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Dear 그림책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지음, 이지원 옮김 / 사계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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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딱 맞는 어떤 사람,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텔레파시처럼 지지직 통하는 그런 사람, 결코 풀어지지 않는 운명의 끈으로 단단히 엮인 사람, 서로의 모든 것이 저절로 이해되고 절대로 나를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남겨주지 않는 사람을 꿈꾼 적도 있었다.  그러나 ‘관계’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관계’ 속에서 나는 찢기고 찢겨서 너덜거린 적도 있었고, ‘관계’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욱 깊이 외로움을 느낀 적도 있었다.(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다는 노래말도 있지 않던가.) 그런 과정 속에서 ‘관계’에 대한 모든 꿈과 환상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고, 저절로 이어지는 ‘관계’는 있을 수 없으며 서로 노력을 기울여도 자칫하면 깨질 수 있는 게 ‘관계’라는 것을 배웠다. 그건 연인관계에서도, 부부관계에서도, 친구관계나 부모자식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생 때는 아니더라도 중고등학생 때나, 뭐 대학 다닐 때라도 이런 책을 읽었더라면 시행착오를 좀 덜 겪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다면 좀 더 일찍 성숙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이나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에게 선물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에 의하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일이 아니다.  마치 만화 속 로봇들이 변신 합체하듯이 두 사람이 만나 너도 나도 아닌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내가 너를 만났다고 갑자기 다른 차원의 새로운 세상이 확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너와의 만남으로 한동안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쁠 수는 있지만, 평생을 그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가끔은 없어지는 열쇠나 가끔 막히는 자물쇠’같고 ‘드넓은 바다 위에 따로 떠있는 두 개의 섬’이며 ‘나란히 한쪽으로 나 있는 두 창문’이고, ‘모래시계의 두 그릇’이며 ‘지붕을 받치는 두 벽’이고 때로는 ‘서로 엇갈리는 낮과 밤’이고 ‘뿌리가 얽혀 나란히 자라는 서로 다른 두 나무’이기도 하고, ‘바퀴 하나에 바람이 빠지면 다른 바퀴가 멀쩡해도 달릴 수 없는 자전거의 두 바퀴’이고 ‘단단히 서로 엮인 사랑에 관한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가 되기도 할 뿐이다.  나를 버리고는 너에게 이를 수 없고, 네가 나를 사랑해서 너 자신을 버리는 순간 내가 사랑하던 대상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건 단지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뿐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그렇다.  내 속으로 낳은 아이라도 그 아이는 자주 내가 열지 못하는 꽉 막힌 자물쇠가 되고 나와는 너무나 다른 풍경을 가진 섬이기도 하며, 배터리가 떨어진 시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너에 대해 다 알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어쩌면 아직도 서로에게 줄 상처가 더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함께여서 더 쉽고 함께여서 더 어려운’ 이 관계를 버리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좀 더 현명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가족과 친구, 동료들 사이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 마음을 가다듬으며 펼쳐보고 싶은 그런 책이다.  관계에 대한 비유들이 절묘하고 초현실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도 즐겁다.  ‘초등학생이 보는 그림책’ 시리즈이지만, 초등학생 고학년에서 성인까지 두루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연륜과 경험의 깊이에 따라 울림이 다를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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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14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새로운 상상그림책 <문제가 생겼어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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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1등만 했대요 네버랜드 우리 걸작 그림책 16
노경실 지음, 김진화 그림 / 시공주니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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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는 아무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헤매고 산다고 하더라도, 애들에게는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닌가요?  아이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부모로서의 자존심 지키기나 과시욕, 혹은 열등감의 반작용이라고만 보기에는 그 속엔 뭔가 애틋한 것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항상 1등만 했던 엄마아빠의 화려하고 완벽한(하지만 날조된) 경력 때문에 ‘나는 왜 일 등을 못 하지요? 나는 우리 아빠 아들이 아닌가요?’하며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하지요. 이 책은 부모의 그런 속마음과 항상 1등만 하는 엄마아빠의 완벽한 과거경력에 대해 고민하는 아이들의 속마음을 함께 잘 담아냈습니다. 그림도 무척 재미있고 유쾌합니다. 속표지의 그림은 우주의 블랙홀이 열리는 듯, 시공간이 휘어지며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틈이 벌어진 것 같은 그림인데요, 이 책의 주인공인 현호라는 아이가 아빠의 과거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확인할 수 있는, 부모로서는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통로지요. 

현호는 받아쓰기도 1등, 여자애들에게 인기도 1등, 먹는 것도 건강도 1등, 독후감 쓰기도 1등에 알통대장이었다는 아빠의 주장이 영 미덥지 않습니다.  현호가 보아온 일상생활 속의 아빠 모습은 양말을 벗으면 냄새가 나고, 줄넘기 백 번도 못 하고 캑캑거리고, 책 읽다가 책 베고 잠들어 버리고, 똥배가 튀어나온 정반대의 모습이니까요. 그래서 현호는 아빠의 과거를 볼 수 있는 타임머신을 만듭니다. 그림책에 나온 타임머신에 필요한 재료들은 저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지 않아서 좀 아쉽네요. 이 책을 보고 타임머신 만들어 보겠다며 나설 아이들도 있을 것 같군요.

타임머신을 통해 현호는 아빠의 어린시절의 모습이 1등만 했다는 아빠의 주장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빠의 ‘뻥’이 들통이 났으니 아빠는 ‘뻥쟁이’라고 아들에게 비난받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더군요. 하지만요, 저도 아이들을 키워봐서 압니다.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보다 훨씬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답니다. 현호는 아빠의 초라한 어린시절의 모습에 오히려 안도하고 기뻐합니다.  ‘나는 우리 아빠 아들, 아빠는 진짜 진짜 우리 아빠! 아빠와 나는 똑! 꼭! 쑤욱! 찰싹! 닮았어요.’하며 기뻐합니다.  아빠와 마주서서 줄넘기를 넘는 아이 그림이 하늘색 배경으로 날아갈 듯 가볍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아빠를 그린 그림에 주목하게 됩니다. 무표정한 얼굴, 후줄근하고 헐렁한 티셔츠 차림이거나 하얀 런닝셔츠에 늘어진 트레이닝 바지 차림, 침대와 합체가 되어 누워있기도 하고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어 버리는 아빠의 모습이 참 친근하다는 게 오히려 슬퍼집니다.  아마도 아이들이 가장 많이 보는 실제 아빠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아들에겐 영웅이고 싶지만 녹록치 않은 현실과 싸우다보니 힘들고 지친 아빠, 그래서 현실 속의 영웅이 되기 어려워 아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화려하게 꾸미는 ‘뻥’의 힘을 빌려서라도 영웅이 되고 싶은 아빠, 그렇게 해서라도 아들이 자극을 받아 열심히 노력해서 현실 속의 영웅으로 자라나기를 희망하는 아빠의 모습에 부모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아빠의 ‘뻥’과 그 뻥에 상처받은 현호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아들 현호와 아빠의 품 넓은 이해심과 단단한 애정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건강하고 밝은 가족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실 속에선 아이들이 엄마아빠의 과거를 확인해볼 타임머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겠지요.  아이들이 모를 거라고, 들통 날 염려가 없다고, 아이들을 불안하고 우울하게 만들 위험이 있는 ‘뻥’을 함부로 치며 살지 말라는 게 이 책의 교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뭐든지 1등이었던 아빠는 아쉽게도 아이들에게 존경도, 사랑도 받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자, 이제 공은 우리 엄마아빠들에게 넘어왔군요. 고민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과거는 폐기처분되었으니 지금, 여기에서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아빠가 되어야 할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말입니다.  이 책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아이와 손잡고 나가 함께 줄넘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살짝 스쳐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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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아이 길벗어린이 작가앨범 10
김동성 그림, 임길택 글 / 길벗어린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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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하루도 쉬지 않고 내리는 비에게 너도 하루쯤 쉬어야 되지 않겠냐고, 해가 너무 게을러져서 큰일이라고, 서로 돌아가며 공평하게 일하라고 잔소리 좀 했습니다.  잔소리는 했어도 가만히 내다보고 있으면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은 참 고요합니다.  온 세상이 비로 흠뻑 젖고, 고운 빛깔의 우산들 속에서 사람들은 좀 더 다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몸서리치게 짙푸르던 초록빛, 쨍쨍하게 따갑던 햇빛이 그 열기를 식히고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꼭 김동성 님의 그림 같습니다. 김동성 님이 그려내는 초록과 황토빛이 감도는 갈색은 아득하고 신비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남몰래 숨겨두었던 현 하나가 ‘둥’하고 낮게 울리는 듯하고 그 찌르르한 진동에 설레게 됩니다.

<들꽃 아이>의 그림은 <엄마마중>을 닮았습니다. <엄마마중>의 마지막 그림, 초록빛 하늘에서 함박눈이 한가득 쏟아지던 장면이, 이 책의 여름풍경과 비슷하게 겹쳐옵니다. <엄마마중>에서 눈이 날리던 초록빛 하늘에 <들꽃 아이>에선 총총한 여름 별빛이 은은하게 박혀있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깊은 산골에 사는 보선이네를 찾아가는 울창한 숲길은 숨이 턱 막힐 만큼 초록이 곱습니다.  당장에라도 시원한 매미 소리, 재잘대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올 것만 같습니다. 김동성 님의 그림에서 초록은 나무와 풀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학교 창틀에, 교무실과 교실 문에, 칠판과 게시판에, 보선이의 티셔츠에, 그리고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에도 이끼처럼 피어있습니다.  그 초록이 황토빛 갈색과 어우러져 시간을 거꾸로 되돌립니다.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길어 올립니다. 

그림책 속의 사람들은 김동성 님의 황토빛 갈색이나 초록과 비슷합니다.  은은하고 수줍은 표정들입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책상에 둘러앉아 식물도감에서 꽃 이름을 찾으며 즐겁게 웃는 그림에서조차 요란스럽고 소란스러운 기운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책은 제목과 표지에서 드러나듯 고요히 ‘여자 아이’의 세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식물도감을 보며 선생님과 웃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 남자 아이는 끼어들지 못했습니다.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남자 아이의 세계는 이 그림책에서 주변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곱고 여리고 잔잔한 사람들의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는 표정에서 그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느끼게 됩니다.

글에서는 책 속 선생님의 순수한 열정이 보입니다.  다른 선생님들께 보선이가 꺾어온 꽃 이름을 물었다가 면박을 당하자 “왠지 온몸을 바늘에 찔린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책방을 뒤져 식물도감을 사다가 꽃에 대한 공부를 하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식물도감을 펴놓고 꽃 이름을 찾아보기도 하고, 급기야 어느 선생님도 찾은 적이 없었던 보선이의 집을 찾아가기도 하지요.  그런 선생님께 보선이는 진달래꽃을 시작으로 산과 들에 피어나는 온갖 꽃들을 선물합니다. 가난하고 먼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하고, 장심부름을 하느라 수업시간에 늦기도 하는 보선이지만 생활기록부에 쓰인 대로 ‘공부는 뒤떨어지나 정직하고 맡은 일을 열심히“하는 성실한 아이이고 꽃처럼 고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순수하고 고운 마음을 가진 선생님과 제자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특별하고 유난한 사건이 없는데도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손전등을 챙겨서 학교를 가야 하는 아이, 손전등에 들어갈 전지를 사느라 수업에 늦는 아이, 눈이 내리면 결석해야 하는 아이,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에서 사람보다 나무와 풀과 꽃들을 더 많이 만나는 아이를 통해서 선생님이 오히려 세상살이를 더 배웠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내 앞에 놓이게 된 것일 테고요.

이미 1997년 마흔 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임길택 선생님께서 ‘들꽃 아이’에 대해 남기신 글을 읽다가 더 가슴이 아파집니다.
“‘들꽃 아이’에 나오는 보선이도 실제 아이다.  이름 또한 그대로 썼다..... 지금 아이들이 보선이가 걸었던 길을 잃어버렸다는 게 안타까워 이 이야기를 썼다.  이런 길을 잃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꿈을 잃어버린 거나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임길택 산문집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러게요, 지금 아이들은 꽃도 나무도 풀도 볼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네요.  학원버스에 짐짝처럼 실려서 피곤하고 지친 눈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보여주고 어떤 길을 가라고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그림에서는 뿌연 유리창 너머 초록빛 하늘에서 눈이 내립니다.  마치 <엄마마중>에서처럼요. 그렇게 눈이 내리는 바깥 풍경을, 학교를 떠나야 하는 선생님이 반듯하게 정돈된 빈 교실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말도 건넬 수 없는 뒷모습입니다.  그저 곁에 서서 잃어버린 그 길을 생각하며 한숨 돌리고 싶을 뿐입니다.  애잔하고 쓸쓸한 뒷모습이지만 곁에 서면 오히려 제가 위로를 받을 것만 같습니다.  아마 쉰을 넘긴 나이를 살고 있을 보선이는 어릴 때 선생님께 드렸던 꽃 선물에 대한 보답을 이 책으로 받았겠지요.  이 책을 보고는 눈물을 쏟지 않았을까요.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저이지만, 어쩌다 가끔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나 봅니다.  참 아름다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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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낙하 미래그림책 52
데이비드 위스너 지음, 이지유 해설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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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좋아했지만, 그림 자체보다는 ‘그림을 엮어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데이비드 위스너의 그림책들을 전부 읽어보지는 못했다.  <1999년 6월 29일>이나 <허리케인>은 그 내용이 무척 궁금했는데도 건망증이 심한 나는 도서관에 가서 그의 책을 깜박 잊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읽은 그의 책은 <이상한 화요일>, <시간 상자>, 그리고 이번에 읽은 <자유 낙하>까지 딱 세 권 뿐이다. 

읽으려고 그의 그림책을 펼치면, 기기묘묘한 환상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곤 한다.  더구나 한 마디의 설명글도 허락지 않은 그의 그림책을 보고 있자면(<1999년 6월 29일>이나 <아기돼지 세 마리>엔 짧은 글이 한 줄씩 들어 있는 것도 같지만) 아주 세심하게 그림을 읽어달라는 은근한 압박이 느껴져서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게다가 워낙 그림책의 내용이 스펙터클한데다가 그림책 판형을 보자면 일반적인 그림책 사이즈인데도 불구하고 그림에서 장대한 스케일이 느껴져 마치 아이맥스 영화라도 관람하는 듯한 아찔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구석구석 그림을 관찰하고, 머리 속에서 그림책의 스토리를 구성하고, “아!”하고 감탄하기까지 하려면, 읽는 사람의 꽤 적극적인 참여와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 입장에서 글자가 없다고 읽는 수고를 덜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게 얼마나 크고 중대한 착각이었는지 깨닫고 당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자유 낙하>는 <시간 상자>보다 좀 더 읽기가 어려웠다. 그건 이 책이 <시간 상자>보다 더 복잡한 장치들을 갖고 있는데다 스토리도 소년의 뒤숭숭한(?) 꿈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 같다. 꿈이란 것이 원래 뒤죽박죽 일관성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꿈꾸는 사람 맘대로’ 차원의 세계니까 말이다. (하긴 꿈도 내 맘대로 꿔지지는 않더라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규칙과 법칙들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가 바로 꿈의 세계라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이기도 하다.  소년의 꿈을 따라가는 일이 즐거웠던 것도 ‘읽는다’는 행위를 통해 소년의 꿈에 참여함으로써 나도 그 자유를 함께 나눠가질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첫 장면에서 소년은 침대 머리맡에 스탠드 불을 켜 놓은 채로 커다란 책을 읽다가 펼친 그대로 가슴에 올려놓고 잠들어 있다.  소년이 덮고 있는 이불은 굵은 단색 체크무늬인데, 이 이불의 무늬는 그림책에서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넓은 초원, 서양 장기판, 그리고 지도의 위도와 경도선이 교차하며 만드는 사각형들로 확장되기도 한다. 

침대 옆 창문으로 커튼이 휘날릴 정도의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소년이 잠들기 전까지 읽었던 책이 지도책이었다는 것이 이 장면에서 드러난다.  지도책의 한 페이지가 뜯겨져 펄럭이며 날아가고, 소년의 이불은 어느새 널따란 초원으로 이어진다.  저 지도가 소년을 어떤 세계로 안내할까? 

책의 내용에 대해선 여기서 멈추는 게 나을 것 같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내가 보고 상상한 이야기들을 무려 세 페이지에 걸쳐 세세히 적었었는데 다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글자 없는 그림책에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어서 뚝 끊어내고 다시 쓰고 있는 중이다.

글자 없는 그림책의 묘미는 독자마다 상상의 가지들을 다양하게 뻗어갈 수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  단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그림들을 읽는다면 소년의 꿈에 즐겁게 동참할 수 있을 거라는 것뿐이다.  <시간상자>처럼 이야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드러나진 않지만 대신에 다양한 재미와 씹어 읽는 맛은 <자유 낙하>가 더 큰 것 같다.  용을 흘끔 곁눈질하는 소년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긴장감, 아직도 뭔가 할 말이 더 남은 것 같은 아쉬움을 가득 담은 채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는 하얀 고니들의 눈빛, 성곽과 이어진 용의 몸과 숲 속 나무처럼 서 있는 책들, 바위계곡의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길이 도시 건물로 변하는 것, 잠에서 깨어난 소년 주변의 일상의 사물들에서 발견하는 꿈의 질료들까지. 

이 책을 낱장으로 뜯어 길게 이어 붙여서 띠벽지처럼 만든 다음 아이 방 벽에다 붙여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아마 무척 멋있을 거고, 아이는 날마다 그림들을 보면서 상상의 이야기를 퍼 올릴 게다.  책값이 아까워서, 또 오랫동안 소장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이 책을 띠벽지로 만드는 과감한 행동까지는 못하더라도 아이에게 자주자주 펴보게 하고 싶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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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튼 -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과 배려
닥터 수스 지음, 김서정 옮김 / 대교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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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었다는데, 난 왜 그걸 깜깜 몰랐을까.  큰아이 둘은 극장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러가기엔 너무 컸고, 막내는 극장 나들이를 하기엔 너무 어려서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었나 보다.  그림책 호튼을 읽고 나니 애니메이션이 궁금해진다.

이 책 속의 착하고 익살스러울 것만 같은 표정의 코끼리 호튼을 바라보고 있자면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크고 동그란 눈에 환상적인 속눈썹은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매력이 있다. 게다가 아무리 작은 소리도 들을 줄 아는 천부적 재능은 존경스럽다.
‘잘 듣는’ 능력을 가진 아이를 난 알고 있었다.  미하엘 엔데의 책 <모모>의 주인공도 ‘진정으로 마음을 기울여 사람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난 호튼의 이야기에서 자꾸 모모를 떠올렸다. 


먼지뭉치 속 작은 인간의 아주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작은 호소에 최선을 다해 행동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호튼.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같잖은 처세술이 공감을 얻은 지 오래인 우리 사는 세상에서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라.”는 교훈이 아이들에게 잘 먹힐까?  단지 책 한 권 읽어줬다고... 좀 궁상맞은 염려를 해보게 된다.


나는 이 책을 두 가지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사회 안에서 호튼이나 다른 정글 속 동물들처럼 상대적 강자의 입장에 놓일 때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먼지뭉치 속 작은이들처럼 상대적 약자의 입장에 놓일 때도 있다.  <호튼>은 이 두 입장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아닐까.  아주 아주 작고 약하고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호튼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강자의 바람직한 모습과, 내가 아무리 작고 힘없는 사람일지라도 함께 뭉쳐 목소리를 내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마치 요즘의 촛불처럼!!!)는 사회적 약자의 바람직한 모습 말이다.  이 두 모습이 우리에게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 될 수 있다면 우리 사는 세상도 정말 행복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이 아려오는 건 그게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소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만 소통이 가능한 세상은 좋은 세상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호튼이 먼지뭉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귀를 기울였듯이, 나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먼지뭉치 속의 사람들을 인식할 수 없었던 캥거루나 원숭이들처럼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과 목소리를 나도 내 편의에 따라 무시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온 적이 많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 속의 먼지뭉치 속 작은이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좀 더 넓게 본다면 소수민족들, 제 3세계 국가들 등을 상징한다고 본다면, 내가 이 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며 “너도 호튼 같은 사람이 되어라.”고 말할 자격이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나의 경험들이 그리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배우고 자라나야 한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려면 말이다.  적어도 나보다는 소통에 능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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