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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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최전선 이라는 책제목은 나의 구미를 당겼다. 박노자라는 조금은 불편한 진보주의자와, 허동현이라는 보수(나는 수구라고 부르고 싶다.)의 논쟁은 어떻게 치열하게 상대방에서 창과 방패를 휘두르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1. 실망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고,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나의 상상과는 달리 둘다 공자왈 맹자왈 등의 너무도 당연하고 도덕적인 말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 성향의 교수로 알려진(http://www.nocutnews.co.kr/news/1156588 뉴스 참조) 허동현가 적극적으로 수구파의 논리를 말할 것으로 기대했다. 박노자는 진보라고 하지만, 안중근을 인종주의를 넘어서지 못한자(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109000/2006/12/021109000200612210640012.html)로 평가하는 글들을 보면서 그들의 진정한 본심을 듣고 싶었다.

 

자칭 '건강한 보수'와 '개인주의적 진보'라는 두 사람의 글들은 서신교류(메일)라는 택스트이기에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하고 타인에게 공격받을 글들을 쓰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 이책을 읽으면서 내심 실망감을 갖게했다.

 

2. 희망

나의 기대와는 상관 없이, 언론에 비친 그들의 모습일 잘못된 것이든, 아니면, 철저한 자기 검열을 통해서 쏟아진 글이든. 이책 자체는 상당히 건전한 글들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 책의 내용과 글들이 이들의 진정한 모습이길 바란다.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시대를 고민하며, 우리사회를 올바른 사회로 만들길 원하는 이들의 치열한 고민과 토론은 기대승과 이황과의 사단 칠정 논쟁을 연상시킨다. 주장은 있지만, 토론과 경청은 없는 우리시대의 자화상을 보며, 절대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는 두사람의 토론은, 그 토론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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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노바 - 주경철의 역사 에세이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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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들을 무겁게 읽지 않고, 산책하며 가볍게 읽을 수 잇는 책이다.

 

참고문헌도, 해당 주제에 1~3편에 불과하다. 이정도의 참고문헌으로 쓴 글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산책하며 가볍게 머리를 식히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상식으로 알고 있던 주제는 좀 싱거웠지만, 나도 몰랐던 주제들은 너무도 새로웠다. 서양사학자로서 서양사에만 치중되기 쉬운 주제를 한국사를 포함한 세계사의 많은 주제들을 고대부터 현대까지 소개하고 있다.

 

인상적인 몇개의 주제를 하나 소개하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칼래의 시민에 대한 새로운 소개이다. 이것이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그러나, 노암 촘스키가 말했듯이 " 우리가 진실을 알면 때때로 씁쓸해 진다." 노빌레스 오빌리쥐를 이야기 할 때, 근거로 소개하는 것이 바로 칼래의 시민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불합리를 깨부수기 위해서 과거의 신화를 깨부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주경철의 말을 믿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참고문헌과 기록, 그리고 치밀한 논증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주제들도 5분정도 읽고 머리 식히고 싶을때, 펼처들면 좋은 책들이다.

 

과거 읽었던, 문화로 읽는 세계사에서 느꼈던 재미와 감동에 비해서는 못하다는 느낌든다. 주경철에게 부탁하고 싶다. '문화로 읽는 세계사'와 같은 재미와 감동을 같이 사냥할 수 있는 책을 써주길... 물론, 이 책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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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을 읽고 난후, 2권을 집어들었다. 정조가 없는 암흑의 시대! 정조라는 성군을 만났기에 화성을 건설하고,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없는 세상은 해가 없는 하늘이고 달이 없는 밤이었다.

  이 암흑의 시대를 정약용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채웠다. 실학을 집대성하고 500여권의 저서를 남긴 것은 바로 그의 18년 유배생활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학의 최고봉이자, 조선 500년 역사 최고의 학자로 남겨질 수 있었다. 이러한 유배를 그에게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 까? 아니면 불행이라고 생각해야할까? 아마도 불행을 정약용이 행운으로 바꾸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정조가 없는 암흑의 시대를 학문이라는 등불로 밝혀나가고자했던 그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에 대한 노론 벽파의 공격은 천주교를 트집잡아 시작한다. 그는 천주교를 배격하였으나, 노론 벽파에게는 이 사실보다는 그를 죽이겠다는 표독한 집념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 많은 인재가 죽어갔다.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 부터 시작해서 수 많은 남인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그의 형, 정약종도 그 수많은 사람중에 한사람이었다. 단지 정약용 그와 그의 형 정약전이 유배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할 정도였다. 피바람의 시대,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책은 유배시절의 그의 많은 저서와 민초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형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우고 있다. 때로는 너무도 어려운 '주역'이라는 책을 정약용의 저서를 길게 인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주역'의 '주'자도 모르는 나에게 너무도 이해하기 난해했다. 정약용 그가 '왕필'을 능가하는 '주역'의 대가라는 것 밖에는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 이덕일이 밉기가지 했다.

  유배지에서의 탁월한 학문적 업적과 그의 형 정약전의 '자산어보'의 완성, 탁월한 스님 혜장 선사를 유학자로 만든 일화 등이 정약용의 유학자로서의 탁월함과 그의 형재들의 재주가 사장된 사실에 대한 안타가움을 더했다. 국가의 안보보다는 정권의 안보만을 위하는 노론 벽파의 모습이 치가 덜리기도 했다. 18년 동안의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에 안착한 그에게 서용보가 측은히 안부를 묻는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정약용을 위하면서 조정에서는 정약용을 배척했다. 노론벽파의 광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익종이 죽기 직전에 그를 불러 치료하게 해서, 치료를 하지 않아도 죽고, 치료해도 죽게 만든다. 정약용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그는 또다시 유배를 가거나, 죽음을 맞이했어야 했다.

 광란의 시대! 암흑의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가며 시대를 달관했던 정약용! 18년동안 정조의 곁에 있었고, 18년 동안 유배를 갔고,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돌아와 초야에 묻혀 살아야했다. 너무나도탁월한 그의 재능이 현실에서 너무도 짧게 쓰여진 것이 안타깝다. 언제나 인재는 있지만, 그 인재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에 그 인재는 땅에 묻힌 구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노론 벽파! 그들의 광란이 우리의 역사발전을 가로 막았고, 그리고 근대화를 막았으며, 일제 강점의 토대를 만든 것이 아닐가? 그리고 오늘은 과연 그렇하지 안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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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前사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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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책을 몇권 읽었던 적이 있다.

 

우리 역사를 과도하게 좋은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닌지,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참신한 시각이 좋다.

 

지금 역사학계의 키워드가 1국사를 넘어 시야를 넓혀서 우리의 역사를 보자는 것 같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도 이러한 류의 책이다.

'근대를 말하다'(이덕일)과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라는 책을 읽고 이 책을 읽었는데,  단순히 1국사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상황을 긴밀하게 살피면서 우리의 근대사를 살피니, 역사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해가되었다. 참으로 참신한 서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 한국사만 연구해도 힘들텐데, 어떻게 한국의 고대사에서 부터 근대사의 역사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일본의 역사도 이해해서 이해하기 쉽게 책을 섰는지 의문스럽기도하다.

 

내가 알지 못했던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와 아나키즘에 대해서 쉽게 써준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는 왜그리도 복잡한지, 읽을 때는 이해가 되었지만, 읽고나서는 다시 혼란스럽다. 너무도 파벌이 심했던 사회주의자들이 밉기도 하다. 이를 일목요연하게 계보도를 그려서 설명해 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일본인이 쓴 대중 역사서에 일반인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도표로 깔끔하게 사건을 도식화시켜 놓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설명이,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를 설명할 때는 필요할 것 같다.

 

일제의 전쟁기계들에 대한 설명과 이들이 파멸로 이르는 모습은 너무도 흥미로웠다. 내가 일본사 책을 좀 읽었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런데, 일본사 전공자도 아닌 이덕일은 이를 쉽게 설명해 주었다. 흥미롭고 쉽게 서술하는 그의 글이 빛을 발한 것이다.

 

물론 아쉬운 점이 있다.

첫째, 1930년대 만주에서 활약했던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활약상을 서술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제2의 청산리 대첩으로 불리는 대전자령 전투는 다른 책을 통해서라도 서술해주었으면 좋겠다.

둘째,, 글과 사진의 배치가 어색하다.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진이 해당 페이지에 나오지 않고 쉽부분에 배치되어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210쪽의 가와시마 요시코(김벽휘) 사진을, 그녀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208쪽에 배치했다면, 독자가 이해하기에 좋았을 것이다.

셋째, 오타 이다. 369쪽 11줄에 "강원도반 반장이었던 장준하는~"  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같은 페이지 4번째 줄에는 "경기도반(반장 장준하)으로 구성했다."라고 적혀있다. 장준하는 경기도 반이 맞다. 그의 자서전에서도 분명 경기도반이라고 적혀있다. 이러한 사소한 실수를 수정했으면 좋겠다.

 

암튼, 독자에게 좋은 읽을 꺼리를 선사해준, 이덕일에게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더 좋은 책을 많이 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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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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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에드워드 윌슨은 consilience라는 말을 부활 시켰다. 그의 제자이자 이 책을 번역한 최재천은 책속에 잠들어있던 통섭이라는 단어를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고 consilience의 번역어로 사용했다. 두툼한 책장을 넘기며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화두는 '과연 통섭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었다. 큰스님이 행자에게 던지는 화두와 같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어려운 책을 꾸역꾸역 읽었다. 


  이책은 생물학을 중심으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통섭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문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에드워드 윌슨의 이 주장이 자못 오만하게 들렸다. 


  "교양과목이 대학의 핵심 교과과정으로 자리잡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464쪽


  시대가 변하니 대학의 핵심과목도 변해야한다. 아니, 기존의 교양과목이 변해야한다. 유시민이 '문과공'이라는 책을 쓰고 나서 각종 유튜브에 나와서 인문학자가 과학을 공부하지 않기에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다는 내용의 지적을 했다. 유튜브에서 비춰진 유시민의 발언은 인문학보다 과학이 우선한다는 인문학 전공자의 항복선언이었다. 글쎄, 인문학자가 과학을 공부해야한다는 명제는 깊은 공감을 하면서도 그의 그러한 모습은 좋와보이지 않았다. 

  통섭의 당위성에는 공감하지만 전공하나도 제대로 알기 힘든 상황에서 어찌 과학까지 공부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천재일 수는 없지 않은가? 라는 질문이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문화를 알기 위해서 뇌과학과 신경과학 유전학을 먼저 설명하는 에드워드 윌슨의 글을 읽으며 그가 말하는 통섭이 만물박사가 되라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사실 만물박사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기에 유한한 시간속에서 배울 수 있는 학문의 양도 제한적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품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통섭을 필요하다.

  인문학 내에서도 같은 사건을 역사학과 정치학이 달리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서로의 연구 방법론이 다르다보니, 대화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 학문의 장벽을 넘나들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이 필요하다. 그 장벽을 넘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험난할 것이다. 그렇지만 올바른 진리를 찾기 위해서 인문학은 과학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류를 연구했듯이, 인문학자는 자신의 주장이 뜬구름이 아닌 대지에 뿌리박기 위해서 과학을 공부해야한다. 

  인문학만이 과학을 필요로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과학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만들어냈다. 우리 과학자가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이라는 괴물이 폭주하지 않고 인간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인공지능 개발 윤리가 필요하다는 외침이 절실하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의지적인 진화'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 과학은 윤리적 선택에 직면해있다.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을 목도하며 과학자들이 윤리적 철학적 판단력이 절실하다. 과연 우리 과학자들은 윤리학과 철학을 통섭하며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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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4-05-2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괄적인 이론을 형성할 때 서로 다른 다양한 분야의 원리를 서로 연결하는 것>
혹은
<특히 과학과 인문학의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 간의 합의>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Consilience 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William Whewell 이었습니다.

과학과 역사에서 일관성(증거의 수렴 또는 증거의 일치), 서로 무관한 독립적인
출처의 증거가 강력한 결론에 ‘수렴‘할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이 Consilience 의 개념은 과학 철학자들(Philosophers of science) 에 의해 널리
논의되었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한 용어였다가,1998년 저술가이자 생물학자인
E. O. 윌슨의 저서인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통섭: 지식의 통합> 에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문화적 간극을 메우기 위한 시도로 사용되며 알려졌습니다.

윌슨은
˝the humanities, ranging from philosophy and history to moral reasoning,
comparative relig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arts,
will draw closer to the sciences and partly fuse with them˝

“철학과 역사, 도덕적 추론, 비교 종교, 예술 해석에 이르는 인문학이 과학과
가까워지고 부분적으로 과학과 융합할 것”이며, 이러한 융합을 통해 과학과
과학적 방법이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고
모든 진리의 궁극적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강나루 2024-05-26 14: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 네요

Jeremy 2024-05-26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조>에서 <부활> 로 바로 본문 고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