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아이들 - 전범의 자식들, 역사와 대면하다
타냐 크라스냔스키 지음, 이현웅 옮김 / 갈라파고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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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혹은 조상의 잘못을 그 후손들이 책임지어야할까? 당신이 연좌제에 반대한다면 나치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과거사에 대해서 반성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우린 어떻게 답해야할까? 부모와 자녀는 별개의 생명체이다. 부모가 저지른 범죄 때문에 자녀가 처벌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조상이 친일한 댓가로 최고의 교육을 받고 부와 명예를 누리는 후손들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조상들의 잘못을 내가 왜? 책임지어야하느냐'는 반박에 적당한 설명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치의 아이들'이라는 책을 서가에서 펼쳐들었다. 독일은 제3제국 전범의 자녀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그리고 전범의 자녀들은 부모의 유산을 어떻게 떠안았을까?

 

1. 부모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치의 아이들.

  나치의 핵심 전범중에서 딸바보들이 많다. 헤르만 괴링과 하인니히 힘러가 대표적인 딸바보들이다. 유대인과 집시들에게는 악마의 모습을 보이지만, 자신의 딸에게는 너무도 사랑스런 아버지이다. 사랑처럼 강력한 쇠사슬은 없다. 보통의 쇠사슬은 얽매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기에 쇠사슬을 끊으려 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쇠사슬을 받은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쇠사슬을 그리워하며 안주하게 만든다. 

  나치 전범의 자녀들 중에서 부모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부모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부모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은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힘을 어쩌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가 총통의 후계자 루돌프 헤스의 아들 볼프 뤼디거 헤스와 홀로코스트 설계자 하인리히 힘러의 딸 구드룬 힘러,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의 딸 에다 괴링이다. 

  구드룬 힘러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하인리히 힘러는 자신의 딸 구드룬 힘러에게 너무도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녀는 '히틀러 유겐트'를 모델로 '비킹 청년대'를 창설한다. '침묵의 원조'를 통해서 나치 전범들을 도와 준다. 그 중에는 '리옹의 백정' 클라우스 바르비도도 있다. 아버지의 죄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사죄하기 보다는 아버지의 생각을 이식받아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려한다. 

  헤르만 괴링의 딸 에다 괴링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 재미 있는 일화가 있다. 


  "라이히 고속도로가 폐쇄되었다는 걸 들었나?", "아니. 무슨 일이 있나?", "에다가 거기서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네."-75쪽


  헤르만 괴링이 딸 에다 괴링을 얼마나 끔찍히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이다. 에다 괴링에게 아버지에게는 죄가 없다. 단지 히틀러만이 모든 죄의 책임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그 분의 눈을 들여다보면 평화를 읽을 수 있지."라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아버지의 사랑의 쇠사슬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짐작케한다. 

  총통의 후계자 루돌프 헤스의 아들 볼프 뤼디거 헤스도 아버지의 무죄를 주장한다. 루돌프 헤스는 영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단독으로 비행기를 조정해서 영국에 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 볼프 뤼디거 헤스에게 아버지는 평화를 추구한 사람이다. 그는 나치의 침략을 합리화했으며, 많은 생존자가 있다는 것을 근거로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도 아버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의 사랑에 짖눌려 사랑의 쇠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대를 지나면서 사랑의 쇠사슬은 약해지기 시작한다. 헤르만 괴링의 증손녀 증손자는 죄악의 유전자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불임을 결정했으며, 종손 마리아스는 유대교를 받아들인다. 구드룬 힘러의 종손녀 카트린은 바르샤바 게토에 살았던 유대인 가문 후손과 결혼했고, 조상이 한 만행에 죄책감을 느낀다.

  부모의 유산을 넘겨 받을 수밖에 없는 나치의 자녀들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유산을 극복할 것인가? 그 유산에 짖눌려 살 것인가? 는 자녀의 선택에 달려 있다. 부모의 사랑이 클수록 그들은 부모의 유산에 짖눌려 쇠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쇠사슬은 세대를 지나면서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2. 부모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자녀들.

  모든 나치의 아버지들이 자녀에게 사랑을 주지는 않았다. 히틀러의 오른팔 마르틴 보어만의 아들 마르틴 아돌프 보어만, 크라쿠프의 백정 한스 프랑크의 아들 니클라스 프랑크가 대표적인 예이다. 

  히틀러의 오른팔 마르틴 보어만은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해야했기에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림자 총통' 보어만은 아들을 나치의 기숙학교에 보낸다. 나치가 패망을 하고 나서야 마르틴 아돌프 보어만은 아버지의 죄를 알게 된다. 그리고 가톨릭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다. 열정적 선교활동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별다른 사랑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의 쇠사슬이 약했기 때문일까? 그랫기에 아버지의 죄를 씨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사제의 길을 갔던 것일까?

  크라쿠프의 백정 한스 프랑크의 아들 니클라스 프랑크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니클라스는 가족들에게 '이방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미클라스 프랑크는 아버지 한스 프랑크가 자신을 안아주기를 기대했지만, 니클라스의 아버지는 그를 안아주지 않았다. 다행이라해야할까? 아버지의 사랑의 쇠사슬은 니클라스를 올가메지 못했다. 나치가 패망하자, 아버지 한스 프랑크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노르미가 아버지의 전범행위에 고통을 받으며, 죄악의 유전자가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40세에 자살했던 것에 비해서, 니클라스 프랑크는 아버지의 전범행위와 정면으로 대결한다. 그리고 이를 소재로 여러권의 책을 쓴다. 또한 평생 동안 아버지의 시신을 담은 사진을 곁에 두고 보관했다. 왜일까? 그는 이렇게 답한다. 


"저는 이 사진에 담긴 장면이 마음에 들어요. 그가 죽었으니까요." -173쪽


  아버지의 죽음을 직시하고, 아버지의 죄를 직시한 니클라스 프랑크에게 사랑의 쇠사슬이 너무도 약하다는 사실은 축복일까? 불행일까? 


3. 새로운 화두의 등장.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나치의 아이들'이라는 책은 무거은 화두를 던져 주었다. "나는 어떤 아버지가 될 것인가?"라는 화두는 나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 자녀의 삶에 무조건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책을 통해서 깨달았다. 나치전범의 자녀들 중에서 한쪽은 사랑을 받고 자랐기에 부모의 쇠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삶을 살아간다. 부모의 죄를 합리화하거나, 부모에게 죄가 없다는 논리를 만들고 근거를 찾는다. 사랑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기는 커녕, 옥죄어 오는 쇠사슬에 행복해한다. 

  반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나치의 자녀들은 사랑의 쇠사슬이 너무도 약하기에 쇠사슬을 끊고 현실을 직시한다. 부모와 마주하며 부모의 죄를 직시한다. 사제가 되거나 책을 쓰면서 부모의 잘못을 씻으려 노력한다. 

  그렇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에게 쇠사슬이 될 수있다. 자녀의 삶을 화창한 봄날 장엄하게 피어나는 꽃들처럼 활짝 피울 수있기 위해서, 부모는 한가지 더 노력해야할 것이 있었다. 자녀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한다. 현실의 부조리함과 타협하면서 삶을 살아간다면, 부모의 사랑은 가혹한 쇠사슬이 되어 자녀의 삶을 갈가 먹을 것이다. 현실의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고 정도를 걷는 부모가 자녀에게 사랑을 나눠준다면, 자녀도 올바른 삶을 살아가며 행복해할 것이다. 맹목적인 사랑은 독이될 수 있다. 자녀가 자신의 두발로 대지를 딛고 우뚝 서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부모는 먼저 올바른 삶을 살아야한다. 그리고 나서 행복한 사랑을 주어야한다. 

  나치전범들은 자상한 아버지 일지는 모르지만, 삶을 올바로 살아가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지적했듯이, 나치 전범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장 루돌프 회스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루돌프 회스는 아버지로부터 군대식 규율을 강조받으며 성장했다. 모든 어른은 존경과 공경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옳기 때문에 그는 생각할 필요 없이 복종을 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복종을 즐겼다. 감옥에서 모범수였던 것도, 생각하기 보다는 복종에 익숙한 독일식 교육의 효과(?)였다.생각하지 않고 윗사람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라는 독일의 규율은 나치의 괴물을 만들어냈다. 

  심리학자 G.M 길버트가 유대인들이 그러한 운명을 겪을 만한 사람이었냐고 질문하자, 루돌프 회스는 놀라운 대답을 한다. 


  "생각을 하는 건 우리의 일이 아닙었습니다"-245쪽


  루돌프 회스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거부한 존재였다. 이것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장 루돌프 회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총통의 후계자 루돌프 헤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제게는 제 의식이 없습니다. 제 의식은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루돌프 헤스 113쪽


  일찍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했다. 나치 전범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을 대신해주는 존재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부두교의 좀비들 처럼,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그들은 히틀러의 말에 맹목적으로 복종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삶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생각도 옥좨어 버렸다. 

  사랑하는 자녀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먼저 스스로 생각하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며 정도를 걷자. 그리고 자녀를 사랑하자. 그럴 때만이 나의 사랑이 자녀의 삶을 망가뜨리지 않을 것이다. 



  지난 8월의 어느날, 광화문 거리에서 우리는 수많은 좀비들을 보았다. 부두교 사제 호운간이 부두교 신자들을 황홀경에 빠뜨리며 신비한 약으로 그들의 몸과 영혼을 지배하듯이, 신자들을 광화문으로 끌고 나와 그들의 영혼을 지배하며 대한민국을 코로나19 공포에 빠뜨렸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치의 아이들'의 한구절을 읽었다. 


  "우리는 죄를 물려받지는 않지만 우리 조상의 죄로 생겨난 결과는 물려 받는다."-289쪽


  그들의 맹목적인 삶이 그들의 자녀에게는 쇠사슬이 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을 코로나19 공포로 몰아 넣은 그들의 죄는 물려받지 않겠지만, 그 죄로 인해서 생겨나는 결과물은 그들의 자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물려받게 될 것이다. 마치, 친일파의 죄를 그 자녀가 물려받지 않지만, 친일 부모의 죄로 생겨난 결과물의 영향은 자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다. 무엇으로 광화문의 좀비들과 그들의 죄로 생겨난 결과물을 물리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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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20-08-27 2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상의 잘못을 책임지라는 게 아니라, 반면교사가 있으니 그들이 더 옳은 삶을 살길 바라는 거죠. 그런데 그걸 책임전가라고 발끈해버리니 어이가 없어지는 겁니다. 흑흑흑

강나루 2020-08-28 21:19   좋아요 0 | URL
옳은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