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진보적 역사선생님들 중에서 박노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던져주는 한국사회에 대한 촌철살인은 너무도 아프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우리의 다른 모습을 성찰하게 해준다. 제국주의 국가의 피해자로 스스로를 자리메김하고 우리사회에 대한 비판적 지적에 대해서 히스테리적 반응을 보였던 나를 되돌아 보았다. 지금까지 읽은 박노자의 책중에서 이 책이 가장 탁월했다. 그의 조국인 러시아에서 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조국인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탐구하고, 현자 자신의 터전인 노르웨이와 그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치고 미쳐 보지 못한 치부를 들춰냈다. 박노자의 매력속으로 들어가 보자.

 

1. 하얀가면을 벗는 방법.

 책장을 펼치자 "우리 모두의 스승인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글 귀가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그의 날카로움은 에드워드 사이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책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인들이 동을 바라보는 편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과 동양인이 서양인을 바라보는 왜곡된 편견을 뜻하는 옥시덴탈리즘이라는 창을 통해서 박노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많은 진실들을 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박노자의 글을 통해서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을 살펴보자.

 

"1. 우리의 통념은 대개 19세기 서구 중심적 - 그리고 보통 자본주의 옹호론적 - 사회과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당연한 '것도 자연발생적인 것도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중략)

 2. 우리의 사회 정치적 현실을 경정짓는 가장 주용한 기구인 국가는, 사회적 폭력을 독점하는 만큼 늘 각종 폭력을 행사하거나 잠재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위험하고 몰도덕적인 것이다. (중략)

 3. 근대의 서구 중심 세계 체제 전체가 문제시된다면 근대 패러다음 속의 대립적 개념들의 이분법들 - 예컨대 '반동'과 '혁명'의 이분법 - 도 상대화, 지양돼야 할 것이다. (중략)

 4. 하얀 가면에 갇힌 눈들은 늘 '중심' - 즉 서구적인 부강 과학 합리성을 가장 가시적으로 표상하는 쪽 - 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하얀 가면을 벗어던지려면 '중심'의 주술에서 깨어나고 지배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반란적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하략)"20-24쪽

 

  박노자가 제시한 하얀가면을 벗는 방법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의 관념을 의심하고 국가를 의심하고 국가가 제시한 이데올로기를 의심하며, 중심에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한 한다. 주입된 이데올로기를 맹신하고 국가를 절대선으로 생각한다면 아무런 고통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갈 수 있다. 그 죽음이 국가의 폭력에 의한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박노자가 제시한 방법에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면 우리는 기존에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느꼈던 혼란과 놀라움을 견뎌내야한다. 아이가 어머니 배속에서 나오려면 좁은 산도를 거쳐야한다. 그리고 어머니 배속을 힘겹게 나와야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서는 박노자가 제시한 방법을 따라가 보려 한다.

 

2. 가면을 벗은 진실들

박노자는 세상의 모든 가면들을 벗겨 버린다. 박노자에 의해서 벗겨진 가면들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미쳐 바라보지 못했던 것들을 그는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박노자가 벗겨버린 가면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이 쓰고 있는 가면이다. 박노자 자신이 소련출신의 유대인이 아닌가? 유대인들에게 홀로코스트의 가면을 벗어던지는 질문 자체가 위험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도 박노자는 당당히 홀로코스트와 유대인에게 덧씌워진 가면을 벗어던진다.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말할 때, '세계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박노자는 말한다. 과연? 홀로코스트에서 벌어진 대학살이 '세계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일까? 아니었다. 절대왕권과 자본주의 국가들이 비서구권에 대해 저질러온 학살, 유럽인들이 미주 대륙의 토착 인구에 쓴 무기와 이들을 노예화한 것, 영국의 지배로 인한 인도의 황폐화(19세기 아사자 수는 1천만 명 이상), 영국의 아편 강매로 인한 중국의 아편 중족 유행(희생자 수를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은 홀로코스트를 능가한다. 어디 그뿐이랴? 박노자가 예로들지 않았지만, 일제의 난징 대학살, 일제의 남한 대토벌작전, 한국의 보도연맹 사건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대규모 살육이 행해졌다.

  역사는 선택적으로 호출된다.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말했듯이, 역사는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호출된다. 유대인은 이스라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홀로코스트 만을 호출했다. 이때 히틀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이름없는 집시와 공산주의자들은 제외되었다. 박노자는 말한다. 절대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란 폭력을 독점한 조직이다. 이 조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한다. 그 폭력이 사회적으로 합리적 폭력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합리화된 폭력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그 많은 폭력중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합리화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만을 호출했다.

  박노자의 이스라엘 가면 벗기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유대인의 역사에 덧씌워진 가면마져 벗겨 버린다. 이스라엘은 서유럽에서 박해받은 유대인들의 역사만을 정통역사로 가르친다. 아랍인들과 평화롭게 지낸 세파르디의 역사를 외면하고, 동유럽에 살고 있었던 아슈켄나지의 역사도 무시한다. 특히 아슈켄나지가 쓰고 있었던 이디시어와 이디시어 문학작품을 말살한다. 이스라엘의 말살 정책은 세파르디의 갓난 아이를 유럽 출신의 시온주의자에게 입양하는 '2세 동화작전'에서 극에 달한다. 박해의 역사를 설별해서 '박해받은 유대인'이라는 신화를 만들고, 이를 반박할 수 있는 세파르디와 아슈켄나지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히틀러와 전체주의 일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이러한 역사만들기, 아니 가면 씌우기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쏘아올린 미사일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광경을 보며 환호하는 비극을 낳았다. 박해의 역사를 잊지 않고 가르치는 것은 다시는 박해의 역사를 겪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살이를 겪은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서는 더욱 간악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가 되듯이, 박해받은 민족이 힘을 가지면 더 잔혹해질 수 있는 비극을 막지는 못했다. 박해의 역사를 평화와 공존의 역사로 만들지 못한 한계를 그들은 직시해야한다.

 박노자의 가면 벗기기는 유럽과 미국으로 이어진다. 독일에 비해서 서유럽과 미국은 더 도덕적일까? 라는 질문을 한다. 우선, 히틀러가 우생학을 근거로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선전했다는 실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나치 독일의 '인종위생법률'을 미국의 우생학자들이 극찬했으며, 서구를 비롯한 일본에서 우생학의 광풍이 불어닥쳤다는 사실을 박노자는 지적한다. 우생학이 식민지를 열등하게, 백인 제국주의를 우등하게 포장하는 사이비 과학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꺼리를 던져준다. 과학은 객관적인 학문이라는 말이 얼마나 의미없는 말인지, 정치와 학자들이 유착되어 서구의 하얀가면을 강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우리는 직면해야한다. 박노자는 말한다. "아랍 문화의 후진성을 늘 들먹이는 유럽중심주의적 학자들은 지금도 정학유착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 말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과학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가면을 벗기 위해서......

  독일에 비해서 서유럽과 미국이 더 도덕적이지 않다는 박노자의 또 다른 근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에 대한 처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독일 포로를 '살려주기 부담스러워서' 라인 강 근처 '임시 간이 수용소'에 10만명씩을 집어 넣었다. 그결과 수많은 독일 포로들이 죽었다. 프랑스의 경우, 식량을 비현실적으로 적게 줌으로서 '외인부대'에 지원 입대를 유인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때 베트남 전에 동원된 외인부대에는 독일 포로 출신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소련의 경우는 독일인을 강제노동, 강간, 살해했다. 이 광경을 본 솔제니친은 소련 정권의 도덕성에 심각한 의심을 하게 된다. 선과 악이라는 쉬운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에게 박노자의 글을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우리가 하얀가면을 벗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견뎌내야한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는 그의 관점은 우리가 특정 역사관에 입각해서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스라엘과 서유럽에 덧씌워진 가면을 벗긴 박노자는 불교로 눈을 돌린다. 선불교라하면 동양의 정신이 서양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일으켜 전형적인 밝은면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선불굘르 서구에 소개한 스즈키와 엘리아데가 전체주의 경력이 있는 자들이라는 지적을 한다. 특히 스즈키는 '무사도 다도 선불교를 동양 정신의 최고 표현'으로 평가한다. 즉 불교를 "폭력화 어용화"하여 "복고적 수구주의적 문명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박노자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간다. 왜? 벽안의 백인들이 선불교에 더 관심을 갖는가? 슬럼가의 흑인들이 경제적 이유로 선불교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백인들이 선불교를 접할 수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박노자는 직시한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긍정적 현상속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직면하려는 그의 날카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하기에 박노자의 글과 말에 한국의 지식인들이 열광하는 것이다. 빨간약을 먹은 듯한 느낌과 가면을 벗은 상쾌함을 그의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3. 가면을 벗은 후에..

박노자의 글을 통해서 세상에 덧 씌워진 수많은 가면들을 벗었다. 가면을 벗은 후에 상쾌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남모른 당황스러움도 느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박노자는 소련은 전체주의 국가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소련은 전체주의 국가'라는 가면을 벗겨버린다. 예전에 뉴라이트 교수가 지금의 세계사 교과서가 전체주의 국가에 소련을 빼먹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소련도 전체주의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제대로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박노자는 공산주의 악마화에 황금의 기회를 준 독일계 유대인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이 1968년 재판을 내면서 "소련을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명시했다고 말한다. 즉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핵화돼 무기력해져 천편일률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기 꺾인 개인'이 1950년대 초 소련 사회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도 미국 관학자는 '사회주의에 악마의 얼굴 씌우기' 위해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남용한다. 전체주의 연구의 권위자가 소련은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관학자들은 소련에 가면을 씌우고 있으며, 한국의 뉴라이트들도 이를 따르고 있었다.

  박노자의 가면 벗기기가 '전체주의' 용어에서 처럼 상쾌함만을 주지는 않는다. 그는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식민지 수탈론' 뿐만 아니라, '식민지 근대화론', '동학 혁명론'까지도 비판한다. 모든 가면을 부숴버리는 그의 글에 나는 당혹감을 느낀다. 모든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깨부순다면 한국사에서 무엇이 남는가?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라는 불완전한 창으로 역사를 바라보았는데, 이마져도 부숴버리면 어떻게 역사를 바라보아야할까? 박노자는 어떠한 틀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새로운 역사를 바라보는 창을 만든다면, 박노자는 이마져도 깨부술 것이다. 그 창도 배제와 왜곡이 있다고.....

 가면을 벗었다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할까? 박노자는 가면을 벗은 러시아 음악계의 천제 유리한인과 제국주의 국가 네덜란드의 위선을 맹렬히 폭로한 물타툴리, 스탈린 체제에 저항한 알렉슨도르 지노비예프를 소개한다. 가면을 벗어던진 용기있는 이들의 삶은 너무도 힘겹다. 때로는 박해와 가난에 시달려야했다. 우리 사회에도 가면을 벗어던진 용감한 사람이 많이 있다. 수 많은 내부고발자들이 정의로운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무관심과 보복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가면을 벗지 않고 살 것인가? 가면을 벗고 고통받으로 살것인가? 쉽지 않은 질문이 밀려온다.

  가면을 벗는 상쾌함과 가면을 벗은 후의 고통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가면을 벗지 않는다고 모두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박노자는 폴란드 유학생들이 노르웨이에서 보인 굴종적인 모습을 소개한다. 박노자와 수업을 들은 폴란드 급우들은 교실에서 발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수많은 간호사와 선원, 학자들을 받아들여준 노르웨이 관민에 '뜨거운 감사'를 표했고, 자기 나라를 후원해준 유럽국가에 존경심을 표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제3세계에 대해서는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얀피부의 유럽국가에는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고, 자신보다 힘이 약해보이는 제3세계에 대해서는 거만한 지배자의 모습을 보이는 폴란드 급우들의 모습은 안쓰러워보인다. 마치 시집살이를 당한 시어머니가 시어머니가 되어서는 더욱 억척스럽게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말처럼. 소련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에게 가혹한 분할 통치를 받은 폴란드가 강대국에게는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제3세계에 대해서는 멸시를 보내는 듯하다. 서구에 의해서 띄워진 하얀 가면을 벗지 못한다면, 굴종적으로 살수밖에 없다. 떳떳하게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면을 벗어 던져야한다. 폴란드 유학생은 우리가 가면을 왜? 벗어 던져야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박노자의 글은 충격적이면서도 불편하다. 박노자에 의해서 가면을 벗어지만, 나에게 펼쳐지는 세계는 당혹스러운 낯선 모습이다. 이를 삶에 어떻게 녹여내야할지는 또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나의 서재에 읽고 싶은 책이 추가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프란츠 파농의 "검은피부 흰가면"이 그 책이다. 박노자의 안내를 받아서 새로운 고전들을 읽고 나 자신도 모르는 또다른 가면들을 벗어 던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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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북사랑 2020-01-17 1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 읽으러 왔을 때 1번까지만 글이 있었는데, 드디어!!!^^

2020-01-17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