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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이 책은 강렬한 시에서 부터 시작된다.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평화를 알지 못하고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예,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인권이라는 숭고한 가치가 철저히 짖밟히고, 동물적 식욕과 생존 욕구만이 남아 있는 인간! 프리모 레비는 질문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냐고.... 프리모 레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려면 기본적인 인권과 생존권이 보장되어야한다고 믿고 있다. 인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 인권과 생존권은 보장되어야한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기 위해서 필요한 인권과 생존권이 철저히 무시된다.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허락되지 않는 그 속에서는 동물적 욕구만이 존재한다.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생존을 위해서 나치에 협력하는 카포는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의 시체를 처리하며 그들의 입속에 있는 금니를 뽑아낸다. 구타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생존을 위해서라도 유대인 포로들은 카포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이탈리아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작가는 이송도중 독일군 호위병에게 이유없이 구타를 당한다.
"그들이 우리를 버스에 태워 카르피 역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기차와 호위병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최초의 구타를 당했다.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이어서, 몸도 마음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만을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17쪽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리는 그들을 보면서 프리모 레비는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을 느낀다. 섬세한 프리모 레비의 감수성에 감탄이 절로나온다. 우리는 폭력에 익숙해져있다. 나의 어린시절, 학교에서도 폭력은 일상적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책상위에 삼국지를 올려 놓았다고 담임 선생은 나의 머리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산수문제를 못푸는 학생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고 칠판에 강하게 부딪쳤다. 폭력은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었다. 교사가 휘두르는 폭력을 학생들도 그대로 배웠다. 학교에서도 학생들 사이에 폭력은 종종 벌어졌다. 단지 담임 교사가 무관심해서 몰랐을 뿐이다. 학교의 폭력은 군대에서도 이어졌다. 훈련을 앞두고 군기잡는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일명 '차기'인 상병이 이등병과 일병을 구타했다. 상병이 제대로 구타하지 못하면 병장이 상병을 몰레 구타하며 '군기 제대로 잡아라'며 훈계했다. 우리 사회는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일제강점기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일상화된 폭력 속에서 우리는 폭력에 무감각해졌다.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리는 경우를 우리는 흔하게 보았다. 재미로 사람을 때리고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사람을 나는 많이 보았다. 프리모 레비에게는 우리가 익숙한 폭력의 일상화가 무척 생소했다. 이러한 감수성이 그가 아우슈비츠의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양분이었을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는 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의사, 제봉사, 약사, 화학자 등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끌려왔다. 그런데, 때로는 강제로 끌려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법을 따르기 위해' 자발적으로 들어온 유대인이 있었다. 순간 나의 눈을 의심했다. 죽음의 수용소에 '법을 따르기 위해' 자발적으로 들어온 유대인이 있었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프리모 레비는 '터무니없게도'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나로서는 믿겨지지 않았다. 자신의 숨통을 옥죄는 악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가 현실에는 존재한다. 법이 존재하는 정당한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악법도 법이라고 믿는 그들은 스스로를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한나 아랜트의 '악의 평범성'의 사례는 가해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생각하지 않는 '노예'들은 악법으로 인간을 괴롭히고 사법살인을 하는 '법비(法匪)'의 좋은 먹이감일 뿐이다. 이런 노예들은 우리 주변에 많지 않은가? 나라를 도둑질할 놈을 그가 특정 지역 후보이기 때문에 무조건 찍어주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우리주변에 흔하게 있지않은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떠올랐다. 빅터 프랭클의 글에 묘사된 죽음의 수용소에는 음울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에 반해서 프리모 레비의 책에는 음울함이 짙게 묻어난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배고픔이 떠나지 않았으며 그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 본능을 레비는 탁월하게 묘사했다.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며 장기적인 목표를 갖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표현들이 곳곳에 있다.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음울함이 그가 1987년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그도 삶의 의미를 말하기도 했다. 독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엇을 것이다."-307쪽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신이 겪은 진실을 증언해야한다는 그의 삶의 의무, 혹은 의미는 그가 1987년까지 살아 남는데 기여했다. 수용소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공통으로 꾸는 꿈이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차리고 가족에게 자신이 겪었던 수용소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진실을 알리려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고통속에서 꿈에서 깨어난다. 그들은 증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그의 삶의 목표이자 의미가 되었다. '이것이 인간인가'의 일본어판 제목이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이다. 작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는 이를 기억해야한다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1987년 자살한 이유도 전후 세대들이 아우슈비츠의 진실에 대해서 관심이 사그러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그의 삶의 의미를 사라지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이 팔래스타인 난민들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우슈비츠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 프리모 레비는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것에 대해서
"아무리 전쟁중이라하더라도 베긴과 그 동료들이 보여주었던 잔인한 오만함을 정당화할 수 없다."-319쪽
라고 일갈했다. 시집살이를 혹독하게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서는 더욱 악독한 시어머니가 되는 어리석음을 프리모 레비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아우슈비츠가 그에게 또다른 대학이었기에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보았을때 나의 과거는 나를 더욱 풍요롭고 자신감 넘치게 해주었다. 새파랗게 젊은 시절 라벤스 부르크 여자 수용소에 끌려갔던 내 친구는 수용소가 자신의 대학이었다고 말한다."-307쪽
감옥, 수용소를 인생과 세상을 배우는 대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고 신영복 선생부터, 빅터 프랭클, 프리모 레비 ..... 어느 곳에선들 배우고 알려한다면 인간은 성장한다. 똑같은 고난 속에서도 그가 무엇을 배우려하는가에 따라서 고통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진흙탕에서도 연꽃이 피듯이......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잊지 않고 성장하는 인간이 진정 인간적인 인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