적인 기술에 학생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B는 build로 학습한 내용이나 사회적 실천을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메이커 공방이나 메이커 운동 자체가 이 것이다. 마지막 C는 코딩으로 코딩교육을 말한다. 코딩 교육은 미래 인공지능과 로봇때문에 그 자체로 중요하기도 하지만 논리성과 합리성, 비판적 사고를 말하는 컴퓨팅 사고를 갖출 수 있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모두가 수학자가 되기 위해 수학을 배우는 것이 아닌것처럼 말이다.

 책은 미래 교육을 강조하지만 그 바탕의 원리는 과거 오래전 존 듀이를 비롯한 진보적 교육학자들이 말하는 논지를 따라가는 느낌이다. 물론 현대는 기술의 시대이기에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교육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활용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저자 자체도 뛰어난 교사를 넘어서는 교육기술은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건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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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7-16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육에서 선생님의 중요성은 여전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

닷슈 2019-07-16 22:16   좋아요 1 | URL
적극 동의합니다
 
인생 우화
류시화 지음, 블라디미르 루바로프 그림 / 연금술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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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인간을 만들며 완벽하게 만들었기에 세상이 잘될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인구가 불어나고 인간사회가 발달할 수록 의외로 엉망이었다. 그래서 신은 인간이 너무 많으니 어정쩡한 녀석들은 그냥 놔두고 가장 지혜로운 이들과 가장 멍청한 이들을 천사둘을 시켜 모아오게 했다. 지혜로운 이들은 각 마을마다 한명씩 뿌리고 멍청한 녀석들을 손수 재교육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지혜로운자는 실제 사회가 그렇듯 얼마되지 않아 쉽사리 재배치가 되었지만 문제는 실제 사회가 그렇듯 멍청한 놈들은 너무나도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담당한 천사는 이녀석들에게 원대한 신의 뜻을 일깨우는데도 애를 먹었고 워낙 많은지라 한방에 옮기기도 쉽지 않았다. 고심끝에 큰 자루에 녀석들을 담고 운반하던 천사는 그만 이녀석들을 폴란드의 헤움이란 도시에서 놓쳐버리고 만다. 가장 멍청한 이들로 이루어진 헤움은 단시간에 망할 것이 분명해보였지만 어찌된 것인지 나름 번성하고 현자의 도시란 명칭가지 붙고 만다. 물론 자칭이지만. 그리고 이 우화는 이 가상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이렇게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말도 안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꾸며가는데 주변 도시들은 실제 폴란드의 도시를 써서 웬지 모르게 이 도시가 지구상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그냥 어이없지만 몇개는 뼈를 때리기도 했다.

 에피소드중 하나인 '세상에서 가장 쉬운 위기 대처법'이다. 폴란드에도 장마가 있는지 여름에 장마가 오기 시작했다. 밭이며 논이며 모두 잠겨 그야말로 심각한 '위기'였다. 그러자 늘 그렇듯 헤움엔 회의가 열렸고 마을의 제일가는 현자 베렉이 말한다. 물이 많긴 하지만 물이 없어서 가뭄에 농사도 못짓는 지역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이 기가막힌 주장이 먹힌다. 그래서 이들은 '위기'를 '축복받은 환경'으로 바꿔부르기로 한다. 본질을 돌리고 다른 프레임으로 기가막히는게 바뀌는게 지금 일본과의 위기상황에 대응하는 한심한 뭔 당같다.

 하여튼 계속되는 축복에도 마을엔 문제가 계속된다. 밭은 썩고, 물에 잠긴 가축은 병든다. 아이들도 물놀이만 하고 일을 하지 않아 게을러졌다. 더 큰 문제는 물이 너무 불어 안식일에 쓸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또 회의를 열고 그래서 밀가루로 붕어빵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예배당으로 갈 방법이 없자 이번엔 문짝을 뜯어 가가호호 뗏목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다만들고 나니 현자인 니들은 물이 모두 빠진걸 알아챈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상황에 이들은 지금은 다시 위기로 인식하기로 한다. 그리고 비가 다시오는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애써 만든 뗏목을 발판으로 써 예배당에서 붕어빵을 먹는 전통을 만들기로 한다. 기가 막힌 마을이다.

 책엔 이런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어리석은 사람들로 어리석어 보이지 않는 현실 사람들의 부조리와 비리, 이기심, 어리석음을 우화라느니 거울로 비치려는 것 같다. 이런게 우화의 가치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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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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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두 가지가 놀라웠다. 우선 단편집이라는것. 600p에 가까운 두께가 단편집인 건 처음이었다. 마땅히 장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타이틀이 별루라는 것. 재미나고 신선하며 독특한 단편이 많이 이 책에서 타이틀을 차지할 정도라면 종이동물원은 마땅히 재밌어야 했다. 하지만 분량도 생각보다 적었고 개인적으론 많이 아쉬웠다. 뭔가 보여주다 만 느낌. 평론가들의 생각은 달랐는지 뒤의 평을 보니 종이동물원은 작가에게 많은 상과 유명세를 남긴 작품이었다. 작품성과 대중성은 반비례하는 것일까? 

 켄 리우의 단편집이 독특한건 그의 이름때문이다. 중국계이면서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고대의 중국문화와 일본침략과 국공내전을 중국근현대사의 아픔, 그리고 미국인으로서 첨단을 자랑하는 미래가 재밌게 뒤섞여있다. 서술을 잘 따를수 있는 것도 그가 기본적으로 아시아권문화를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잘 썼어도 서양인의 서술은 정말 잘 번역되지 않는한 따라가다 망설이게 된다.

 여러 개의 작품중 과거를 다룬 1개의 작품과 미래를 다룬 2개, 그리고 미래와 과거과 뒤섞인 1개가 마음에 들어 정리한다. 

 과거 작품의 배경은 대만이다. 릴리라는 붉은 머리의 미국소녀가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대만으로 이주한다. 릴리는 미국에선 제법 인기있는 소녀였지만 새 대만의 국제학교에서는 왕따신세다. 릴리는 제법 좋아하고 즐기지만 다른 미국아이들이 혐오하는 중국 도시락은 이 아이의 신세를 더욱 악화시킨다. 어느 날 릴리는 길을 거닐다 대만의 물소를 본다. 그 물소의 뿔은 미국 물소와 다르게 뒤로쳐졌다. 웬지 쉽게 잡아 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거기에 릴리는 5살에 양 등에 매달려 무려 28초를 견딘적이 있다. 그렇게 물소를 잡아탄 릴리는 물소주인인 중국인 할아버지와 소년을 만나게 된다. 할아버지는 한자점으로 릴리에게 한자와 중국문화를 가르쳐주고 왕따에서 벗어나게 도움을 준다. 소년은 커서 미국의 메이져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뛰고 싶어한다. 거기에 금발의 미국인 아내도 원한다. 릴리는 할아버지에게 배운 한자점으로 제해권이란 단어의 영어뜻을 아버지에게 묻다 우연히 소년의 친부모가 2.28사건과 관련되었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소년의 아버진 할아버지를 신고하고 할아버진 모진 고문끝에 죽고, 저항하던 소년도 죽는다. 릴리는 아무것도 모르며 자신의 물음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시대의 아픔이다.

 미래세계에서 갑작스레 콜걸들이 살해당한다. 범인인 워쳐라는 남자다. 그는 어릴적부터 권력욕을 탐했고 사람을 지배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뒷골목에서 전전하던 그가 한 콜걸을 알게되고 어느날 서로의 몸을 탐하다 우연히 그녀의 눈빛이 이상함을 느낀다. 일부 콜걸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훗날의 보험으로 눈에 영상저장임플란트를 심었던 것이다. 워처는 이를 이용하기로 한다. 임플란트를 한 콜걸들만 찾아죽이고 그 임플란트로 그녀들과 관계한 권력자를 위협하는 것. 이 대담한 살인에 한 탐정이 끼어든다.

 또 다른 미래 이야기는 지구에서 우주로의 여행이야기다. 지구의 과밀화로 승객 천여명을 태운 우주선이 처녀자리의 먼 행성으로 이주를 시도한다. 가는데는 400년이 걸리기에 철저한 인구조절로 수세대에 걸친 자손들이 간신히 도착하는 거리다. 항해후 모처럼 지구에서 통신이 들어온다. 의술의 발달로 영생의 비밀이 풀린것. 이 시술은 우주선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우주선의 사람들은 정해진 인구수로 인해 영생이냐 자손을 남길 것이냐를 두고 고민한다. 400년후 도착한 행은 놀랍게도 이미 상당부분 개발이 되어 있었고, 생명체도 있었다. 알고보니 이들은 지구인이었다. 그들이 떠난후 백년이 넘게 지나 과학기술이 발달해 후발로 출발한 이들이 한참 먼저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외양이 이상하다. 그들은 생물학적 불멸을 넘어 기계와 하나가 된 것이었다. 도착한 이들은 바로 고민에 빠진다. 보다 확실하고 엄청넌 지성을 가진 불멸이 될 것이냐 구석기의 정신과 유물을 가진 인간으로 남을 것이냐였다.

 마지막은 역사와 미래 이야기다. 양자이론의 연구로 어느날 과거로 여행이 가능한 장치가 개발된다. 물론 가서 상황을 볼수만 있으며 관여할 수 없고, 과거의 사람들도 여행자를 보지 못한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는 이를 일본의 잔학한 범죄인 731부대의 현장을 고발하는데 사용한다. 731부대의 피해자 유족들은 과거 조상들이 당한 범죄와 일본의 간학함을 보고 경악하며 분노한다. 모든 역사적 쟁점을 마무리 할만한 이런 장치의 발명에도 세계는 더욱 논란에 빠진다. 일부 사람들은 이 장치가 역사학 자체를 파괴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지금을 과거에 다시 묻히게 만들다고 했다. 다른 이는 이 장치를 아예 믿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장치를 통해 여행하는건 거부한다. 정치권은 더 말썽이었다. 1세계의 민주사회는 처음 장치의 등장을 환영했다. 역사는 잊혀지면 안되는 거고 정의는 중요하니까. 하지만 문제가 민감하다. 미국과 중국은 대결구도였고, 미국을 돕는 제1 똘마니 일본이 위기에 처하는 것은 미국에 좋지 않았다. 거기에 다른 나라들도 뒤가 가렵기 시작했다. 자유민주주의 1세계 국가치고 과거에 만행을 저지르지 않은 국가가 없었다. 그 현실이 파헤쳐지는 것. 그들은 그게 두려워졌다. 그래서 생각보다 빠른 전 세계의 합의로 이 장치의 사용을 금지하는 국제협약이 이루어진다. 사람이나 개인이나 과거 자신의 과오를 직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이다.

 이 소설에는 이 외에도 정말 재밌는 소설이 많다. 정말 버릴게 없는 단편집인 것이다. 한 여름밤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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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09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고로 풀릴 때까지 기다려서 드디어
사긴 했는데 여적 못 읽고 있네요...

그런데 버릴 게 하나도 없다고 하시니
이번 휴가 때 읽어야 하나 싶네요 :>

닷슈 2019-07-09 15:49   좋아요 0 | URL
재미납니다 휴가에 딱맞을겁니다

행인1 2020-08-05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종이동물원은 끝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다른 것들은 중국인의 관점이 너무 진하단 생각입니다. 기대가 컸는지 만족은 그다지.......
 
왜 크고 사나운 동물은 희귀한가 - 생태학의 관점에서
폴 콜린보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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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표지도 산뜻하고, 얇아보인다. 덥고 힘들때 가볍게 읽기에 좋아보였다. 주제도 흥미롭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좀체 진도란게 나가질 않았다. 집중해서 시간이 날때 읽어야 하는 책같았지만 흥미롭고 어려워 계속 읽고 말았다. 완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 이유다. 그래도 생태학과 우리가 사는 세계,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조금더 이해의 폭을 넓힐수 있었던 것 같아 좋았다. 책의 출간 연도는 이기적 유전자와 비슷한 무려 1978년이다. 하지만 명작이 다 그렇듯. 과학책임에도 시대의 뒤떨어짐을 전혀 느낄수 없었다.

 이 책에는 몇가지 기본 전제가 있다. 우선 생명체들은 다윈주의에 따라 최대한 많은 수의 후손을 남기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음은 생명체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종의 총 개체수는 결국 그 지역의 수용력이 달렸다는 점이다. 생쥐가 새끼를 100마리 낳아도 해당 지역의 수용력이 5마리라면 결국 살아남는건 다섯마리란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쥐가 새끼를 두마리만 남는다면 3마리의 자리는 다른 개체의 후손에게 돌아가게 되니 어쨌든 생쥐는 최선을 다한다. 따라서 적합한 개체란 제한된 생태적 지위 가운데 하나를 성공적으로 차지하는 존재이며, 적합성은 향후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 생태적 지위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씩 논지를 따라가보겠다.

 

1. 왜 크고 사나운 동물은 희귀한가.

 자연계에서 먹이사슬을 한단계 한단계 오를때마다 동물의 크기는 대충 10배정도 커진다. 그래야 포식을 하는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상위 포식동물이 가장커야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포식자인 육식동물보다 훨씬 큰 초식동물도 많기 때문이다. 코끼리만 봐도 그렇다. 포식동물이 더 작을 수 있는 건, 무리짓기 사냥으로 가능하다. 늑대나 사자처럼 여럿이 힘을 합쳐 자기의 크기에 육박하거나 더 큰 동물도 사냥이 가능한 것이다.

 포식동물의 크기를 제한하는 요소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에너지 효율이다. 식물은 고작 평균2%의 효율로 태양에너지를 당으로 전환하다. 그리고 이를 먹는 녀석들은 단계를 거칠때마다 겨우 10%의 효율을 보인다. 먹이사슬 단계가 늘어날수록 위로 전달되는 에너지가 극히 적어지는 것이다. 이는 포식동물이 먹은 에너지를 자신의 번식과 생존 및 활동에 상당부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덩치를 크게 하는 포식동물도 있다. 바로 고래다. 고래는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최상위 포식자임에도 여러단계를 거치지 않고 1차 소비 동물을 먹는다. 이 경우 에너지 효율을 엄청나게 높일 수있지만 적은 칼로리를 가진 녀석들을 하나하나 잡아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이 이점을 상쇄시킨다. 호랑이가 에너지 효율 높이자고 멧돼지가 아닌 메뚜기를 하나하나 사냥한다고 해보자. 손해가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고래는 제자리에서 대량의 물을 삼키고 물만 걸러내고 이녀석들을 먹는 매우 게으른 방법이로 이를 만회한다. 그래서 그렇게 큰 덩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먹이 사슬 단계를 지날때마다의 에너지 감소와 무리사냥 등이 크고 사나운 동물을 적게 만드는 이유다.

 

2.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 ???

 우리는 흔히 강이나 호수 바다가 파랗고 청명해 보이는 것을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그런 류의 것들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기에 유독 부럽기까지 하다. 유럽이나 동남아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이 파랗다는 것은 영양분이 적고 생명체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이 파랗기 위해서는 햇빛이 물에 스며들어야 하는데 파장이 긴 가시광선의 색들을 흡수되고 가장 짧은 푸른 계열의 빛이 바닥에 도달해 반사된다. 그래서 바다가 푸른색인 것이다. 하지만 물안에 생명이 가득하고 녹색의 식물이 많다면 물은 갈색이나 녹색계열을 띠게되며 다양한 화학작용으로 냄새도 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물의 형태인 것이다.

 그런데 파란호수나 강에도 생명은 살아간다. 이건 어찌된 일일까? 푸르른 유럽의 호수들은 대개 빙하호의 흔적인 경우가 많다. 겨우내 얼었던 호수가 녹으며 호수는 위아래가 뒤섞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산소가 물에 유입된다. 하지만 봄에 기온이 오르며 생명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층부와 기온이 여전히 낮은 하층부로 분리된다. 물고기는 바로 이 하층부에 산다. 하층부는 한때 유입된 산소가 유입되어 있고, 적게나가 영양분이 바닥에 있어 작은 생태계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파란호수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우리처럼 녹색이나 갈색의 부영양호로 바뀌게 된다. 세월이 지나며 퇴적작용으로 바닥이 높아지게 되고 먼저 하층부가 사라지게 된다. 영양분을 오랜세월 묶어두던 하층부는 기온이 높은 상층부와 만나게 되면서 화학작용이 활발해지게 되고 생명체가 들끓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깊은 호수는 빈영양호에서 부영양호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바다다. 우리는 흔히 바다를 제2의 식량창고로 생각하고 있으며 워낙 넓기에 생명체가 가득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육지와 맞닿아 있지 않은 대부분의 바다는 매우 푸르며 이는 곧 영양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바다의 식물조직은 연간 약 920억t 정도를 생산한다고 추정하는데 비해 육지는 무려 2720억t에 달한다. 식물량이 동물량도 결정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먹을 거리는 우리의 통념에 비해 바다보다는 육지에 훨씬 풍부하다. 이는 영양물질들이 육지는 식물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에 분포하는데 비해 바다는 육지 인근이나 해저 심해류가 용승하는 지역이 아니면 그렇지 못하다는 점과 관계한다. 또한 에너지의 근원인 태양에너지가 육지의 경우 이렇다할 장애물 없이 도달하는 반면 바다에는 물로 인해 상당부분 흡수된다는 점 때문으로 생각된다.

 결국 바다는 영양의 보고가 아니라 사막에 가까운 존재였던 셈이다.

 

3. 종은 왜 이렇게 다양한가?

 종은 3가지 이유로 다양해진다. 우선 지역적 차이에 따른 분기다. 같은 종이었던 녀석이 개체수가 늘어나며 퍼지면서 다른 환경에 노출되게 된다. 세월이 오래지나 점차 다른 형질이 적합성을 띠게 되고 더 오래되면 아예 다른 종이 된다. 책은 이걸 형질 분기라고 한다.

 다음은 형질치환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형질 분기로 퍼지다 보면 결국 같은 지역을 두고 다투게 된다. 하지만 지역의 생물 수용성은 한계가 있기에 경쟁이 이루어지게 되며 서로 비슷하여 비슷한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생물종들은 극히 불리해진다. 평생을 두고 경쟁을 해야하기에 번식에 쏟을 에너지가 부족하게 되며 이는 적합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기적으로는 같은 지역에서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종들이 살아남게 된다. 이로 인해 종들은 극단적으로 분화하게 되고 이를 형질치환이라 한다.

 마지막은 사냥방법과 피하는 방법간의 군비경쟁이다. 육식동물은 사냥을 위해 최고의 전략과 무기등을 개발해 나간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성공적이겠지만 먹히는 초식동물들 역시 덩치를 키우고 무리를 짓는등 막강한 군비경쟁을 시행한다. 실제로 먹히는 대부분의 초식동물들은 어리거나 늙고 병든개체이며 대부분의 성년개체들은 육식동물의 공격을 압도하거나 피할수 있다. 이런 군비경쟁으로 종은 더욱 다양하게 분화한다.

 이 3가지 이유로 종은 다양하게 분화하는데 그 결과 그들은 자신만의 생태적 위치를 차지한다. 생태적 위치는 그 지역의 자연이 수용하는 한계만큼 한 종이 배타적으로 차지하는 지역을 말한다. 생태적 위치는 환경이 풍부하면 늘어나고 환경이 악화되면 줄어든다. 이 생태적 위치는 오랜 세월 절대적이라 할수 있는데 최근 이를 무시하는 개체가 나타났다. 바로 인간이다.

 

4.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은 지구 역사상 다윈주의에 따른 번식전략을 수정하지 않은체로 자신의 생태적 위치를 변화시킨 유일한 존재다. 이는 인간인 가축의 사육과 농경을 시작함으로써 식량 생산량을 극단적으로 늘리는 것으로 인해 가능했다. 이렇게 자신의 생태적 위치가 강화됨에 따라 인간은 자손을 극단적으로 늘려왔다. 하지만 늘 한계는 있었기에 교묘한 영아살해 문화가 있었으며 후손을 성년까지 키우는 시간이 길어 드는 자원과 돈이 워낙 컸기에 자식 계획도 다른 생물에 비해 정교했다.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생태적 위치를 개선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바로 전쟁이다. 전쟁으로 다른 지역을 차지해 생태적 위치를 늘려나가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항상 생활수준의 향상압박을 겪는 주변부에서 일어나곤 했다. 책은 재밌게도 이런 주요 예로 인구가 과밀하고 주변부이면서 마땅한 팽창지역이 없으며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영국섬과 일본섬을 든다.

 하여튼 이런 시도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인구 수가 늘어나 우선 도시국가가 형성되고 인구가 다시 늘어나 빈곤이 만연화 한다. 빈곤이 심해지자 위협을 느낀 상류층은 하층을 억압하기 시작하고 세련된 합법장치로 계급제나 종교를 도입한다. 이것으로도 모자라면 공격적 전쟁이 일어나게 되며 전쟁으로 지역이 통합하여 제국이 형성한다. 하지만 제국내에서 자원부족이 심화되면 결국 사방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며 이는 제국의 붕괴로 이어진다. 제국내 소규모로 분화된 지역들은 다시 힘을 규합해 국가를 세우고 제국을 재건한다. 그리고 이는 반복된다.

 이런 다람쥐 쳇바퀴 시스템에서 인간은 최근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간신히 벗어났다. 더 큰 생태적 지위가 가능해졌으며 이로 인해 세계 인구는 전쟁없이 70억으로 불어났다. 하지만 결국 파이가 커지면 그 파이만큼 인구가 따라잡아 문제가 생겼기에 갈등은 다시금 일어날수밖에 없다. 결국 스케일만 더 커진 셈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저자는 특별한 대책이 없다면 이 문제로 인해 핵전쟁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계 주요 선진국의 인구는 감소하고 있으며 예전과 달리 과밀하고 좁은 지역을 지닌 주변부가 세계의 패권국에 도전하기 힘든 정세이기도 하다. 결국 인구가 줄어들거나 인간이 스스로의 생태적 지위를 낮추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매우 재밌었다. 특히, 통념과 다른 지식이 많았는데 자연의 안전성과 균형이 생명체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이루어진 물리적 시스템이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도 마찬가지로 본다. 인간에 의한 화석연료도 단기적으로는 큰 혼란을 일으키겠지만 결국은 대양에 많이 흡수되어 새로운 균형이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바다는 대기에 비해 50배에 달하는 이산화 탄소를갖고 있다. 종교에 대한 생각도 재밌었다. 세계적인 종교의 호소력은 결국 피지배자들이 재배를 얼마나 견디도록 해주는 조언능력에 있다라는 것이다.

 도무지 40년된 책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저자가 돌아가신게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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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성 2019-07-0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년 전 책이라는 사실을 잊고 읽었네요! 대단합니다.

닷슈 2019-07-07 08:23   좋아요 0 | URL
진짜 대단한 책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