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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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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스포일러 포함/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이소룡]

브루스 리. 이소룡.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소룡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영화를 많이 접할 환경도 아니어서, 이소룡은 나에게 그저 무술 영화 배우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소룡을 흠모하는 많은 팬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와 같은 세대를 살던 사람들 중에는 더욱 많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우상과 같은 이가 어느날 갑자기 죽는다면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좋아하는 스타가 어느날 갑자기 삶을 마감하는 하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 절망의 맛을 보기도 했다. 이소룡의 팬들은 이소룡이 죽었을 때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소룡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그 중에 이 소설의 주인공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상구라는 사람의 삼촌... 그 또한 이소룡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 삼촌의 이야기를 블랙 유머의 코드로 풀어가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천명관이라는 소설가의 소설은 처음 읽어본 것인데, 그의 소설들을 또 읽어보고 싶은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나는 소설을 읽고 나면 얼마 안가 줄거리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줄거리를 자세히 적어 둔다. 그런데, 그 줄거리에 이 소설의 지은이의 웃음코드를 전달하지 못하는 점,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있다면 양해를 구한다.

 

 

[이소룡의 죽음이 가져다 준...]

1973년 여름, 이소룡이 죽었다는 소식은 대한민국 조그마한 시골에까지 전해졌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권상구는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그에게 중학생 형 동구가 있었고, 고등학생인 삼촌 권도운이 있었다. 상구는 삼촌의 영향을 받아 이소룡에 빠져 있었다. 이소룡의 사망 소식을 접한 삼촌은 이소룡을 추모해야 한다면서, 상구, 동구를 뒷산으로 데리고 갔다. 가는 길에 상구는 친구 종태를 만나서 같이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 방식으로 이소룡을 추모하는 의식을 벌였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했다.

삼촌은 사실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후에, 할아버지의 아들이라면서 상구의 집에 나타났다. , 할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낳은 혼외 아들이라는 거다. 할머니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어린 삼촌을 받아들였고, 아버지는 삼촌을 아들로 생각하고 보살펴 주었다. 삼촌도 커가면서, 밥벌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하기도 했다. 삼촌은 어렸을 때부터 말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상구의 아버지는 삼촌을 무술학원에 보냈다. 자신의 몸은 알아서 처신하라고그래서 삼촌은 무술을 배우게 되었는데, 무술에 흥미를 느끼는 삼촌은 어느 정도의 무술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소룡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삼촌은 이소룡의 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보는데, 읍내에 상구와 "용쟁호투"라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불량배와 시비가 붙었고, 그간 배운 무술로 완전히 제압을 해버렸다. 그 일이 있고, 상구와 친구 종태는 삼촌에게 무술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서 삼촌은 뒷산에서 그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특히 종태는 무술 습득 능력이 뛰어났고, 삼촌에게 사부라고 불렀다.

어느날 그들이 살고 있는 시골에 영화촬영을 하러 왔는데, 그곳에서 삼촌은 맞고 쓰러지는 으악새 단역을 하기도 했다. 으악새 단역이란, 한 대 얻어맞고 으악하고 쓰러지는 역할이라고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삼촌은 한눈에 반한 영화배우를 보게 된다. 그 배우의 이름은 최원정. 하지만 삼촌에게는 그림의 떡이지.

삼촌은 호떡집을 괴롭히는 불량배를 처치해준 적이 있는데, 그 인연으로 호떡집 사장의 여동생인 오순과 애인 사이가 되었다. 오순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는데, 어쩌다가 오순이 임신했다면서, 결혼하자고 했다. 삼촌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어서 좀더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그런데, 오순은 예전부터 독극물 제조에 일가견이 있는 이였다. 삼촌이 거절하자, 삼촌 몰래 커피에 청산가리를 타서 먹고 둘이 같이 쓰러졌다. 그들이 그때 다방에 있었는데, 그 시간 다방 밖에는 삼촌에게 체면을 구긴 불량배 도치와 그의 오야붕 토끼가 있었다. 삼촌이 다방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토끼가 인근 불량배들을 죄다 모았다. 100여명이 넘었다. 그들은 ‘돌격 앞으로’를 외치면서, 다방으로 들어갔다. 청산가리를 먹고 복통으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삼촌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각목으로 휘두르다 다방의 전등이 깨져서 꺼지고... 깜깜한 다방 안에는 100여명의 불량배들이 각목들을 들고 싸우기 시작했다. 누가 적인지 모르고.. 서로 각목을 휘둘렀다. 삼촌은 오순을 들쳐 엎고 나왔는데, 밖에서 토끼와 대면하게 되고, 토끼와 정신 없이 싸우다 정신을 차려보니, 토끼가 피를 흘리고 실신해 있었다. 토끼가 죽은 줄 알고, 삼촌은 오순을 엎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오순을 병원에 데려다 주고, 삼촌은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떠났다. 다행히 오순은 죽지 않았고, 또 다행히 토끼도 죽지 않았다. 토끼와 오순은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물론 그들은 그들이 병원에 입원한 이유가 모두 삼촌 때문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서울 살이]

무작정 고향인 동천을 떠난 삼촌은 서울로 올라왔다. 우연히 충무로에 있는 중국집 배달을 하게 된 삼촌은 그렇게 정착했다. 40대 미혼 여성인 마 사장이 운영하는 북경반점이라는 중국집의 배달. 삼촌은 오토바이를 한 대 가지고 있었는데, 고향을 떠날 때 그 오토바이를 타고 왔고, 서울에 와서도 그 오토바이를 타고 짜장 배달을 했다. 어느날 삼촌이 배달을 간 집에서 예전에 삼촌이 한눈에 뽕 간 영화배우 최원정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삼촌은 최원정을 껴앉는 바람에 옆 사람들에게 크게 얻어 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삼촌은 충무로에서 단역 배우를 하는 용식을 알게 되는데, 용식으로부터 흥미로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소룡이 죽기 전에 찍던 <사망유희>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소룡의 대역 배우를 뽑는 오디션이 홍콩에서 있다는 소식이다.

북경반점에는 칼판장이라는 주방 도우미가 있었는데어느날 그가 중국집 식구들의 돈을 모두 싹쓸이해서 도망을 갔다. 이때 삼촌도 그가 모아둔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도둑맞았다. 다른 사람들은 돈만 잃어버렸는데, 마 사장은 또 다른 것도 잃어버렸다. 그건 사랑. 젊은 시절 사랑에 상처를 받은 마 사장은 칼판장을 진심 사랑했거든그런 칼판장이 사랑을 배신하고 도망가 버린 것이다.

삼촌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고향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돌아왔다. 삼촌은 시골 집에 내려와서 그곳에 머물면서 조용히 지냈다. 상구에게 홍콩에 있을 이소룡 오디션을 이야기했더니, 문중에 공부 잘하면 도와주는 문중 장학생이 있다면서, 무술도 하나의 공부니까 문중 장학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삼촌은 할머니의 삽십구제 때 문중들에게 무술 솜씨를 선보였다가 아버지에게 된통 혼났다. 그렇게 문중의 도움 받기는 실패하고 삼촌은 다시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왔다고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삼촌은 다시 북경반점에 왔다. 마 사장은 삼촌으로부터 이소룡 오디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홍콩 가는 밀입선을 알선해주었고, 삼촌은 그 밀입선을 타고 홍콩으로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갔다.

 

 

[삼청교육대]

한편 상구는 중학생이 되었다. 친구 종태는 여전히 그의 곁에 절친이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짝사랑하는 영어 선생님의 자취 집에 종태가 놀러 간 것을 알고 눈이 뒤집어졌다. 화장실에 영어 선생님과 종태가 섹스를 했다는 낙서를 했다. 종태는 이 일로 학교 놀림감이 되었고, 학교 짱과 싸움이 붙게 되었는데, 조용히만 있던 종태가 그 학교 짱을 완전 제압을 해 버렸다. 삼촌으로부터 배운 무술을 종태는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나중에 종태는 낙서를 한 사람이 상구라는 것을 알고 상구를 대판 두들겨 팼고, 상구는 엄청 맞았다. 분해서 상구는 종태네 소와 송아지의 줄을 풀어주고 엉덩이를 발로 차버렸다. 소들이 놀래서 도망을 가고, 그날 밤에 그 소들은 늪에 빠져 죽은 채 발견되었다. 가난에 찌들었던 종태네 집의 전재산과 같은 소들이 죽자, 다음날 종태의 아버지는 자살을 하셨고, 그 일로 종태네 가족은 그 시골을 떠났다. 그리고 상구는 가진 죄책감은 평생을 갖게 되었다.

홍콩으로 떠났던 삼촌은 수 개월 만에 돌아왔다. 삼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사망유희>의 이소룡의 대역으로 한국 사람이 뽑혔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삼촌은 아니었다. 정말 한국 사람이 이소룡의 대역을 했나? 하는 생각에 구글링을 해보았더니, 정말 김태정이라는 한국사람이 이소룡의 대역을 했다고 한다. 집에 돌아온 삼촌은 열심히 농사일만 했다. 그런데 읍내에 갔다가 경찰에 잡혀서 삼청교육대에 잡혀오게 되었다. 삼청교육대에서 삼촌은 수많은 사람들이 별 잘못 없는데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 사상범이었던 정기자라는 사람을 살려주는 의로운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삼청교육대의 악질 교관인 '염마'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그에게 당한 건 삼촌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삼촌은 고향에서 쌈박질 해서 알게 된 불량배 도치와 그의 오야붕 토끼를 만났는데, 그들도 염마에게 엄청 당했다. 그곳에서 만나니가 도치와 토끼가 적이라는 생각보다 동향사람이라는 친분이 더 커져서 그들은 친하게 지냈다. 어느날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개밥을 훔쳐 먹은 도치가 얻어 맞아 죽고, 복역자들과 관리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토끼는 죽을 뻔했는데, 삼촌 때문에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다리에 총상을 입어서 한쪽 다리를 잘라야만 했다.

...

 

[스승과 제자의 명승부]

삼청교육대에서 나온 삼촌은 고향에 돌아와서 토끼파에 가입했다. 예전부터 무술실력이 좋은 삼촌은 토끼파의 넘버2가 되어 토끼파의 최고의 전성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들이 살던 시골이 공장부지로 선정되면서, 신시가지가 들어서고 사람들 수도 급격히 늘었고, 조직 폭력배의 수도 늘었다. 아참, 토끼는 오순과 결혼을 했고, 오순은 그 옛날 삼촌이 씨를 들여놓은 그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있어서. 토끼의 밑에서 일하니 오순과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오순은 모르는 척 하자고 했다. 토끼는 우연히 삼청교육대의 악질 교관 '염마'를 만나고 삼촌까지 불러서 둘이 열심히 팼다. 거의 반죽음이었다. 삼촌은 그를 살려주라고 했지만, 토끼는 끝내 죽여 버렸다. 그런데 그 '염마'의 귀가 멀쩡했다. 삼청교육대의 '염마'의 귀는 토끼가 물어뜯어 잘려 있어야 했었다. 다른 사람을 죽인 거다. 이 일이 있고, 삼촌은 다시 그곳을 떠나려고 했다. 그가 떠날 빌미가 생겼다. 그 동안 토끼는 삼촌의 무술 실력으로 지역 깡패판을 평정했는데, 반대 그룹의 새로운 고수가 들어왔다. 별명이 쌍절곤을 잘 사용해서 절곤이라고 했다. 삼촌이 절곤이와 결투하러 갔는데, 그 절곤이는 바로 종태였다. 종태는 삼촌을 스승으로 모셨었는데, 이렇게 적으로 만나다니마치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들은 3시간 넘게 우열을 가리지 못하는 싸움을 하다가 삼촌이 일부러 허점을 보여 주면서 결투는 끝이 났다. 그 결투로 삼촌은 그 바닥을 떠났다. 한편, 토끼는 종태에게 접근하여 포섭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종태는 원래 조직을 배신하면서 자신의 보스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감옥에 들어갔다. 토끼가 그에 대한 보상으로 가족들에게 가게를 차려준다고 했고,

감옥에 다녀오면 자신에게 높은 자리를 준다고 했다. 대학생이 된 상구는 그렇게 감옥에 갇힌 종태를 면회를 가서 다시 옛정을 되살렸다. 여기까지가 1권의 이야기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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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억압이나 슬픔이 아니라 평안한 기쁨, 보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의식할 새도 없이

우리에게서 삶의 자유와 기쁨을 앗아가버립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매우 교묘하게 작동합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꼼꼼히 살펴보세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란 '소비의 자유'일 뿐이고

자본주의에서 얻는 기쁨이란 '자기 파괴적인 욕망의 충족'일 뿐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욕망의 집어등에 걸려

허우적거리며 깊이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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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모든 것을 고백하며,

기독교도들에게는 평화와 안식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수중에 많이 넣을수록 현대인의 마음에도

여유와 안정이 찾아들지요.

독실한 신자는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 찾아올 때 신의 은총을 느낍니다.

또는 로또 복권에 당첨되거나 주식 투자로 주가가 오르면

우리는 돈이라는 신이 강림한 데 대해 엄청난 황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우리 지배력은 돈을 쓰지 않고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을 꿈꾸는 동안에만 작동합니다.

현실적으로 돈을 사용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버립니다.

이 순간은 마치 신이 떠나버린 듯한 무서운 효과를 낳습니다.

신의 은총을 찾아 다시 교회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돈이 떠나려는 순간,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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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 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해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세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얼마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가 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은 돈의 자유이지 우리 삶의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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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드에게 파리는 악의 꽃, 다시 말해 '악'이며 동시에 '꽃'이었습니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악'은 19세기 파리를 장악하던 산업자본의 힘,

다시 말해 '화페'의 신적 역량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꽃'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상품'이나 '여성'을 상징합니다.

산업자본이란 '악'이 있기 때문에 상품이라는 '꽃'도 가능했겠지요.

보들레르가 파리에 대해 애정과 증오라는 이중 감정을 보인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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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리의 시인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양 극단 사이에서 끝까지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념적으로 어떤 한 가지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인의 숙명이 아니겠지요.

시인은 양 극단의 괴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철저히 응시하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표출하는 존재일 테니까요.

바로 이 점을 가장 잘 알던 인물이 다름 아닌 벤야민 자신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보들레르에 집착하며 19세기 자본주의의 근저를 

보들레르와 그의 모순적 삶을 통해 규명하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겠지요.(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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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알제리 농민들의 사유와 너무나도 흡사해서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지금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한 가지 대안으로,

동양의 전통 사유가 각광을 받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산업자본이 일으킨 환경 파괴의 대안으로 

생태철학이 강조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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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류 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선하게 살며,

얼마나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까요?

..

파스칼만큼 인간의 허영과 가식을 깊이 통찰했던 철학자도 없지요.

...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사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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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그나마 위안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였습니다.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사랑이란 감정은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소망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본주의는 늘 인간의 무한한 진보와 번영을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곧바로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가의 노쇠함과 그에 이어지는 필연적 죽음입니다.

육체적 노쇠함은 인간을 탐욕과 축재로부터 벗어나게 하지요.

물론 노쇠해져 죽음이 가까이 왔는데도 자본주의적 탐욕의 갈등이 꺼지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인 유하에게는 이 두 가지 희망이 어렴풋하게나마 그 빛을 발합니다.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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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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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저절로 엄지척]

이번에 읽은 책은 강헌이라는 분이 쓴 음악에 관한 책이다. 자신의 전문분야에 관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겨울에 그 분이 쓰신 <명리>라는 책은, 그 분이 관심이 많아서 쌓은 지식을 이용하여 쓰신 책이라면, 이 책은 자신이 오랫동안 했던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강헌이라는 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년 전 노무현 시민학교에서 음악의 역사에 대한 강연을 통해서였다. 어찌나 말을 구수하고 재미있게 하시던지, 필기까지 하면서 강연을 들었다. 집에 와서 그가 쓴 책들을 읽어보려고 검색을 해봤는데,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겨울에 <명리>라는 책을 낸 것을 알고 알아봤더니, 작년에 한 권을 더 쓰셨다.

<명리>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김어준의 벙커1에서 강연했던 것들을 나중에 정리한 책이다. 읽기 전 글씨가 작고, 더 작은 글씨로 된 주석이 엄청 많아서 부담스러웠는데, 읽기 시작하면서 바로 엄지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였다.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첫째 아이가 이 책 제목을 보더니 "전복? 그 먹는 전복 이야기하는 거야?" 라는 질문을 던져 한바탕 웃게 하기도 한 책, 얼른 후속편이 나와야 한다.

 

 

[대중음악의 부모, 재즈]

첫번째 주제는 재즈다. 재즈는 대중음악의 부모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20세기 초 뉴올리온즈라는 조그마한 항구도시에서 시작한 재즈는 불과 30년 만에 전세계의 대중음악이 되었다. 그것은 당시 세계 상황과도 관계가 있었다. 뉴올리온즈는 조그마한 항구 도시로 세계 1차 세계 대전 이후 군악대가 쓰던 악기들이 싼 값에 많이 흘러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힘들게 일하던 아프리칸 어메리칸들이 그 악기들을 이용해서 음악을 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재즈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을 알리는 걸출한 인물이 한 명 출현했는데그가 바로 루이 암스트롱이다. 고등학교 시절 때 맥주 광고에 나와 알게 된 "What a wonderful world"로 유명한 가수. 그의 목소리는 정말 매력적인 목소리다. 그의 노래 중에 "What a wonderful world"도 좋지만, 신데렐라에 나왔던 "비비디바비디부"를 재즈로 부른 그 노래가 더 좋았다. 우리 아이들이 신데렐라를 좋아해서 루이 암스트롱이 부른 비비디바비디부를 들려주면  그 노래도 좋아한다.

루이 암스트롱은 새 시대를 여는 1900. 미국의 상징이기도 한 미국독립기념일인 7 4일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출생은 그를 전설로 만들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암튼, 그의 목소리는 재즈를 위해 하늘이 내린 목소리라고 할 수 있었다. 재즈가 뉴올리온즈에서 시작해서 시카고, 뉴욕으로 이동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와중에 세계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는데전세계에 있는 미군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재즈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음악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 오히려 처음 재즈 음악을 만들었던 흑인들 사이에서 예술자적 자의식이 생기면서, 블루스의 본질을 연주한다면서, 재즈 음악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비밥이라는 음악이 등장하면서 재즈의 인기를 수그러들었다. 그래도 재즈는 모든 대중음악의 부모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

그리고 등장하는 음악 장르는 로큰롤이다. 에릭 홉스봄이라는 사람은 "로큰롤에게 존속살해당한 재즈"라고 말할 정도로 로큰롤의 등장과 함께 재즈는 급속하게 인기가 줄어들었다. 로큰롤은 1950년대 미국의 풍요시대와 함께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문화라는 것은 어른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미국의 풍요시대에 10대 소년들은 지옥 같은 학교를 탈출하고자 했고, 출구전략으로 문화를 선택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고.... 문화의 대표격인 음악에서 10대는 열광하게 되었다. 리듬앤블루스라는 장르가 10대들의 지지를 받으면 크게 인기를 얻었다. 리듬앤블루스는 원래 흑인하급음악이었는데,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라는 사람이 리듬앤블루스에 최적의 목소리를 가진 백인을 찾아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 그러면서 리듬앤블루스에서 락앤롤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이동하게 된다. 리듬앤블루스와 락액롤의 차이는... 리듬앤블루스는 색스폰이 주된 악기였고, 로큰롤은 일렉트릭 기타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리듬앤블루스의 대표곡인 "Rock around the clock"을 유튜브로 검색해서 보면 색스폰을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로큰롤은... 음악과 관련 없는 두 개의 단어 rock roll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리듬앤블루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4개의 단어 중인 rock roll을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뜻은 '성교'라는 뜻의 은어라고 한다. 그러니, 기성세대인 부모들이 얼마나 이 로큰롤을 싫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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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앤블루스라는 말의 '리듬' '블루스'는 모두 음악과 관련된 말이었다하지만 로큰롤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단순히 바위가 구른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록(rock)은 동사로 '부딪히다, 흔들다'의 뜻이고(roll) '구르다, 휘감다'라는 뜻이다. 리듬앤블루스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음탕한 네 개의 동사인 rock, roll, shake, rattle 중 두 개인 록과 롤로 만든 것이 로큰롤이다. 로큰롤은 흑인 은어로 남녀 간의 성교를 의미한다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성교를 뜻하는 은어로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말이 '빠구리". , 제주도에서는 '빠구리' '땡땡이친다'는 뜻이므로 제주도는 여기서 제외한다. 그런데 KBS의 음악 프로그램인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진행자자인 유희열이 새로 음반을 낸 YB를 소개하면서 "우리 YB의 새로운 빠구리 음악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방송 진행을 했다고 생각해보면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가 바로 영구 방송 출현 금지에 처해질 것이다로큰롤이라는 말 자체가 미국 기성세대의 주류 백인들에게 분노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개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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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거부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TV의 보급과 함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인기는 하늘을 뚫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56년에는 빌보드 차트에서 4개의 노래로 34주간 1위를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학부모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로큰롤은 사탄의 음악이다"라고 하고 로큰롤을 보이콧하고, 로큰롤 가수들에 대한 범죄를 조작하여 체포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틀즈의 우상인 척 베리도 그렇게 범죄를 조작하여 체포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9년에서 1960년 사이에 세계 로큰롤 가수 순위 1위에서 4위 가수 중에 3명이 의문의 사고사로 죽는 사건도 일어났다고 한다. 이때 라밤바로 유명한 리치 발렌스로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그리고 죽지 않은 한 명은 군대 재직 중인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한다. 이 사고들이 우연일까?

...

로큰롤은 비틀즈의 등장과 함께 다시 한번 정점을 찍는다. 리버풀에서 온 그들은 1964 4월 둘째주 빌보드 차트 1위와 5위까지 모두 그들의 노래로 채우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미국, 아니 세계 대중음악은 시대를 거듭하며 다양한 음악의 장르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중음악]

, 그럼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보통 가요라고 하는데지은이는 그것은 잘못된 말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가요라는 말은 일제 시대 생긴 국민가요라는 말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고, 당시 국민가요는 황국 신민의 노래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말로 일제잔재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가요라는 말을 쓰지 말고 대중음악이라는 말을 사용하라고 한다. 그리고 일제시대 일본 황군들의 노래인 <감격시대>가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광복절 등을 기념하는 행사에 KBS 등 공영방송에서 연주하고 있다는 것에 개탄을 했다.

그런 그렇고, 미국에 재즈와 로큰롤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통기타가 있다. 1969년 사진작가였던 한 청년이 장충동에 있는 드라마센터에서 공연을 했는데, 기타 하나 들고 모든 음악을 자신의 자작곡으로 한 신선한 공연이었다. 이 때가 통기타 음악의 시작이라고 지은이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 젊은이는 아직도 가끔 TV에서 볼 수 있는 한대수란 분이다. 한대수란 분의 집안은 완전 엘리트 집안이면서 불우한 일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백낙준 박사와 연희전문대학을 설립하고 초대학장을 지내신 분이고, 아버지는 서울대 공대 출신이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당시로는 정말 보기 드문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 가서 핵물리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대수 일곱 살 때 아버지는 실종되었다고 한다. 수소폭탄 기술을 빼돌리지 못하게 CIA가 제거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수소폭탄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의 수제자였던 점에서 신빙성이 있는 말 같다.

...

암튼, 한대수에서 시작한 통기타는 세시봉과 트윈폴리오로 이어지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트윈폴리오는 잘생긴 의대생 출신의 윤형주와 음악에만 미친 송창식의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지만, 그들의 인기는 엄청났다고 한다. 하지만 윤형주가 집안의 반대로 음악을 그만두고 다시 학교공부를 한다고 해서 트윈폴리오는 해체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만둔 윤형주가 일년도 안되어 솔로 앨범을 내었다고 하니, 송창식 입장에서는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할 만 하겠다. 하지만, 송창식 또한 솔로로 데뷔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니, 인생사 바로 당장만 보고는 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활기를 띤 통기타 음악은 모던포크라는 장르로 1970년대 전성기를 이루었고, 69~74학번이 주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1970년대는 소위 청년문화의 부흥을 일어났다. 이때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아침이슬'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를 서강대 새내기 양희은이 청아함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목소리로 불렀는데, 그 가사가 장엄하고, 상징적이어서 이후 시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불렀고, 오늘날에도 시위 때마다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그런데, 김민기가 그 노래를 만든 것은 술 먹고 취해서 묘지에서 잠들고,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 겨우 일어나서 지은 노래라고 한다. 그래서 가사에 묘지가 나오고, 태양이 나온다고 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다. 어찌되었든 이 노래는 청년의 상징이 되었고긴급조치 9호 때 금지곡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수많은 곡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는데, 이 노래만이 아무런 이유 없이 금지곡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록의 대한 역사도 이야기 주었다. 1963 "해변으로 가요"의 키보이스로 시작한 록은 이후 신중현에 의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중현은 "The add 4"라는 그룹을 만들었지만 실패하고 이후 펄 시스터즈를 프로듀싱해서 대박을 터뜨린다. 이후 신중현은 프로듀서로 대성공을 하게 된다. 그가 프류듀싱한 이들이 크게 성공을 했다. 김추자, 장현, 임성훈, 박인수 등등... 신중현 사단이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하고 싶었던 록밴드는 계속되어 실패를 맛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밴드라고 생각하고 만든, 그 이름도 촌스러운 "신중현과 엽전들"이란 밴드가 1974 '미인'이라는 노래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데 신중현에게 암흑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것도 별 생각 없이 한 하나의 거절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요청의 주인공이 청와대에 계신 '그분'였다는 게 문제였다. '그분'은 신중현에게 국민가요를 의뢰했고, 신중현은 바빠서 거절했고, 이로 인해 비극이 시작되었다. 권력의 탄압이 들어온 것이다. 신중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신중현과 엽전들 2집에 '군가'로 가득 채웠고, 잘못을 비는 듯한 바른 자세의 앨범 자켓도 내보였다. 그 앨범 자켓이 책에 실려있는데, 지금 보니 웃음이 절로 나고 오히려 그분의 행태를 비꼬는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분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신중현의 모든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고앞으로 나올 곡마저 금지시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신중현은 한동한 가난과 친구가 되었다. 당시 대마초는 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마초 파동을 일으켜 신중현을 대마초 파동의 왕초로 부각시켰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걸어온 길이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대한 음악도 간단히 이야기해주면서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 이번에는 클래식이다. 클래식 음악가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한 명만 뽑으라고 하면 뽑기가 어려울 지 몰라도, 두 명을 뽑으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뽑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클래식 역사에도 대변화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바흐가 죽은 1750년부터 베토벤이 죽고 난 몇 년 뒤인 1829년까지가 대격변의 시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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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가 죽고 난 후 베토벤이 죽고 난 뒤까지 약 79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이 시기 동안 우리가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경제적으로 중요한 두 사건인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이때 모두 일어났다하루하루 역사가 매일 새롭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격동의 시기에모차르트의 짧은 35년간의 삶과 베토벤의 정말 파란만장했던 57년의 삶이 얹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기반 없이 이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시대를 만든 것도 있지만, 결국 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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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양음악가는 계급의 위치로 보면 중간계급이었다고 한다. 중간계급이라는 말은 잘 하면 더 윗쪽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급이라서, 경쟁이 치열한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음악가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좋은 음악이 많이 나왔고, 많은 작곡가를 배출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그 중에 위대한 음악가인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모차르트는 그가 타고난 것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의 극성으로 음악을 하게 된 것은 너무 유명하다. 이 책에서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악역으로 그린 살리에리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 소속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했는데, 당시 프리메이슨 가입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는 점도 곁들였다. 그의 마지막 불우한 죽음도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모차르트를 좋아해서 모차르트 관련된 책을 여러권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그의 영화 같은 삶은 늘 나에게 감동을 준다. 이 책에서 한가지 알게 된 사실. 하이든이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언성까지 높여가며 그를 지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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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은 정말 끔찍이도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함부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번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의 화음이 이상하다는 어떤 동료 궁정 음악가의 지적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그렇게 썼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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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베토벤은 용모, 나이,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귀족으로 속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귀족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으나, 그렇지 못했고 궁정악장도 되지 못했다고 한다. 베토벤을 다룬 영화로 <불멸의 여인>이 가장 유명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불멸의 여인'은 그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라고 한다. 베토벤은 성격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공격적이고 독립심이 강했다고 하는구나. 스승 네 명이 있었는데 모두 사이 안 좋았다.

우리는 보통 베토벤을 말년에 귀먹은 음악가라고 하면서 더욱 극적인 위대함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는 초기부터 귓병이 있었고, 완전히 안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베토벤의 위대함이 조금이라서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교향곡 <영웅>에 대한 이야기... 나폴레옹을 칭송하기 위한 교향곡. 원래 교향곡의 제목은 나폴레옹의 이름인 '보나파라트'라고 했지만, 나폴레옹이 수세에 몰리고, 검열이 심해져 '보나파라트'로 했다가는 위험에 빠질 것 같아서 그때서야 영웅(에로이카)로 제목을 바꿨다고 한다. 베토벤도 말년에는 행복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소송에 휩싸였고, 검열이 강화된 사회로 인해 자유가 위축이 되었다고 한다. 베토벤에 대해 안좋은 면만 이야기한 것 같지만, 지은이는 시대를 바꾼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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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지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 스물두 살의 더벅머리 청년이 이 저주의 도시 빈에 등장했다. 그는 스승 하이든의 인도를 거부했으며, 한 번 밖에,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인, 모차르트의 오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계했다. 이 청년 베토벤은 모든 제단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권좌를 만들었다. 불손하기 그지없었던 베트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할 규범이란 없다.”

 

나는 이 짤막한 한 줄이야말로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영원한 챔피온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학적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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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 윤심덕]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시작은 일제시대 윤심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더욱 극적인 삶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드라마틱한 삶 때문에 윤심덕의 이야기는 영화, 뮤지컬 등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음모가 있었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하는데,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윤심덕은 유부남 김우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동반자살을 선택했고, 그 이후 나온 윤심덕의 유작앨범 <사의 찬미>는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살한 이후 낸 노래의 제목이 '사의 찬미', 즉 죽음을 찬미한다고 하니 얼마나 절묘한다? 이 노래의 히트는 앨범 판매량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당시 이 노래를 듣기 위해 유성기 판매량도 엄청나게 늘었다는 거다. 당시만 해도 레코드판을 들을 수 있는 유성기는 일부 부유층만 가지고 있었는데, <사의 찬미>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샀다고 한다.

, 이 위대한 속에 어떤 음모가 있었을까? 그들은 정말 동반자살했을까? 그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타살 당했거나 아니면 아예 죽지 않고 해외 어디선가 숨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먼저 그들이 사랑한 사이는 맞았나? 서부터 의문은 시작된다. 그들은 세차례 정도 만나게 되는 시기가 있었는데, 정말 사랑했는지도 확인이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윤심덕은 신여성으로써 포부가 많았고, 자신이 번 돈과 후원 받은 돈으로 동생들을 모두 해외 유학을 보냈다. 가족이나 측근들이 이야기하기를 윤심덕이 자살할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김우진의 동생도 이 사건의 의심을 가지고 사람을 사서 시신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여행한 어떤 일본인이 그곳에서 일본인 부부를 만났는데, 그들이 윤심덕, 김우진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탈리아 주 일본 대사관에 그 지역에 일본인 조사를 요청했는데, 그 지역에 일본인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타살이든 해외 잠적설이 맞다면 누가 꾸민 일일까? 그것은 <사의 찬미>를 기획했던 음반회사가 그랬다는 거다. 그 음반회사는 유성기를 만드는 회사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해진 노래 '사의 찬미'도 원래 앨범에 없었던 노래인데마지막에 급하게 녹음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음정도 좀 맞지 않는다고 한다. 이 정도면 신빙성이 꽤 있지 않는가.

 

[트로트는 우리 것인가?]

트로트의 국적 논쟁가야금의 대가 황병기 선생은 “누가 뽕짝을 우리 것이라 우기냐?"냐고 비판을 하기도 했단다. 트로트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 뿌리까지 왜곡하지는 말자고 한다. 트로트를 전통가요라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과장된 말이라는 거다. 트로트의 뿌리는 누가 뭐라 해도 일본의 엔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평가는 것이 옳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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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는 일본이 만들었고, 그곳에서 전해져 온 음악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한국의 서민정서로 자리잡았고 완성도의 측면에서 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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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평가해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불교 또한 외세에서 들어왔지만, 우리나라에서 꽃을 피운 것처럼 트로트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크게 번성했다고 하면 안될까? 오히려 일본에서 들어온 것을 뻔히 아는데그것을 전통가요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더 창피한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암튼, 이 책에 대한 총평은 최고다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얼른 속편이 출간되어야 한다. 알라딘 서점에서 조회해보면 전복과 반전의 순간” 2, 3권이 조회되는데, 미출간으로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에 나올 것 같다. 기대된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바흐가 죽고 난 후 베토벤이 죽고 난 뒤까지 약 79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이 시기 동안 우리가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두 사건인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이때 모두 일어났다. 하루하루 역사가 매일 새롭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격동의 시기에, 모차르트의 짧은 35년간의 삶과 베토벤의 정말 파란만장했던 57년의 삶이 얹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기반 없이 이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시대를 만든 것도 있지만, 결국 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하이든은 정말 끔찍이도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함부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번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의 화음이 이상하다는 어떤 동료 궁정 음악가의 지적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그렇게 썼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지."

그(모차르트)가 지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 스물두 살의 더벅머리 청년이 이 저주의 도시 빈에 등장했다. 그는 스승 하이든의 인도를 거부했으며, 한 번 밖에,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인, 모차르트의 오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계했다. 이 청년 베토벤은 모든 제단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권좌를 만들었다. 불손하기 그지없었던 베트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할 규범이란 없다."

나는 이 짤막한 한 줄이야말로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영원한 챔피온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학적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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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그래서 이들(10대)은 자신들의 출구 전략으로 '문화'를 선택한다.문화를 통해서 자신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선생과 부모들에 대해 복수할 것을 결심한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들이 부모한테 반항하는 패턴은 똑같다.부모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백인 중산층 부모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아이들은 그것을 잘 알았다.'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라는 부모 세대들을 대표하는 특성을 부정하면서 모든 종교적 교리를 넘어서는 비백인적 행동, 다시 말해서 음탕한 흑인의 밑바닥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이름이 바로 리듬앤블루스였다.


(77)

리듬앤블루스라는 말의 '리듬'과 '블루스'는 모두 음암과 관련된 말이었다. 하지만 로큰롤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단순히 바위가 구른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록(rock)은 동사로 '부딪히다, 흔들다'의 뜻이고, 롤(roll)은 '구르다, 휘감다'라는 뜻이다. 리듬앤블루스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음탕한 네 개의 동사인 rock, roll, shake, rattle 중 두 개인 록과 롤로 만든 것이 로큰롤이다. 로큰롤은 흑인 은어로 남녀 간의 성교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성교를 뜻하는 은어로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말이 '빠구리"다. 아, 제주도에서는 '빠구리'는 '땡땡이친다'는 뜻이므로 제주도는 여기서 제외한다. 그런데 KBS의 음악 프로그램인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진행자자인 유희열이 새로 음반을 낸 YB를 소개하면서 "우리 YB의 새로운 빠구리 음악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방송 진행을 했다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가 바로 영구 방송 출현 금지에 처해질 것이다. 로큰롤이라는 말 자체가 미국 기성세대의 주류 백인들에게 분노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개념이었다.



(119)

서태지와 아이들이 강렬한 기타 연주에 전통 악기를 조합한 <하여가>를 발표할 때 머리를 꼬아서 레게파마를 하고 나온 것은 레게음악을 한다는 상징이었다. 레게파마는 한국식 영어였고, 정확한 단어는 '드레드록'(dreadlock)이다. 드레드록은 "나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을 신종하는 자입니다."라는 뜻이다. 라스타파라아니즘은 흑인왕국주의라는 뜻으로, 흑인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드레드록은 전사의 표식이다. "더 이상 백인의 지배를 거부한다. 나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전사, 라스타다"라는 표식이었다. 이렇게 모든 패션에는 다 이유가 있다.


(179)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댄스뮤직이다. - 리하르트 바그너


(197)

여기까지가 바흐가 죽고 난 후 베토벤이 죽고 난 뒤까지 약 79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이 시기 동안 우리가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두 사건인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이때 모두 일어났다. 하루하루 역사가 매일 새롭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격동의 시기에, 모차르트의 짧은 35년간의 삶과 베토벤의 정말 파란만장했던 57년의 삶이 얹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기반 없이 이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시대를 만든 것도 있지만, 결국 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208)

바흐가 남긴 어록 중에서 정말 바흐를 잘 설명하는 한마디 말이 있다.


"누구나 나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나만큼 쓸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바흐는 진심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바흐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는 아니었다.



(226)

요제프 2세는 그 오페라의 초연을 보고는 이렇게 딱 한 줄로 표현했다.


"친애하는 모차르트여, 그대의 작품에는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




(235)

하이든은 정말 끔찍이도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함부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번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의 화음이 이상하다는 어떤 동료 궁정 음악가의 지적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그렇게 썼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지."



(252)

상황이 이렇게 달랐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창작의 동기도 달랐다. 모차르트의 꿈은 자기 작품을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작품은 630개가 넘는 그의 작품 중 몇 개 되지 않는다. 먹고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귀족들에게 위촉받은 것이나 후원자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반면에, 베토벤은 서양음악사 최초로 누구의 주문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작품을 쓴 작곡아였다. 물론 베토벤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헌정했다. 하지만 모차르트와는 달랐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헌정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곡을 써놓고 난 뒤에 누군가에게 떠맡기듯이 헌정을 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자기 마음대로 헌정을 해놓고는 돈을 달라고 한 적도 있다. 마치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것처럼 작품을 헌정하고, 돈을 요구해서 받아낸 것이다.




(266)

"친구들이여, 박수를 쳐라! 연극은 끝났다."


베토벤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말이다. 폼 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죽기 하루 전에 한 것이다. 실제로 베토벤은 이런 말을 끝으로 눈을 감는다.


"아깝다, 아까워. 너무 아까워!"


베토벤은 대체 뭘 아까워했던 걸까. 베토벤은 병석에서 와인을 주문했다. 그런데 그 배달이 조금 늦었다. 그는 마지막 와인을 먹지 못하고, 아니 따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와인 도착이 너무 늦었다고 한탄하면서 죽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을 규정하는 말 중에 나는 롤랑 마뉘엘의 이 문장을 가장 좋아한다. 


"베토벤은 음악을 기술에서 의식으로 만든 사람이다."



(270)

모차르트는 죽기 3개월 전 자신의 친구이자 최고의 동료였던 대본 작가 로렌초 다 폰테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썼다.


"쉬는 것보다 작곡하는 것이 덜 힘들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일을 한다."


굉장히 짠한 마음이 드는 말이다.



(272) 

그(모차르트)가 지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 스물두 살의 더벅머리 청년이 이 저주의 도시 빈에 등장했다. 그는 스승 하이든의 인도를 거부했으며, 한 번 밖에,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인, 모차르트의 오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계했다. 이 청년 베토벤은 모든 제단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권좌를 만들었다. 불손하기 그지없었던 베트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할 규범이란 없다."


나는 이 짤막한 한 줄이야말로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영원한 챔피온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학적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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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통권 148호 - 2016년 5월~6월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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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또 한번의 선거와 정치혁명]

0.76%.

지난 4월에 있었던 20대 국회의원 녹색당 정당 지지율이다. 내심 3%의 득표율로 원내 진출을 기대했으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성 정당의 높고 높은 벽이 엄청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3%까지는 어렵더라도 1%는 쉽게 넘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벽이다. 여소야대라는 보기 드문 선거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의 예상 외의 적은 득표율과 녹색당의 원내 진출 실패로 인해 그리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다. 기성 정당들은 더욱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선거가 아닐까 생각했다. 대인배처럼 작은 정당의 권리를 알아주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있을까? 다른 나라처럼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원 자리를 주는 제도가 과연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을까? 이번 호에는 녹색당으로 종로에 출마했던 하승수 녹색당 대표가 쓴 정치혁명에 대한이 글이 있었다. 현재 다른 나라의 선거제도를 봤을 때, 그나마 대의제 민주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제도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생각한다. 정당 지지율만큼 국회의석을 차지하는 것... 지역구 의원으로 국회의석을 일부 차지하고, 각 정당은 정당 지지율에서 부족한 만큼 비례대표제의 수를 받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정당지지율과 국회의석 수 비율을 맞추는 그런 제도다. 만일 지역구로 당선된 인원수가 정당지지율보다 많게 되면, 그만큼은 보상해 주는 제도. 그래서 간혹 전체 국회의원수가 의원 좌석 수보다 많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상당히 합리적인 제도이지만우리나라에는 그것을 도입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 되면 손해를 보는 거대 정당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깝다. 그렇게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되면, 작은 정당들의 원내 진입하는데 더 쉬워질 텐데

그러면 작은 정당들이 원내 진입하면 뭐가 달라질까? 그것은 뉴질랜드의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처럼 소선거구제를 가지고 있다가 제법 최근인 1990년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했다고 하고, 그 이후 두번째 선거에서 벌써 많은 좋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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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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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화를 보니, 부러우면서도 우리나라도 희망을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게 된다. 일부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도 있고, 시민들의 여론이 형성이 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또 쉽게 희망을 품는다. 그렇기 위해서는 이런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정당에 힘을 실어주고, 표를 주어 연동형 비례대표 제도를 대세로 만들면, 결국 바꿀 수밖에 없지 않을까? 희망고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학의 붕괴]

이번 녹색평론의 부제는 '대학의 붕괴'. 언제부터인가 대학은 취업을 위한 학원 같은 곳으로 되어버렸다. 대학의 추구하는 가치관은 무엇일까? 대학의 평가에 취업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우리나라 대학은 취업을 위한 곳으로 바뀌었고, 그것에 필요 없는 학과는 없어지고, 그것에 필요 없는 강좌는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무한 경쟁을 표방하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이외의 가치는 중요시 하지 않는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대학들은 대학평가 순위의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보다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그렇다고 대학이나 학생들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그 시스템대로 따르고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대학의 문제가 우리나라에만 해당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다른 나라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녹색평론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맹주가 된 미국과 일본의 대학 문제점을 적은 글들도 실렸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유명 대학은 강의를 영어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영어로 강의를 하면 대학평가를 좋게 받기 때문이란다. 대학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로 위해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에 대한 단점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실력은 우수하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대학 교수가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영어를 능숙하게 하는 사람으로 교수 자격을 제한하게 되면, 그만큼 인력풀이 축소되는 것이다. 정말 이 한심한 제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음이 답답하다.

그런데, 자존심이 세다고 하는 일본에서도 그렇게 대학 강의를 영어를 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약간은 예상치 못했던 사실이다.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일본의 두 지식인이 토론을 하는데그들도 영어로 대학 강의를 하는 것은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 발췌글처럼 영어로 강의를 하는 것에 대한 부작용을 이야기하는데, 공감이 갔다. 아래 글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일본’을 ‘우리나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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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가 학문연구라는 고도의 의론의 장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일본어도 최첨단의 용어를 갖지 못하고 뒤떨어진 언어로 전락합니다일본어가 그렇게 열화된다면 그것이 또 일본 국민의 우민화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한편으로, 표면상으로 영어를 매끄럽게 말하는 엘리트들도 모어(母語)에 입각한 깊은 사고력이라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우수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결국, 일본 전체가 우민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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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에 오늘날 대학의 문제점에 대한 글이 많이 실려 있었다. 많은 글들에 공감이 갔다. 아래 발췌글들은 곧 나의 생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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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대학은 운영하는 대학본부는 대학의 운영 목표를 학문 탐구와 지적 성숙을 이끄는 교육에 두지 않는다그들의 관심은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관리하는 것이다따라서 대학의 관리체제는 기업의 관리체제와 같다기업의 경영 결과가 재무제표라는 숫자로 나타나듯이 대학의 운영 결과는 대학의 순위로 나타난다가령 순위평가에서 7위인 대학은 6위인 대학에 비해 좋지 않은 대학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대학의 모든 노력은 순위를 올리기 위한 것이 되고순위평가에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부문은 대학 운영진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정부 역시 대학을 숫자로 관리하며, 그 숫자에 의해 재정지원 여부와 그 규모를 결정한다대학정보공시라는 제도는 겉으로는 각 대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이지만이 정보 공시에 나와 있는 정보는 그 학교에서 무슨 연구를 하며 어떤 교육을 받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대학에 대한 정보든 숫자이다학생의 수, 교수의 수, 논문 편수, 예산 규모, 유학생 수 등이 공시의 내용이며이러한 숫자를 나열하면 대학의 면모를 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숫자가 지배하는 대학, 돈이 지배하는 대학에 대학의 본령인 학문과 교육은 없다대학은 이미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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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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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이 급진적 변화란 무엇인가사실상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초,중등교육은 물론 대학에서도 인문학과 예술 교육이 축소되고 있다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붙들린 정책결정자들의 눈에는 인문학이나 예술은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한 것으로 비쳐지고 있을 뿐이다그리하고 그것들은 학교의 교과과정에서그리고 부모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빠른 속도로 설 자리를 잃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과학과 사회과학이 갖고 있는 인문학적 측면-상상력과 창조성에 관계된 요소 및 엄격한 비판적 사고-도 단기적인 이익추구에 혈안이 된 국가정책 때문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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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세계시민이 되자면 정말 인문학이 필요한가세계시민이 되자면 우선 많은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지만그러한 지식은 인문적 교육 없이도 획득할 수 있다그러나 책임 있는 시민이 되자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즉 역사적 증거를 평가하고, 경제적 논리들을 사용하고그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며사회적 공정성 여부를 평가하고, 외국어를 말하며세계의 주요 분쟁지역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사실적 부분들에 관한 지식만을 얻는 데는 인문학과 연관된 지적 기술이 없이도 가능하다그러나 그 연관관계들의 어떻게 되는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실적 지식만을 갖는 것은 거의 무지만큼 나쁜 것이다왜냐하면 그런 경우학생들은 정치가들이나 문화적 선도자들이 제공하는 상투적인 것과 진실한 것 사이를진짜와 가짜 사이를 구분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세계 역사나 경제에 관한 이해가 지적으로 총명한 세계시민의 육성에 쓸모 있는 것이 되려면 인문적, 비판적 능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따라서 종교나 정의에 관한 철학적 이론에 대한 학습과 나란히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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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도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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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글쓰기]

녹색평론 몇 호 전부터 글쓰기에 대한 글이 연재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서인지, 녹색평론에서도 그것을 기획했던 것 같다. 그 연재가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시인이자 경희대 교수인 이문재라는 분이 쓰신 글인데,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으로 어르신 분들의 글쓰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가면 갈수록 세대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그런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로 글쓰기를 제안하고 있었다. 어르신들이 노년에 글쓰기를 많이 하고, 그 글들을 젊은 세대와 공유하면 세대간 양극화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글쓰기는 모든 세대 많은 사람들이 하면 좋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글들을 공유하고 그런 글들이 여론을 만들어내고그렇게 되면 오늘날 정치가 유권자를 무시하는 행태도 글쓰기를 통해서 여러 사람과 공유하게 되면 그들도 무시 못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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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우리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회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의 저자로 거듭난다면 현실정치가 지금과 같은 파행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현실정치가 유권자를 이토록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자율적 인간, 그리고 자율적 인간이 형성하는 공동체가 가져야 할 기본 능력이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다재차 강조하지만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글쓰기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분노와 절망을 글로 써내고, 꿈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위에 인용한 글의 저자가 말했듯이 소망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그라민은행을 설립하고 '소셜픽션'을 창안한 무하마드 유누스가 말했다. "꿈은 함께 꿀 때 더 빨리, 더 크게 이뤄진다." 사회적 글쓰기는 함께 꾸는 꿈이다. 집단지성이고 소셜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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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에 실렸던 글쓰기에 대한 연재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된다고 한다. 나중에 기회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 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고, 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 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 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 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 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 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 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 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도, 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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