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이 온다 (리커버 특별판) - 간단함, 병맛, 솔직함으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임홍택 지음 / 웨일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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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론 밀레니얼 세대로 분류되지만 80년대생과 90년대생은 상당히 다르다. 80년대생은 자라면서 인터넷을 접한 세대라면 90년대생은 자라면서 스마트폰을 접한 세대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제적으로는 70년대생이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세대라면 80년대생은 완전고용이 붕괴된 상황에서 5-60대가 정리해고 되는 걸 본세대 그리고 90년대생은 일개 사원마저 상황에 따라 정리해고되는 것을 본세대다. 가장 부유하게 자랐지만 가장 부유해지기 어려우면서도 거기에 사회적 안정성마저 없는 세대란 의미다.

 일부 이해력이 부족한 세대들은 이런 90년대생들을 도전의식이 없는 세대, 꿈과 야망이 없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세대로 치부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세대의 특성이란 결국 당시의 경제적 환경과 사회문화적 요소가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다. 그네들이 야망을 감히 가질수 있었고, 도전할수 있었던 것도 사회가 안정적이고 웬만하면 취직이 되고 장사도 잘되어 누구나 크게 재산을 증식할수 있던 시기였단 점을 그들은 깨달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여튼 책에서 말하는 90년대생들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다.

 첫번째로는 정직함이다. 여기서 솔직함은 정직함이라기보다는 모든 분야의 공정성과 관련한다. 즉,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정직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학연이나 지연, 혈연등 과거 세대들이 중시하던 가치를 혐오한다. 조국사태와 정유라 이화여대 부정입학사건, 거기에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에 이들이 무척이나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이와 관련 깊다.

 두번째 특성은 솔직함이다. 이들은 사회적 허위의식을 버리고 자기자신에게도 솔직하며 당당히 남에게도 솔직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편러에 열광한다. 과거 같으면 예의가 없어보이고 자기만 아는 것 같은 불편러들이 대세인 것이다.

 세번째 특성은 재미다. 이들은 재미를 추구한다. 과거 세대가 삶의 목적으로 뭔가 거창한 것을 찾았다면 이들은 어떤 면에서는 삶의 목적자체가 없다고도 볼 수 있으며 그저 유희를 추구한다. 즉, 욜로인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혼자살거나 결혼해도 딩크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단순히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유희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네번째 특성은 간단함이다. 이들은 길고 복잡한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을 줄이는 현상이 나타나며 문자보다는 영상을 선호한다. 영상조차도 다 보는 것을 즐기지 않아 줄인 영상을 좋아하며 이것조차 길어선 안되며 즉각적으로 이해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져야한다. 그러다보니 이들의 일기는 F자패턴을 따르는데 제목과 주요내용만 신경을 쓰고 나머지는 대충 읽는 방법이다. 클리핑신드롬도 나타나는데 이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를 골라주고 요약, 발췌해주는 콘텐츠만을 소비하는 현상이다.

 90년대생의 이와 같은 특징을 갖고 있지만 현재 사회, 특히 기업은 이들을 받아줄 만한 준비가 되지 않은 듯하다. 선발이나 회사에서 이들을 대하고 육성하는 과정에서 기존 세대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에 맞게 행동하고 근무할 것을 이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경제체제가 4차산업으로 넘어가고 있는 지금, 기업엔 모바일 세대인 이들이 가장요구될 수 밖에 없지만 회사에 몸을 갈아야 한다던가, 야근을 당연시하는 문화는 90년대생들에게 맞지않는다. 그래서인지 지금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90년대생들의 1년 퇴직 비율은 생각보다 매우 높다. 90년 대생들이 중소기업을 기피하는 이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적 대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90년대생들은 중소기업 경영자의 마인드가 대기업에 비해 훨씬더 꼰대스럽다는게 기피의 주 이유라고 말한다. 워라벨을 중시하는 그들에게 경제적 요인보다는 자신의 발전가능성과 근무환경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미국은 물론 우리보다 더 보수적으로 여겨지는 중국마저도 80-90년대 생들을 이해하고 우대하는 조건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독특한 이 세대의 포용력있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들이 특별히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이들이 요구하는 솔직함이나 정직함, 근무조건의 개선, 자아실현추구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은 사실 복지국가이자 민주국가라면 당연한 것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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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
임지현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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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이란 개념이 없고, 세계시민이나 지구촌이라는 공통의 용어가 없던 시절. 그 땐 학살은 전쟁이나 정치, 종교의 부산물로 당연한 것이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먼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그러한 일을 잘 알지도 못했고, 오직 피해국 당사자들만 기억했다. 그들 역시 오랜 아픔을 갖고 한동안 피해를 기억하며 살았겠지만 아픈 기억은 오래 전승되지 못하고 비교적 빠르게 잊혀졌다.

 하지만 인권이 발명되고, 세계시민적 시각을 갖게 된 오늘날은 다르다. 반세기가 넘어 직접 가해자나 피해당사자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음에도 각 나라들은 이를 기억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터부시한다. 재밌게도 분명히 일어난 같은 사건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반응은 극명히 다르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가해를 부정하고, 오히려 가해과정에서 자신들의 잘못으로 입은 피해를 부각시킨다. 피해국은 피해자로써 이런 가해자의 행위 자체와 이후의 반성없는 모습을 용서하지 못하며 피해를 받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신의 가해자적 모습을 숨기고 부정한다. 이처럼 양자는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으로 인해 마찰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이 책의 제목 기억전쟁이다. 기억전쟁은 반세기전 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겪었던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첨예하다.

 근데 이 기억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우선 부정론자들의 등장이다.

 

1. 부정론들

 역사적 사건을 부정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단도직입적 부정론이다. 그냥 부정하고서 보는 것이다. 그런일은 절대절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혐의의 부정론이다. 소문에 의해 피해 상대방에게 오히려 혐의를 씌우는 것이다. 이로써 피해당사자들을 격한 감정에 빠뜨려 흐뜨러트리는게 목적이다. 문제는 이들은 남에게 혐의를 잘 씌울지언정 자신의 가해혐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건에서 유족들에게 돈을 많이 받아내려 끝까지 저렇게 군다라는 것,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향해 돈을 벌러 갔다라는 식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악의적 혐의를 씌우는게 대표적이다.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실증적 부정론이다. 실증주의는 글자그대로 피해자들이 당한 피해를 입증할 만한 물질적 증거의 부재를 문제삼아 피해를 부정하는 방법이다. 글자그대로 과학적 접근 방법에기에 당사 피해해자 가해자가 아닌 제 3자가 보기에 이 부정론의 파급력은 상당하다. 주요학문의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은 한국의 주요 전쟁피해자들을 향해 그런 행위를 한 정부공식문건이 없다라는 식으로 일변한다(실제론 있다. 숨기고 있을 뿐.)

 문제는 그럴듯해보이는 이런 실증주의가 힘있는 자의 논리라는 것이다. 가해자들은 전쟁당시 강한 정부와 군대로 관련 문서를 스스로 생산했지만 피해자들을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저 끌려가서 당했을 뿐이고 그로인해 쓰라린 경험에 대한 감정과 목소리, 충격에 의한 불분명한 기억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피해의 문서를 내놓으란게 실증주의 부정론의 목소리인 것이다.

 게다가 실증주의 부정론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문서엔 역시 관심이 없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식인 것이다.

 

2. 냉전과 민족주의

 올바른 기억을 방해하는 기억전쟁의 또 다른 요소는 냉전과 민족주의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최대 전범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소련등 새로운 냉전질서로 인해 주요 피해당사자인 한국과 대만, 동남아시아의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에 의해 억지로 일본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이로인해 피해 기억은 냉전이라는 오랜 기간 수면아래에만 존재했다. 냉전이 끝난 후, 각국의 피해문제는 수면위로 올라왔지만 이제는 중국 대 미국, 일본이라는 새로운 축에 의해 다시 억압당하고 있다. 박근혜와 아베의 무리한 위안부문제 해결 시도는 미국과 중국에 의한 이런 새로운 대결축에 의해 다시 피해자들의 기억이 억압당한 사례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독일은 일본 같은 전범국이지만 서유럽은 당시 연합국에 의해 무참히 폭격당한 민간의 피해를 그리고 동독 지역은 소련적군에 의해 입은 무차별한 여성성폭행과 인적 손실의 기억을 냉전의 논리에 의해 오랜시간 감춰야만 했다. 아군에 의한 피해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전쟁중 전사자나 희생자에 대한 신화로 피해의 기억을 억압한다. 거의 모든 국가는 그체제를 막론하고 죽아간 자들을 자세한다. 즉, 전사자 숭배와 전쟁미화의 시도로 국가를 언제든 동원체제로 유지하려는 것이다(그것이 경제든, 전쟁이든) 하여튼 이와 같은 논리로 전후 한국에서는 희생자는 잊혀지고 독립투사들만이 부각되었다(제대로도 아니다. 진영논리에 의해서 일부만, 그리고 이용했을 뿐이다) 전후 일본 역시 전쟁 중 희생자들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가해자로서의 역사성, 그리고 피해자들의 기억을 망각했다.

 

3. 각 나라들의 기억들

그렇다면 이런 냉전과 민족주의, 부정론에 의해 뒤틀린 각 나라들의 기억을 어떠할까.

먼저 가해자들을 살펴보자

 

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냉전논리에 의해 서독은 서유럽은 연합국의 무차별한 폭격에 의한 민간피해를 동독은 소련적군에 의한 막대한 피해를 묻어왔다. 하지만 통일 이후 이러한 희생 기억이 수면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이런 희생자들을 나치치하 유대인의 고통과 동일시하기 시작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역사성의 망각이다.

 이탈리아 역시 파시즘 정권을 합법적으로 일으키고 전쟁에 참여했음에도 역사성을 망각했다. 자신들을 파시스트들에게 이용당한 희생자로 여기며 일반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은 협조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로 면죄부를 획득했다. 거기에서 한술 더 떠 잔학학 나치즘에 비해 자신들의 파시즘은 한층 유순했으며 모든 도덕적 끔찍한 일은 독일군이나 동성애자 마약중독자, 새디스트가 한 것으로 치부한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이탈리아에 비해 전쟁범죄에서 비교적 자유로워보인다. 독일에 적극 협조한 이탈리아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강제로 합병되어 전쟁범죄에 어쩔수 없이 참여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어쩌면 아시아의 다른 국가와 유럽국가들은 한국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합병은 강제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1차대전 후 힘이 많이 빠진 당시 많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막강한 독일의 마르크경제에 병합되기를 희망했다. 그들의 적극성은 놀라울 정도인데 인구 700만중 나치당원이 무려 50만에 달했다. 거기에 더욱 적극가담자로 할 수 있는 나치 친우대의 비율은  본국인 독일의 8%를 아득히 상회하는 14%의 수준이다. 이런 전쟁범죄로 오스트리아 공산당이 주도한 전후 인민법원은 나치가해자와 공범자를 처벌했다. 하지만 이후 공산당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재판의 정당성 마저 부정하면서 재판의 처벌자들을 희생자화시킨다. 이를 통해 가해자들마저 희생자가 되는 오스트리아 전 인민의 희생자화가 완수된다.

 

나. 일본

 일본은 감히 미국에 대들다 원폭을 맞은 관계로 가해자임에도 희생자가 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맞이한다. 거기에 미국과 소련의 냉전구도하에서 미국 자본주의 진영의 한축으로 영입되면서 피해자인 다른 아시아 국가와도 손쉽게 화해하면서 국제적인 빚마저 강제 청산한다.

 이런 호기로 일본은 비교적 다른 전범국가들에 비해 손쉽게 가해의 기억을 부정하고 피해의 기억을 강화하는 코스프레가 가능했다. 그들은 군함도 같은 가해의 장소는 손쉽게 부정하면서도 나가사키나 히로시마등 피해자 코스프레가 가능한 부분을 문화재화하고 강조한다.

 특히 2차대전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체에 피해를 입히는 만행이었음에도 단지 태평양전쟁으로 이를 칭하거나 미국과의 대결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가해행위를 가린다. 또한 전쟁의 패배과정에서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등지에서 퇴각하지 못해 발생한 피해의 기억을 독일처럼 탈역사화하고 피해만을 강조하면서 국민이 협조한 전쟁범죄의 역사성도 지워버린다. (대표적인 예가 문제의 책 요코이야기다) 당시와 같은 총력전 체제에서는 아래로부터의 햅조없이는 전쟁수행이 불가능한 만큼 가해국가의 희생자는 총력전체제의 공범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해자들이 그렇다면 피해자의 기억은 어떨까?

 

다. 폴란드

 폴란드는 독일이나 소련처럼 전쟁 당사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치와 소련에 의한 피해와 유대힌 홀로코스트로 무려 500-600만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폴란드는 아주 공정?하게 피해자의 수를 유대인 300만 폴란드인 300만으로 나누는데 유대인 피해자가 실제론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폴란드의 전후 기억은 단순해서 폴란드인 자체도 유대인처럼 나치독일과 소련에 의한 피해자로 자신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폴란드에도 2차대전 나치의 전쟁범죄에 가담한 상당한 가해의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폴란드 내에서 유대인의 희생자수는 무려 300만으로 유럽의 어느나라보다도 가장 많다. 그리고 이는 단지 나치독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 색출에 있어 폴란드 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다. 아무리 나치라도 점령국인 폴란드내에서 풀뿌리 식으로 유대인을 색출하려면 현지주민의 고발과 협조가 필수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란드는 이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가린다.

 냉전 역시 폴란드의 기억을 흐뜨러트린다. 폴란드는 전후 사회주의 국가로 편입되면서 자기땅에서 발생할 홀로코스트를 그 자체로 기억히가보다는 사회주의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이용한다. 나치는 국가사회주의지만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 였기에 홀로코스트를 사회주의 입장에선 자본주의의 잘못된 부산물로 전용하기 쉬웠던 것이다. 폴란드의 민족주의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흐뜨러트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숫자경쟁이 이루어졌고, 홀로코스트 내에 폴란드인 희생자 성지가 세워지기도 했다. 홀로코스트 자체보단 자신들의 희생을 더 강조하는 느낌이다.

 

라. 유대인

유대인은 전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자 입장을 꾸준히 견지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관련한다.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강한 민족주의와 영웅주의가 필요했다. 때문에 시오니스트들에게 유럽으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는 영웅이나 지배자, 정복자, 주체적 인간이 없는 그야먈로 자비를 구걸하는 비겁한 역사에 불과했다. 때문에 유럽에서 비겁하게 빌붙어 살다 죽음을 맞이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시온주의를 부정하고 팔레스타인 이주를 거부한 민족의 배반자에 불과하게 된다. 이 같은 시각은 북미로 이주한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견지되었다. 스스로 구대륙을 떠나 신대륙을 개척한 유대인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정착이 승리이자 영웅의 이야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자신들과 동일시 될수 없는 패배자에 불과했다

 이 같은 홀로코스트 피해자에 대한 인식 기류가 변화한 것은 1961년 아이히만 재판때부터이다. 여러개의 다각도 카메라와 가해자들과 피해자들의 증언이 뒤얽힌 이 재판에서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 피해자에 대한 강한 공감, 그리고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이후 유대인들의 입장은 극적으로 변화하여 영웅적 시온주의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과 자신들을 동화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국가존재이유도 홀로코스트로 인해 정당화되기 시작하였다.

 

마. 중국과 한국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만행은 냉정논리와 민족주의에 의해 억압되었다. 이를 위로 일깨운 계기는 베트남전이었다. 베트남 반전운동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억압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는데 시작은 모순되게도 아사히 신문의 일본기자 혼다 가쓰이치였다. 혼다는 베트남전을 취재하며 드러난 민간인 학살과 여러 만행을 보며 자신들의 전쟁에서도 이러한 흔적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당연한 의문에서 르포를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만행중 대표적인 사건인 난징대학살에 주목하였고 여러 취재끝에 만행을 폭로한다. 그의 르포는 아직 냉전중에기에 동북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일본내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난징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날뛰었고 급기야 사건을 일본 좌파들의 선전전책으로 축소하려 했다. 가장 분개해야할 중국의 마오정부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난징대학살에 관심이 없었다. 냉전체제 하에 주적인 미국 자본주의로 괜시리 일본 군국주의로 화살을 돌려 체제의 역량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군 학살 피해자보단 국민당 반동세력에 의한 피해자, 그리고 혁명적 순교자들이 우선시되었다.

 한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과의 전쟁, 그리고 냉전으로 한국에서의 피해자 기억은 철저히 억압되었다. 독립투사와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이 영웅으로 국가중심의 경제개발에 이용되었으며 일본식민지에 의한 피해는 냉전과 경제개발이 어느정도 정리된 90년에 이르러서야 터져나왔다. 한국 역시 폴란드처럼 일본 전쟁과 식민지에 의한 피해자로서의 의식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가해국인 일본의 태도가 독일과는 전혀 다른 만큼 이 이상으로의 의식 발전이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폴란드의 경우처럼 한국은 일본의 장기간 식민지배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갔고, 전쟁에 끌려가서 일본의 전쟁범죄에 협력한 과거가 있다. 실제로 87명정도의 일본군 소속 한국인이 전범재판 끝에 유죄로 인정받았음은 적극적 협력의 반증이 될 수 있다.

 

4. 앞으로 기억이 나아가야 할 길.

과거의 분명한 기억은 전후 각국의 경제, 외교적 지형이 새롭게 그려지거나 민족주의 혹은 인종에 의해 억압받았다. 이러한 억압된 기억들이 90년대 들어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 냉전의 종식과 비슷하게 등장한 공적영역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적영역에서의 기억조차 자신이 좀더 큰 피해자라는 제로섬 게임에 빠진 상황이다. 실제로 폴란드는 유대인과 자신들 중 어느쪽이 더 큰 피해자인가라는 점에서 민감하게 굴고 있으며 책에 등장하는 아르메니아 인들은 일본군 성노예 같은 피해에 공감하면서도 자신들의 피해가 질적으로 더 높다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홀로코스트에는 인종주의적 요소나 민족주의적 요소도 가미된다.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피해는 실제로 막심하지만 지구 역사상 존재해온 그 어떤 홀로코스트보다 피해가 비극적이고 크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에 유럽과 북미사회가 주목하는 것은 이것이 같은 백인을 대상으로 한 만행었기 때문이다. 즉, 같은 문명인들간의 잔혹범죄였기에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유럽과 북미는 그리 큰 시간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벨기에의 콩고민 학살(1000만명), 호주의 테즈메니아인 절멸사건, 미국의 선주민 제노사이드(1800만명)등의 홀로코스트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그네들이 나치의 하켄 크로이즈엔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임에도 일본의 전범기인 욱일기에 탈역사적이게도 디자인적으로만 접근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비문명 야만인간의 학살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예로 2차대전후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점령후 네덜란드 여성을 성노예로 삼은 것은 큰 문제가 되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 여성들의 피해에 서구사회는 무관심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책은 원론적인 답을 제시한다. 과거의 기억은 지배적인 사회, 문화적인 코드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고 영향받을 수 밖에 없다. 즉 민족이나 계급, 인종, 젠더, 세대등 특정 이념에 기초한 경우 피해의 기억은 오염될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요코이야기의 경우처럼 아무리 생생한 기억이더라도 맥락을 탈역사화하는 것을 극도록 경계해야 한다. 결국 풀뿌리 기억은 철저히 역사적 맥락하에 모든 이념을 넘어서는 평화와 인권의 개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용서다. 이미 전쟁범죄의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는 대부분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기본적으로 용서는 피해당사자가 가해자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대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용서는 이미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들과 민족공동체라는 이유로 대신 사과하고 대산 용서하길 원한다. 그러나 섣부른 용서와 화해는 억울한 피해자를 망각하게 만듬으로써 피의 얼룩을 모른체하는 거짓평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책은 용서와 화해라는 말보다는 양자가 서로 과거의 끔찍한 과거를 아프게 인정하고 끊임없이 직시하며 살아가는 것을 제시한다. 그래야 그와 같이 일이 적어도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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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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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우리가 부러워하며 앞서가는 성평등 국가들이 모인 곳이 서유럽이다. 하지만 그들의 성평등 상황도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지진 않는다. 사실 역사를 조금만 살펴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는 유럽에서 여성참정권이 보장된 해만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는데 영국은 겨우 1928년이고 이 소설의 배경인 프랑스는 1946년에 이르러서야 도입되었다. 그러고보니 1948년인 대한민국과 큰 차이가 없다. 거기에 나름 유명한 고소득 복지국가인 스위스는 1971년이다. 거의 전세계 꼴찌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럽일지라도 100여년전에 태어난 여성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자신이 몸담았던 사회의 성평등의식 변화는 기술변화와 마찬가지로 상전벽해 수준일 것이다. 그리고 그걸 소설로 담아낸것이 이책 '루거 총을 든 할머니'다. 루거총은 나치독일이 2차대전때 사용한 권총이다. 그걸 프랑스인 할머니가 갖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베르뜨 가비뇰이다. 소설의 배경은 2016년으로 베르뜨의 나이는 무려로 102세다. 이 노인은 경찰서로 연행되는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중무장하여 집안에 있던 루거총과 22구경 장총으로 옆집 남자를 쏴서였다. 이유도 기가막히다. 한 연인이 할머니의 차를 훔치려다 눈에 띈다. 그들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를 세상에서 가장 중시하는 할머니는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도피자금까지 준 후, 옆집의 고약한 법무사차를 훔치라고 조언한 후 시간을 벌어주고자 그 법무사 녀석의 엉덩이에 구멍까지 내준 것이다. 거기에 좀더 시간을 끌어주고자 무장한 경찰녀석들과 대치하며 폭언을 퍼부우며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인 것은 덤이다.

 경찰 벤투라는 이 엄청난 할멈을 연행하여 심문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고 여생이 얼마남지 않은 사람에게 무서운 것이라곤 없었다. 심문을 하는건지 당하는건지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수사관 벤투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된다. 우발적 범행을 보였던 것 같던 이 할멈이 사실은 연쇄살인마였던 것. 할머니의 지하실엔 무려 7명의 유골이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그렇게 현재인 2016년과 할머니의 과거로 병행한다. 베르뜨는 가난한 여자들만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남자복이 워낙 없는 집인지 외할머니도 어려서 남편을 잃었고, 어머니도 1차대전에 남편을 잃었다. 베르뜨가 1차대전 발발시점인 1914년생이니 아버지 없이 자란 셈이다. 그래도 집안 여자들은 수완이 좋았다. 외할머니는 장사를 하다가 증류기를 만들어 독한 술을 팔았고, 약했던 어머니는 어느 순간 약간의 옷가지만 가지고 집을 떠나버렸다.

 베르뜨는 100년전 여성 답지 않게 가부장적이지도 않고 주체성이 있는 자아가 강한 여성이었다. 성적인 쾌락부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아름다운 외모를 자각하고, 성감대가 발달한 사춘기 이후 동네 남자아이들 그리고 같은 동년배 여아들과 동성애를 즐겼다. 정신적인 감흥은 없었다. 그냥 경험하고 싶고 즐기고 싶어서가 다였다.

 그러다 그녀는 자신보다 무려 20살이나 많은 동내 잡화점 가게 주인과 결혼한다. 가난했고, 할머니마저 노쇠하여 수입원이 마땅치 않던 베르뜨로서는 나름 최선의 현실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정신적 지주였던 외할머니는 그녀의 선택을 마뜩지 않다. 그를 보고 가슴이 뜨거워 어찌할줄 모르는가 그사람이 매일 아침에 곁에서 눈을 떠도 괜찮은가등의 질문을 던지며 말이다. 이 남자는 베르뜨를 보고 반해 어찌할줄 몰라 결혼하지만 밤자리에서의 그녀의 대담함과 자유분방함에 곧 놀라고 당황한다. 곧 여느 남자처럼 아내를 다스리기 위한 폭력이 시작되고 베르뜨는 할머니의 죽음에도 무신경했던 이남자를 삽으로 쳐서 죽인다 .그녀의 첫살이이고 지하실로의 암매장은 이때 의식처럼 시작된다.

 다음은 2차대전중 그녀를 강간하려고 들어온 독일 군인 녀석이었고, 그녀석이 이후 그녀의 심벌처럼 되버린 루거총을 본의 아니게 선물하게 된다. 이 총은 어쩌면 나치보다 베르뜨의 손에서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르겠다. 베르뜨는 계속 이런 저럼 이유로 결혼이라는 실수를 한다. 사랑보다는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 혹은 경제적 이유에서, 혹은 그냥 외로워서였다. 그런 결혼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그녀를 손찌검했던 남편들은 나란히 루거총의 희생자가 되 첫남편 주위에 묻힌다. 이런 그녀에게 동네사람들은 공포와 멸시의 의미로 블랙위도우란 별명을 선물한다.

 그러던 그녀가 영원의 사랑을 만난다. 미군 루터였다. 흑인인 루터는 처음 본 흑인이었고 별천지의 세계에서 온사람 처럼 성평등적이었고,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낡은 성관습이나 고정관념에 얽메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유분방하며 자아가 강한 베르뜨를 모두 받아주었다. 베르뜨가 정작 어울릴 수 있었던 사람이 미국 사회의 마이너 흑인이란 점은 작가가 당시의 시대상황과 지금의 시대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보인다.

 하여튼 루터와의 만남은 더욱 극적이다. 처음 만난 1945년엔 루터가 기혼자여서 미국으로 돌아가야했지만 15년후인 1960년엔 아내와의 사별로 베르뜨 곁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은 그후로 무려 15년을 행복하게 같이 산다. 베르뜨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일어난다. 그리고 그 사건은 베르뜨를 다시 살인의 길로 이끈다. 연쇄살인마지만 공감가는 살인을 하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 책이다. 성평등에 대한 인식, 그리고 과거로의 재밌는 여행이 이어지며 책은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정말 재미난 책이다. 추천한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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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12-24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2019년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리질리언스 - 다시 일어서는 힘
천경호 지음 / 교육과실천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다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전문가는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책에서 인용한 제프딕슨의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교육과 관련한 말이 많다. 교육학이 많이 발전하고 다양한 교육매체와 사교육이 판을 치지만 학생들은 그다지 과거보다 똑똑해지거나 더 착해지지 않은듯 하다. 실제로 연구결과에 따르면 지금시대의 학생은 10년전의 학생보다 오히려 인지능력이 감퇴했다고 한다. 정크푸드와 지나치게 경쟁적인 교육환경, tv, 인터넷과 게임, 작은 성인을 만들어내는 마케팅을 그 원인으로 본다.

 책 리질리언스(resilience)는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회복탄력성이다. 하지만 회복탄력성자체가 앞으로의 발전가능성을 잘 담아내지 못하기에 저자는 리질리언스란 용어를 책에서 사용한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스트레스를 피할수 없고 이를 이겨내고 살아가야하기에 리질리언스 갖는다. 하지만 이에는 개인차가 존재한다. 개인차는 선천적인 면도 있지만 사회, 가정, 학교의 지지로 만들어내는 후천적인 면도 당연히 존재한다. 책은 후자에 주목한다.

 한국은 리질리언스를 키워주기에 매우 부실한 나라다. 우선 첫번째 보호막인 가정이 부실하다. OECD국가중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며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급여는 불과 50-60%에 불과하다. 이는 대부분의 부모가 저임금으로 인해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려야 함을 의미한다. 거기에 고용역시 불안정해 항상 경제적으로 불안한 환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충분한 정서적 인지적 지원을 해주기 어려우며 잦은 스트레스로 이를 자녀에게 쉽게 전가할 수 있다. 제대로된 훈육보다는 폭력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학교다. 학교에서 학생을 위한 인지적 정서적 지원을 해주는 최고의 사람은 교사다. 하지만 문제는 이 교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좀처럼 학생을 마주할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교사의 주 업무는 수업과 생활지도지만 학교현장은 여전히 행정업무중심이다.(사실행정업무는 교사의 업무로 법령에 규정되어 있지도 않다) 학교 현장에 뿌려지는 연간 공문수는 만여개에 달한다. 거기에 교육과 무관한 방과후나 돌봄등의 업무가 학교에 주어져 교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 그래도 비교적 많은 한 학급 학생수를 감안한다면 선생님 하나하나가 얼마나 학생을 마주할 수 있을까

 사회 역시 문제다. 기득권의 편인 정치권은 당연히 노동자의 편에 앞서 노동시간줄이기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학교현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교육환경을 개선하려기 보다는 장시간 노동문제의 해결을 돌봄과 방과후의 형태로 학교에 떠넘긴다. 게다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을 관리할 사회복지공무원의 수도 무척이나 적다. 이들이 적은 급여에도 엄청난 격무를 부담하고 있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거기에 경쟁적 사회문화와 이를 투영한 경쟁적 입시문제. 상업문화의 팽배는 아이들의 인지정서발달에 매우 좋지 못하다.

 이런 가정, 학교, 사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개인의 리질리언스 발달의 기본 조건이다. 여기에 인지적 정서적 자기 조절을 배워나가는 것이 추가된다. 인지적 자기조절은 행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집행기능을 맡은 것이다. 정서적 자기조절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심리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자기 정서를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인지적 자기조절 향상 방법으로 책에서는 이해하기와 이로움 찾기를 제시한다. 이해하기는 사건을 이해하도록 설명 및 도와주기이며 이로움 찾기는 사건에서 이로움이나 긍정적 의미를 주는 것이다.

 정서적 자기조절 방법에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이의 조절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줄이기 위해 독서, 음악감상, 차마시기, 걷기, 심호흡등의 활동이 중요하다. 의외로 잠들기전의 독서는 스트레스를 68%나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다른 요인보다 가장 높은 효과를 보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하기 역시 스트레스를 줄이긴 했지만 고작 12%정도로 낮은 효과를 보였다. 다음은 스트레스를 유의미한 디스트레스르 받아들이도록 삶에서 중요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알아내는 것이다. 사실 스트레스는 부정적이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적절한 스트레스는 집중력을 높이고 긴장을 느끼게해 좋은 성과를 불어오기도하므로 이런 측면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리질리언스가 강한 아이들은 부정적 생활 사건의 강도와 빈도가 줄어들고, 반성적 스트레스가 낮으며 높은 지적능력을 보이고, 자기 존중감이 높으며 자기 조절기술이 뛰어나가도 한다. 이런 리질리언스가 강한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사회와 학교, 가정이 해야할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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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7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9-12-17 15:0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가정과 더불어 학교정상화도 중요합니다
 
사이코패스는 일상의 그늘에 숨어 지낸다 - 범죄심리학자 이수정과 프로파일러 김경옥의 프로파일링 노트
이수정.김경옥 지음 / 중앙M&B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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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해 범죄심리학자로 최근 인지도가 높아진 이수정 교사가 쓴 범죄프로파일링 책이다. 범죄자를 프로파일링 하며 그들의 과거와 범죄로 빠지게 된 계기 등을 분석하고 쓴 책으로 제목처럼 사이코패스만을 다루진 않는다.

 성범죄자에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자. 성격장애 범죄자, 충동장애범죄자 한국형범죄자들을 사례별로 다룬다. 먼저 일어난 사건을 다룬 후, 그들의 범죄요인과 가정 및 주변환경 등을 다룬다. 다 읽어보니 경악할 만한 범죄들이 많았다.

 범죄자들은 대개 어려서 환경이 매우 불우했는데, 가정이 결손된 것은 물론이고 성장과정에서 교사나 이웃, 친인척으로부터 이해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성관계도 좋지 못해 어려서 부터 이성을 정상적으로 경험하고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 보다는 성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일회성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비교적 가벼운 범죄로 사회에 돌아왔어도 빨간줄을 터부시하는 우리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어 다시 범죄로 돌아가기 일수였다.

 이런 것을 볼 때 사회의 돌봄 및 관계형성 기능이 중요해보인다. 사람은 유전적인 차이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폭력성을 갖고 태어나며 이로 인해 범죄로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리 문명은 이 폭력성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사람을 공진화시켰지만, 역설적으로 문명엔 폭력성 역시 필요하기에 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가정과 마을이 이런 자정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사회가 이를 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야 범죄의 수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에서 본다면 한국은 범죄의 수를 늘릴 수 밖에 없는 사회다. 사회안전망은 극히 부족하며 교육현장은 입시경쟁으로 인간성이 말살된다. 사회에선 범죄자에 대한 과도한 공포와 불안으로 이들에게 재사회화의 기능을 사실상 제공하지 않으며 공적인 부분에서도 지원이 미흡하다. 사회적 분위기 역시 범죄자에 대해 조정보다는 형벌을 요구하는 분위기다. 물론 그래도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들이 결국은 돌아와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 재범을 막기 위한 전자발찌나 정보제공등은 재범을 막지 못했고, 위험을  줄이지도 못했다. 덴마크와 같은 식으로 조정기능을 대폭 강화하는 형태로 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의외로 동물보호법이나 동물학대 금지법이 범죄를 줄이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연쇄살인은 대개 5단계를 거치는데 환상과 스토킹, 유괴, 살해, 사체유기다. 그리고 연쇄살인범들은 완성된 범죄자가 되기에 앞서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범죄의 대상으로 삼아 연습을 해가며 욕망에 따라 범죄의 대상을 확대해 나간다. 그때 이들의 주 연습 대상이 동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동물범죄에 대한 관리는 강력범죄자로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조기 발견이나 관리로 작용할 수 도 있다는 면에서 중요할 수 있다.

 이 책은 사례가 많고 다양한 유형의 범죄를 같은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어 재미가 대단하지는 않다. 하지만 극도로 흉악한 범죄자들도 그들이 반드시 그길로만 가지 않을 수 있었으며 다른 가능성을 보여줄수 도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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