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으로 돌아간 악어가죽 가방 길벗어린이 저학년 책방 9
김진경 지음, 윤봉선 그림 / 길벗어린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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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간다는 건 기뻐하고 축하할만한 일이다. 그러니까 악어가죽 가방이 어찌어찌해서 밀림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있으면 흐뭇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백화점 진열대에 놓인 두 개의 악어가죽 가방. 밤이 되어 사람들이 다 가고나면 큰 악어가죽 가방은 어미 악어가, 작은 악어가죽 가방은 새끼 악어가 된다.  

"엄마, 우린 악언데 왜 가방이 되어 있어야 해?"

라는 새끼 악어의 질문에 어미 악어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우쭐하는 버릇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 조상 할아버지 악어에 대한 이야기가 액자소설처럼 그림책 속에 자리잡는다.  

뽐내는 걸 좋아하던 조상님 악어는 어느날 임금님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자에겐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자 임금님 앞에 나아가 꼬리로 자기 배를 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임금니의 악사가 되어 궁전에 살게 된다. 그런데 그 이후 악어의 배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앞다투어 악어를 잡아서 북을 만들고, 가방이며 허리띠, 지갑들을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마치고 어미 악어와 새끼 악어가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갑자기 우쭐대기 좋아했던 조상님 악어가 악어모양 네온사인 빛으로 나타나 말을 한다.

"모두 내 탓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욕심이 많은 동물인 줄 몰랐어. 그걸 알았다면 절대 임금님의 궁전에 가지 않았을 거야."  

그러고는 악어가죽 가방들에게 발을 줄테니 밀림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발을 얻은 악어가죽 가방은 백화점 진열대 유리를 깨고 나와 하수구 안으로 들어가 밀림을 향해 탈출한다.

이 그림책에서는 악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동물이 어디 악어 뿐일까. 얼마 전에 읽은 <우리 동네 미자씨>에서는 여우목도리가 나왔고, 얼마 전 TV에서는 예쁜 모피를 위해서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밍크가 나왔으며, 각종 보양식 메뉴에 올라 밀렵당하는 동물들과 쓸개에 연결된 호스로 담즙을 뽑아줘야 하는 곰들, 각종 서커스와 동물묘기를 위해 학대받는 코끼리와 원숭이 같은 동물들, 인간의 무자비한 개발로 서식지를 잃어가는 수많은 동물들, 인간이 벌이는 각종 실험에 희생당하는 동물들과 녹아내리는 빙산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리는 북극의 곰들... 

이 그림책에서 조상님 악어가 이런 말을 한다.

"그래, 나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와 봤다. 너희들의 한숨이 나를 부른 셈이지."

누군가의 원망과 한숨의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것. 아마 이 조상님 악어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을 게다. 악어든 곰이든 밍크든 벌레든 나무든 풀이든 산이든 강이든 아니면 다른 인간 누구이거나 나 자신을 향해서도 우리는 원망과 한숨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거라고, 그리고 원망과 한숨이 있는 그 곳에 가봐야한다고.  

새끼 악어가 '우린 악언데 왜 가방이 되어있어야 해?'라고 물은 것처럼 많은 것들이 물어올지 모른다. 난 밍큰데 왜 코트가 되어 있어야 해? 난 여운데 왜 목도리가 되어 있어야 해? 난 코끼린데 왜 물구나무를 서야 해? 난 강물인데 왜 흐르지 못하고 멈춰야 해? 난 산인데 왜 높이 솟지 못하고 깎여야 해? 난 일을 했는데 왜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해야 해? 난 왜 하루종일 일하고도 배가 고파야 해? 기타등등 기타등등...   우린 그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를 생각하면 좀 답답해진다.

여러분 중에 혹시 길거리에 놓여 있는 악어가죽 가방 두 개를 본 사람 있나요?  
그건 가방이 아니라 어미 악어와 새끼 악어였을 거예요.
여러분 중에 혹시 강물 위에 둥둥 떠가는 악어가죽 가방을 본 사람 있나요?
그것도 가방이 아니라 어미 악어와 새끼 악어였을 거예요.  
여러분 중에 혹시 밀림에서 고급 악어가죽 가방 두 개를 본 사람 있나요?
그것도 가방이 아니라 어미 악어와 새끼 악어였을 거예요.  

악어가죽 가방과 악어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장들이다. 어딘가에 있는 악어가죽 가방, 밍크 코트, 여우 목도리 등등은 그냥 가방, 코트, 목도리가 아니라 악어이고, 밍크이고 여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이 마음에 든 건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동물을 보호합시다'라는 구호를 드러내지 않고 동물들이 정말 있어야 할 곳과 사람들의 사치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들 안에 들어있는 잔인한 폭력과 동물들의 슬픔을 잘 녹아냈다는 점 말이다.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악어들이 악어가죽 가방이 된 일차적인 책임을 우쭐대기 좋아하는 조상 악어에게 두었다는 점은 어쩐지 좀 찝찝하고, 조상악어가 네온사인 빛을 통해 등장하는 것도 아이들에게 잘 이해될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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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5-02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에 악어 가방이 엄마 악어와 새끼 악어로 변하는 부분부터
움찔했어요. 살면서 무시하고픈 진실이잖아요.
가끔요, 세상과 조화란 어느 선까지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저 어렵기만 해요.

섬사이 2011-05-03 07:24   좋아요 0 | URL
세상과의 조화라.. 너무 어려운 문제네요.
다만 인간인 우리가 너무 많이 가진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여섯 번 저녁 먹는 고양이 시드 - 좋은책어린이그림책, 세계창작 03
잉가 무어 글.그림, 김난령 옮김 / 좋은책어린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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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된 책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것도 별을 다섯 개나 찍어놓고 리뷰를 써내려가는 건, 어쩌면 잔인한 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얘기하지 않고 넘어가기는 좀 서운하다. 책을 빌려 읽고는 그 책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지는 책이 있다.  나에겐 이 책이 그런 책 중에 하나였는데, 책을 주문하려고 했다가 빨갛게 쓰여진 '절판'이라는 글자 앞에 좌절했었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빽빽하게 꽂혀있는 그림책들 사이에서 다시 이 책과 조우하고는  "너 아무래도 안되겠다. 나 따라와라."하고 한 번 더 대출했다. 사진과 리뷰로 남겨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상품검색을 했더니 중고책으로 나와있었다. 얼른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제 내 것이 된 이 책,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이럴 때도 통하는 말일까?  

처음엔 '여섯 번 저녁 먹는 고양이'라는 제목에 호기심이 동했었다.  특이함은 때로 신선함을 느끼게 하니까. 표지 속의 저 새카만 고양이가 저녁을 여섯 번 먹는다는 최고의 먹성 고양이 시드다.     

 

 

 

 

 

 

 

시드는 아리스토 거리에 산다. 1번지, 2번지, 3번지, 4번지, 5번지, 6번지에. 집이 여섯 군데라 저녁도 여섯 번 먹을 수 있고, 주인이 여섯 명이라 이름도 여섯 개, 잠 잘 곳도 여섯 군데인데다가 여섯 명의 주인이 저마다 다른 곳을 골고루 긁어주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보낸다.   

 

 

 

 

 

 

 

 하지만 그 행복이 깨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시드가 지독한 감기에 걸리자 여섯 명의 주인들이 저마다 각자 시드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간 것이다. 여섯 가지 다른 방법으로 여섯 명의 주인에게 이끌려 동물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시드는 물약을 여섯 번 먹어야 했던 것이다. 일이 이쯤에서 마무리되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수의사가 예약수첩을 확인하다가 감기에 걸린 여섯 마리 고양이가 모두 아리스토 거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여섯 명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 그러자 여섯 명의 주인들은 시드더러 '하는 일도 없이 저녁을 여섯 번이나 먹었다'며 '얌체고양이'라고 화를 낸다. 그리고는 '앞으로 시드한테 하루에 저녁을 딱 한 번만 주자고' 결의한다.   

만약 이 책이 고전적인 도덕관념을 따른다면 시드가 저녁을 한 번밖에 먹지 못하고 배고파하거나, 더 심하게라면 아리스토 거리에서 쫓겨나는 걸로 마무리를 짓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들을 속이고 제 욕심을 채운 시드가 인과응보에 따른 처벌을 받는 걸로 끝난다면 그야말로 가장 단순한 교훈을 심어주는 따분한 그림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지금부터 더 빛을 발한다.    

누가 뭐래도 시드는 저녁을 여섯 번 먹어야 하는 고양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속았다'라고 느끼는 건 순전히 사람들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다. 시드는 여섯 주인이 불러주는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느라고 노력해야만 했고,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안됐다. '우쭐이'이기도 하고 '돌쇠'이기도 하고, '익살이'였다가 '촐랑이'가 되어야 했고, '살랑이'이면서 '흑기사'이어야 한다는 건 내가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런 시드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 나름 시드를 보면서 행복해 했을 테니까, 시드더러 '하는 일도 없이 저녁을 여섯 번'이나 먹는 '얌체'라고 하는 건 시드 입장에선 자존심 상하고 억울한 일이다. 오히려 '이웃끼리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는 아리스토 거리 사람들이 더 문제다. 이웃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정답게 살았다면 시드가 이 집 저 집 다니며 저녁을 여섯 번 먹어야 하는 특이한 고양이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시드도 여섯 가지 이름에 걸맞게 사느라고 힘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드는 미련없이 아리스토 거리를 떠난다. 그러고는 피타고라스 광장의 1번지, 2번지, 3번지, 4번지, 5번지, 6번지에서 살기 시작한다. 시드가 새롭게 정착한 이 동네 사람들은 '광장'에 사는 사람들답게 이웃끼리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시드가 저녁을 여섯 번이나 먹는 고양이라는 걸 처음부터 모두 알았고, '시드가 저녁을 여섯 번 먹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가 떠오른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리스토 거리의 사람들은 시드를 '소유'해야 했다. 내가 이 책을 '내 것'으로 삼아 행복한 것처럼 아리스토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시드를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고, 시드 또한 한 사람의 것이어야 마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시드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화를 내며 시드를 배척해야 했던 것 아닐까. 대조적으로 피타고라스 광장에 사는 사람들은 시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림을 보면 내 것도 아니고 우리 것도 아니고 시드까지 전부 다 함께 '우리'라는 것에 행복해하는 따스한 느낌이다.   

 

그렇게 이 책을 손 닿는 곳에 두고 몇 번을 뒤적이다 보니 또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아리스토 거리에는 아이들이 없다는 점. 그리고 피타고라스 광장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중에는 어느 집 창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드를 모여서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그 그림을 비교해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우리집 꼬맹이딸 생각이 났다.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면 처음 보는 아이와도 금세 친구가 되어 논다. 나중에 "오늘 놀이터에서 만나서 재미있게 논 친구는 이름이 뭐래?"하고 물으면 "몰라"한다. "이름도 안 물어보고 그냥 놀았어?"하면 노는 데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는 듯이, 오히려 이름을 묻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아이들의 세계는 그렇다. 어른들은 친해지기 위해서는 이름과 나이는 기본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취향인지, 결혼은 했는지 안했는지, 고향이 어딘지, 심지어는 학벌이 어떻게 되고 재산 정도는 어느 정도인지 시시콜콜 다 알아야 한다. 아니, 그런 걸 다 알고 나서도 친해지기는 어렵다.  

아이들 사이의 관계는 어른들 사이의 관계보다 훨씬 더 건강하게 열려있다. 아마 시드가 저녁을 여섯 번 먹는 고양이이고 그래서 저녁 때마다 여섯 집에 들러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아이들이 가장 먼저 알아냈을 것이다.

이 그림책은 나에게 관계를 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중고책으로 주문하고 배송을 기다리는 지금, 누군가 이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난 끽 소리도 못하고 기꺼이 빌려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절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사람들에게 기꺼이 추천해주고 싶은 책인데 말이다.   

그나저나 이 책에서 시드가 살던 거리와 광장의 이름이 왜 '아리스토'와 '피타고라스'인 걸까? 모르긴 해도 '아리스토'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따온 게 아닐까 싶은데... 왜지? 왜일까? 끙... 

사족 하나,
이 책 맨 뒤에는 '어린이 친구들에게'라는 글이 있다. 이 글에는 이웃끼리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면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겨도 알 수 없다고 쓰여있다. 그리고 아리스토 거리와 피타고라스 광장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시드 같은 고양이가 아니라 고약한 침입자가 들어온다면 어떤 동네 사람들이 먼저 알게 될까요?'하고 묻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아, 이 그림책이 이렇게도 풀이가 될 수 있구나.'했다. 갑자기 이 그림책이 무지 교훈적인 책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하나...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목적이 '더 빨리 힘을 모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건, 뭔가 개운하지 않은 면이 있다. 차라리 이 글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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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2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드에게 속은(?) 사람들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나가다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가슴이 쿵 했습니다.
아, 그렇네요. 아이들은 틀림없이 시드가 여섯끼를 먹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발견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겠지요. 그것은 욕심만 가득한
제 행동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즐거운 주말되셔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섬사이 2011-04-25 14:39   좋아요 0 | URL
재미있고 가슴 '쿵'하게 읽어줘서 제가 오히려 고마워요.
가만 보면, 아이들에게 배울 것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면서도 내가 아이보다 못하구나, 할 때가 종종 있거든요.^^

 
똥자루 굴러간다 우리 그림책 4
김윤정 글.그림 / 국민서관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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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랑 같이 책을 읽어가다보면 어떤 이유로든 깊은 인상을 남기는 책들이 있다. 그 내용이 너무 감동적이거나 웃겨서인 경우도 있지만 때론 너무 엽기적인데 그게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져서 그런 경우도 종종 있다.  

이 책은 아마 <똥벼락> 이후 가장 엽기적인 똥이야기가 아닌가 싶은데, 도서관에서 빌려온 날 이 책을 읽고는 나도 막내도, 그리고 큰애들까지도 낄낄낄 웃어댔다.  

표지를 보면 한 장군이 양손을 입가에 갖다대고는 뭐라 외치고 있는데, 분명 "똥자루 굴러간다~~"하고 제목을 외치고 있는 게 틀림없을 테고, 장군 양쪽에 있는 포졸들은 뭐가 그리 웃기는지 장군을 바라보며 웃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이 장군, 뭔가 이상하다. 손이 너무 곱상하고 가슴께까지 곱게 드리운 댕기머리는 또 뭔가.    

 

 

 

 

 

 

 

 
책을 펼치면 속표지에 강아지 한 마리가 등장한다. 눈을 감고 코를 킁킁대며 어딘가로 향하는데오른쪽 끝에 노랗게 번져나오는 냄새가 수상하다. 다시 한 장을 더 들추면 냄새는 더 진해지고 못가에 서 있는 동물들의 표정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다람쥐 한 마리는 코까지 틀어막고 있는데 아까 보았던 그 개 한 마리만 여전히 좋다며 냄새를 좇고 있다.    

 

드디어 본이야기로 들어간 첫장부터 거대 똥이 떡 하니 등장한다. 똥을 자세히 보면 콩나물이며 거뭇거뭇한 수박씨가... '아이고, 정말 적나라하게 더럽다' 하면서도 묵직하고 거대한 똥의 존재감을 무시하지 못하고 아이랑 같이 똥에 박힌 콩나물이 하나, 둘, 셋, 넷, 다섯개라며 세고 있다. 그림책이 엽기인 건지, 아니면 내가 더 엽기인 건지 헷갈리는 순간이다.  아무튼 '똥 한 번 누면 뒷간이 막히고 똥 두 번 누면 앞길이 막힌다'는 똥자루 굵은 똥자루 장군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군사들이 우연히 시댓가를 찾았다가 이 어마어마한 똥자루를 발견하고는 나름 논리적인 사고 전개과정을 통해서 '똥자루가 굵으니, 덩치가 클 것이요. 똥자루 색을 보니, 속도 튼튼하겠구나. 나라의 든든한 장군감이 분명하니, 여봐라, 똥임자를 찾아라!'며 똥자루 임자를 찾기 시작한다. 지금같으면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체포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당시의 우리 조상들은 배포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구석구석 똥임자를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찾아내긴 했는데, 이런 그 어마어마한 똥의 주인이 가슴 봉긋한 처녀였던 것이다. 대장이 아연실색하고 있는데, 이 처녀 어마어마한 똥 주인답게 야무지게 말한다.  "여자인 게 뭐 어떻습니까? 나라만 잘 지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리도 멋질까. 이만하면 똥자루 굵은 것쯤, 여자인 것쯤, 뒷간이 막히고 앞길이 막히는 것쯤 용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대장도 이 당당하고도 야무진 처녀에게 반했는지 부장군에 명하는데 정작 부하들은 데굴데굴 구르다 못해 눈물까지 질질 짜가며 웃느라 정신이 없다. 괘씸한지고!!  이 버르장머리 없는 부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하는데!!! (근데, 좀 웃기긴 웃기겠다.)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 때, 부장군 처녀는 마을 여기저기에 박을 심고 동글동글하게 박이 열리자 그 박을 이용해서 마을에 쳐들어오는 적군을 도망가게 만든다. 적군들이 겨우겨우 아무도 없는 산 중턱까지 도망가서 숨을 돌리려 할 때, 저 산 끝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처녀가 산을 흔드는 소리, '끄-응-'  저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 똥장군 처녀의 익살스런 표정을 보고 어떻게 따라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똥자루 굴러간다!"  

시퍼렇게 질린 왜군 병사들이 혼비백산 달아나는 그림은 생각보다 카타르시스 효과가 크다. 이 그림책을 읽을 즈음이 일본에 거대 쓰나미가 덮쳤을 바로 그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좀 미안하다'하면서도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꼬맹이는 옆에서 "엄마 이 사람은 똥에 깔렸어." "엄마엄마, 이 사람은 똥에 박혔어" "엄마, 이 사람은 머리에 똥 맞았어" 하는데 그림에 아주 푹 빠진 것 같았다.     

 

처녀는 적을 무찌른 공으로 장군이 되었고, 그 후로 적들이 쳐들어오는 일은 없었다나.  장군이 되어 밝게 웃고 있는 처녀의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기왕이면 데굴데굴 구르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처녀를 조롱하던 그 괘씸한 부하들이 장군이 된 처녀를 인정하고 존경하게 된 모습들을 함께 그려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너무 교훈적이라든가 아니면 너무 뻔한 결말이라든가 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나보다 한 수 위였다. 뻔하고 교훈적인 결말 대신에 예상하지 못했던 산뜻하고 매력적인 뒷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겨 놓았던 것이다.  뒷쪽 속표지에 이 똥자루 장군과 대장 사이의 스캔들을(저 새침떨며 도도하게 튕기며 돌아서는 처녀의 모습이 어쩌면 이렇게도 내마음에 쏙 드는 건지!!) 그리고 뒷표지에선 적군의 장군이 왕에게 보고하고 있는 창호지 그림자를 그려 놓았다.  "하늘에서 거대한 똥자루가!" 하고 왕에게 보고 하는 적군의 장군이 어쩐지 측은하다. 분명 왕에게 "어디서 그런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므니까!"하며 야단을 맞을 것 같은데... 

'이완 장군과 똥자루 큰 처녀'라는 강원도 설화와 '무쇠바가지'라는 설화를 한데 섞어서 새로 쓰고 그린 그림책이라고 한다.  가져다 쓴 옛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거기다가 맛깔나는 글과 유머스럽고 정감가는 그림을 더해서 아이들이 즐겁게 읽을 그림책으로 탄생시켰다는 사실이 난 무척 반갑고 신난다. 뒤숭숭한 요즈음 나와 아이들에게 웃음을 안겨다 준, 엽기적인 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것 같은 그런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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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1-04-08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너무 웃겨요.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것 같아요. 한편 엽기적이긴 하지만요.ㅎㅎㅎ

섬사이 2011-04-11 13:18   좋아요 0 | URL
저도 한참을 웃었어요.
막내에게 읽어주는데 큰녀석들까지 곁에 와 붙었다니까요.
책읽는 즐거움을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책이죠.^^

하늘바람 2011-05-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들어도 웃기네요

섬사이 2011-05-19 11:40   좋아요 0 | URL
예, 무척 웃기고 재미있어요.
태은이랑 읽어보세요. ^^
 
내가 라면을 먹을 때 모두가 친구 12
하세가와 요시후미 지음, 장지현 옮김 / 고래이야기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이 리뷰를 쓰고 있을 때, 다른 분들은 뭘하고 계실까.  올 한해동안 가까이 지냈던 연하녀는?  얼마 전 손수 뜨개질한 스웨터를 보내준 우리 엄마는..  28년만에 이사해서 아파트로 입주하신 우리 시부모님은 이제 새집에 많이 익숙해지셨을까.  고등학생 때 이유도 없이 날 얄미워하던 그 친구는 잘 살고 있을까.  중학생 때 펜팔을 하던 영국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애도 나만큼 나이를 먹었겠구나. 이 그림책을 읽고 나니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나와 연결된 사람들, 나와 연결된 세상과의 보이지 않는 고리 같은 것.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방울이는 하품을 한다.
옆에서 방울이가 하품을 할 때 
이웃집 미미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이웃집 미미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
이웃집의 이웃집 디디는 비데 단추를 누른다.
이웃집의 이웃집 디디가 비데 단추를 누를 때 
그 이웃집 유미는 바이올린을 켠다.
그 이웃집 유미가 바이올린을 켤 때

 
   

 이런 상상은 누구나 가끔 해보지 않을까.  아파트에 사는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 내 위에 어떤 사람이 자고 있고, 그 위에 또 어떤 사람이 자고 있고.. 하는 상상을 하다보면 아파트라는 공간이 참 삭막하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하지만 밤새워 공부하는 학생이 있을 수도 있고, 걱정이 많아 잠을 못 이루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랑하며 잠드는 사람, 싸우고 등돌리고 자는 사람, 악몽을 꾸는 사람, 밤낮이 바뀐 아기 때문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밤을 지새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마다 이 밤을 보내는 마음도 모습도 사연도 제각각일지도...  

   
 

이웃마을 남자아이는 야구방망이를 휘두른다. 
이웃마을 남자아이가 야구방망이를 휘두를 때
그 이웃마을 여자아이는 달걀을 깬다.
그 이웃마을 여자아이가 달걀을 깰 때
이웃나라 남자아이는 자전거를 탄다.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탈 때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여자아이는 아기를 본다.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여자아이가 아기를 볼 때
그 이웃나라 여자아이는 물을 긷는다.
그 이웃나라 여자아이가 물을 길을 때
그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남자아이는 소를 몬다.
그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소를 몰 때

 
   

컴퓨터 앞에 앉기 전 잠깐 본 TV에서 에디오피아의 커피 재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유기농 커피를 재배하는 그들은 커피 판매가의 10%도 안되는 가격에 커피를 파는데 올해는 병충해로 커피열매 대부분이 썩어버려 걱정하는 이야기였다.  내가 좋아라 하며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에디오피아의 어떤 사람은 썩어버린 커피열매에 마음을 졸이며 한숨을 쉬고 있었겠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커피콩을 볶아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지도 못하고 열매껍질로만 차를 끓여마신다는데, 이런...  너무 먼 나라 이야기라고 커피 한 잔을 너무 우습게 생각했구나.  늘 항상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커피 맛에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일지도 모르겠구나.
얼마전엔 몽고의 맨홀 속 아이들을 보기도 했다.  겨울엔 영하 40도의 추위가 예사라는 몽골에서 추위를 피하려고 유독가스와 폭발의 위험이 있는 맨홀 속으로 들어가 하루를 살아내는 아이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선 생필품들이 부족해서 좁은 땅굴을 이용해 어린 소년들이 이웃 이집트까지 가서 생필품들을 밀수해온다고 한다.  때로 땅굴이 매몰되어 목숨을 잃기도 하고, 좁은 땅굴을 오가다 보면 사고를 당하는 일도 많다는데 어린 소년들이 어른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기가 하는 일을 설명하는 것을 봤다. 
어쩌면 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맞은편 나라 여자아이는 빵을 판다.
그 맞은 편 나라 여자아이가 빵을 팔 때
그 맞은 편 나라의 산 너머 나라 남자아이는 쓰러져 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그 때
바람이 불었다.

 
   

얼마전 큰딸이 학교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올해 사랑의 열매는 전자파 차단 스티커로 나왔는데 반 아이들 중에 단 한 명도 그 스티커를 산 사람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단 한 명도?
"너라도 하나 사지 그랬어.  어려운 사람들한테는 겨울이 참 힘든 계절인데, 연말연시도 다가오는데, 하나 사지."했더니 친구들이 모두 '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다'며 아무도 사질 않아서 혼자 튀는 게 싫어 자기도 사지 않았단다.  하도 경쟁에 시달리다보니 아이들이 거칠어지고 이기적이 되어간다는 걸 느끼고는 있었지만 딸아이가 전하는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을 만나고 보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내가 아이를 잘못 키운게 아닐까, 불안할 만큼.  

이 그림책 속에서 부는 바람.  그 바람을 우리도 같이 느끼고 안아야 하는데 무엇인가가 그 바람을 막고 있는 듯하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그 때
바람이 막혔다
, 가 되어버린 느낌.  
아이들 이야기를 해서 뭐하랴.  결국 어른들을 보고 배운 것인 걸.  아이들더러 인정머리 없다, 이기적이다, 탓하기 전에 나를 돌아볼 일이다.  

섬사이, 너에겐 바람이 불어오더냐. 
저 산 너머 먼 나라에 쓰러져 있는 아이의 등을 훑고 지난 바람이 너에게도 불어오더냐. 
그림책 하나가 내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묻고 있다.  

 

*** 인용한 글은 이 그림책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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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12-1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좋죠.^^

섬사이 2009-12-13 23:09   좋아요 0 | URL
네. 반복해서 읽을수록 더 좋아지네요. ^^
 
<안녕, 영원히 기억할게!>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안녕, 영원히 기억할게!
하라다 유우코 지음, 유문조 옮김 / 살림어린이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결혼을 하고 집안 분들이 돌아가실 때마다 장례를 치르면서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더 큰 몫으로 다가왔다.  미안함, 죄책감,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세상을 떠난 사람의 어떤 눈빛, 이야기, 추억, 그리고 휑한 빈 자리.  정작 죽음을 맞은 사람은 고단한 일을 마친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죽은 사람을 미화시키는 건 죽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겨진 나를 위해서라는 것도 알았다.  

이 책은 개구장이 눈빛을 가진 검둥개 리리와 단발머리 여자 아이와의 우정 이야기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고 있던 리리는 아이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갖고 있는 목숨줄은 저마다 달라서 리리는 수명을 다하고 숨을 거둔다.  태어나던 순간부터 사랑하는 친구가 되어주었던 개의 죽음, 그 죽음을 남겨진 아이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추억하고 그리워하고 '안녕'이라는 작별인사를 건네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무력감을 아이는 잘 이겨낸 걸까.   

배경이 아예 생략되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배경만을 그린 단순화한 그림은 개와 아이의 감정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죽음을 통해 아직 남아있는 존재들의 생명을 연민한다는 것은 좀 잔인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있을 때 잘 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아이들도 그럴까?  언젠가는 우리가 모두 헤어져야 하는 날들이 온다는 걸, 누구는 떠나고 누구는 남겨지는 날이 온다는 걸, 어렴풋하게라도 알고 느끼게 될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이 리뷰를 쓰는 것도 나에겐 버겁다.  이 나이가 되어도 '죽음'이라는 주제 앞에 편안할 수 없다는 게 좀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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