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
임현정 지음 / 페이스메이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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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날 우연히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알게 된 피아니스트 임현정 님. 아빠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음악에 관심이 있거든. 음악에 관련된 책들도 가끔 보고, 음악에 관련된 콘텐츠도 가끔 보고 듣고, 물론 음악 자체도 즐겨 듣고하기야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으려나.

그런데 아빠는 애석하게도 음악을 평가하는 귀는 가지고 있지 못했어. 피아니스트들이 치는 음악을 들어봐도 정확히 차이점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임현정 님이 치는 피아노 연주는 한번만 봐도 한번만 들어도 차이가 확 나더구나. 힘이 느껴지고, 속도감이 느껴졌어. 그리고 음악에 취해서 연주하는 모습 또한 좋았단다.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단다. 처음 우연히 보고 난 다음 임현정 님의 연주 모습을 여럿 찾아보았단다. 여성 피아니스트라고 하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연주하는 경우도 많은데, 임현정 님은 대부분 블랙의 편안해 보이는 의상을 입으셨는데 긴 검은 머리와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았어.

혹시나 하고 인터넷 서점에서 임현정 님을 검색해 보았더니 책도 내셨구나. 그 중에 최근에 출간된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라는 책을 읽었단다. 지은이도 이야기한 것처럼 베토벤에 대한 책들은 너무 많아서, 누군가는 또 베토벤이냐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임현정 님은 자칭 베토벤 스토커라고 할 정도로 베토벤에 푹 빠져 사시는 임현정 님께서 음악가에 대한 책을 쓴다면 가장 먼저가 베토벤인 것은 당연했을 거야. 특히 임현정 님은 24살 때 유명 음악사의 제안을 받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다 외워서 녹음을 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 앨범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빌보드 클래식 종합 차트 1위를 했다고 했어. 이 내용을 보니 어렴풋이 기억나는구나. 우리나라 사람 중에 빌보드 차트 1위를 했던 클래식 연주자가 있다는 소식. 그 분이 임현정 님이었구나.

이 책을 읽다 보니, 처음 프랑스로 유학을 간 지 20년 정도 되었다고 했어. 스무 살에 갔다고 해도 그럼 벌써 마흔이 넘었나? 아빠가 본 영상에서는 꽤 젊어 보였는데이래서 알아보니 프랑스 유학을 열네 살에 갔다고 하는구나. 그것도 혼자서중학교 1학년 때될 사람들은 떡잎부터 다르다더니이 책을 읽고 나서 임현정 님이 쓰신 책을 한 권 더 샀어. 그 책은 유럽에서 임현정 님께서 프랑스어로 출간한 책을 다른 번역가가 우리말로 옮긴 <침묵의 소리>라는 책이란다. 그 책에서는 임현정 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고 하는데, 임현정 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그 책을 읽고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자꾸나. 그 책도 기대되는구나.

1.

임현정 님께서 베토벤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베토벤 음악을 좀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 베토벤의 삶에 대해서 알게 되었는데, 그러나 베토벤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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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베토벤의 곡을 연주하는 일은 단지 음악 작품을 연주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방면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우리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려는 시도다. 베토벤의 삶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인생을 조명하는 것이 음악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감화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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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임현정 님이 연주하는 베토벤의 곡이 너무 빠르다는 평을 받는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임현정 님은 베토벤의 악보대로 연주한다고 하셨어. 너희들은 피아노를 칠 줄 아니 메트로놈도 아빠보다 더 잘 알잖아. 임현정 님께서 이야기하기를, 베토벤의 악보에 적혀 있는 메트로놈의 속도에 맞춰 연주를 한 것뿐이라고 하더구나. 최근에 많은 연주자들의 베토벤 연주는 원래 메트로놈의 속도보다 느리게 연주한다고 하셨어. 심지어 어떤 음악가는 베토벤 악보에 적혀 있는 메트로놈의 숫자가 실수로 잘못 적힌 것이라는 하는 이도 있다고 했어. 아빠는 임현정 님이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 베토벤의 음악이 더 듣기 좋았단다. 힘이 있고, 속도감이 있고, 마치 락을 듣는 기분이었어.

음악가는 어떤 연주를 해야 할까? 남들이 듣기 좋아하는 음악을 해야 할까? 자신만의 스타일을 연주해야 할까? 연주자마다 추구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임연정 님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연주자였어. 고전음악가들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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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억제하고 나보다 남의 시선을 우선시하면서 연주하는 연주자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좋겠다. 고전 음악가라고 불리는 그들이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이유는 틀을 벗어난 혁신적인 정신을 음악에 녹여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이 세월을 관통해 우리에게까지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치의 위선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하는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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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에 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구나. 임현정 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미 베토벤에 관한 좋은 평전들이 많이 있으니까 말이야. 이 책은 피아니스트 임현정 님께서 베토벤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고, 음악을 사랑하는 임현정 님이 조곤조곤 들려주는 음악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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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음악이야말로 표현이 자유로운 언어다. 사회가 문학을 검열하고 억압했을 때 마지막까지 자유롭게 메시지를 던질 수 있었던 도구는 바로 음악이었다. 위대한 음악가들의 연주는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누가 연주하는지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다. 그들은 기계처럼 악보대로 연주하는 수준을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 곡을 재창조한다. 이그나츠 프리드만이 연주하기 시작하면 즉시 그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나의 전폭적인 찬탄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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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화제가 되었던 임현정 님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 전집을 검색해 보았더니 절판되었더구나. 안타깝네.

PS:

책의 첫 문장: 처음 베토벤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보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미 베토벤에 관한 훌륭한 평전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의 끝 문장: 그는 앞으로도 영원히 내 인생의 롤모델이자 큰 영감으로 남을 것이다.


베토벤 역시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찰나의 순간 듣고 끝나는 무언가가 아닌, 영원히 신화처럼 남을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작품에 일일이 작품 번호를 매기고 엄격하게 관리했다. 작품 번호를 붙이지 않은 곡도 있지만 심혈을 기울여 애착이 가는 작품에는 꼭 작품 번호를 붙여 정식으로 출판했다. - P62

침묵은 자신의 마음이다. 그 마음 안에 불필요한 생각과 감정이 가득 차 있다면 이어질 음악이 온전하게 느껴질 리 없다. 그래서 침묵의 순간에는 고요함과 평온함을 유지해야 하며, 그 깊은 안정감에서부터 에너지를 일으켜야만 모든 격한 감정들을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 - P64

누구나 남들은 모르는 자신만의 약점이나 트라우마가 한두 가지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강점으로 승화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태도에 달려 있다. 현재 자신의 사정이 너무 불리하다고 해서 미래의 가능성마저 닫아버려서는 안 된다. 과거는 이미 끝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현재보다 더 중요한 시간은 없다. 과거의 시간에 매몰되어 절망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미래를 바꿀 현재의 선택이 더 중요하다. - P88

젊음이 가지는 눈부신 활력과 무모함은 그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장년의 지혜와 깊이 있는 열정은 장년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간혹 젊은 음악가들이 왜 벌써부터 하얀 머리가 난 철학가처럼 심오한 분위기를 풍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지나간 젊음은 다시 오지 않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이 20대 때 작곡했던 초기 피아노 소나타의 열정과 활기를 그대로 표현해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 P109

음악에서 말하는 템포는 속도가 아닌 ‘시간’을 뜻한다. 이탈리아어로 시간은 템포(tempo), 영어로는 타임(time), 프랑스어로는 떵(temps)인데, 굳이 여러 나라 언어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 모든 단어들이 라틴어 ‘템푸스(tempus)’에서 유래된 것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여기서 ‘템(tem)’은 무언가를 자른다는 뜻으로, 즉 템푸스는 ‘시간을 자른다.’ ‘시간을 나눈다.’라는 뜻이라고 보면 되겠다. 절을 영어로 ‘템플(temple)’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자른다는 뜻의 ‘템’에서 유래되었다. 속세에서 떨어져 있다는 뜻에서 템플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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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2-01-07 09: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임현정님이 유튜브 채널에서 이 책을 함께 읽으며 독자들과 대화하기도 하세요. 자유롭게 대화하면서 즉흥적으로 관련 곡을 연주해주기도 하시고요 ㅎㅎ

bookholic 2022-01-07 18:38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영상을 찾아서 보도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유니와책친구들 2022-01-07 0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아빠에게 이런 편지를 받는 자녀분들운 넘 행복할 것 같아요!

bookholic 2022-01-07 18:39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몇몇분께는 말씀드렸는데, 아이들이 이 편지의 존재를 아직 모릅니다 ㅎㅎ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mini74 2022-02-10 1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토벤의 보은인가요 ㅎㅎ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bookholic 2022-02-12 05:04   좋아요 1 | URL
ㅎㅎ 고맙습니다.. 오늘은 베토벤의 고마움을 느끼며 베토벤의 음악을 들어봐야겠어요...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새파랑 2022-02-10 1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이번달도 당선 축하드려요~!!

bookholic 2022-02-12 05:05   좋아요 2 | URL
네, 고맙습니다~~~
늘 변변치 않은 글에 ˝좋아요˝ 버튼 눌러주신 덕입니다 ㅎㅎ
즐거운 주말 되시고요~~ 이번주말도 책과 함께~~

이하라 2022-02-10 1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축하드립니다^^

bookholic 2022-02-12 05:05   좋아요 1 | URL
늘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뜻하고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서니데이 2022-02-10 2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bookholic 2022-02-12 05:0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scott 2022-02-10 23: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북홀릭님에게 임현정님이 진짜로 선물을 주셨네요!
아들과 딸에게 비밀로 😊

bookholic 2022-02-12 05:09   좋아요 2 | URL
ㅎㅎ 그렇게 되었네요..
책 읽을 때 책 제목도 유심히 봐야겠어요~~
임현정 님 SNS에 가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어요...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러블리땡 2022-02-11 0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ookholic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 즐거운 주말 되세요 ^^

bookholic 2022-02-12 05:13   좋아요 1 | URL
러블리땡 님, 고맙습니다~~
좋은 책과 함께 즐거운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thkang1001 2022-02-11 0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ookholic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bookholic 2022-02-12 05:14   좋아요 1 | URL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따뜻하고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강나루 2022-02-11 14: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ookholic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 축하해요^^

bookholic 2022-02-12 05:16   좋아요 2 | URL
강나루 님, 늘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시고요~~

thkang1001 2022-02-12 0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ookholic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41-42)

부르주아(bourgeois)는 프랑스어로 성안에 사는 사람들을 뜻해요. 여기서 부르(bourg)는 성을 의미합니다. 유럽에는 스트라스부르, 함부르크, 잘츠부르크처럼 부르(bourg), 혹은 부르크(burg)로 끝나는 도시 이름이 많아요. 성벽을 둘러치면서 도시를 형성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중세 후기에 상업 활동으로 부를 쌓은 평민들이 주로 성안에서 살았어요. 이 때문에 성공한 평민들을 성한에 사는 사람, 즉 부르주아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89)

한편 테르 뷔르제 광장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지속됩니다. 프랑스어로 증원 거래소를 북스(Bourse)라 하고, 독일어로는 뵈르제(Borse)라 하는데요. 이게 다 여관 테르 뷔르제(Ter Buerse)를 어원으로 삼아요. 영어로도 증권 거래소는 원래 부어스(Burse)로 불렸는데 18세기에 국가로부터 왕립 거래소라는 명칭을 부여받아 이름을 바꾸었죠.


(135)

프랑스 동부에 닿아 있는 부르고뉴 공국은 1363년부터 1482년까지 약 120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15세기 르네상스라는 결정적 시기에 유럽 한복판에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그리고 부르고뉴 공국이 있었던 120년간은 미술사에 대단한 자취를 남겼죠. 앞으로 펼쳐질 북유럽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거든요.


(243)

옛날에는 사회 변화나 유행의 속도가 지금보다 훨씬 느렸으니 30년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 정도 변화는 격변이라고 할 수 있죠. 인물이든 사물이든 정확히 재현해낸 얀 반 에이크 그림이 여러 가지 부분에서 이전에 비해 진보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얀 반 에이크가 등장하는 1420년대에서 1430년대에 북유럽에서 그려진 그림들을 아르스 노바(Ars nova) , ‘새로운 미술이라 하는 거겠지요. 도시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새로운 소비 문화가 만들어졌고, 상인과 장인 등 제3신분이 등장해 시민사회가 형성되었죠. 이 같은 일련의 변화는 새롭고 정확한 미술이 나오는 데 중요한 시대 배경이 되었습니다.


(542)

요즘 화가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화가들이 쓰는 재료와 표현 기법에 큰 관심을 기울일 겁니다.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 어떤 재료를 썼는지는 간과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재료를 통해서 미술을 보면 달리 보이는 부분들이 많아요. 베네치아 회화는 유화를 캔버스에 그렸기 때문에 색채가 더욱 살아나고 표현도 더 다채로워졌으니까요.

이렇게 색채는 베네치아 회화의 핵심 요소로 떠오릅니다.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색채가 주목받는 시기가 온 겁니다. 특히 조반니 벨리니는 15세기 후반부터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며 베네치아의 화려한 색채 표현을 이끌어나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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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 저런, 월턴의 생애, 진심으로 축복을 기원합니다. 1840년에 출판된 책이 100년 넘게 이렇게 완벽한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마구리를 거칠게 재단한, 너무나 아름답고 감미로운 책이에요. 1841년에 이 책에다 이름을 남긴 윌리엄 T. 고던이 너무나 애처로워요. 얼마나 많은 싸구려 후손을 거쳐왔겠어요. 어쩌다가 당신한테 거저 팔리기까지 말이에요. 세상에, 그 책이 거쳐온 그들의 서재들을 맨발로 달려보고 싶네요.


(83)

마침내 제가 (소설을 싫어하는 이 제가) 제인 오스틴에 착수하여 오만과 편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소식에 즐거워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제 책으로 구해주실 때까지 도서관에 돌려주지 않으렵니다.


(88)

저는 봄마다 책을 정리해서 다시 읽지 않을 책들은 못 입는 옷을 버리듯이 내버려요. 모두들 큰 충격을 받지요. 제 친구들은 책이라면 별나게 구는 사람들이거든요. 이 친구들은 베스트셀러는 뭐든 다 가져다가 최대한 한 빠른 속도로 끝내버려요. 건너뛰는 데가 많을 거다, 하는 게 생각이죠. 그러고는 뭐든 두 번 다시 읽지 않으니 1년쯤 지나면 한마디도 기억하지 못하지요. 그러는 사람들이 정작 제가 책 한 권 쓰레기통에 던지거나 누구한테 주는 걸 보면 펄펄 뛰는 거예요. 그 친구들 주장은 이래요. 책을 사면 읽고서 책꽂이에 꽂아둬. 평생 다시 펼쳐보는 일이 없을지언정 내버리면 안 돼! 양장 제본한 책이라면 더욱더! 왜 안된다는 거죠? 저 개인적으로는 나쁜 책보다 신성을 모독하는 것은 없다. 이런 생각이에요. 아니, 그냥 범용한 수준의 책이라도 마찬가지죠.


(101)

기꺼이 브루클린 다저스를 응원하지요. 그 보답으로 스퍼스(문외한한테는 토튼햄 핫스퍼스 풋볼 클럽이죠)에 응원을 보태준다면 말입니다. 현재 리그에서 꼴찌 다음가는 팀입니다. 하지만 시즌은 다음 4월까지니까 이 궁지에서 빠져 나올 시간을 충분하다고 봐야겠죠.


(144)

때때로 제가 당신을 아주 질투했다는 얘기도 이젠 할 수 있겠네요. 프랭크는 당신 편지를 정말 좋아했고, 당신 편지들은 어딘가 그이의 유머 감각과 아주 닮았거든요. 그이는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저는 언제가 자기 권리를 위해 맞서는 아일랜드 사람이었어요. 그이가 너무나 그리워요. 하루하루가 참 즐거웠거든요. 그이는 늘 책에 관한 것을 설명해주고 가르쳐주려고 애썼지요. 제 아이들은 멋진 숙녀가 되었고, 이런 점에서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아마도 저처럼 홀로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있겠죠? 횡설수설을 용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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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2-01-03 23: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이 책 찐 재밌고 유익하고 유쾌하죠. 그때 느낌이 훅 살아나는 듯요. 즐독하세요~~~^^

bookholic 2022-01-04 11:55   좋아요 0 | URL
네, 편지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우정...
책쟁이들의 책 이야기들...
잔잔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행복한책읽기 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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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몇 달 전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천 개의 파랑>의 작가, 천선란 님의 새로운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예약 판매까지 해서 구입했단다. <천 개의 파랑> SF지만 따듯한 휴머니즘이 담겨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나인> SF지만 따뜻한 휴머니즘이 담겨 있었어. 아빠의 취향으로 봤을 때 <나인>이 더 좋았단다.

<나인>이라고 하면 오래 전에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 <나인>도 생각났단다. 주인공인이 아홉 번의 시간 여행을 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로 구성된 드라마였는데, 아빠가 재미있게 봤거든. 물론 이번에 읽은 <나인>과 드라마 <나인>은 전혀 관련이 없어. 그 드라마보다 저 재미있었어. 언젠가는 이 소설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웹툰으로 재탄생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최근 우리나라 드라마, 영화, 웹툰 등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우리나라 소설들도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구나. , 그럼 천선란 님의 <나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게. 아빠의 편지는 늘 그렇듯 스포일러를 가득 실려 있는데 이 소설은 더더욱 스포일러를 모르고 봐야 재미있을 것 같구나.


1.

주인공은 나인이라는 17살 고등학생이란다. 부모님은 없고, 이모와 함께 살고 있어. 이모의 이름이 유지라서 유지 이모라고 불렀고, 줄여서 지모라고 불렀단다. 지모는 브로멜리아드라는 화원을 하는데, 일반적인 화원이 아니고 희귀한 식물들을 주로 판매하는 화원이었어. 나인과 지모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은 선연시라는 곳인데, 지은이가 만든 가상의 도시란다. 선연시 주변에는 선연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또한 지은이가 만든 가상의 산. 나인의 절친 두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의 이름은 미래, 나머지 한 명의 이름은 현재였단다. 과거라는 친구는 없었어ㅎ 미래는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미래의 엄마는 경찰이었고, 애인이 요한이라고 하는 여자였단다. 자신이 성소수자인줄 모르고 살았다가 뒤늦게 진정한 사랑을 만난 케이스.

나인은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 도장에 다녔는데, 태권도도 수준급이었단다. 나인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는 2 년 전에 실종한 박원우라는 선배가 있었단다. 사건은 단순 가출 사건으로 종결되었지만, 박원우의 아버지는 몇 년 째 계속 전단지를 나눠주고 붙이면서, 아들을 찾고 있었단다. 이런 배경으로 소설은 시작된단다.


2.

그런데 최근 나인은 자주 환청이 들이는 경험을 하게 된단다. 뜻 모를 말들이 계속 들려왔어. 어느날 해승택이라는 동갑내기 학생이 나타냈어. 그러면서 나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너는 식물이야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리고 최근에 들리는 환청은 환청이 아니라 식물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했단다. 말 같지도 않아서 떠 넘겼다가 그 이야기를 지모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지모는 어렸을 때 사진을 보여 주면서 그 말이 맞다고 했어. 흙에서 태어나서 사진 속 흙이 묻은 어린 아기가 나인이라고 했어. 그리고 지모 자신도 식물이라고 했단다.

며칠 뒤 해승택이 다시 나타나 나인의 정체에 대해 설명해주었어. 나인은 누브족이라고는 외계인이라고 했어. 해승택 자신도 나인과 마찬가지로 누브족이라고 했단다. 누브족은 어느 나이가 되면 손끝에서 새싹이 돋아나는데 그것을 심으면 아기가 태어난다는 거야. 열을 심으면 보통 두셋은 자란다고 하는데나인과 해승택이 태어난 이후로는 지구상에서 더 이상 태어난 누브족이 없다고 했어.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이 변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 같아. 그래서 누브족들은 또 다시 그들이 살아가야 할 행성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어. 나인은 지모의 손톱에서 자란 새싹에서 태어난 아이였어.

나인은 승택과 함께 선연산에 가서 나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 중에 한 불쌍한 나무. 일제 시대 일본 경찰에 쫓겨 총맞고 선연산에서 죽었는데 나무가 되었다고 하는 금옥이라고 하는 나무야. 자신이 사람이었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고, 2년 전에 나무가 되어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내용은 충격적인 내용이었단다. 네 남학생들이 선연산에 왔다고 했어. 그 중 한 명은 박원우라는 학생이고, 또 한 명은 권도현이라는 학생이었어. 그리고 박원우가 지금 이 곳에 묻혀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실종된 줄 알고 있던 박원우 선배는 사실 이곳에서 죽은 다음 묻혀 있는 것이야. 그 죽음에는 권도현이라는 선배와 연루가 되어 있고 말이야.

이런 진실을 알게 된 나인. 하지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몰랐단다. 경찰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겠어. 그래서 무작정 경찰서에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단다. 나무가 그러더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야.

나인은 직접 권도현을 찾아갔어. 그리고 박원우 이야기를 꺼내자, 권도현은 당황하며 나인을 멱살을 잡고 때리려고 했어. 그때 현재가 와서 위기를 모면하게 했단다. 이로써 권도현이 범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단다. 권도현 선배는 고3인데, 큰아버지가 학교의 이사장이고 아버지는 선연시 대형 교회의 목사이고, 어머니는 잘 나가는 종합학원 원장님이었단다. 그러니까 엄청 잘 사는 집의 둘째 아들이었던 거야. 그러나 박원우 사건이 있고 난 이후에는 최근에 심신이 많이 약해져서 헛것도 자주 보고, 코피도 자주 흘리고 그랬어. 뜻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죽였고 그것도 친했던 친구를 죽였고, 그 죄를 숨기며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니. 박원우 사건은 권도현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알고 계신데 그 일을 숨기려고 공권력에 뇌물을 주는 등 별의 별일을 다 했단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들의 죄를 숨기기 보다는 모두 자신들의 명예와 부가 무너질까 봐 그랬던 거야.

원래 권도현과 박원우는 태권도 도장을 함께 다니는 엄청 친한 친구였단다. 그러다가 도현이 태권도 도장을 그만 두고 학원에 다니면서 멀어졌고, 그리고 도현의 엄마가 가난한 원우와 만나지 못하게 했단다. 그리고 원우가 진지하게 외계인을 봤다는 이야기를 떠벌리고 다니면서, 친구들은 고등학생이나 되었으면서 외계인이야기나 하고 다닌다며 왕따를 시키기도 했어. 도현도 새로 사귄 나쁜 친구 송우준, 김민호와 어울리면서 원우를 멀리하게 되었어. 박원우가 죽은 날 함께 있었던 나머지 두 친구도 바로 송우준과 김민호였고,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권도현의 아버지는 엄청난 돈을 써야 했단다.


3.

나인과 승택은 금옥 나무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도현이 저지른 범죄를 알릴 수 있을까?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면서 말이야. 나인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고, 그것도 미래와 현재가 아무리 친해도 말 할 수 없는 비밀이 생기고, 박원우 사건을 조사하다 보니 자연히 미래와 현재와도 사이가 멀어졌어. 미래와 현재도 무슨 일인지 최근에 사이가 안 좋아 보였어. 미래는 나인이 엄마가 일하는 경찰서에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인에게 화해를 하려고 갔다가 나인이 태권도 도장 선배인 석구에게 박원우에 대한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어. 석구는 도현을 친동생처럼 아끼는 형이었는데, 도현의 이야기를 하니 참았던 울음보가 터졌단다. 석구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 도현과 원우가 엄청 친했기 때문에 도현이 원우를 죽였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나인은 산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승택과 함께 자주 선연산에 갔단다. 그러다가 다른 누브족이 갖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나인은 산의 나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정신을 집중하면, 나인의 에너지가 파란 빛의 에너지가 발산하여 식물들의 키가 순간적으로 자랐어. 갑작스러운 식물들의 성장을 캐시 위한 방송국 차들이 선연산으로 몰려 들기도 했단다.

미래가 나인과 석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에게 박원우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어. 미래의 엄마 경혜는 2년 전 박원우 사건 자료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감쪽같이 다 사라진 거야. 담당 경찰한테 물어보니 팀장이 다 가져갔다는 거야. 권도현의 아버지의 돈줄이 여기까지 미쳐 있구나. 돈으로 다 막아 둔 것인데, 나인은 다시 곡괭이로 파헤치려고 하는 것이었어.

….

나인과 승택은 다시 선연산에 가서 이야기를 듣게 된단다. 이번에는 2년전에 있었던 상세한 모든 이야기를 듣게 돼. 권도현은 송우준, 김민호와 함께 술을 먹고 나서 원우를 불러 술값을 계산하라고 했어. 원우는 그 자리에 왔고, 그들은 함께 산에 갔어. 도현은 원우가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한편, 원우가 외계인이 있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이제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원우와 다시 친해지려고 했지만, 둘은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홧김에 원우를 밀쳤는데 그곳에 벼랑이 있어서 그만 원우가 떨어지고 말았단다. 겁에 질린 도현이 부모님께 연락을 하고, 부모님이 와서 원우를 땅 속에 매장한 것이란다. 그런데 나무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벼랑에 떨어지긴 했지만, 원우가 생존에 있다는 것이었어.

정신을 한데 모아 집중하며 듣던 나인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파란빛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주변의 식물을 또 크게 만들었단다. 이때 미래와 현재가 나인을 찾기 위해 선연산으로 오는 도중에 선연산에서 순간적으로 파랗게 빛을 보았단다. 그리고 선연산에서 미래와 현재는 나인을 보았단다. 나인과 승택은 더 이상 정체를 숨기지 않고, 미래와 현재에게 자신의 정체를 이야기했단다.

이후 이야기는 나인, 미래, 현재, 승택이 잘 작전을 짜서, 권도현이 고백을 하도록 하고, 모든 진실들이 세상에 알려지고, 죄를 지은 자들은 벌을 받는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게 된단다.


4.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좋은 문구들이 많이 나온다는 점이란다. 지은이 천선란 님은 어떻게 그런 문장들을 만들어낼까? 아래 같은 글은 연륜이 묻어나는 글처럼 보이는데, 젊은 작가의 펜에서 나왔다는 것이 대단하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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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벗겨 낸 세상의 비밀을 한 겹씩 먹으면, 어떤 비밀은 소화되고 흡수되어 양분이 되고, 어떤 비밀은 몸 구석구석에 염증을 만든다. 비밀의 한 꺼풀을 먹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의 시스템은 그걸 먹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설정되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시기가 너무 이르면 소화하지 못해 탈이 나거나 목이 막혀 죽기도 하고, 너무 늦으면 비밀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배출시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텅 빈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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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좋은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단다. 아빠가 이 책을 읽고 나서, Jiny가 이 책을 읽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책의 내용도 재미있고 말이야. 그래서 아빠가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이야기를 해주니, 먼저 읽어봐도 되냐고 물어보더구나. 그래, 한번 읽어보라고 했는데, 이 책에 푹 빠지셔서 이틀 만에 뚝딱 읽고 역대급으로 재미있다는 감상평을 하셨지. 그러면서 아빠가 읽은 책 중에 자신이 읽을 만한 책이 또 없냐고 물어봤지... 너희들보고 언제나 천천히 자라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쑥쑥 금방 자라니 이렇게 책을 함께 읽는 행복도 금방 찾아오기도 하는구나.

천선란 님의 작품은 아빠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예전에 출간한 다른 책들도 한번 찾아봐야겠구나. 그런데 진짜 지구인들 사이에서 지구인과 똑 같은 모습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외계인들이 있는 거 아냐?


PS:

책의 첫 문장: 그곳은 원래 죽은 땅이었다.

책의 끝 문장: 그곳은 원래 죽은 땅이었어요.


감정에 가라앉는 건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고, 무언가에 슬픔을 느꼈다면 그 슬픔을 다시 느끼지 않도록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테면 현재가 울 때마다 미래는 현재를 울게 만든 원인을 찾아 없애는 식이었다. 놀리는 애가 있으면 찾아내 혼내거나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시험을 망쳤을 때는 울어 봤자 성적이 바뀌지 않으니 그 시간에 차라리 영어 단어나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라고 말했다. 몇몇 친구는 그런 미래의 화법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나인과 현재는 그런 미래를 좋아했다. - P49

찰나의 표정이란 감정을 가장 진솔하게 비추는 호수의 수면 같은 것이다. 조그만 충격에도 금방 흩어지고 만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한때,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마법 같은 것이다. 그러니 원망할 수가 없다. 미워할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안쓰럽다는 걸, 불쌍하다는 걸, 가엾다는 걸, 애잔하다는 걸. 때때로 어떤 이들의 표정은 파도같이 잔잔하게 밀려오다 부서지고 흩어진다. - P112

살아간다는 건, 적응한다는 건, 익숙해진다는 건, 버텨야 한다는 건, 존속한다는 건, 그러니까 끈질기게 존재한다는 건, 세계라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무게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지한다는 건 지킨다는 것이고 동시에 버린다는 것이다. 지켜야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버려야 하는 건 존재했던 모두다. - P189

그렇게 어떤 일은, 죽음은, 억울함은, 호소는 한없이 뒤로 밀리고 밀려 세상 밖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걸, 그렇게 사라지지도 분해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로 우주를 떠돌게 된다는 걸 미래는 아직 모른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지만 조금씩 알게 되겠지. 그걸 알아가는 게 살아가는 것이고, 나이를 먹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것도 알게 됐으면 한다.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더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 P376

이 꽃이 처음 싹을 틔웠을 때는 이 세상이 지구였는지도 몰랐을 거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있는 힘껏 세상 밖으로 나와 봤겠지. 물을 머금지 못하는 흙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시선과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시련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다른 씨앗들처럼 일찍이 삶을 포기했을 텐데, 땅에 있을 때부터 나인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밖에 하지 못해 기어코 세상에 나왔다. 그렇지만 나인은 후회하지 않는다. 이 행성이 자신의 행성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외롭지 않다. 후회한다고 해서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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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과연 누가 지금의 광기를 버티면서까지 사법개혁을 위해 장관 후보자로 나서려고 할 것인가? 그래서 지금의 논란은 단지 조국 후보자 한 명을 둘러싼 대립이 결코 아니다. 행여 조국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한 개혁 의지를 가진 인물이 다시 후보자로 지명된다면 그때는 사돈의 팔촌까지 뒤지고 묏자리까지 아예 파헤쳐서라도 주저앉히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더 도덕적이고 더 개혁적인 후보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다. 이 광기의 살육을 나는 규탄한다. 그것이 적어도 지금은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수호하는 길이라 믿는다.

-       건국대 이종필 교수 칼럼 중에서


(107)

이랬던 검찰이 지금은 달라졌을까. 나는 항상 고 노무현 대통령의 한탄을 잊지 않으려 했다.

검찰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가운데 검찰은 임기 내내 청와대 참모들과 대통령의 친인척들, 후원자와 측근들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추진한 대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치적 독립과 정치적 중립은 다른 문제였다. 검찰 자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으면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주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정치적 중립은 물론이요 정치적 독립마저 스스로 팽개쳐버렸다. 검경수사권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서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118)

이에 대한 <한겨례> 김종구 편집인의 비판은 정확하다

참여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금 확인되는 바는 첫째, 검찰은 태생적으로 진보정권과는 유전적 코드가 맞지 않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살아온 삶의 이력이나 추구하는 가치 등 검사들의 전반적인 정체성자체가 진보정권과는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둘째, 검찰은 권력의 충견으로 기꺼이 용맹을 떨칠 수는 있어도, 자신들의 이빨을 약화하려는 시도는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 ‘마음이 놓이는보수정권과 마음이 놓이지 않는진보정권을 대하는 검찰의 태도에 본질적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131)

검사 출신으로 검찰의 민낯을 폭로한 비판서 <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를 출간한 이연주 변호사는 개탄했다.

검사들은 과거 언론 탄압하고, 민간인 사찰하고, 거짓 자백을 강요했던 잘못은 한 번도 되돌아보지 않으면서, 검찰이 휘두른 칼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느끼지 않으면서, 검찰 조직 문제에만 기개 있게 덤비고 정의를 내세운다.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겁한 사람들이다.”

이어 이 변호사는 검찰의 모토를 간명하게 정리했다.

정권은 유한하고, 검찰은 영원하다.”


(177-178)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는 일갈한다.

() 법무부장관 가족의 일기장까지 파헤쳐 한 달에 100만건이 넘는 기사를 언론에 흘리며 한 가족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파괴하면서까지 정의와 상식을 실천하고자 한 검찰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심각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 위증을 연습시키면서 증인을 매수해 전 국무총리(한명숙)의 사회정치적 생명을 파괴하는 일도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검사들이 룸살롱에서 받은 접대를 ‘96만 원 접대로 만들고, 전 검찰총장의 가족이 수십 억의 허위증명서를 발급하고, 또는 땅 투기를 해서 100억 원의 이익을 챙겨도 이러한 자기 식구들 사건에는 관대하다. 그런데 기억할 것이 있다. 정의는 누구에게나’ ‘어느 사건에나공평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그 진정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취사 선택적 정의 적용은, 정의의 이름을 빌린 불의일 뿐이다.”


(187)

<조선일보> 기자는 내가 치료받은 병원까지 찾아가 무슨 치료였는지 묻고 갔다. 동네 카페와 세탁소 등 상점을 방문해 나와 내가족에 대한 불만이 없는지도 탐문했다. 채널A는 등교하는 아들을 따라붙어 버스에 올라타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질문을 퍼부었다. 아파트 인근에 회사명이 붙어 있지 않은 취재 차량을 항상 주차해놓고 가족이 이동하면 추격전을 벌였다. 서울에 오셨다가 부산으로 돌아가는 어머니를 모시고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을 계속 쫓아오더니, 어머니가 내리자 어머니를 가로막고 카메라를 들이댔다. 친구와 지인을 만나러 나갔다가 쫓아오는 차를 확인하고 돌아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남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친구와 지인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240-241)

장관 사퇴 후 정의당도 유상진 대변인 논평을 통해 덕담을 해주었다.

취임 이후 36일 동안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개혁을 해왔고, 오늘까지도 개혁안을 발표하며 쉼 없이 달려왔다. 그러면서 45년 만에 특수부를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것 등 그동안 검찰개혁의 초석을 마련했다. 가족들에 대한 수사 등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검찰개혁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추진해온 것을 높이 평가한다. 장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으며, 수고 많았다.”


(279)

장관직을 그만두고 내려온 후 건국대 이종필 교수의 글을 접했다. 가슴 찡하게 감사했다.

공권력과 언론이 합세해 이렇게 한 가족을 몰아붙이면 누군가는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지도 모른다. 검찰과 언론은 이미 전과가 있는 공범관계가 아니던가.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이 10년 전의 노무현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꼭 지키겠다고 다짐한 것은 정치적인 수사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사람을 살리고 싶었다. 검찰개혁이니 적폐청산이니 하는 거창한 구호는 솔직히 뒷전이었다. 그냥 잠자코만 있으면 또 누군가 죽어나가겠구나, 내 한 목소리라도 보태서 사람을 살리자는 절박함이 훨씬 더 컸다.

내가 외친 조국 수호는 장관으로서의 조국을 지키자는 게 아니라 한 생물학적 인간으로서의 조국을 지키자는 말이었다. 서초동에는 그런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


(297)

1993 6 23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갇힌 경험이 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구치소 독방 크기는 비슷할 텐데, 더 좁게 느껴졌다. 1993년에는 반정부운동 참여로 구속되었고, 2019년에는 고위공무원의 직권남용혐의로 갇힌 것이라 기묘한 감정이 일었다. 1993년에는 검찰 공안라인이, 2019년에는 검찰 특수라인이 영장청구의 주도자였다. 1993년 검찰은 극우 보수적 정치관으로 무장한 채 체제의 수호자로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는 선봉에 서 있었다면, 2019년 검찰은 조직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언론과 야당과 손잡고 문재인 정부와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299)

<한겨레> 이재성 기자가 12 26일 당일 인권연대소식지에 쓴 글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늑대가 된 검찰에게 가장 큰 천적은 이른바 검찰개혁 세력이다. 그대로 뒀다간 검찰이 사냥을 못하게 되거나 번식이 불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에게 조국은 호랑이 새끼 같은 존재였다. 더 크기 전에 물어 죽여야 했다. 조국 하나를 잡기 위해 청와대와 총리실, 기획재정부, 경찰청 등 가리지 않고 들이닥쳤다. 전국의 검찰 조직을 총동원해 넉 달 동안 뒤진 끝에 고작 감찰 무마직권남용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채용 비리 혐의를 받는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 등에게는 구속영장의 ㄱ자도 꺼내지 않은 검찰이다. 표적수사이자 문어발식 별건수사일뿐 아니라 친검 편파 수사로서 검찰 흑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329)

20215 18일 열린민주당 김의겸 의원은 윤석열을 12.12 5.17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에 비교하면서, ‘2단계 쿠데타를 벌였다고 분석했다.

윤석열 총장의 시작도 조직을 방어하기 위해서다. 검찰의 권력에 조국 장관이 겁도 없이 개혁의 칼날을 들이대니 조국을 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람에 충성하지 않으나 조직은 대단히 사랑하는윤 총장이다. 먼저 칼을 뽑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로까지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조국만 도려내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고 하니, 당시만 해도 역심까지 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세력이 윤 총장을 떠오르는 별로 보기 시작한다. 윤 총장도 서초동 조국 대첩을 거치며 어차피 호랑이 등에 탔구나싶었을 것이다. 이왕 내친김에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돌진한다. 울산시장 선거 사건, 월성 원전 사건 등이다. 명분을 축적한 뒤, ‘전역을 하고는 본격적으로 대선 판에 뛰어들었다.”


(357)

2019 9 2일 기자간담회에서 토로했다.

저는 통상적 기준으로 금수저가 맞습니다. 세상에서 강남 좌파라고 부르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금수저면 항상 보수로 살아야 합니까. 강남에 살면 보수여야 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금수저이고 강남에 살아도 우리 사회 제도가 좀더 좋게 바뀌면 좋겠다, 공평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런 고민을 했고 공부했다 해도 실제 흙수저 청년, 흙수저 사람들의 마음을 고통을 제가 얼마나 알겠습니까. 10분의 1도 모를 것입니다. 그것이 제 한계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려고 합니다. 금수저라 해도, 강남 좌파라 야유받아도 국가권력이 어떻게 바뀌는 게 좋겠다, 정치적 민주화가 어떻게 되면 좋겠다고 고민해왔습니다. 그 점에 대해 나쁜 평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해보려고, 그 기회를 달라고 여기에 비난받으며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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