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국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89
다카라 구라요시 지음, 원정식 옮김 / 소화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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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사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학습을 했다. 학생들은 제주도의 예를 들면서 중앙의 강력한 국가가 주변부를 복속시키며 국가와 민족이 형성되기에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사라 주장하기도 했고, 일부학생은 오키나와는 류큐왕국의 문화를 간직한 류큐의 역사로 보아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879년 류큐의 왕이 도쿄로 끌려가면서 류큐는 오키나와 현으로 강등되었다. 오키나와 인들은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순응했고,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옥쇄를 강요당했다. 오키나와인들이 옥쇄로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 댓가는 미군 주둔기지로 미국에게 통치권이 넘겨지는 것이었다. 조국 복귀운동을 통해서 일본으로 복귀한다면 미군 범죄도 사라질 것이라는 환상을 갖았지만, 1972년 일본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슬픈 오키나와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찬란했던 류큐왕국의 모습을 살펴보고 싶었다. "류큐왕국"이라는 책을 펼쳐든 것도 이 때문이다.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실시하면서 찬란한 류큐왕국의 시대가 열린다. 류큐는 조공무역을 통해서 얻은 명나라의 물품을 얻는다. 류큐의 나하에는 동남아시아와 일본의 상인들이 몰려와 자국의 특산물을 진귀한 주변국의 물건과 교역하려 몰려들었다. 당연히 일본상인은 중국과 교역할 수 없었기에 중국의 물품을 류큐를 통해서 얻고 싶어했다. 이러한 류큐왕국의 강성함이 만국진량의 종에 기록되어있다. 


류큐국은 남쪽 바다의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삼한의 우수한 점을 모으고 대명국과 상조하며 일본땅과 순망치한의 관계를 맺고 있다."-만국진량의 종-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류큐왕국의 부강함을 가져왔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이 사라지자, 류큐왕국의 강성함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결국, 사스마번의 침입을 받아 일본에 예속되었다. 그럼에도 류큐왕국은 유지되었고, 중국에 조공무역도 계속되었다. 류큐왕국을 유지시키면서 류큐왕국의 조공무역의 이익을 가져가려는 얄팍한 일본의 저의는 너무도 교활했다. 심지어, 일본 민간인 업자가 류큐 사자를 자칭하며 조선에 무역을 요구하기도 했다. 조선은 왜구의 창궐을 염려해서 알면서도 속아주었다. 일본의 교활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류큐왕국이 1879년 류큐처분에 따라서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충실하게 순응하면서 류큐왕국의 후손이라는 정체성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버린 일본으로 다시 복귀하고 싶어했고, 일본에 복귀하고 나서도 일본 본토인에 비해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오키나와 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일본에서 찾고 있다.1977년, 5년간 오키나와가 일본에 복귀한 것을 좋아한 사람은 50%에 불과했으나, 현재의 오키나와인 대대수는 일본으로 복귀를 좋아한다. 오키나오 전투에서 천황을 위해 옥쇄할 것을 강요받았고, 수많은 오키나와 인들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을 외치지 못하고 있다. 

  "역사가는 현민의 여론을 배경으로 역사상을 재구성할 의무를 져야한다."(185쪽)라는 의무감을 가지고 일본의 역사가들은 오키나와의 역사가 일본사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전설상의  '고류큐 초대왕' 슌텐이 일본 헤이안 말기의 무장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의 아들이라점을 일본 역사학자들은 강조한다. 류큐는 일본의 지방사이고, 류큐어는 일본어와 유사성이 많다는 주장도 이러한 '역사가의 의무'에서 비롯된 연구물이다. 


  일본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오키나와인들의 바램은 가와카미 필화사건을 촉발시켰다. 1911년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가 오키나와인들에게한 강연이 문제가 되었다. 


  "오키나오를 관찰하니, 오키나와는 언어, 풍속, 습관, 신앙, 그 밖의 모든 점에서 내지와 그 역사를 달리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 현 사람들이 충군애국의 사상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한탄할 것 없다.  나는 이렇기 때문에 오히려 오키나와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큰 동시에 또 가장 많은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32쪽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를 정확히 파악한 교토제국대학교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의 지적은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는 오키나와인에게는 자신의 약점을 후벼파는 강연이었다, 결국 2주간 자료조사차 오키나와에 머무르려했던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는 1주일만에 오키나오를 떠나야했다.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의 정확한 지적을 포용하지 못할 정도로 오키나와 인들은 철저히 황국 신민화교육을 받았고, 일본은 오키나와 인들을 황국신민화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에게 류큐인으로서의 자존감은 사라졌다. 그 댓가로 오키나와인들은 오키나오 전투에서 옥쇄를 강요당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서 일본에게 버림받고 미군기지로 고통을 당해야했다. 1972년 일본에 복귀하고 나서도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다. 


  2019년 10월 31일 파란만장한 슈리성이 다시 한번 불탔다. 류큐 왕국의 왕이 살던 이성은 일본에 병합된 후에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오키나와 전투때 전소되었다. 그후, 류큐대학 캠퍼스로 사용되던 슈리성터는 1992년 류큐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열망에 따라 다시 복원되었다. 오키나와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당했던 외면과 차별 처럼, 슈리성도 핏박과 슬픔을 겪어야했다. 2019년에 완전 소실된 슈리성을 다시 복원할 계획이 현재 시점에서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슈리성을 다시 복원한다 할지라도, 오키나와 인들이 류큐인으로 다시 태어 나지 못한다면, 슈리성의 의미는 다시 부활할 수 없다. 완벽한 황국신민화 정책이 성공한 오키나와를 바라보며, 친아들이 아닌 업둥이가, 친아들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애닳픈 모습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아리다. 언제쯤, 오키나오 인들은 일본인으로 인정받기 보다는 류큐왕궁의 후손으로서의 자존심을 갖고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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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4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류큐라면 오키나와 !! 일본이 엄청 잔인하게 지배해버린 가야왕궁하고 교류도 할정도로 문화적으로 우월했었던것 같은데 황국 식민화 정책으로 지금에 오키나와는 류큐왕국에 모습을 볼수 없다는게 너무 안타깝네요 ㅜ.ㅜ강나루님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ᒄ₍⁽ˆ⁰ˆ⁾₎ᒃ♪♬메리메리 크리스마스 ^.~

강나루 2020-12-24 04: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scott 님도 메리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