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혜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라는 지혜에 대한 최인철의 정의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지혜란 자신이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는 부연설명이 이어진다. 이 말은, 논어 위정편에 나와있는 "아는 것을 안다고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는 공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모든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가지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자신이 보는 진리는 자신만의 채로 모래사장의 모래를 치는 것과 같다. 채 사이로 빠져나가는 보다 많은 모래들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채에 남아있는 모래들이 세상의 진리라 말한다. 최인철은 '자신만의 채'를 '프레임'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한언어를 알게 된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프레임'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알아보자.

 

1. '프레임'! 역사를 생각하다.

  프레임이라는 단어는 역사학의 용어로 환언한다면, '역사관'으로 말할 수있다. 대학을 다니며, '너의 역사관'을 갖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타인의 역사관으로 역사를 바라보지 말고, 자신의 역사관으로 역사를 해석할 수 있어야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역사관을 갖으려 노력했다. 수많은 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나만의 역사관을 확립해나갔다. 나 자신만의 역사관을 정립하면서,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나의 역사관'으로 논리적으로 꾀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또한 수많은 사실들이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사실도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사관이라는 단어가 역사에 국한된 용어라면, '프레임'이라는 단어는 우리 생활과 보다 밀접한 단어이다. 우리의 생활을 어떤 프레임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태도, 세상에 대한 태도가 바뀔 수 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등의 각종 이념도 이러한 프레임 전쟁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든다. 즉, '나는 남들을 잘 알고 있는데 남들은 나를 잘 모른다.'라는 착각은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잘 드러내는 지적이다. 프레임을 이 책에서는 개인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를 민족이나 국가의 관점으로 확대한다면, 기나기 인류의 역사속에서 벌어진, 각종 이념대립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어느 민족이나 스스로를 최고의 민족이며, 선택받은 민족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타민족을 잘아는데, 타민족은 우리를 모른다라는 생각을 많이한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에 갖힌 민족들의 일반적 모습이다. 자민족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도 있지만, 때로는 그 함정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지혜도 필요한 법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고 나면 자신은 처음부터 작은 나비였다고 생각한다.' 즉 회상해낸 자신의 과거 모습은 과거의 실제 모습을 닮았다기보다 현재의 자기 모습을 더 닮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만들어진 전통',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역사학의 격언과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전통이 기껏해야 2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며, 심지어는 근대화 과정에서 창조해낸 것들이라는 사실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리의 고유 무예라고 생각했던 태권도가 사실은 일본의 가라데와 공수도가 결합되어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사실은 근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전통은 그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들이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라는 말을했다. 모든 역사는 과거 그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의 필요에 의해서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수많은 정권들이 들어서면, 과거의 역사를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다시 쓰려한다. 박근혜 정권의 한국사 국정화 계획을 예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과거를 호출하고, 때로는 과거를 새롭게 만드는 작업들이 역사에서는 흔하다. 우리가 절대적 역사 진리라고 믿는 것들도 때로는 우리가 만들어낸 프레임으로 보는 세계일 뿐이다.

 

2. 프레임 - 우리를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날카로운 이빨을 지닐 수 없게 된 존재들은 과거 자신의 이빨이 얼마나 강했는지 떠올리며 현재를 보호하려 한다.'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본다. 왕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느냐는 말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졌는지 아느냐는 반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초라한 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우리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다. 박정희 시대가 더 행복했다고 말하며, 박정희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P집회에 나가는 불쌍한 루져들! 그들이 바로 이빨빠진 늙은 호랑이들이다.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향수에 취해서 과거를 강제 인출하려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과거를 강제 인출당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객관화하고, 현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들도 한때는 잘나가는 호랑이였으니까....

  '프레임은 주변의 사소한 물건들을 통해서 우리가 의 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행동을 좌우한다.' 자신을 변화시키려면 주변의 물건을 바꾸라는 저자의 충고를 교육에도 적용시킬 수있다. 어떠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가? 어떠한 학급을 만들고 싶은가? 자연스럽게 접촉빈도를 높이도록해보자. 예전에 들었던 팟캐스트에서, '물건에서도 기가 나온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기'라는 동양적 프레임으로 세상을 설명한 점이 다를 뿐, 세상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단순히 타인을 변화시키려하는 것이에서 나아가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내가 닮고 싶은 모습! 하고 싶은 일! 그것으로 나의 주변을 다르게 꾸며보자.!!

 

3. 프레임 -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프레임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얇지만 가장 두꺼운 지혜를 담고 있는 이 책의 지혜를 소개해보자.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가? 행복한 사람은 의미 중심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 항상 의미, 이유, 목표를 생각하며 상위 수준 프레임을 추구한다. Why를 물으며, 보다 높은 시야에서 생각한다. 반면, 불행한자는 하위수준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쉬운지, 성공가능한지 등을 먼저 생각하며, How를 묻는다. 또한 행복한 사람이 '존재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불행한 사람들은 '소유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인생을 성취해야할 목표로 생각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현재를 희생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고서는 허탈해하기도 한다. 나 자신이 그랬다. 결국 인생이 도달하는 지점은 '죽음'이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도달점이다. 인생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오늘 행복하지 않다면, 내일 행복할 수 없다. 항상 상위 수준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무엇은 소유하려는 목표를 갖기 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 과정을 중시할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 To have or To be! 당신은 소유를 선택할 것인가? 존재를 선택할 것인가?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유난히도 타인의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들과는 많은 대화를 하기 싫다. 그가 쏟아놓는 험담들은 유쾌하기 보다는 또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평가 내용을 들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보를 알 수 있다고 이 책은 조언한다. 정당하지 않은 비난은 정당화될 수 없다. 정당한 비판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 험담 프레임에 갖혀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험담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바로 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똥개의 눈에는 똥만 보이기 때문이다.

  부자가 더 잔돈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예전예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험사에서 비상시 도로에서 기름이 떨어졌을때, 도움을 요청하라면서 주유 써비스를 해준다. 고급 외제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이 이를 알뜰하게 다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도 황당했다. 돈도 많은 사람들이 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프레임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러하기에 그들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정 지혜로운 부자는 돈의 절대 액수를 중시하기 때문에 상대적 비교에 따른 푼돈이란 이름을 거부한다. 부자는 푼돈 프레임, 상대적 가치 프레임에 빠져, 100원짜리를 버리는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는다. 상대적 가치 프레임에 빠진자들은 콩나물 값을 깎을 때는 100원도 귀하게 여기지만, 10만원 짜리 물건을 살때는 100원을 깍아 주면 오히려 기분나빠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는 이러한 프레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부자일 수록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하라!라는 말의 뜻을 아는가? 현상유지를 하려는 우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서,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할 때, 우리는 보다 지혜로워질 수 있다. 사용하는 물건, 서비스, 직업까지 처음 접하는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하자! 한번 사용한 써비스를 계속 불평하지 않고 이용하면, 호갱취급을 당한다.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다. 변하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의 뇌를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뇌로 바꾸기 위해서라도, 항상 '중립적인 대안'으로 리프레임하자!

  20대에 이제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실연의 아픔이 싫어서 계속 연인관계를 지속했던 어리석은 기억이 있는가? 고통이 두려워! 실패가 두려워서 주저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과감히 결정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나는 나의 '마음의 면역체계'를 과소평가했다. 생각보다 우리의 면역체계는 강하다. 시련, 고백거절에 대해서도 우리의 마음은 잘 견뎌낸다. 시간이 지나면 웬만한 것들은 다 사소해 보인다. 도전하자! 도전하지 않아서 후회하기 보다는 도전하고 시련의 아픔을 견뎌내자!!

 

  이 책의 마지막장은 지혜로운 사람의 10가지 프레임이 제시되어있다. 나의 삶에 많은 지침이 되어줄 것이며, 이 글을 읽는 고마운 사람들에게도 많은 지혜를 줄 것이기에 이를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하려한다.

첫째, 의미중심 프레임을 갖아라,

둘째, 접근 프레임을 갖아라, 도전하고 실패와 처벌보다는 보상에 관심을 갖자.

셋째, '지금 여기'의 프레임을 갖자,

넷째, 비교 프레임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

다섯째,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자.

여섯째, 닮고 싶은 사람을 찾아라.

일곱째, 주변 물건을 바꾸어라.

여덜째, 체험 프레임을 소비하라.

아홉째, 누구와의 프레임을 갖아라.

열번째, 위대한 반복 프레임을 연마하라.

  당신도 위대한 프레임을 갖고 현명해지기를 빌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회남자 - 한대 지식의 집대성 오늘 고전을 읽는다 4
이석명 지음 / 사계절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회남자'! 그 이름도 낯선 책이다. 팟캐스트 '전영관의 30분 책읽기'에서 이윤호선생이 '회남자'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어서 처음 알게된 책이다. 한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사상을 담았기에 결국 무제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두께도 상당히 얇아서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책장을 넘겨보자.

 

1. 회남자에 대한 입문서

  '회남자'라는 책이 얇은 책이라는 생각에 책을 읽기 시작했으나, 이 책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회남자에 대한 입문서였다. 장사 마왕퇴의 발견에서 부터 시작하여 회남왕 유안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서술하며 '회남자' 탄생의 배경을 서술한다. 그리고는 '기론'과 '무위'등의 개념을 통해서 '회남자'가 어떠한 의미를 가진 사상서인지를 서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회남자에 대한 안내서를 만났다는 즐거움도 있었으나, 상당히 가벼운 책이라는 한계점에 아쉬움이 남는다. 음식맛은 보지 못하고, 열심히 레시피만 읽은듯한 느낌이 든다.

 

2. 회남자는 무제에 대항한 책이었을까?

  이윤호선생은 '회남자'를 팟캐스트에서 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책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회남자는 무제에 반기를 든 책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은 황제와 노자의 사상이 결합된 황로학의 대표적 이론서이다.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라는 최고의 통치술을 이루기 위해서, 인재등용, 법치, 시스템마련, 세의 확보 등의 다양한 통치술을 소개하고 있다. '무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지가 아니라, 순리에 따라서 시스템적으로 통치가 이뤄지도록 하여, 통치자가 바삐 움직일 필요가 없는 상태를 '무위'라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무제의 중앙집권화에 반기를 든 책이 아니라, 무제의 중앙집권화를 효율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지 그 방도를 알려준 책이라할 수 있다. 황실의 피가 흐르는 유안이, '회남자'가 완성되자 한질을 무제에게 바쳤고, 무제는 이책을 소중히 보관하였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회남자'는 무제의 통치술에 반기를 든 책이 아니라, 무제의 통치술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알려준 책이었다.

 

3. 성인과 미친자를 구별하라!

  아인슈타인의 비서가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많이 듣다보니, 아인슈타인을 대신해서 특강을 했다고 한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이 질문을 했다. 비서는 "이질문은 너무도 쉬운 질문입니다. 제 비서도 이에 대답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라며 비서에게 학생의 질문에 대답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막힌 무위(색이무위)와 열린무위(통이무위)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진정으로 과학에 대해서 깨달은 자이고, 아인슈타인의 비서는 깨닫지는 못했으나, 아인슈타인의 겉모습을 흉내낼 수 있는 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사람에게 차이는 없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본질적 차이가 있다. 이것이 막힌 무위와 열린 무위의 차이일 것이다. 세상의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집착하지 말라고 강조하면, 자신은 집착을 하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아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보이기에 집착할 수 없는 자일 경우가 많다. '회남자'에서는 성인과 미친자의 차이와 공통점을 소개하고 있다. 둘다 근심이 없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인은 덕으로 내면의 조화를 유지하는 반면에, 미친자는 화복을 분간 못하여 근심이 없는 자이다. 겉모습만을 보고, 겉모습만을 따라하면서 진정으로 깨달았다고 생각하는자! 그를 경계해야한다. 진정으로 통달하려한다면, 내면에서 부터 깨달음이 우러나와야 할 것이다.

 

4. 즐거움도 경계해야할까?

  회남자에서는 , 인간의 본성은 '고요함'이라고 단정한다. 귀와눈이 소리와 색깔의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져든다면 오장이 요동하여 안정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고요함'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즐거움 또한 경계하라는 이 말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즐거움'을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즐거움들을 통털어 '즐거움'이라고 단정하여 말하는 것 자체가 무리한 표현이었다. 우리에게 해를 줄 수있는 즐거움은 감각적 쾌락, 즉 sex와 같은 쾌락일 것이다. 너무 지나치게 탐닉하면 정신과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지적즐거움이나 이타적 즐거움(봉사활동)과 같은 즐거움은 많이 할 수록 행복하게 우리를 이끌지 않는가! 이들을 구별해서 논지를 전개했다면,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회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중국에는 수많은 고전이 있다. 그 많은 고전들 중에서 새로운 고전 하나를 만났다. 한대의 철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작품에 대한 작은 입문서를 읽고, 회남자라는 책이 어떠한 책인지 어렴풋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회남자라는 책의 입문서로 훌륭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에 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학생을 상담하면서부터였다. 자신의 꿈이 상담가이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고, 의미치료에 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상담을 하려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배워야하다고만 생각했다. 제3의 학파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그후,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 관심이 높아져갔다. 과연 어떠한 책일까? 듣고 있던 팟캐스트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의 한부분이 소개될 때, 그 책을 직접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프래모 래비의 책을 읽을까? 빅터프랭클의 책을 읽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프래모 래비가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했고, 증언자 문학을 남기기까지 했으나, 아우슈비츠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했던 반면에,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신의 학문을 더욱 빛나게 갈고 닦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갖게 해주었다. 결국, 아우슈비츠에 패배하지 않은 빅터 프랭클의 책을 펼쳤다.

 

 

1. 수용소와 우리의 현실은 너무도 비슷하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나의 머릿속에는 그 수용소와 너무도 유사한 수용소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군대였다. 물론, 강약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군대에서의 생활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군대 선임과 보초를 서면서, 갑자기 선임병이 나에게 물었다. "너는 군대에 온 것 같냐?" "....." "난, 커다란 감옥에 온 것 같다. 난 내가 군인 같지가 않다." 선임병이 말했던 그 말은 내가 느끼고 있었던 감정과 유사했다. 군대는 거대한 감옥과 같았고, 나의 모든 생활은 통제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모습도 너무도 많이 변했다. 하나같이 먹는 것에 집착하고, 이 군대생활을 빨리 끝내고 싶다며, 날짜를 셌다. 처음에는 달로 세고, 그 다음에는 날짜로 셌다. 고참병이 신참이 오면 몇일 남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신참은 "아주 많이 남았습니다."라고 외친다. 선임병이 웃으며 말한다. "야! 그 날이 오냐? 나라면 자살한다.!!" 까마득히 남은 군대생활을 조롱하는 것이 선임병들의 낙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빅터 프랭클이 말한, 죽음의 수용소에서 보이는 수용소 사람들의 모습과도 유사했다. 먹는 것에 집착하고, 이 기약 없는 생활이 언제 끝날지를 궁금해한다. 단지 다르다면, 군생활은 언제 끝날지를 알 수 있다면, 수용소 생활은 그 날짜를 모른다는 점이다. 훈련병이었을 때는 더욱 수용소 생활과 유사했다. 훈련병 시기에는 성욕도 없었으며, 훈련소 입소 후, 1주일 동안은 대변을 보지 못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훈련소 생활에서 관심은 생존과 훈련소 생활을 마치는 것 뿐이었다.

 

그 고통 속에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저녁 날짜를 세는 것 외에도, 누군가에 대한 정신적 의지였다. 애인이 있는 사람은 애인이 보내주는 편지에 집착하고, 나처럼 애인이 없는 사람은 고생하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의지처였다. 그 의지처가 배신을 하며 탈영으로 이어진다. 특히 애인이 배신을 하면, 혹시나 탈영하지 않을까? 간부들의 상담이 이어진다. 밖에서는 이해가지 않는 일들이 군대에서는 현실로 다가온다.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으로 삼은 것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만나는 것과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다시 세상에 내놓겠다는 열정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의미가! 그를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를 지지해주었다.

 

군대의 생활이 고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도 소소한 희망과 재미가 있었다. 그 안에서 신참이 보이는 엉뚱한 행동은 웃음을 자아내게 했으며, 주말에 종교행사에 가서 먹는 초코파이의 맛은 달콤했다. 크리스마스날 보았던 연극은 너무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용소에서도 유머가 있었다. 유머와 예술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도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남겼듯이, 예술과 유머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삶을 살아가게하는 윤활류였다. 반대로 '유머와 예술'이 없다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수용소에서 치료받고 있는 사람들 조차도 그속에서 사소한 행복감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나도 사회에서는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던 봉아지염에 걸려 의무반에서 누워지냈다. 그러면서도 그 사소한 휴식에 행복감을 느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행복함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적응력과 생존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닫게 된다.

 

 

2. 강신주, 신영복 그리고 유발 하라리를 생각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강신주와 신영복 그리고 유발 하라리가 생각났다. 그들의 말과 빅터 프랭클의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들이라면 빅터 프랭클의 말에 어떠한 해설을 남겼을까?

 

강신주는 어느 강좌에서 사랑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자는 자살하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이 보살펴야할 금붕어라도 있는자는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못한다는 말이다. 반면 빅터 프랭클은 미래로 부터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면, 자실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강신주와 빅터 프랭클의 말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강신주는 자살을 방지하는 열쇠를 '사랑'으로 보았고, 빅터 프랭클은 '기대' 혹은 '희망'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것!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일과 동물, 그리고 그 무엇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희망은 삶에 대한 의미를 갖게 할 것이다. 강신주의 말과 빅터 프랭클의 말은 표현이 달랐지만, 하나의 이데아였다. 단지 이데아를 다른 말로 표현했을 뿐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고 신영복 교수가 생각났다. 베트남 전쟁 포로로 끔찍한 경험을 당한 사람이 포로생활을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되는 체험'이며, '이로은 점이 있다.'라고 선언하는 모습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쓰고, 감옥에서 읽은 고전을 바탕으로 '강의'라는 책을 쓴 신영복 교수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같은 감옥생활 혹은, 포로생활을 하지만, 어느 사람은 현실에 굴복하고,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감옥! 그것도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 세월을 갖쳐 살면서도 자신의 삶을 더욱 성숙하게 만든 사람들!! 신영복 뿐만이 아니었다. 고인이 된, 김대중 전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전대통령 또한 감옥이라는 가혹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의미와 희망을 잃지 않으려했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와 희망을 감옥에서 만들었다.

 

빅터 프랭클은 지금의 정신의학이 '인간의 마음을 그저 하나의 수단으로만 보고, 정신질환 치료를 하나의 테크닉으로만 간주'한다고 개탄한다. 정신의학은 '환자를 병 너머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보라'고 절규한다. 빅터 프랭클의 말은 인본주의에 기초한 위대한 정신의학자의 진리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빅터 프랭클의 말에 동의할까? 유발 하라리는 그이 저서'호모 데우스'라는 책에서 현대 사회가 신성시하는 인본주의도 미래사회에서는 도전을 받을 것이라 주장한다. 최신 뇌과학을 근거로 인간의 정신도 뇌활동의 일부분이며, 인간이 결정하기 이전에 이미 뇌에서 결정이 내려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절대시하는 인본주의는 설곳이 사라진다. 빅터 프랭클의 절규를 최신 뇌과학은 뇌 신경세포의 상호작용에 불과한 것이라며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수단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고귀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빅터 프랭클의 절규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과거 종교가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진리를 볼 수 없도록 했듯이, 과학이라는 또하나의 거대한 종교가 인간의 참된 가치를 없앨 수 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인간의 참된 의미를 찾아야한다.

 

3. 현실을 생각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들은 곧바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다. 그들은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그들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버티도록 했던 정신적 지주가 사라졌다. 사랑하는 아이들도, 사랑하는 아내도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은 파탄을 맞이한다. 빅터 프랭클의 수용소 친구는 귀리를 짖밟으면서 '자신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는데, 이까짓 귀리를 밟는 것 정도를 가지고 왜 그래?'라고 항변한다. 빅터 프랭클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나의 폐부를 찔렀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서, 더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키거나, 선임병에게 많이 맞은 자가, 선임병이 되어서는 더욱 가혹한 폭력을 후임병에게 시킨다. 폭력의 대물림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병든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고, 심리학 책들을 읽으며 스스로 치유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집단에게도 나타나고 대물림된다. 팔래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유대인들의 가혹한 행동은, 역사적 집단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음으로써, 폭력적 행동이 어떻게 대물림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고통이, 역사적 트라우마가 되어 대물림되고 있다. 그들의 피의 보복을 치위하기 위해서라도, 빅터 프랭클의 책을 그들이 읽어야한다.

 

빅터 프랭클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우울증, 공격성, 약물중독'이 널리 퍼져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실존적 공허함에서 나온 것들이라 진단한다.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준다면, 많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 말한다. 빅터 프랭클의 지적은 비단,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과 청소년들도 '우울증, 공격성, 약물중독'이 노출되어 있다. 단지 심각성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실존적 공험감을 없애줄 방법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정할 수 있도록 하고, 그 목표를 이뤄가 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도록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학생부 종합전형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알 수 있다. 학생부 종합전형을 네글자로 줄이면 '진로지도'이다. 자신의 꿈을 찾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진학해야할 학과를 선택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고등학교에서 진로와 관련된 책을 읽고, 관련된 동아리활동 및 교과활동을 한다.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는 학생을 평가하여 선발한다. 우리의 교육현실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대입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학생부종합전형이 있는 집 자식들을 합격시키는 불공정한 제도라고 비난을 받는다. 이러한 기사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많이 든다. 보수 매체들은 왜? 학생부 종합전형을 비난하는 것일까? 분명, 수능과 논술을 비롯한 여타 대입제도보다 학생부종합전형은 사교육비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학생부 종합전형을 준비하느라, 학교현장은 예전에 비해서 분명 내실이 있어졌다.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와 관련된 책을 한권이라도 읽고, 자신의 꿈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렇다면 왜? 보수매체들은 학생부종합전형을 비난하는 것일까? 혹시 사교육비을 더 쓸 수 있는 자들을 위한 교육제도를 그들은 원하는 것은 아닐까? 수능처럼 단순히 성적순으로 대학을 가는 것이 누구에게 이로울까? 사교육비를 많이 쓸 수 있는 자들이 유리할 것이다. 그리고 수능성적으로 사람을 뽑는다면, 이러한 인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응할 수 없다. 시대변화의 요청 속에서 학교현장을 바꾸기 위해서는 학교현장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현명한 대중들이 무엇이 21세기 새로운 인재를 키워내는데 더 훌륭한 제도인지를 판단해야할 것이다.

 

'스타인 호프의 도살자' J박사를 아는가? 그는 많은 정신병자를 가스실로 향하게 했다. 그런데 그는 모스크바의 루비앙카 감옥에서 죽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은 그가 죽을 때,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적 차원에 도달해서 생을 마쳤다고 증언한다. 지옥 같은 감옥이 그를 성자로 만든 것일까? 지옥 같은 감옥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스타인 호프의 도살자'는 성자가 될 수 있었을까? 한국의 현실에도 '스타인호프의 도살자'에 비견될 수 있는 고문기술자가 성직자가 된 경우가 있다. 감옥살이를 하고, 성직자가 되어서는, 자신이 다시 태어나도 그일을 할 것이며, 그일은 범인과 두뇌싸움을 하는 예술이었다고 증언한다. 왜? 한국의 '스타인 호프의 도살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적 차원에 도달'하지 못했을까? 한국의 감옥이 루비앙카 감옥에 비해서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J박사보다 한국의 '스타인 호프의 도살자'가 인간성이 더 떨어지기 때문일까?

 

'역설의도기법'을 아는가? 글씨를 흘려쓰는 사람에게 자신이 글씨를 얼마나 엉망으로 쓰는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고 마음 먹고 글씨를 쓰라 처방했더니, 그사람의 증상이 사라졌다. 역설의도기법은 '도덕경'의 한구절을 떠올리게했다. 그릇은 비움으로써 그 쓰임이 있다. 받으려면 주고, 집으려면 펴라! '도덕경'의 역설적인 이 구절이 빅터 프랭클의 '역설의도기법'과 너무도 유사했다. 집착을 버리자. 멈추면 보이는 것이 더 많은 법이니까.....

 

4.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 - 창조, 사랑, 시련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에는 '창조', '사랑', '시련'의 방법이 있다. 이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의 범위를 사람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일, 동물 등 보다 넓힌다면, 삶의 의미를 찾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사랑'일 것이다. 다양한 시련을 이기는 힘도 사랑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책에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을 얼마나 강하게 만드는지에 관한 글들이 적혀있다.

 

"왜 살아야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니체

 

니체의 이 말은 의미가 인간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잘 말해준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은 환경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저항하고 맞서 싸울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현실에 굴복할 수 있으나, 강한 정신력과 삶의 의미는 가혹한 환경을 이겨 내게 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 결국, 가혹한 현실속에서 절망을 택할 것인가?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현실에 당당히 맞설 것인가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현실을 탓하며 절망을 선택한자들은 어떻게 될까?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결국 절망 속에서 스스로의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급격히 저항력이 떨어져, 병으로 죽거나, 현실적인 쾌락을 택하며 죽어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선택해야할까? 한비야의 책 '지도밖으로 행군하라'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서술되어 있다. 어느 부족에게 씨앗을 주고, 다른 부족에게는 씨앗을 주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아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했지만 씨앗을 받은 부족은 씨앗이라는 희망덕택에 아사자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 가혹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기대' 혹은 '희망'이다. 위대한 지도자는 국민에게 훌륭한 비젼을 제시한다. 그것이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가혹한 현실을 극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에게 나는 어떻한 비젼과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해본다.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은 탈출을 결심했다가 자신이 보살펴줄 사람이 생기자 이를 포기한다. 친절한 독일군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며 사람들을 수용소 밖으로 실어 날랐을 때, 자신의 명단이 없어 항의했다. 그러나 수용소 밖으로 이송된 사람들은 대부분 불에 탄 채로 발견되었다. 빅터 프랭클은 천운으로 살아 남아 감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치료라는 제3의 학파를 만들어 우리의 인생에 많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 만약 그가 이송차량에 탑승했다면 그의 의미치료도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우리에게 '의미 치료'라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우리에게 내리 쬐고 있다. 나의 마음에도 그 빛이 비춰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병법 노자, 생존과 승리의 제왕학 - 생존의 기술, 승리의 조건, 변화의 전술 제자백가 아카이브 3
임건순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자는 현실 도피자가 아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노자는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혼란한 세상을 떠나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운둔자라는 이미지의 노자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러한 이미지를 나이들어서도 가지고 살았다. 그러던중, 팟캐스트 '학자들이 수다'에서 김시천의 색다른 주장을 알게되었다. 노자 주석본 중에서 하상공장주에는 우리가 알고있는 노자와는 전혀다른 노자가 그려져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 노자 주석서중에서 우리는 왕필본에만 치우쳐 노자를 이해했다. 그러나 하상공장주에 나와있는 노자는 제왕들에게 통치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팟캐스트에서 임건순의 주장을 들었다. '도덕경'은 병법서이다.!! 무슨말인가? '도덕경'이 병법서라니?? 순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논어'를 다읽고 나면, '도덕경'에 도전하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병법서로 도덕경을 한번 읽어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올해 초부터 '도덕경'을 왕필주석본으로 읽고 있다. 그러면서 이 주석을 달리 풀이해보는 연습을 했다. 혼자만은 힘든작업이었다. 그래서 임건순의 '병법노자'를 읽기로 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도덕경'은 병법서이다.

  사상은 골방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상가는 시대와 호흡하면서 시대의 고민을 고민하고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 과정에서 사상이 성립한다. 이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도덕경'을 읽으며 너무도 쉽게 간과했다. 살육과 전쟁, 암투가 난무하던 춘추전국시대! 그그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묘책을 모색하던 과정에서 '도덕경'이 쓰여졌다고 임건순은 주장한다. 탁견이다. 살아남는것! 그것이 절대 과제였던 시대에 당연히 '도덕경'도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이 담겨있다. 전쟁이 난무했기에 '도덕경'에는 병법서에서 보았던 구절들이 너무도 많았다.

  '소국과민 (小國寡民)'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나는 전원적인 원시공동체를 생각했다. 그러나 임건순은 '내무반'을 생각했다. 작은 단위로 쪼개고 자신이 입는 옷을 편안하게 생각하게 하며, 맛없는 음식을 맛있게 먹게하고, 죽음을 중히여기도록하는 사회!! 그곳이 바로 군대의 모습이었다. 법가에서 추구했던 '재민지배'가 바로 '소국과민'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백성들을 전쟁터로 보내기에 가장 알맛도록 편재하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우직하게 만들필요를 노자는 잘알고 있었다. 그리고 노자는 '도덕경'에 이를 담았다. 나는 여기에서 생각을 더해보았다. '국'이란 무엇인가? 바로 제후가 사는 곳을 '국'이라했다.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이 독립하면서, 제후들이 사는 '국'이 국가가 되었다. 그러면서 '국'의 뜻이 확장되었다. 제후국을 작게하고 그 민을 적게하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황제라면, 제후들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 그들의 힘을 약하게 해야한다. 그리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해야한다.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맞다. '도덕경'은 영락없는 제왕학의 교재이면서 병법서이다. 도덕경을 병법서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이것 말고도 많았다.

  '성기지 (絶聖棄智)'를 어떻게 해석할까? 성스러운 것을 끊어버리고 지혜를 버려라!! 라고 해석할까? 그런데 임건순은 이를 우직한 병력 자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책으로 풀이한다. 먹물든 사람들이 싸우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도망치고 살길을 바라지 않았던가? 맞았다. 화랑 관창을 보며 과거에는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위대한 인물이라 평가했으나, 지금 나는 국가주의가 인간을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개탄하고 있다. '인본주의', '개인의 인권', '개인의 가치'라는 고상한 덕목이 나의 머릿속을 채우면서 유한한 자신의 목숨을 영원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바치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고 있다. '절성기지'는 '소국과민'으로 동원한 병력을 강하고 우직하게 만드는 방법을 논하고 있었다.

  '천지불인(天地不仁)'는 또 어떻게 해석할까? 천지가 불인하다니!! 나쁜 사람은 하늘이 벌을 줄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아닌가? 그런데 임건순은 이를 승리를 위해 냉정하라! 사람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처럼 취급하라라고 풀이한다. '천지'는 바로 제왕이다. 그리고 장군을 뜻한다. 백성과 병사를 다스릴때는 필요하다면 냉정해져야한다. 때로는 이기기위해서 자신의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 넣어야한다. 그렇기에 '천지는 불인'해야한다. 김유신이 개백의 5천결사대를 이기기 위해서 어린 관창을 사지에 몰아 넣었지 않은가? 장수는 불인해야한다. 불인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노자는 용병술을 말하고 있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구절은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 도올은 이 구절은 만물은 항상 변화한다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임건순은 이를 승리의 길은 항상 정해져있지 않다고 풀이한다. 장수가 항상 견지해야할 변화하는 상황속에서 어떻게 전투를 승리로 이끌 것인가를 말한 말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지름길인 경우도 있다. 실생활에서도 이말은 너무도 많이 경험해본다.

 '장생구시(長生久視)'라는 말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다. 아니,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일 것이다. 흔히 '도광양회'라는 말을 많이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뜻을 숨기고 조용히 힘을 그리라는 이 말은, 이미 노자가 했었던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길게 오래살려면 섯뿔리 나서기 보다는 힘을 길러야한다. 자신의 뜻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력은 중국인을 당해낼 수 없다. 수많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야했던 혼란의 역사속에서 중국인들이 몸으로 채득한 교훈을 노자는 이미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었다.

  이책에서 말하고 있는 도덕경의 내용들의 일면만 보더라도 도덕경은 영락없는 병법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도덕경을 병법서로 보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품어본다. 임건순이 놓친 이 부분을 한번 탐구해보자.

 

  2. 우리 역사속의 병법서 '도덕경'

  우리 역사속에서 도덕경이 언제 처음 소개되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도덕경이 보인다. 고구려 군사를 격파한 태자 근구수가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려하자, 신하가 말고삐를 잡으며,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라는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태자깨서 족함을 얻었으니, 지금 그친다면 위태롭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영민한 태자 근구수가 이를 따랐다. 놀라운 것은 도덕경을 전쟁에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제에서도 도덕경을 병법서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덕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장욕탈지 필고여지(將欲奪之 必固與之)'라는 말이 있다. 빼앗으려면 먼저 주어야한다. 고구려군사들이 거짓으로 패하고 도망가는 척하며 백제군을 유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추격을 멈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시에서도 '도덕경'의 냄새가 난다. 족함을 얻었으니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는 내용의 시에서 고구려에서도 도덕경을 병법서로 읽었으며, 을지문덕도 도덕경에 능통했을 것으로 상상하게 한다. 임건순도 을지문덕이 시를 지어 조롱한 것이 아니라, '노자'의 지족과 지지라는 병법의 원칙과 지침을 상기시켜 준 것이고, 이에 따라 우중문과 우문술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탁월한 견해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도덕경은 어떠한 교훈을 주고 있을까?

 

3.  도덕경에 비친 오늘

  도덕경에는 장차 빼앗으려면 먼저 주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문재인정권의 탁월한 외교력이 떠올랐다. 외국기자가 북한과의 대화에서 트럼프가 기여를 했는가?라는 질문에 문재인은 아주 많은 기여를 했다고 화답했다. 트럼프에게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트럼프를 평화의 전도사로 추켜올렸다. 중간선거에서 이겨야만하는 트럼프를 띄워주어 문재인정권은 평화와 대화라는 값진 결실을 얻어내려한 것이다. 도덕경은 이렇게 우리의 외교전에서 많은 외교전략을 제시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의 미투운동에서도 도덕경은 큰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귀해지려면 천함으 근본으로 삼아야하고 높아지려면 반드시 낮음을 바탕으로 해야한다.라는 도덕경의 구절이 있다.  A정치인이 떠오른다. 차기 유력한 대선주자이며, 풍수지리를 하는 분이 A의 손을 잡는 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며, 그다음 대권은 A가 거머쥘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파렴치한으로 떨어졌다. 높아지려는 사람이 그 권력을 이용해서 낮은 사람들을 상처주었을때,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현실이다. 물론 아직 사법적인 결론이 아지 않아 뭐라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구의 말처럼 음모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이 어떠한 것이든지, 도덕경은 스스로 높아지려면 낮은 곳에 임하고 항상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고 경계하라는 주문을 우리에게 한다. A정치인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항상 조심했어야했다. 자신의 조그만 실수가 상대방에게 공격의 호기가 될수도 있기에 항상 자신을 낮추며 낮은 곳에 임해야했다. 낮은 곳에 임하는 척만으로는 부족했다.

  '도가도 비상도'라는 명언은 패턴이 아니라 전술로 싸워야한다고 말한다. 이는 일상생활에서도 진학지도에서도 드러나는 명언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경우, 처음에는 대학에서 동아리활동을 중시했다. 그런데, 많은 학교에서 동아리활동을 내실있게 적어주자, 이제는 교과세부능력 특기사항을 유심히바라본다. 처음에는 열심히하는 학생들을 많이 써주었다면, 이제는 거의 모든 학생을 잘 써주기에, 대학에서는 동일한 내용은 삭제하고 독특한 내용만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술은 패턴이아니다. 같은 전술은 필패를 부른다. 항상 변화하는 상황속에서 '상도'를 추구하기 보다는 변화하는 전술로 응해야한다. 인생도 전쟁의 일부일수 있으니 말이다.

  학생들에게 6.25를 가르칠 때, 중국이 인해전술을 써서 우리가 1.4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정확히는 인해전술이 아니라 '기동과 포위의 전술'이라고 수정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인해전술'과 '기동과 포위'전술은 같은 내용이었다. 다시말해서, '인해전술'은 단순한 저글링러쉬가 아니었다. 대병력을 이용해서 은밀히 적 후방에 침투시켜 주요거점과 길목을 장악하고 보급망을 차단하여 적을 고립시키는 고난위의 전술이었다.  '인해전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6.25라는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다. '인해전술'이 바로 노자의 '이무치유以無治有’의 논리가 실현된 전술이었다.

  '문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으로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안다.'라는 표현을 임건순은 장막안에서 전략을 짜는 모습이라고 풀이한다. 그리고 전략에서 이겨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피력한다. 우리 역사속에서도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패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신미양요때 포함외교라는 고전적 전술로 미국은 우리를 협상장으로 불러오려했으나, 만명이 죽는다해도 강화는 없다라는 흥선대원군의 전술에 미국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서 미국이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이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국 정부는 전략의 패배라고 성토했고,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며 승리를 자축했다. 우리 주변에서도 큰그림을 보지 않아서 인간관계에서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내가 패배하여 더많은 것을 얻기도 한다. 도덕경은 우리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책은 단순히 '도덕경'을 병법으로만 소개하지 않고 법가와 유가를 새롭게 소개하고 있다. 법가와 병가, 노자가 눈이라면, 유가는 귀이며, 묵가는 입이라고 말한다. 중국인이 손자와 노자의 자식이라면, 우리는 공맹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명분과 대의를 중시하며 때로는 교조적이기에 윤봉길과 같은 많은 의사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붕당정치를 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도 우리가 공맹의 자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중국인은 실리적이며 그러하기에 의사가 나올 수없다고 말한다. 병법을 주로 읽고, 병법서를 풀이한 책을 쓴 저자는 공맹의 자식인 한국인이 좋다는 아이러니한 말까지 한다. 임건순!! 그는 단순히 현학적인 말들로 고전을 표현하지 않는다. 쉬운말과 색다른 그만의 눈으로 '도덕경'이라는 고전을 새롭게 볼 수있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 그의 책을 더 읽어 보고 싶은 욕망이 샘솟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어로 만나는 세계명언
최용훈 지음 / 종합출판(EnG)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논어를 영어로 무어라 번역할까? '대화'라고 번역하지 않을까? 라는 추측을 했던 나는 'The Analect of Confucius'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공자의 명언'!! 동양을 대표하는 '논어'는 사실 공자의 명언을 모아 놓은 모음집이었다. 또한 노자의 '도덕경'도 명언을 묶어 놓은 책이다. 그렇다면 서양의 명언을 묶어 놓은 책이 있다면, 이 책 또한 고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어 명언을 읽기로 결심했다. 인터넷 서점을 써핑하면서 가장 좋은 영어 명언집을 찾으려 노력했다. 결국 '영어로 만나는 세계 명언'을 읽기 시작했다.

 

1, 탁월한 구성

  영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영어가 그릇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영어라는 그릇에 담기 주옥같은 명언들이 한가득 담겨있다. 단순히 영어명언들을 소개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명언의 유래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영어공부와 인문학적 소양을 같이 쌓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러나, 부록으로 제시한 '행복한 삶을 위한 명언'은 단순히 명언을 나열하는데 멈추었다. 책값이 좀더 지출되더라도, 책의 부피가 조금 커지더라도 부록으로 제시한 명언에도 그 명언의 유래와 의미를 되새김할 수 있는 서술이 이어졌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생긴다.

 

2. 오늘을 되새긴다.

  논어를 읽으며 무릎을 탁치는 경험을 이책을 읽으며 다시한번 경험했다. 셰익스피어가 '헨리4세'에서 'The better part of valour is discretion'이라는 말을 했다. 용기의 대부분은 조심성이라는 말이다. 알렉산더 포프는 'Fools rush in where angels fear to tread'라고 말했다. 천사들이 발 들여 놓기를 꺼려하는 곳으로 바보들은 뛰어든다.는 뜻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적진에 뛰어드는 가미가제 특공대를 보면서 공감하다고 감탄하는가? 셰익스피어와 알렉산더 포프는 이를 진정한 용기로 보지 않고 있다. 만용은 용기가 아니다. 진정한 용기있는 자는 순간의 분노를 억누르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병법 '36계'에도 36번째 계책이 줄행랑이 아니겠는가!

  스페인계 미국 사상가인 조지 산타야나는 'The young man who has not wept is a savage, and the old man who will not laugh is a fool.'이라 말했다. 울어본 일이 없는 젊은이는 야민인이며, 웃으려 하지 않는 노인은 어리석은 자다.라는 말이다. 이 명언을 읽는 순간, 오늘날의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젊어서는 산업화시대를 몸으로 이겨내며 열심히 앞만보고 살아왔다. 그러나 시대는 독재시대에서 민주주의 시대로 변했다. 그런데 P집회에 나가는 노인들의 머릿속은 독재시대, 아니 전제군주정의 시대에 머물러있다. 노인이 되었는데도 여유롭지 않고 503호에 목메여 있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진정 어리석은 자들인가?라는 질문을 해본다.

  2030세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도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그런데 비트코인 열풍을 문재인 정권이 잠재우자, 비트코인 열풍에서 빠나오기 싫어하는 일부 젊은 세대들은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웃지 못할 행태를 보였다. 구약선경 '잠언'에는 'Go to the ant, thou sluggard; consider her ways, and be wise.'라는 말이 있다. '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라는 이 말은 비트코인 열풍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며 아직도 현실로 나오지 못하는 어리석은 일부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비트코인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묻고 싶다. 비트코인이라는 거품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자신이 파멸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냐고.... 루신이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침탈이라는 현실을 바라보며, 아직도 잠에 취해있는 중국인들을 위해서 '아큐 정전'을 썼다. 혹시 비트코인 거품에 취해있는 당신이 아큐는 아닌가? 루신은 고민한다. 철로된 방에 자신만이 깨어있다. 산소는 줄어드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모르고 잠에 취해있다. 이들을 깨워야할까? 어자피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이대로 행복하게(?) 죽도록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좋지 않은가? 당신이라면 어떤 답을 내놓겠는가? 깨워야한다.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할지라고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치료는 시작된다. 병든 비트코인 세대로 치료하기 위해서 문재인 정권은 강력한 칼을 빼들었다. 환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이겨내야만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

  오늘도 인문계 고등학교의 불빛이 운동장을 비춘다. 교실을 환하게 밝히는 불빛을 보면서, 자유를 억압당하고 닭장에서 자라야하는 양계장의 닭들의 모습을 보는듯하다. 앨빈토플러가 한국은 미래사회에 유용성이 없는 과거의 지식을 배우는데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한 어느 랍비의 격언에 'Don't limit a child to your own learning, for he was born in another time.'라는 말이 있다. '아이에게 자신이 배운 것만 가르치려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이후,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귀에 부던히도 맴돌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공포와 기대를 가지고 관련 서적을 뒤적였다. 그러나 우리 교육현장은 아직도 4차산업혁명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미래에 대한 대비를 잘해야하는 교육현장이, 가장 완고하게 일제식의 수업을 하며, 야간자율학습을 반강제로 시키고 있다. 기성세대와는 다른 시대에 태어나 미래사회를 살아가야하는 학생에게 우리는 기성세대가 배운 것만을 가르치려한다. 우리 교육의 화두는 과연 우리 교육이 미래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인재를 기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어야함을 알아야할 것이다.

 

3. 아쉬운점.

  명언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은 이책의 강점이다. 그러나 옥에도 티가 있는법! 이책에도 옥에 티가 있다. '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손자병법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그러나 '손자병법'에는 '백전백승'이라는 구절은 없다. 단지 '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구절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미국에 대해서 잘알고 우리에 대해서 잘안다 한들 세계 초강대국 미국가 전쟁을 해서 이길 수 있겠는가? 적을 알고 나를 안다면 위태롭지 않을 뿐이다. 즉, 초강대국 미국을 적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아,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책에서는  동야의 명언을 소개하면서 '백전불태'라 적지 않고, '백전백승'이라적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손자병법'을 쓴 사람은 '손빈'이 아니다. 손빈은 '손빈병법'을 저술했다. '손자병법'을 저술한 사람은 손빈의 할아버지인 '손무'이다. 영문학에는 조예가 깊은 저자가 동양고전에 대해서는 실수를 연발하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영어로 옮기면 'Seeing is believeing'이다. 한나라 선제가 흉노를 토벌할 계책을 묻자, 조충국은 "백번 듣는 거이 한번 보는 것만 같이 못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적지에 잠입해서 계책을 모색했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세운 전략을 반란을 진압시켰다.'라고 적고 있다. 다분이 중국중심의 서술이다. 흉노와 강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조국충이 흉노와 강족의 침임을 물리친 것일 뿐이다. 온 천하가 중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려야한다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책을 쓰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중국의 서적을 읽을 때, 조심해야하는 '중국중심의'사고관이라는 덧에 저자가 걸린 것은 못내 씁쓸하다.

  Never too late to mend.(잘못을 고치는 것은 뒤늦은 것이 아니다.) When youhave faults, do not fear to abandon them(잘못을 고치는 데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은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동양의 명언을 소개하면서 동양고전의 원문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크나큰 아쉬움이다. 이들 명언들이 논어의 어느 구절인지 안내해주고, 한문 원문을 적어주었더라면 나에게는 크나큰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배려를 해주지 않았다. 'Out of sight, out of mind.'(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중국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라 한다. 그러나 중국의 고시중에서 누구의 시이며, 그 원문이 무엇인지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영어 속담으로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은 동양의 시라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지만, 저자의 불친절한 설명에 아쉬움이 켜졌다.

 All men know the utility of useful things; but they do not know the utility of futility.(세상 사람들은 모두 유용한 것의 쓰임은 알면서 무용한 것의 쓰임은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쓸모없는 나무가 살아남아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쓸모있는 나무들은 목재로 쓰기 위해서 베어가기에 쓸모없는 나무만 남게 되고, 그 쓸모 없음이 쓸모가 되어 나무가 살아 남게 되었다. 장자가 친구의 집에 갔더니, 친구가 집에서 기르는 새를 잡아 친구를 대접하려 했다. 하인이 어느 새를 잡을지를 물었다. 친구는 울지 못하는 새를 잡으라했다. 쓸모없음으로 인해서 울지 못하는 새는 일찍 죽었고, 쓸모 있는 새, 즉 울수 있는 새는 살아남있다. 제자가 장자는 쓸모있음과 쓸모 없음 중에서 어디에 있으려하는지 묻자, 자신은 그 가운데에 있겠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장자의 유명한 쓸모없음의 쓸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는 장자 철학의 깊이있는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무가 집을 짓거나 배를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을 알고 기름은 연소시키는 것에 쓴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나무와 기름이 유용한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 구실도 못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들도 많다.'라고 피상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탁월한 영문학 교수이지만, 동양고전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4. 이의 있습니다!!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라는 말은 마태복음에 있는 말이고, Life is short and Art is long.(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은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한말이다. Art는 예술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의미로 처음 쓰였다. 무심코 쓰던 말들의 뿌리를 알아가는 여행은 너무도 즐겁다. 그러나 이러한 명언을 읽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삐딱한 생각을 하곤한다. 마태복음에 'Love your enemies, and bless them that curse you.(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라는 말이 있다. 과연 적을 사랑하면 정의는 지켜질까? 적을 사랑하라고 적폐세력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나의 왼쪽 뺨을 내밀면 이 사회의 정의는 바로세워질 수 있을까? 진정으로 참회하는 적을, 진정으로 참회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사랑하고 용서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저들은 참회할 마음도 없으며, 다시 권력을 잡으면 엄청난 정치보복을 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로마 황제에게 탄압 받던 시기의 초기 기독교가 용서 밖에는 달리 로마군에 대항할 무기가 없었던 현실 속에서 그들이 택한 가장 탁월한 무기가 사랑과 용서가 아니었을까? 그 시대에 유용한 무기를 시간이 지난 지금에 아무런 고려 없이 사용한다면,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줄 것이다.

  An empty bag cannot stand upright.(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뜻이라한다. 영문학에 대가이신 저자의 말이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삐딱한 생각은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순히 밥을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식이나 도덕적 심성이 차있지 않으면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라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If it be true that good wine needs no bush, 'tis true that a good play needs no epilogue.(좋은 술에 간판이 필요 없듯이, 훌륭한 연극에는 에필로그가 필요 없다.'라는 셰익스피어의 이 말은, 놀랍게도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대사가 나오는 '뜻대로 하세요'라는 연극은 좋은 연극이 아니란 말인가?

 

5. 동서양 명언 비교

  이 책을 읽다보면, 동서양의 명언을 넘나들면서 때로는 너무도 흡사한 말이 동서양에 존재하고, 때로는 서로 상반된 명언이 동서양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란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Do to others as you would be done by.(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반면에 공자는 What you do not want done to yourself, do not do to others.(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라는 말을 했다. 어느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가? 개인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공자의 말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여러가지 일로 싸웠다. 그중에 하나가 나의 옷차림에 아내가 간섭한 일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옷차림을 나에게 강요하는 모습이 너무도 부당했고,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호랑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고기를 말에게 주며, 말 너는 왜? 내가 준 음식을 먹지 않냐며 화내는 것과 같은 경우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기 보다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나의 무의식적 폭력을 줄이는 방법은 아닐까?

  There are two kinds of failure: those who thought and never did, and those who did and never thought.(두 종류의 실패하는 사람이 있다.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자와 실천은 하되 생각하지 않는자.) 피터가 한 이 말은, 논어 위정편에 나와 있는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말과 너무도 흡사하다. 생각과 실천을 강조한 피터와 생각과 배움을 강조한 공자는 표현 구조는 너무도 유사하다. 피터가 생각과 실천의 조화를 강조한 반면, 공자는 배움과 생각을 강조했다. 피터와 공자의 말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격언이다. 배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배우지만, 이러한 배움의 과정은 실천으로 이어져야한다. 또한 실천을 통해서 배움이 다시 일어나야한다. 끊임 없는 배움과 실천, 생각과 배움의 순환구조가 계속되어야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성서 명언에 나오는 고어들이다. thy(너의), thou(you), shalt(이리라)라는 고어들은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알아듣기 힘든 단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년여 동안 하루에 한문장 혹은, 일주일에 한문장씩 책을 읽고, 썼다. 그러면서 나도 한껏 성숙했다. 저자 최용훈이 '영어로 만나는 세계 명언'의 개정 증보판을 내주길 바란다. 논어가 공자의 어록을 모아 놓은 것이 듯이, 최용훈의 '영어로 만나는 세계 명언'이라는 책은 21세기에 또다른 고전을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