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그레이트북스 84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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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성격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접근과 철학과 관련된 결과들을 결합시켜 과학 철학인 것처럼 행세한다. ‘이데올로기‘란 말은 동물이 동물학의 주제인 것처럼 이념도과학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함의를 또 이데올로기 (Ideologie, ideolo-gy)의 접미어 로기 (logy)는 동물학인 zoology에서처럼 로고이(logoi),
즉 그것에 관한 과학적 진술만을 의미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데올로기는 사이비 과학인 동시에 사이비 철학일 것이며 과학의 한계를 위반하는 동시에 철학의 한계도 위반한다. - P268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하는골수 나치나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즉 경험의 현실)의 차이와 참과 거짓(즉 사유의 기준)의 차이를 더이상 보지 못하는사람들이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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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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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각자가 자신에 맞는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보는 세상을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본 세상이 오직 하나뿐인 진리라는 오만을 내려 놓고 타인의 안경을 써보기로했다. 타인의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은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번에는 건축가 유현준의 안경을 쓰기로했다. 건축가가 바라본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1. 건축가에 대한 편견 깨기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사실은 무분별한 개발을 그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며 진행되는 무분별한 개발을 경제발전이라는 용어로 포장하며 돈을 벌 수 있는데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특히, 한강 개발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으면서 무척 놀랐다. 


  "한강 개발에 대한 많은 접근 방식에서 우려되는 것은 비어 있는 한강을 지나치게 밀도 높은 공간으로 만들려고하는 것이다." -201쪽

  "한강공원처럼 24시간 사용 가능한 수변에 위치한 도심 공원은 전세계에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202쪽


  그릇이 비어있기에 쓸모가 있듯이, 한강을 비우기에 쓸모가 커진다는 사실을 유현준은 알고 있다. 건물을 밀도 높게 지어서 돈벌이를 많이하기 보다는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더 나아가서 자동차와 아파트의 등장으로 우리는 마당과 골목을 잃어야했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다. 개발 지상주의가 지배했던 시기에 우리는 마당과 골목을 내어주며 행복해했다. 그러나 하나를 얻으려할 때 어쩌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내어 주어야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웃과 대화가 단절된 아파트에 살면서, 돈을 내지 않고 서는 머무를 공간이 너무도 부족한 도시에 살아야하는 댓가를 지불해야했다. 건축가 유현준은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지적하며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유현준은 발코니 확장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아파트 베란다를 줄여서 용적율을 높이고 실내 공간을 확장하는 것에 대해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찬성하면 찬성했지,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현준은 그러하지 않았다. 빨래가 널려 있는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며 발코니가 사라진 도시에 아쉬움을 표한다. 


  "우리의 도시가 살 만한 거리로 채우지기 위해서는 건축물에 사람 냄새가 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유리창 대신에 발코니가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야 한다." -59쪽


 어느 아파트에서는 아파트 값을 높이기 위해서 에어콘 실외기를 아파트 밖에 달리 않기로 결의하기도했다. 빨래가 널려 있는 모습을 지저분하게 바라보며, 아파트 값을 높이기 위해서 생활의 불편함도 감수하는 이 시대에 유현준 교수는 현타를 날리고 있다.

  이제는 건조기를 사용하는 집이 많아지면서 유현준 교수가 정겹게 보고 싶어던 빨래가 널려 있는 풍경을 보기는 힘들어지고 있다. 더 많은 건물을 지어 돈을 벌려는 탐욕의 시장 논리를 유현준 교수의 말한마디로 없애버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더 좋은 도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버리있음을 일깨우는 깨달음의 죽비를 내리치는 용기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바로 건축가 유현준이다.


2. 건축가의 세상보기

  공간과 건축을 바라보는 건축가 유현준의 시선은 참신하다. 도시를 바라보며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비밀을 깔끔하게 설명해준다. 몇가지 예를들어보자. 사무실 책상 위에 책이 수북히 쌓아 높고 업무를 보고 있는 사람을 보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하는가? 나는 그사람을 너무도 게으른 사람이라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유현준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프라이버시가 필요하다. 필자가 있는 사무실에는 책상 앞에 책을 쌓아 두는 직원이 있었다. 이는 그 직원이 단순히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개방된 책상이 불안해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기 위해서 책과 서류로 벽을 치는 것이다. 보통 사무실에는 큰 모니터가 벽의 역할을 해준다." -220쪽


  어떤가 건축가의 눈으로 직원을 바라보니, 직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 공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평가하다보니 편협하고 왜곡되게 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의 본능적 욕구를 이해할 때문이 우리는 세상을 보다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 

  중국 북경에서 사람들이 잠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본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들을 평가하겠는가? 혹시 시민의식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꼴볼견으로 보지는 않았는가? 그런데, 유현준의 생각은 달랐다. 


  "사실 이런 문화는 거리를 거실처럼 느끼고 사람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191쪽


  잠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거리를 거실처럼 느끼고 있다는 설명은 나의 무릎을 치게했다. 거리를 나의 사적 공간의 확장으로 바라보니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부끄러움 없이 잠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설명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공동체 의식이 높다면 동료 시민이 위험에 빠지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한다. 뉴스나 유튜브에 소개된 영상에는 납치되는 아이, 사고를 당한 주민을 바라보면서도 신고를 하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 중국인의 모습이 꾀이었다. 물론, 수 많은 사례 중에서 극히 일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중국인들 사이의 공동체 의식이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지금 소개한 두가지 사례는 이 책에 소개된 내용 중에서 극히 일부분이다. 탁월하면서도 색다른 유현준만의 시선이 이책 곳곳에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공간의 미래'라는 책에 이어서, 건축가 유현준이 쓴 두번째 책을 읽었다. 유현준은 개발 논리에 앞도되어 무분별한 건설로 돈을 벌기를 자라는 악덕 건축가가 아니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도시와 공간을 바라보며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겨운 도시를 만들고 싶어하는 건축 인문학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남다른 통찰과 해안을 제시해준다. 건축 인문학자 유현준이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 글귀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건축은 중력을 어떻게 아름답게 극복하느냐를 통해서 다른 예술이 주지 못하는 감동을 전달해준다. 에펠탑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같은 건축물을 보면서 우리가 감동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약은 언제나 더 큰 감동을 위한 준비 작업이다."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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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말하기 -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설득과 소통의 법칙
윤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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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하기를 두려워하는 대통령이 있다. 후보시절에는 상대후보와 토론하는 것을 기피히더니 이제는 기자와 각본을 짜지 않고 생방송으로 질의 응답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통령이 있다. 방명록을 작성할 때도 쪽지를 보고 베껴쓰는 대통령이 있다. 그 대통령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주어를 말하지 않았으니, 특정 대통령으로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일반적으로 그런 대통령이 있다는 말이다. ㅋㅋ) 그래서 대통령 노무현이 그립다. 어떤이는 말잘하고 토론잘해서 세상을 시끄럽게한다며 그를 싫어했다. 그래서 말을 잘하는 노무현의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말했다. 


  "저더러 말을 줄이라고 합니다. 방송 뉴스를 봤더니 대통령이 말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독재자는 힘으로 통치하고 민주주의 지도자는 말로써 정치를 합니다. 제왕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권력과 위엄이 필요하죠."-2006.12. 정책기획위원회 신규회원 위촉장 수여식, 110~111쪽


  그렇다. 토론하기를 기피하고, 대화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그러한 사람은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라면 대화와 토론에 능수 능란하고 이를 즐겨야한다. 미국의 대통령들 중에서도 버락 오바마를 비롯해서 수많은 대통령이 대화와 토론을 즐기지 않았는가? 서구의 민주주의 모범국가 지도자들은 국민과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직 독재자들만이 대화와 토론을 싫어한다. 대통령 노무현은 우리 사회가 아직 민주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민주주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직도 독재권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말잘하는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체제'라며 노무현을 비하했다. 

  노무현은 연설담당 비서관이 적어주는데로 연설하는 못난 대통령이 아니었다. 연설문을 사전에 기자에게 나눠주면 기자들은 "이거 어차피 현장가면 다르게 말하실거 아니에요?"라며 불평을 했다. 기자양반에게는 불편하겠지만, 자신의 말을 현장에 맞게 능수능란하게 구사할줄 아는 대통령을 두었다는 점에서 국민에게는 행운이었다. 

  노무현은 에드리브, 현장 수정, 앞 사람이 이미 야이기한 원고 내용 삭제 등등 연설을 자유자재로 수정했다. 길을 만들어 놓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길을 만들어가는 리더였다. 그가 말을 잘하고 연설을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서 말을 갈고 닦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그는 끊임 없이 나랏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참모들과 열심히 일했다. 여기에서 그의 콘텐츠는 마련되었다. 그랫기에 알찬 연설이 될 수 있었다. 

  프롬프트가 켜지지 않으면 멀뚱거리며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되고 부터는 항상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언제 위급 상황에 벌어질지 모르기에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최선의 판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몸상태를 유지해야했다. 폭탄주를 즐기며 새집머리를 하며 출근하는 보통의 상관들과는 다른 지도자였다. 서울대 법대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상고출신의 변호사였지만, 간판에 의존하지 않는 실력파 대통령이 노무현이었다.


  그는 떠나고 우리는 지역감정과 탐욕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때로는 수준미달의 대통령을 뽑기도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소위 '일베'는 노무현을 조롱한다. 


  "역사에는 흑백이 없다. 그러나 쓰는 사람은 흑백으로 쓰려고 한다."-71쪽


  노무현이 참모들과 KTX로 상경하던 중에 한 말이다. 그렇다. 노무현은 흑백으로 편가르기를 할 수 있는 리더가 아니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것은 국민에게 행운이었다. 아니, 바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의 현명한 선택이 우리를 행복하게했다. 이제 노무현을 흑백으로, 지역 감정으로, 좌우 우로 갈라서 보지 말자. 그는 국민을 갈라치기 하기 보다는 하나로 화합하려했다. 그래서 노무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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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령 2024-02-1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 시국에 참 많은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와 함께 뜻깊게 읽은 책입니다.

여전히 권위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 깜짝 깜짝 놀라는 수상한 시절입니다.
 
강신주의 장자수업 1 - 밀쳐진 삶을 위한 찬가 강신주의 장자수업 1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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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는 우화집이다. 그러나 단순한 우화집이 아니다. 처음 '장자'를 읽으며 재미 있는 부분을 지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읽고 생각했다. 과연 장자는 무엇을 이야기하려할까?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함에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강신주)을 함께 읽었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 강신주가 설명한 이야기는 '장자'라는 책의 내용에 비하면 너무도 적었다. 어떻게 필부가 '장자'의 모든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장자'를 완독하고 나서 장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다. 강신주가 장자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텔레비젼을 잘 보는 성격이 아니라, 유튜브의 단편적 강의를 들으며 '강신주의 장자 수업1'을 읽기 시작했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서 벗어나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강순주는 우리에게 던져줄까?


1.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방법!! 독맥적 삶.

  영원한 자유인 강신주! 그는 여전히 자유를 말하며, 인문학자라면 자본주의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국가나 자본의 질서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고 믿는데 있습니다. 심지어 국가나 자본의 질서를 강화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마마보이나 마마걸보다 무서운 국가 보이나 국가걸 혹은 자본보이나 자본걸이라는 괴물이 되고 마는 겁니다." -196쪽


  재미있는 것은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일갈하는 강신주 조차도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여러권의 책을 쓰는 것도, 그 책이 많이 팔리기를 바라면서 강의를 하고 벙커1에서 방청객들에게 자신의 책을 사서 보길 바라며 한 말들을 떠올린다면 그도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10여년 전으로 기억한다. 대중강연에서 강신주는 '바람이 없으면 글라이드를 탈 수 없듯이, 자본주의라는 바람을 이용해서 우리는 살아가야한다.'는 말을 했다. 자본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며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라고 우리를 채근하는 그는 자본주의라는 감옥에서 '관념적 탈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신주는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문명화를 가축화라 지적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을 사용하여 자본보이와 자본걸을 비판한다. 그런데, 과연 강신주의 말은 현실성이 있을까? 사실 자본과 국가라는 질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만약 벗어나고 싶다면 자연인이 되는 길밖에 없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다큐속 자연인들도 100%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은 매우 적다.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없는 것들은 읍내로 나와서 구입할 수 밖에 없다.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 양봉이나 약초채집 등의 경제활동을 한다. 

  장자관련 서적을 읽으며 나의 가슴에서 남는 세속을 떠나는 방법에 관한 글이 있다. '속세를 떠나 산속에서 은일하는 것은 최하급의 은일이고, 최고의 은일은 속세 속에서 은일을 하는 것이다.' 라는 글이다. 진정한 도는 산중에서 닦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서 인간의 고통을 고뇌하며 몸으로 닦는 도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국가나 자본의 횡포에 대항하고 연대하며 우리의 국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도이다. 부순다고 파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맘에 들지 않지만 고쳐나가고 변혁해 나가며 우리 사회에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바람을 이용해서 창공을 날아가는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과 국가 속에서 살아가며 우리는 어떠한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 살아야할까? 나는 '강신주의 장자수업'을 읽으며 '독맥적' 삶에 대해서 생각했다.


  ""독맥적인 것을 따른다."는 것은 척추로 상징되는 당당함과 양기로 상징되는 경쾌함을 기준으로 삶을 살아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당하고 경쾌한 삶! 억압체제를 떠나거나 극복하지 못해도, 아니억압체제를 떠나거나 극복할 때까지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되는 가치입니다." -199쪽


  독맥(督脈)!!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숫타니파타'에도 나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것이 독맥적 삶이 아닐까? 자본주의에 노예가 된자들이 유행에 따라가지 못한다며 나에게 핀잔을 주어도, 승진에 목을 매며 그 경쟁에 같이하지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보내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경쾌하게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독맥적 삶이 아닐까?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스토커와 같은 삶보다는 그가 원하는데로 그에게 행해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나는 나의 길을 가야겠다.


2. 역사공부를 해야하는 이유

  강신주라는 철학자를 좋아하지만, 그가 말하는 논리의 근거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강신주는 철학뿐만 아니라 뇌과학과 인류학 분야의 많은 책들을 읽으며 사유의 폭을 넓힌다. 그런데, 역사학 관련 서적은 많이 읽지 않는다는 인상을 그의 책에서 강하게 받는다. 대표적인 것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노예가 건설했다는 표현이다. 


  "파라오 한사람을 위해 돌을 나르는 수십만명의 노예들을 떠올려 보세요." -222~223쪽


  이집트에서 발견된 상형문자를 해독한 결과 피라미드는 노예가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농민이 건설했으며 그 댓가로 맥주와 밀가루를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피라미드 건설은 농번기를 피해서 농한기에 일종의 뉴딜정책처럼 시행되었다는 연구결과를 강신주는 알지 못하고 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서 피라미드를 노예를 동원해서 건설했다는 잘못된 기록을 강신주는 아직도 믿고 있다. 강신주가 쓴 여러 책에서 피라미드를 노예들이 건설했다는 잘못된 표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강신주가 '농민도 어자피 노예이다.'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예와 농민은 엄격히 구분된다. 또한 농민을 노예로 여긴다 할지라도 대중을 위한 책에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농민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어야했다. 물론 맘에 들지 않는 표현이지만 말이다. 

  강신주는 농경문화를 경멸하며 유목문화를 찬양한다. 억압과 지배의 문화가 농경문화라면 유목문화는 자유가 있는 문화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웃이 마음에 안들면 천막을 걷은 다음 가축을 몰로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만이니까요. 이웃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련없이 떠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277쪽


  강신주의 설명 대로라면 농경사회에서는 이동할 수 없기에 이웃과 다툼이 일어나지만, 유목사회에서는 이동할 수 있기에 분쟁이 발생할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일까? 유목민은 언제나 자유로이 떠나며 분쟁을 겪지 않는 사람들일까? 아니다. 강신주에게 '유목민족 제국사'라는 책을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유목민 조차도 혼자살 수 없다. 그들은 광활한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부족을 형성한다. 쪼드나 강과 같은 가뭄과 홍수가 초원을 덮치며 가축들이 먹을 풀은 줄어든다. 가축의 배를 가르면 자갈들이 가득한 경우도 있다. 뜯어먹을 풀이 없다보니 배고푼 가축이 자갈을 먹은 것이다. 늘어나는 인구와 가축에 비해서 한정된 초지를 두고 부족간의 피의 사투가 벌어지기도한다. 그러한 사투는 너무도 참혹하다. 강신주가 칭기즈칸이 칸으로 추대되기 전까지의 고난의 기록을 읽어보았다면, 유목민에 대한 낭만적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쌍한 강신주는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가는 오류를 범한다.


  "유목국가들은 인간을 가축화하는 야만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국가가 대부분 무문자 사회였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겁니다." -276쪽


  강신주는 유목국가들이 인간을 가축화하지 않는 근거로 '무문자 사회'라는 점을 제시한다. 이것도 엄청난 오류이다. 유목국가들도 문자를 만들었다. 돌궐제국도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고 돌궐문자로 쓰여진 톤유쿡 비석이 발견된 사실이 이를 실증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거란에는 거란문자가 있었고, 여진에는 여진문자가 있었으며, 서하에는 서하문자가 있었다. 유라시아 대제국을 세운 몽골에는 파스파 문자가 있었다. 부족간의 치열한 죽고 죽이는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부족을 통일한 유목민을 국가를 세우고 자방을 정복해 나아간다. 그리고 문자를 만든다. 유목국가가 무문자 사회였다는 강신주의 낭만적 역사관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그의 공상이다.

  강신주에게 말하고 싶다. 역사를 여행자의 시선에서 보지 말라!! 커피에 우유를 부어 마시는 비엔나 커피를 여행자는 낭만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커피와 우유를 마쉴 여유가 없는 마부는 한손에 고삐를 쥐고 다른 한손에 커피와 우유를 들 수 없기에 커피와 우유를 섞어 마셨다. 비엔나 커피는 여행자에게는 낭만적인 모습이지만 마부에게는 고단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절박함이 묻어있는 현실이다. 강신주는 여행자의 시선에서 유목민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는 유목민이되어 유목민의 삶을 바라보길 기대한다. 

  강신주의 많은 글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는 나이지만, 때로는 그의 아전인수식 해석에 동의할 수 없을 때도 있다. 특히, '수주대토' 고사에 대한 그의 설명은 절대 동의 할 수 없다.


  "송나라 사람이 지킨 나무 그루터기는 단순히 전통이나 통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것은 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은 사건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지킨 나무 그루터기는 그가 옳다고 판단한 자신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한비자는 나무 그루터기를 지킨 송나라 농부를 잘못 읽어냈습니다. 송나라 농부는 고지식해서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요. (중략) 일회적 사건을 일회적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오히려 그로부터 일반적 법칙을 끌어내고 그것을 현실에 과감히 적용합니다. 평범한 바보나 멍청이는 이런 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창조적인 과학자나 비판적인 지식인만이 그렇게 할 수 있죠. 송나라 출신들은 주어진 관념이나 상식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 162쪽


  과연 그럴까? 상식과 관념은 현실을 살아가는 일차적 지식이다. 이에 기초해서 사유했다면 일회성 사건을 일반적 법칙으로 오인해서 나무그늘에서 늘어져 쉬면서 어리석은 토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농부의 행위는 경쾌하지도 과감해 보이지도 않는다. 우숩고 무모해보일뿐이다. 강신주가 사건을 달리보려는 시도는 좋아보인다. 그러나 상식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맞대로 평가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못내 불편하다. 역사를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보아야하듯이, 기존의 상식들도 과연 그러한지, 타당성이 있는지 냉철할게 바라보아야하지 않을까?



  책을 덮었다. 책을 읽고 나의 머릿속에 남는 한귀절이 있다.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으니, 만물과 나는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310쪽)라는 혜시의 말이다. 물론 장자는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다"고 느껴지는 그 애절한 상황, 그리고 "세계는 나와 더불어 태어났다"고 느껴지는 그 경이로운 상황에서 벗어니지 말고, 이러한 상황에 따르라"(314쪽)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혜시의 말을 따르고 싶다. 이 순간 만큼은 타의 탄생과 함께 나의 세계가 열렸으니, 나의 세계와 나는 하나라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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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코 2024-05-2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인 문해력이 꼴찌인 이유가 이 글에서 보여지는 구나

2024-05-20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지음, 이현주 옮김, 최형익 감수 / 민음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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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의 귀재 헨리 키신저!! 닉슨 정부에서 중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서 파키스탄을 통해서 중국으로 건너간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냉전의 시대를 건너 데탕트 시대로 이행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의 외교 천재 헨리 키신저의 세계관을 접하고 싶어 그의 책을 펼쳤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외교자문을 했던 그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1. 베스트팔렌 체제 신봉

  독일 땅에서 시작한 30년 전쟁은 유럽의 많은 국가가 참여하면서 국력을 소진했다.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친 국가들은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다양성을 체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제 더 이상 로마 가톨릭과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단일한 세계 질서는 유지될 수 없었다. 헨리 키신저는 베스트팔렌 체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베스트팔렌 평화 조약에서 수립된 구조물은 합의된 규칙과 제한을 기초로 국제 질서를 제도화하고 지배적인 한 국가가 아니라 다수의 강대국들을 기초로 해서 국제 질서를 세우려던 최초의 시도였음을 보여주었다." -42쪽


  지배적인 한 국가가 패권을 장악하기 보다는 '다수의 강대국'들이 세력균형을 이루며 평화적 국제 질서를 세우는 것이 헨리 키신저가 생각하는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외교의 이상이다. 다수의 강대국이 현실적인 외교를 펼치다보니 가톨릭 국가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은 신교편에서 30년 전쟁에 참전했다. 가톨릭 추기경인 그는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합리화한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 인간은 사후에 구원된다. 국가에게는 불멸성이 없다. 국가의 구원은 지금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34쪽


 리슐리외가 신교편에 서서 종교 전쟁에 참전한 결과 전쟁은 30년을 끌게 되었다. 독일은 비참한 전쟁터가 되었다. 그리고 리슐리외가 뿌린 악의 씨앗은 비스마르크에 의해서 프랑스 고립화 정책으로 돌아왔다. 비스마르크는 베스사유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황제 대관식을 거행한다. 

  다원성, 실리주의, 세력균형으로 요약할 수 있는 베스트팔렌 체제를 헨리 키신저는 매우 이상적인 외교 정책으로 파악했다. 그랫기에 헨리 키신저는 빈체제를 긍정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세계사 교과서에서 빈체제를 보수반동 체제로 규정했다. 나폴레옹 전쟁에 의해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전파되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열기가 치솟았다. 이를 억압하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중심이 되어 빈체제를 수립했다. 각국의 자유주의 운동의 빈체제에 의해서 억압당했다. 

  그런데, 헨리 키신저는 빈체제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다. 4국 동맹, 신성동맹, 강대국의 협조체제 성립으로 빈체제 이후 1차 세계 대전까지 평화가 계속되었다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강대국의 협조체제는 1820년 나폴리 혁명, 1820년~1823년 스페인 혁명, 1820년 ~ 1823년 그리스 독립 혁명에서 빛을 보았다고 서술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헨리 키신저에게 강한 역겨움이 일었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을 짓밟고 있는 구체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빈체제 이후 1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 큰 전쟁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구체제 밑에서 신음하며 자유를 갈망하던 수많은 민중들의 아우성에 헨리 키신저는 귀를 닫고 있었다. 힘없는 민중들이 강대국의 힘의 논리앞에 자유를 억압받아도 된다는 그의 생각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약소국 국민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무서운 논리로 다가온다. 


2. 헨리 키신저의 미국 대통령 평가

 헨리 키신저는 현대 외교가 나아가야할 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세계 질서는 홀로 행동하는 한 국가에 의해서는 달성될 수 없다. (중략) 이 질서 개념은 어떤 지역이나 국가의 관점과 이상을 초월한다. 역사의 순간에서 그것은 당대의 현실에 영향을 받은 베스트팔렌 체제의 현대화일 것이다." -416쪽


  '베스트팔렌 체제의 현대화'를 현대 외교가 나아갈 길로 제시한 헨리 키신저는 기존의 고립주의 외교 정책에서 탈피해서 국제 사회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러일 전쟁을 중재한 시어도어 루스밸트 대통령 뿐만 아니라,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고 국제 연맹을 제안하여 1차 세계대전 이후에 평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한 윌슨 대통령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윌슨은 학자 출신 답게 세계평화가 항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이상적인 방법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 국민들은 고립주의로 회귀했고, 미국은 국제연맹에 참여하지 않았다. 평화 정착을 위한 그의 노력도 제2차 세계 대전을 막아내지 못했다. 현실 정치에서 윌슨의 이상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을 그후의 대통령들이 계승했다. 특히 닉슨은 백악관 각의실에 윌슨의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현대에 실시되는 여론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꾸준히 꼽힐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윌슨은 살아 있다. 현실에서 패배했음에도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 영원히 살아있는 자가 윌슨이었다. 

  헨리 키신저의 닉슨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후하다. 어떤이는 닉슨을 거짓말을 잘하는 저열한 대통령으로 평가한다. 그렇지만 헨리 키신저의 생각은 다르다. 


  "정상적인 시기였다면 닉슨의 다양한 정책들은 미국의 새로운 장기 전략으로 통합되었을 것이다. 닉슨은 희망과 현실이 결합된 약속된 땅을 어렴풋하게 보았다. 그 땅에서는 냉전을 끝내고 대서양 동맹을 다시 정의하며, 중국과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수립하고, 중동 평화가 다가가는 중대한 진전을 이루며, 러시아를 국제 질서로 다시 통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지정학적 비전과 그 기회를 하나로 합칠 시간이없었다." -344쪽


  사람을 만나기 보다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는 외교 부분에서 가장 훌륭하게 준비된 되통령이었다고 키신저는 평가한다. 닉슨의 밑에서 중국과 외교를 성공적으로 시작했기에 키신저의 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고 데탕트시대의 문을 열었으니 헨리 키신저로서는 그의 생에 가장 화려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는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영광을 누렸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어떤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승리로 평가하고, 어떤이는 FBI 국장과 닉슨의 파워게임에서 닉슨이 패배한 사건이라 말한다. 어느 관점에서 닉슨을 평가하더라도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탁월한 외교적 업적을 남겼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헨리 키신저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대단히 후하다. 


  "나는 불안한 시대에 용기와 위엄과 확신으로 미국을 이끌어간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여전히 존경하고 개인적으로좋아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그의 목적과 헌신이 때로는 미국의 정치적 주기 내에서 달성할 수없는 것으로 드러났더라도 그것은 그의 조국에 영예를 안겨 주었다. 부시가 대통령직어세 물러난 지금도 그 결정을 추구하고 있고 댈러스에 있는 대통령 도서관의 핵심 주제로 그 결정을 삼았다는 점은 자유의 일정에 그가 얼마나 헌신했느지를 보여준다." -363쪽


  조지 W. 부시는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사람이다. 9.11 사건이라는 초유의 테러 사건에 대해서 초강경 자세를 취했다. 북한도 9.11 테러를 비판하는 성명을 낼 정도로 세계의 어러 나라들은 미국을 두려워했다. 조지 W. 부시는 이라크 침공을 결정한다. 이라크가 생화학 무기를 지니고 테러를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제대로된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이라크를 침공했음에도 사담 후세인이 생화학 무기를 제조하고 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명백한 침공이다. 그가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 '악의 축 발언'은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했다. 사담 후세인 밑에 있었던 수니 과벽파의 일부는 IS가 되어 테러를 하며 세계를 테러의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이러한 조지 W. 부시를 헨리 키신저는 '존경하고 개인적으로 좋아한다'고 밝혔다.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다. 헨리 키신저의 이해할 수 없는 조지 W. 부시에 대한 사랑이 나의 머리를 휘감았다. 그때 영국의 파머스턴이 했던 격언이 생각났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만이 영원할 뿐이며, 그 이익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19쪽


  그렇다. 헨리 키신저에게는 미국의 이익만이 영원할 뿐이었다. 리슐리외 추기경이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서 30년 전쟁에 신교편에 가담했듯이, 미국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이다. 이것이 베스타팔렌 체제의 속성중에 하나였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 헨리 키신저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외교정책의 임무는 미국만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게 아니라 공동의 원칙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중략) 미국의 비전은 유럽식의 세력균형체제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원칙의 확산을 통해 평화를 달성하는데 달려있기 때문이다." -14쪽


  그러나, 키신저는 미국의 외교정책을 수행하고 조언하면서 '공동의 원칙들을 추구'하였는가? '민주원칙의 확산을 통해 평화를 달성'하겠다는 미명아래 약소국의 내정에 간섭한 것은아닌가? 특히, 이 책의 차례를 보면, 유럽과 중국, 아시아, 미국으로 나누어 세계 외교의 역사를 살피고 있다. 그런데, '세계 질서'라는 제목에 어울지 않게 아메리카 대륙, 그중에서도 남아메리카에 대한 서술은 없다. 남아메리카를 독자적인 세력을 보기 보다는 자신의 뒷마당으로 생각하는 미국의 입장을 헨리 키신저는 이렇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외교 일선에 있으면서 남아메리카 정부의 군사 쿠데타를 지원한 정책이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기 싫어서 남아메리카에 대한 서술을 하지 않은 것일까?


3. 헨리 키신저, 그가 남긴 오류

  헨리 키신져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렇다보니, 역사적 사실에 오류가 많다. 퀴즈식으로 '헨리 키신져의 세계질서' 속 오류를 찾아 보자. 


  "프리드리히는 예카테리나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프리드리히를 숭배해온 새로운 러시아 황제는 전쟁에서 철수했다." -49쪽


  위의 문장에서 어떤 오류가 있을까? 윗글에서 '새로운 러시아 황제'는 표트르 3세를 뜻한다. 표트르 3세의 부인이 예카테리나 2세이다. 독일 출신의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3세에게 시집왔으나,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관심이 없었다. 결국, 귀족과 결탁한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을 없애고 러시아의 황제가 된다. 그렇다면, 윗글에 '프리드리히는 예카테리나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라는 표현은 잘못된 문장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카테리나 2세'를 예카테리나 2세의 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로 수정해야한다. 

  한국인이다 보니, 헨리 키신져가 한국에 대해서 서술한 부분이 있으면 반가운 마음으로 유심히 읽었다. 그런데, 연거푸 오류가 발발했다. 


  "소련이 한반도 북쪽을, 미국이 한반도 남쪽을 점령했다. 양측은 점령 지역 철수를 앞두고 각각 1948년과 1949년에 자기들 식의 정부를 세웠다."-323쪽

  "50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몇 달 뒤인 1951년 6월부터 전쟁이 시작된 38선 근처에서 전선이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 중국은 협상을 제안했고, 미국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328쪽


  당신도 어이없지 않은가? 남한이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했고, 같은 해 9월 9일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런데, 연도도 틀릴뿐만 아니라, 남북한 어느 정권이 먼저 수립되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두번째 글은 더욱 황당하다. 헨리 키신저가 몸담고 있는 미국과 관련된 역사 아닌가! 그런데, 6.25 전쟁의 휴전 협상은 중국이 제안한 것이 아니라, 소련이 UN을 통해서 제의했다. 미국 외교 실무를 담당한분이 이런 실수를 하면 안되지 않을까?

  대한민국과 관련한 오류는 그래도 애교수준이다. 그런데, 미국과 총뿌리를 서로 겨누었던 베트남에 대해서는 경멸적인 인상이 짙은 오류가 있다. 


  "1세기에 걸쳐 식민지로 지낸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제도들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특히 남베트남의 경우에는 역사상 한 번도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 -334쪽


  베트남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북베트남 지역에서 시작한 베트남의 역사는 남진을 하면서 베트남 남부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물론, 남베트남 지역에는 '참파'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무시하고 '남베트남의 경우에는 역사상 한 번도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라고 단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베트남인들에게는 대단힌 모욕적인 표현이다. 헨리 키신저가 적국의 역사를, 지금은 친구가된 베트남의 역사를 관심을 갖고 찬찬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제는 고인이 되어 그렇게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여기까지는 역사 학자가 아니라서 오류 발생할 수 있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다음의 오류는 역사와는 거리가 먼 상식이다. 


  "뉴턴의 거대한 시계 장치로 간주되던 18세기 유럽 질서는 다윈의 적자생존의 세계로 대체되었다." -91쪽


  어느 부분이 오류인지 알지요? '다윈의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오류이다. 다윈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말하지 않았다. '자연선택'과 '성선택'을 말했을 뿐이다. 강한자만이 생존하고 약한자가 강한자에게 잡아 먹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면, 지구는 공룡이 지배하고 있어야한다. 그러나, 공룡은 자연에 적응하지 못해서 처절하게 멸종했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제국주의를 합리화한 사람은 사회 진화론을 만든 스펜서이다. 유대인들은 상식이 풍부하다고 하던데, 헨리 키신저의 책에는 오류도 풍부하다.




  헨리 키신저가 탁월한 외교관이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냉혈한 모습을 많이 보이기도 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냉혈한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미국의 국익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하며 그는 탁월한 외교관이다. 그건 그가 이 책에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조언을 남겨 놓았다. 


  "질서를 유지하려면 자제력, 힘, 정당성이 늘 미묘하게 균형을 이루어야한다. 아시아의 질서는 세력균형과 동반자 개념을 결합시켜야한다. (중략) 지혜로운 정치가라면 그 균형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한다. 그 균형을 벗어나면 재앙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265쪽


  요즘 한반도가 불안하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제력, 힘, 정당성'이 균형을 이루어야한다고 키신저는 조언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의 수장은 자제력과 힘, 정당성이 과연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묻고 싶다. 외교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국가의 생존이다. 친미, 친일 일변도의 종미, 종일 외교정책이 한반도의 평화에 과연 도움이 될 것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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