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섯 번 저녁 먹는 고양이 시드 - 좋은책어린이그림책, 세계창작 03
잉가 무어 글.그림, 김난령 옮김 / 좋은책어린이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절판된 책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것도 별을 다섯 개나 찍어놓고 리뷰를 써내려가는 건, 어쩌면 잔인한 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얘기하지 않고 넘어가기는 좀 서운하다. 책을 빌려 읽고는 그 책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지는 책이 있다. 나에겐 이 책이 그런 책 중에 하나였는데, 책을 주문하려고 했다가 빨갛게 쓰여진 '절판'이라는 글자 앞에 좌절했었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빽빽하게 꽂혀있는 그림책들 사이에서 다시 이 책과 조우하고는 "너 아무래도 안되겠다. 나 따라와라."하고 한 번 더 대출했다. 사진과 리뷰로 남겨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상품검색을 했더니 중고책으로 나와있었다. 얼른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제 내 것이 된 이 책,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이럴 때도 통하는 말일까?
처음엔 '여섯 번 저녁 먹는 고양이'라는 제목에 호기심이 동했었다. 특이함은 때로 신선함을 느끼게 하니까. 표지 속의 저 새카만 고양이가 저녁을 여섯 번 먹는다는 최고의 먹성 고양이 시드다.
시드는 아리스토 거리에 산다. 1번지, 2번지, 3번지, 4번지, 5번지, 6번지에. 집이 여섯 군데라 저녁도 여섯 번 먹을 수 있고, 주인이 여섯 명이라 이름도 여섯 개, 잠 잘 곳도 여섯 군데인데다가 여섯 명의 주인이 저마다 다른 곳을 골고루 긁어주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보낸다.
하지만 그 행복이 깨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시드가 지독한 감기에 걸리자 여섯 명의 주인들이 저마다 각자 시드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간 것이다. 여섯 가지 다른 방법으로 여섯 명의 주인에게 이끌려 동물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시드는 물약을 여섯 번 먹어야 했던 것이다. 일이 이쯤에서 마무리되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수의사가 예약수첩을 확인하다가 감기에 걸린 여섯 마리 고양이가 모두 아리스토 거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여섯 명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 그러자 여섯 명의 주인들은 시드더러 '하는 일도 없이 저녁을 여섯 번이나 먹었다'며 '얌체고양이'라고 화를 낸다. 그리고는 '앞으로 시드한테 하루에 저녁을 딱 한 번만 주자고' 결의한다.
만약 이 책이 고전적인 도덕관념을 따른다면 시드가 저녁을 한 번밖에 먹지 못하고 배고파하거나, 더 심하게라면 아리스토 거리에서 쫓겨나는 걸로 마무리를 짓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들을 속이고 제 욕심을 채운 시드가 인과응보에 따른 처벌을 받는 걸로 끝난다면 그야말로 가장 단순한 교훈을 심어주는 따분한 그림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지금부터 더 빛을 발한다.
누가 뭐래도 시드는 저녁을 여섯 번 먹어야 하는 고양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속았다'라고 느끼는 건 순전히 사람들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다. 시드는 여섯 주인이 불러주는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느라고 노력해야만 했고,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안됐다. '우쭐이'이기도 하고 '돌쇠'이기도 하고, '익살이'였다가 '촐랑이'가 되어야 했고, '살랑이'이면서 '흑기사'이어야 한다는 건 내가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런 시드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 나름 시드를 보면서 행복해 했을 테니까, 시드더러 '하는 일도 없이 저녁을 여섯 번'이나 먹는 '얌체'라고 하는 건 시드 입장에선 자존심 상하고 억울한 일이다. 오히려 '이웃끼리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는 아리스토 거리 사람들이 더 문제다. 이웃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정답게 살았다면 시드가 이 집 저 집 다니며 저녁을 여섯 번 먹어야 하는 특이한 고양이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시드도 여섯 가지 이름에 걸맞게 사느라고 힘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드는 미련없이 아리스토 거리를 떠난다. 그러고는 피타고라스 광장의 1번지, 2번지, 3번지, 4번지, 5번지, 6번지에서 살기 시작한다. 시드가 새롭게 정착한 이 동네 사람들은 '광장'에 사는 사람들답게 이웃끼리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시드가 저녁을 여섯 번이나 먹는 고양이라는 걸 처음부터 모두 알았고, '시드가 저녁을 여섯 번 먹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가 떠오른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리스토 거리의 사람들은 시드를 '소유'해야 했다. 내가 이 책을 '내 것'으로 삼아 행복한 것처럼 아리스토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시드를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만 행복할 수 있고, 시드 또한 한 사람의 것이어야 마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시드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화를 내며 시드를 배척해야 했던 것 아닐까. 대조적으로 피타고라스 광장에 사는 사람들은 시드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림을 보면 내 것도 아니고 우리 것도 아니고 시드까지 전부 다 함께 '우리'라는 것에 행복해하는 따스한 느낌이다.
그렇게 이 책을 손 닿는 곳에 두고 몇 번을 뒤적이다 보니 또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아리스토 거리에는 아이들이 없다는 점. 그리고 피타고라스 광장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중에는 어느 집 창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드를 모여서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 그 그림을 비교해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우리집 꼬맹이딸 생각이 났다.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면 처음 보는 아이와도 금세 친구가 되어 논다. 나중에 "오늘 놀이터에서 만나서 재미있게 논 친구는 이름이 뭐래?"하고 물으면 "몰라"한다. "이름도 안 물어보고 그냥 놀았어?"하면 노는 데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는 듯이, 오히려 이름을 묻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아이들의 세계는 그렇다. 어른들은 친해지기 위해서는 이름과 나이는 기본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취향인지, 결혼은 했는지 안했는지, 고향이 어딘지, 심지어는 학벌이 어떻게 되고 재산 정도는 어느 정도인지 시시콜콜 다 알아야 한다. 아니, 그런 걸 다 알고 나서도 친해지기는 어렵다.
아이들 사이의 관계는 어른들 사이의 관계보다 훨씬 더 건강하게 열려있다. 아마 시드가 저녁을 여섯 번 먹는 고양이이고 그래서 저녁 때마다 여섯 집에 들러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아이들이 가장 먼저 알아냈을 것이다.
이 그림책은 나에게 관계를 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중고책으로 주문하고 배송을 기다리는 지금, 누군가 이 책을 빌려달라고 하면 난 끽 소리도 못하고 기꺼이 빌려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이 절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사람들에게 기꺼이 추천해주고 싶은 책인데 말이다.
그나저나 이 책에서 시드가 살던 거리와 광장의 이름이 왜 '아리스토'와 '피타고라스'인 걸까? 모르긴 해도 '아리스토'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따온 게 아닐까 싶은데... 왜지? 왜일까? 끙...
사족 하나,
이 책 맨 뒤에는 '어린이 친구들에게'라는 글이 있다. 이 글에는 이웃끼리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내면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겨도 알 수 없다고 쓰여있다. 그리고 아리스토 거리와 피타고라스 광장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시드 같은 고양이가 아니라 고약한 침입자가 들어온다면 어떤 동네 사람들이 먼저 알게 될까요?'하고 묻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아, 이 그림책이 이렇게도 풀이가 될 수 있구나.'했다. 갑자기 이 그림책이 무지 교훈적인 책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하나...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 목적이 '더 빨리 힘을 모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건, 뭔가 개운하지 않은 면이 있다. 차라리 이 글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