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그림백과 2
재미난책보 지음, 안지연 그림 / 어린이아현(Kizdom)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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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갓 지은 밥에 뜨끈한 국물이 좋아졌다.  나이를 먹으니 밥 좋은 줄을 알게 된 것 같다.  결혼을 해서 주부가 되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고나서야 하루 세끼의 밥을 챙기는 일의 고단함을 알았다.   결혼 전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앞에 앉아 맛있게 먹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던 것이 얼마나 호사였는지도 내 살림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살림을 하는 주부들은 “남이 차려주는 밥이 가장 맛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아무리 소박하고 단출한 밥상이라도 그 안에는 차린 이의 심신의 노고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 심신의 노고가 쏙 빠진 밥을 먹는 것이 그만큼 맛있고 즐겁다는 표현이다.  ‘밥상을 함께 나눈다’는 말의 그 정답고 살가운 의미도 어려서는 몰랐던 것들이다.

그러나 먹을거리가 풍족해진 요즘엔 밥상 안에 담긴 따뜻한 정성들을 살피기가 더욱 어렵다.  대형마트를 가득 채운 다양한 먹거리들은 수요와 공급의 시장논리에 따라 상품으로서의 가치로만 평가되고 바코드를 찍어대고 돈을 지불하면 간단히 내 손에 들어오는 소비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먹을 것이 귀한 것인 줄을 모른다.   먹을 것을 귀하게 여기는 건, 단지 그게 내 입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와 작용하는 물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내 밥상에 오르기까지 그 안에 들어있는 정성과 노고를 생각해서이고 내 밥상의 먹을 것이 된 식물들과 짐승의 생명의 가치를 생각해서가 아닐까. 

이 책에 ‘따뜻한’이라는 꾸밈말이 붙은 것은 우리가 늘 먹는 ‘밥’을 이야기하면서 사람과 그 사는 모습을 살짝살짝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는 아기의 그림이 따뜻하고, 밥상 하나에 들어있는 사람들의 수고가 느껴져 갑자기 밥 한 공기가 정겹고 고마워지기도 한다.  아이들은 어렴풋하게라도 농부들의 수고는 물론이고 밥상을 차리기 위해 시장에 가서 찬거리를 사와 그걸 ‘다듬고, 데치고, 무치고, 삶고, 부치고, 굽고, 끓여서’ 반찬을 만드는 번거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누군가, 그리고 먹은 뒤에는 설거지를 해야 하는 누군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이 이야기 한 ‘먹을 것을 나누면 정도 오가’게 되는 그 마법의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군가가 만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성과 노고를 먹는 일이니 사람 사이에 어찌 정이 흐르지 않을 수 있을까.

‘날마다 맛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에요.’라고 끝을 맺는 이 책이 세상에 나와준 게 어쩐지 참 고맙다.  ‘교육’의 냄새가 너무 강하게 나는 지식전달용 그림책이 넘쳐나고 있는데 ‘백과’라는 타이틀을 달고 옷, 잠, 밥, 집, 책과 같은 우리 일상의 당연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성찰을 아이 수준에 맞게 보여줘서.  그 따뜻함을 책의 둥근 모서리로도 느낄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하루 세끼 밥 차리고 먹는 일이 귀찮아 인간도 광합성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툴툴거리던 나도 정성이 느껴지는 밥상을 차려봐야겠다는 반성인지 작심인지를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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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처녀의 사랑 옛이야기 그림책 7
강숙인 글, 김종민 그림 / 사계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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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속의 「김현감호 설화」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펴낸 책이다.  삼국유사를 읽어보지 않았어도 어디선가 들은 듯 친숙하게 여겨지는 이야기다.  신라 원성왕 때 김 현이라는 청년과 어여쁜 아가씨로 둔갑한 호랑이가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데, 구미호 이야기만큼이나 안타깝고 비극적인 결말이다.  아니다.  구미호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노력하다가 실패했을 뿐이지만, 이 호랑이 처녀는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게 되니 구미호보다 더 기구하고 슬픈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재빨리 자기 잇속을 챙기는 게 미덕이 되어버린 요즘의 현실에서 자기를 희생해서 세 오라비를 구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입신양명을 도우려는 이 호랑이 처녀의 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성의 희생이 본질적이고 운명적이라는 전통적 여성관을 보여주고 있는 옛이야기들은 폐기처분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바리데기나 심청이 같은 옛이야기 속 인물들도 함께 지워버려야 하는 걸까.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모든 것을 끌어안는 여성성을 부정한다면 그 대안으로 우리는 어떤 여성성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걸까. 

옛이야기들 속에 나오는 여성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하지만 무던히 참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난관을 이겨내고 가족과 연인을 지켜내는 여성성에는 간단히 폐기처분하기에는 어려운 위대한 힘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그 힘은 여성이라서 본질적이며 운명적으로 타고난 게 아니라 여성이 능동적으로 선택해서 발휘하는 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런 여성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희생적인 숭고한 여성성을 너무 당연하거나 너무 하찮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는 우리 시대의 시선이 아닐까. 

책을 덮으며 이 ‘호랑이 처녀의 사랑’을 현대 버전으로 바꾼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해졌다.  세 마리의 오라비 호랑이들은 김 현을 잡아먹으려고 하기 보다는 여동생을 김현에게 시집보낸 뒤 자기들이 인간 세상에 나아가 적응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요즘의 아이들은 왜 호랑이 처녀가 세 오라비의 잘못을 대신해 벌을 받아야 하느냐며 따지고 들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아니, 호랑이인 세 오라비가 인간인 김 현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건 본능인데 왜 그게 벌을 받을 만큼 큰 잘못이냐는 것부터 따지고 들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화려하고 밝은 색채의 그림은 ‘슬프도록 아름다운’이라는 표현을 떠오르게 했다.  그림이 밝고 화려할수록 호랑이 처녀의 죽음은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밝고 화려한 세상과 비극적인 호랑이 처녀의 처지가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인 것 같다.  호랑이 처녀의 치켜 올라간 눈매와 옅은 눈동자 빛도 인상적이다.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그림 구석구석을 살피고 (곳곳에 놓인 작은 불상과 탑, 그리고 새, 뱀, 토끼, 도마뱀 같은 동물들, 화려한 꽃의 빛깔들...) 감상하는 것으로도 큰 즐거움을 느꼈다. 

그나저나 호랑이 처녀의 죽음을 기려 지은 호원사라는 절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지금은 그 절터만 남아있는데, 그것도 사유지가 되어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불쌍한 호랑이 처녀의 넋은 어쩌나, 하며 잠시 걱정하다가 갑자기 이 그림책이 종이로 지은 작은 호원사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며 세상에 아름다운 가치를 심어온 모든 여성들에 대한 호원사, 아니 여원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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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섬에서 생긴 일 Dear 그림책
찰스 키핑 글 그림, 서애경 옮김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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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키핑의 책은 처음이었다.  그림책답지 않은 낯선 분위기 때문에 좀 곤혹스러웠다.  아이들이 선호할만한 그림도 아니고 내용 역시 뚜렷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괴기스러운 느낌의 사람들, 그림책 주제로서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도시개발 문제, 그렇다고 개발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유보된 듯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으로 느껴지는 결말, 이걸 억지스러운 의도적 오류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소화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었던 것이다.

몇 번 반복해서 그림책을 읽다보니 어느새 ‘개발’보다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샛강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낙원섬이라는 고향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 채소가게 새러, 정육점 주인 버티, 생선 장수 퍼시, 빵집 베티, 습지에 사는 바르다 할아버지와 낡은 짐배에서 사는 벌리 할머니, 그리고 애덤을 비롯한 아이들, 낙원섬을 가로지르는 유료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한 시의원들과 스타 게리 밴디노즈, 그 밖의 다양한 주변 인물들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개발’은 그들에게 벌어진 공통의 사건이고 이슈였지만 각자에게 전해지는 개발의 의미는 그 양과 질이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환경개선과 개발에 따른 수익 창출에 더 큰 가치를 두었을 것이고, 시의원 같은 사람들은 가시적인 성과와 그에 따른 자기만족, 그리고 ‘돈궤에 돈을 쓸어 담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타 게리 밴디노즈와 주변 인물들에게는 고속도로 건설이 그저 하나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바르다 할아버지와 벌리 할머니에게는 한가롭게 옛일을 추억할 수 있는 자기만의 평화스러운 공간을 빼앗기는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애덤을 비롯한 아이들에게도 섬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고속도로 건설은 익숙한 놀이 공간을 잃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슈퍼마켓의 냉장식품 코너에서 일하게 된 것에 쉽게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고(그러나 정말 만족했을까는 의문이다. 이 그림책에서 냉장식품 코너에 서 있는 새러와 버티, 퍼시, 베티의 표정은 점방거리 가게에 있을 때의 얼굴에 비해 너무 흐릿하고 무표정하다.), 어떤 사람들은 완공된 고속도로를 보고 ‘자부심에 차서’ 만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르다 할아버지와 벌리 할머니와 애덤 같은 아이들은 개발의 손이 닿지 않는 버려진 땅에 자기만의 안락한 터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작가는 ‘결과를 놓고 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뭔가 하나씩은 얻은 셈이 되었습니다. (.....) 어쨌건 낙원섬은 관계된 사람들 모두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개발과 발전을 이룬 낙원섬의 모습보다 아이들이 습지에서 새들과 함께 모여 서있는 마지막 장면이 더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느껴지도록 그린 것은, 찰스 키핑이라는 이 작가가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안 그런 척 하면서 은근히 급속한 도시화와 개발을 꼬집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낙원섬의 모습은 나와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온갖 문명의 이익을 누리고 살아가는 처지이면서도(고속도로가 건설되어 개발이익을 얻는 낙원섬처럼) 마음 속 어딘가에선 바르다 할아버지와 벌리 할머니, 그리고 아이들이 습지에 담장을 두르고 자기만의 아늑한 공간을 만들었듯이 복잡한 격식과 도시적인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나만의 공간으로 숨어들고 싶은 그런 바람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강 위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이라니...  어쩌면 작가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가려진 습지를 찾아가라고, 그래서 문명과 발전이라는 손톱에 할퀴어져 만신창이가 된 우리 자신의 인간미를 되찾으라고 말하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고속도로 완공식에 몰려든 사람들이 잔뜩 들고 나온 것처럼 피켓에 적어 높이 들어야 하는 말들이 아니라, 흑과 백(버니 블랙과 위니 화이트) 또는 남과 북(SOUTHSIDE와 NORTHSIDE)으로 나뉘어져 등 돌리거나 주먹다짐으로 해야 하는 말들이 아니라, 함께 가까이 둘러앉아 소시지와 감자를 불에 구워먹으며 무성한 습지에서 나누는 것 같은 말이어야 한다는 것도. (내가 듣는 수많은 말들 중에 마음속까지 전달되는 말은 얼마나 되었었나.)

어려운 그림책이다.  아직도 이 책에는 내가 찾아서 잘 씹어 삼켜야 할 것들이 더 남아있는 것만 같다.




***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으니 몇 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의원들이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에서 (늘 그렇듯이, 베니와 위니는 기권했습니다.)라는 글이 나온다.  여기서 베니는 버니의 오자다.  처음 이 그림책을 읽을 때, ‘베니는 누구지?’ 하고 한참 찾았었다. 혹시 이 그림책을 읽으며 아이들이 나처럼 베니를 찾는 일이 없도록 다음에 책을 찍어낼 때에는 바로잡아 주셨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책인데, 오자 때문에 더 헤매야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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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아주 큰 고구마
아카바 수에키치 지음, 양미화 옮김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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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충격적인(?) 그림에 놀랐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뭐 이렇게 허술한 그림이 다 있어? 싶어 기막혔기 때문이다.  유난히 그림에 재주가 없는 아들 녀석은 이 책의 그림을 보고는 이렇게 못 그린 그림도 책이 되어 나올 수 있다는 걸 신기하게 여기며 좋아했었다.  아마도 끈끈한 동지의식 내지는 ‘나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다’는 난데없는 자신감을 잠시 느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평소에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책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끼던 나도 아무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이 허술하고 엉성한 그림이 그려진 책 앞에서 무장해제를 당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앉은 자리에서 그림책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아무 거부감 없이 읽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고도 모자라 도서관에서 책을 두 번이나 대출받을 리가 없으니까.  완벽하다 싶을 만큼 잘 그려진 그림들, 그림 작가의 정성과 개성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그림들 앞에서 그동안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검은 윤곽선으로 삐뚤빼뚤 엉성한, 도가 지나치다 싶게 단순화한 이 책의 그림들은 “그냥 나를 즐겨봐!”하며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편해진다.  엉성하게 그려진 이 그림책 속 선생님과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이 책이 좋았던 게 단지 엉성하고 재밌고 편안한 그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간결하고 짧은 문장, 비가 오는 바람에 고구마를 캐러가지 못하게 된 유치원 아이들이 펼치는 상상들도 내 눈을 사로잡았다.  아이들이 그린 거대한 고구마 그림을 놓고(고구마 그림만으로 14쪽의 지면이 할애될 만큼) “이렇게 큰 고구마 어떻게 캐지?”하며 아이들이 상상의 꼬리를 이어가게 만드는 유치원 선생님도 매력적이고(그림만으로 선생님의 매력을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거대한 고구마가 ‘고구마 우주선’이 되기까지의 상상의 과정들과 아이들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놀이를 꾸려가는 모습, 그리고 변신을 거듭하는 고구마의 모습을 흐뭇하게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그림책이 바로 이런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책 앞에서 긴장을 풀고 무장해제 되어 느슨하고 편안한 기분으로 낄낄거렸듯이 아이들도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도, 딱딱한 교훈이나 가르침도, 모두 던져버린 책을 바라는 게 아닐까.  아이들을 가볍게 동동 떠있는 알록달록 고운 빛깔의 풍선처럼 만들어 줄 이런 책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하고 엉성한 그림들과 거침없이 쭉쭉 시원하게 뻗어가는 고구마 상상을 보며 나도 자유로운 해방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책 뒷면에 적힌 작가 소개글을 찾아 읽다가 이 책이 ‘이찌무라 하사꼬’라는 사람이 낸 ‘쯔루마끼 유치원 활동 보고’를 기초로 만든 그림책이라는 글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쯔루마끼라는 유치원에서는 이런 식의 활동을 실제로 했었다는 뜻일까?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엉성한 그림을 그린 아까바 스에끼찌라는 작가가 국제 안데르센 상을 비롯해 꽤 많은 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 작가의 그림 6천여 점이 ‘찌히로’라는 미술관에 기증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그림책의 엉성한 그림은 뛰어난 작가의 엄청난 내공이 담긴 그림으로 밝혀진 셈이다.  게다가 이 그림책이 일본에서 30년이 넘게 아이들의 사랑을 꾸준하게 받아온 그림책이라니, 겉으로는 허술해 보일지언정 결코 만만한 그림책이 아니다.  아무래도 쉽게 아무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그림책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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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행진 - 야누시 코르차크 양철북 인물 이야기 1
강무홍 지음, 최혜영 그림 / 양철북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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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름, 야누슈 코르착.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그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폴란드 고아들의 아버지이며 어린이 인권의 주창자, 의사이자 훌륭한 교육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타이틀은 그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삶은 눈에 보이는 업적보다도 ‘사랑한다.’라는 말이 가진 의미, 그 거대함과 감당키 어려운 무게감을 온몸과 마음으로 고스란히 받아 안은 그 품의 넓이와 깊이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누슈 코르착은 의사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당시의 배고프고 상처 받은 고아들의 곁으로 떠나 아이들 마음속에 인간에 대한 믿음과 자존감, 그리고 사랑을 심어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게토 지역으로 쫓겨나게 된 그와 아이들은 두려움과 공포, 배고픔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보듬으며 어려움을 견뎌가지요.  특히 그는 몸소 구걸을 하면서까지 아이들의 배고픔을 덜어주려 했고, 어린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음악회를 열면서 아이들의 마음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지워주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에 의해 게토의 아동시설마저 폐쇄되고 아이들이 가스실로 이송되어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그는 아이들에게 가장 깨끗한 옷을 입히고 숲을 상징하는 초록 깃발을 높이 들게 하고는 ‘여름 휴가’를 가는 거라며 200여 명의 아이들과 ‘천사들의 행진’을 시작합니다. 

야누슈 코르착은 가스실로 향하는 그 죽음의 기차에 오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훌륭함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를 피신시키려 했으니까요.  기차에 오르는 마지막 순간에는 독일군 사령관으로부터 석방 허가까지 받았지만 ‘그는 마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아이들과 함께 기차에 올랐습니다.’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순교를 앞두고는 깊은 고뇌에 빠져 순교의 길을 포기하려고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만큼 죽음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었을 때, 너무나 힘든 일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할 합리화의 근거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아이들과 마지막을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행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진정한 아버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가 사회복지 사업가나 교육자이기만 했다면 기차에 오르지 않아도 괜찮았을 겁니다.  복지사업 대상자는 그 아이들 말고도 많았을 것이고, 교육을 받아야 할 아이들도 많았을 테니까요.  그런 시각에서라면 그의 죽음은 막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는 아버지였습니다.  그것도 믿음직스럽고 사랑 깊은 아버지였지요.  아버지는 자식들을 고통 속에 버려두고 혼자서만 살겠다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법입니다. 아버지로서는 그럴 경우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차라리 아이와 함께 죽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사회사업가나 교육자가 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더욱 위대한 일이라는 생각에 숙연해졌습니다. 덧붙여 야누슈 코르착과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운명을 같이한 ‘고아들의 어머니 스테파니아’의 삶과 죽음도 야누슈 코르착 못지않게 훌륭하고 위대했음을 새롭게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사기법’이라는 어려운 방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이 책의 글과 참 잘 어울립니다.  당시의 어둡고 짓눌린 분위기는 물론이고 하얗게 빛나는 커다란 나무 아래서 야누슈 코르착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것까지도 따뜻한 배경색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외국작가의 글과 그림인 줄 알았다가 우리 작가의 것이라는 걸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답니다.  그만큼 글과 그림이 책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잘 어울렸다는 뜻이겠지요.  아이들에게 보충해서 설명해줄 수 있도록 그림책 뒤편에 야누슈 코르착에 대한 설명글과 자료 사진들을 따로 실어놓은 것도 무척 마음에 듭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야누슈 코르착이 아이들과 ‘천사들의 행진’을 할 때 ‘숲을 상징하는 초록 깃발’을 들었다는 글과는 달리 그림에선 유태인을 상징하는 별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다는 점이에요.  아이들이 읽는 책이고 글과 그림이 함께 중요한 장르인 그림책이니만큼 사소한 것에도 세밀한 주의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라도 바로 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이 이 출판사의 인물이야기 시리즈 중 첫 번째 책인데 그 첫 걸음이 묵직하고 참신해서 기대가 됩니다.  소위 말하는 기존의 ‘위인전’류를 버전만 바꾸어 찍어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훌륭한 인물 이야기를 잘 어울리는 좋은 그림과 함께 소개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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