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꾸준히 반제투쟁을 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은공산주의자 및 그 영도 하에 있는 진보적 학생 소시민 노동자들입니다. 1925년 12월에 일어난 제1차 공산당사건으로 공산당의 대부분 간부가피검되었으나 이에도 굴하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진영을 정돈대하여 가지고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중 1926년 4월 25일 이조 최후의왕이척이 서거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왜놈들한테 눌려서 신음하는 조선민족에게 반일적 감정을 고취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6월 10일을 기하여 반일 대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각 단체와 연락하야 운동을 계획한 것이 그만 미숙에 발각된 것입니다. - P241
군정 당국은 실정에 눈을 가려, 일터를 찾아 방황하는 노동자를 파업한마하고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한 채 추수에 여념 없는 농민을 태업한•다고 하며, 자기 식량도 미처 거두지 못하는 가난한 농민에게 곡물 판매를 거부한다고 책망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선동하여 경제를 혼란케 하는책임이 인민위원회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첨과 모략을 능사로 하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동 세력에 둘러싸여 포위되어 있는 군정 당국은 그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억압하는 반동 세력의 대두를 조장하고 있다. - P247
8월 중순의 어느 날 밤이었다. 우리 군정학교 학생들이 숙사 뜨락에 앉아서 즐겁게 노래 부르며 휴식의 한때를 보낼 때였다. 신화사에서 사업하는 조선 동무들이 느닷없이 우리들 속에 뛰어들면서일제 놈들이 이제 곧 항복서에 조인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인심을 흥분시키는 특대 희소식은 삽시에 군정학교 전체 교원과 학생들 - P307
속에 퍼졌다. 하여 라가평 언덕은 조선군정학교 교원과 학생들의 열광적인 만세소리와 환호소리로 들끓었다. 군정학교 교원과 학생들은 이 기꺼운 소식을 부근 백성들에게 알리려고저마다 횃불을 추켜들고 시위 행렬을 지었다. 숙사 언덕을 내려선 시위행렬은 라가평 마을을 오르내리면서 "항일전쟁 승리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 "모 주석 만세!"를 높이높이 외쳤다. 한없이 격동된 마을의 백성들도 횃불을 추켜들고 군정학교 교원과 학생들의 시위 행렬 속에 뛰어들었다. 환희와 격정으로 충만한 여름밤 횃불시위는 샐녘까지 계속되었다. - P308
밀사를 따라 당나귀를 타고 연안을 향해 들어갔다. 서금서 연안까지2만 5천 리 밤과 낮을 이어서 몇 날 몇 밤을 산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가라고는 도무지 볼 수 없고 오직 감나무와 호두나무가보일 뿐이다. 별만이 총총한 이역 하늘 아래, 교교한 밤을 나귀에 몸을의지하고 가노라면 바위 위에 크게 나타나는 글자들이 보인다. "토벌을 가는 길은 도망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다. 어디로든지 빠져나와우리에게로 오라! 너희를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이는 팔로군에서 우리들의 학병들을 부르는 신호이다. 흐르는 달빛 아래은은히 클로즈업해 나타나는 우리의 국문 - 공연히 눈물이 죽죽 흐른다. - P326
조선의용대장 시절의 김원봉.
주석 김 선생이 의용대를 대표하여 자못 명확한 어조로 연설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 조선 인민은 중국의 매차의 혁명에 참가하였는바, 특히 동북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실례로된다. 그러므로 이번에 중국 당국은 그들이 조선이라는 뚜렷한 기치를들고 항전사업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김 선생은 자못 영광스러움을 느끼게 되며 그 의의가 중대하다고 인정하였다. "우리들의 역량이 작다고 깔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선의 3천만 민중은 모두 우리의 역량입니다. 아니, 전 중국의 4억 5천만 동포들이 모두우리의 역량입니다." 힘 있는 말마디마다가 매 청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 P374
1939년 3월 나는 조선의용대 본부의 소환령을 받고 본부가 자리 잡은계림으로 갔다. 그때 김구 선생은 서안에서 광복군을 세웠다. 그리하여중경에 있던 어떤 사람들은 서안으로 갔지만 장수연, 김위, 김화순 등 여성들을 포함한 우리 일행 40명은 계림으로 갔다. 계림에 이르러보니 조선의용대는 약 300명의 당당한 진용을 이루었고 3 - P375
개 지대와 부녀대로 나뉘어 있었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임철애를 부녀대대장으로, 나를 부녀대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 P376
조선의용대가 싸움마다 패주하는 국민당 군대와 계속 배합작전을 하며오늘의 후방이 내일 아침이면 전선이 되는 국민당 구역에서 항일선전을 - P385
계속한다는 것은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 날마다 붕괴되는 국민당의 전선과는 반대로 공산당과 팔로군은항일전선에 진출하여 적후 근거지를 세우고 일제 침략자들의 뒤통수를때렸다. 하여 일제 침략자들은 국민당 군대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진공을정치상의 회유정책으로 바꾸고 진공의 예봉을 공산당과 팔로군으로 동렸다.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항일을 하는 이상, 진정으로 항일하는 공산당과 팔로군을 도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 P386
중국군사위원회의 강력한 종용으로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 계획이 드디어 실천에 옮겨져서 이해 5월에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었던 약산 김원봉이 광복군으로 편입되면서 광복군 총사령은 이청천, 참모장은 김홍일이 맡고있었는데, 김홍일은 중국군에서 파견된 셈이었다.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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