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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평전 (양장) - 개정판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는 김삼웅이 쓴 인물 평전을 좋아한단다. 이번에 읽은 책은 그가
쓴 <장준하 평전>이라는 책이란다. 장준하. 학창 시절 교과서에 나오기에는 너무 최근 사람이거나, 군사 정권이 만든 국정 교과서에 나오기에 그의 삶이 너무 독재에 저항을 했거나, 아무튼 교과서에 그가 나오지는 않았어. 그리고 그는 아빠와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빠가 그를 제대로 알 기회는 없었단다. 어른이 되고 나서, 현대사에 관한 책들을 통해서, 그의 단편적인 지식들을 알게 되었고, 그가 독재 정권에 저항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당시 그의 죽음은 실족사로 기록되었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을 실족사로 보지 않았고,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그의 죽음의 배후에는 권력이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하는구나. 당시
권력의 후세가 오늘날의 권력을 잡고 있는데, 그야말로 나라를 말아 드신 것 같더구나. 모든 백성들이 분노를 하고 있는 요즘이란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자신만의 세상에서 살고 계신 것 같구나. 권력자의 부정부패는
참을 수 있지만, 이런 수치심은 참을 수 없더구나. 이런
국가망신이 또 어디 있겠니. 어제는 아빠가 꿈을 꾸었는데, 그
분이 곧바로 물러나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단다. 너무 기쁜 나머지 눈을 번쩍 떴는데, 꿈이었던 거야. 장준하 선생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보고 계신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이 만들려고 했던 대한민국은 이런 건 아닐 텐데… 실망을
하시다가도 이백만 백성들의 성숙한 시위 문화에 뿌듯해하면서, 이제 곧 대한민국은 정상궤도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단다. 자, 그러면 이제
그런 희망을 가져보면서, 장준하 선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1.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에서 장준하가 실족사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당시
장준하는 유신 독재 체제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던 재야 인사였고, 종교계, 정치권, 재야 인사를 모두 아우르는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시기였단다. 75도 경사의 낭떠러지에서 발견된 장준하는 옷에 아무런 생채기가 없었고, 손이나
다른 곳에 아무런 골절이 없었다고 하는구나. 그저 머리 둔부에만 함몰이 유일한 상처였대, 그러면서 실족사라고 하니, 누가 믿겠니? 하지만, 서슬 퍼런 유신 정권 하에서 그 누구도 타살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어.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뻔히 알고 있고… 민주화
정권이 들어와서도 한참이 지난 2004년과 2012년에 다시
조사를 하였고, 그의 결과는 타살일 가능성이 높다고 감식 결과가 나왔다고 하는구나. 하지만, 명백히 타살이라고 도장 찍은 것은 아니래. 아직도 의문사로 남아 있는 거야. 20대 국회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 규명 특별법'을 재발의한다고 하니, 앞으로 추이를 살펴보아야겠구나.
2.
장준하는 압록강이 바로 보이는 의주에서 태어나 삭주로 이사를 갔다고 하는구나.
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대. 그는 신성 중학교에 다니면서, 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는데, 방학마다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르쳤어. 이때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는데, 이때부터
일본에 대한 저항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당시 신성 중학교 옆 동네에 오산 중학교가 있었는데, 그곳에 도깨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선생님이 있어서 직접 찾아가서 만나기도 했다는구나. 그 선생님이 나중에 오랜 인연을 맺게 되는 함석헌이었다고 하는구나. 장준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할 수 없었고, 바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단다. 그러다가 나중에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어. 당시는 1940년대로 일본의 사정이 점점 안 좋아지던 시기였어. 학도병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이 끌려가고, 젊은 여인들은 정신대로 끌려가던 시기였단다. 장준하는 교직생활을 할 때 그가 가르쳤던 김희숙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 연정을 키워왔는데, 김희숙 또한 정신대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일본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을 해서 김희숙과 결혼을 했단다. 유부녀는 정신대로 끌고 가지는 않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는
그 나름의 계획을 세웠어. 일본 학도병에 지원했다가 상황을 봐서 중국으로 망명을 하겠다는 계획이었어. 결혼을 하자마자 장준하는 일본 학도병에 지원을 했고, 훈련 도중에
기회를 봐서 동료 4명과 함께 탈출을 하였고, 중국군 유격대에
들어가게 되었단다.
그렇게 쉽게 중국군 유격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중국군 유격대에 있었던 김준엽을
만났기 때문이란다. 장준하 일행은 중국군과 함께 있었지만, 무기도
없고, 그저 제식 훈련만 하고 있었어. 그리고 중국군이 팔로군과
자기 민족들까지 싸우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을 했단다. 장준하 일행은 중국군 소속의 임천군관학교에서
머물렀는데, 무기도 없어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어. 그는
정신이라도 무장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잡지 <등불>을
발행했어. 거의 문집 수준의 잡지였지만, 앞으로 그의 앞길에
늘 잡지와 함께 하는 출발점이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둘 수 있었단다. 그들은 중대 결심하게 된단다. 당시 임천군관학교에는 삼십여 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로 가기로 했어. 가는 길은 도적도 많고, 중국군의
내전도 있었고,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 지 모르는 일본군들도 있었어. 그 길도 가까운 길이 아니었단다. 6000리 길이었어. 그것도 추운 겨울이었어. 하지만,
장준하 일행은 그 먼 길을 큰 피해 없이 뚫고 지나와 중경 임시정부의 보금자리에 도착을 했단다. 김구
선생이 직접 환영을 해주었으니, 감격이 얼마나 컸겠냐… 하지만, 장준하는 이내 실망을 하게 되었단다. 임정 요인들은 파벌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야. 독립 투쟁을 위해 먼 길을 헤쳐온 장준하의 눈에는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었지. 그는 임정 요인들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어. 그는 분노에 찬
독설을 거침없이 해냈어. 그 자리에 있던 임정 요인들은 크게 반성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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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임시정부의 문제점을 국무위원과 교포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고발하기로 작정했다. 국내정세의 보고로 분위기가
처연해지자, 임시정부 내부의 문제점을 거론했다.
“요즘 우리는 이곳을
하루빨리 떠나자고 말하고 있다. 나도 떠나고 싶다. 오히려
오지 않고 여러분을 계속 존경할 수 있었다면 더 행복했을지 모를 일이다. 가능하다면 이곳을 떠나 다시
일군에 들어가고 싶다. 일군에 가면 항공대에 들어가 중경폭격을 자원,
이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
선생님들은 왜놈들에게
받은 설움을 다 잊으셨는가. 그 설욕의 뜻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분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러 온 것이지. 결코
여러분의 이용물이 되고자 이를 악물고 헤매여 온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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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임시정부에 머무르면서, <등불>이라는 잡지를 다시 만들었어. 그는 광복군 생활을 하다가 서안에서
미군의 첩보원인 OSS 대원이 되어 훈련을 받게 되었어. 이곳에서
이범석 장군을 만났어. 장준하는 OSS 대원으로써 국내 진공
정진대에 선정되어 국내 진입 훈련을 받았어. 하지만, 국내
진입 바로 직전, 일본은 무조건 항목을 하게 되고, 길고
길었던 일제 치하가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래서 그는 광복군 신분으로 8월 18일 귀국하였는데, 아직
일본군이 다 물러난 것이 아니었는지, 여의도 공항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단다. 그리고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단다.
임시정부에서 맺은 인연으로 김구 주석을 보좌하기 시작했지. 그러나
갑작스러운 해방은 행복만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어. 나라는 대혼란이었어. 남과 북으로 나뉘는 조짐이 보이고, 남한 내에서도 권력과 탐욕에
눈 먼 이들이 있었어. 장준하는 김구를 보좌하다가 OSS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범석을 돕기 위해 김구를 떠났는데, 예전의 이범석이 아닌 모습에 실망을 하고 이범석을
떠나게 되었단다. 참고로, 장준하는 자신의 항일 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는데, 그 책의 제목은 <돌베개>란다. 우리 집에 이 책도 읽는데, 아빠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어. 조만간에 읽어봐야겠구나.
3.
해방 이후 5년도 안되어 대한민국은 최악의 시간을 겪게 된단다. 장준하도 피난행렬을 따라 부산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사상계>라는 잡지를 발행하게 된단다. 그때는 알았을까? 평생을 같이 하게 될 잡지였다는 것을 말이야. 물론 초기에는 무척 힘들었지. 지식인들을 위한 잡지라고 해야 할까? <사상계>는 지식인들과 학생들 사이로 조금씩조금씩 인기를
끌다가 함석헌을 만나게 되었단다. 예전에 이웃동네의 유명한 선생님으로 알고 있던 함석헌. 당시 큰 활동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장준하의 <사상계>에서 그의 글을 싣기 시작했고, 이승만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본격적인 매체가 된 거야. 그리고 <사상계>는 최고의 절정기를 이루게 되었대. 길거리에서 젊은이라면 <사상계>를 들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각할 정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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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가 들사람
함석헌을 필자로 ‘발굴’한 것은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장준하와 함석헌은 <사상계>를
통해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이후 한국 사상계와 정신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뿐 아니라 언론사와 반독재 민권운동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장준하가
존재하므로 <사상계>가 있었고, 함석헌의 존재로 인해 <사상계>는 그 존재의 빛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사상계>를 매체로 하여 함석헌과 장준하의 가치와 역량은 상승 효과를 띠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사상계>가 사라진
뒤에도 반독재투쟁을 함께하면서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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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창간했을 당시에는 계몽지, 교양지의 성격을 띠던 <사상계>는 정치평론지 성격을 띠면서 권력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단다. <사상계>의 기자였던 노종호라는 사람이 <사상계>를 네 시기를 구분한 것이 있는데, 이것을 읽어보면, <사상계>가
어떤 잡지였는지,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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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는 계몽지, 교양지적 성격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시기로서, 1953년 창간에서부터 1958년에 걸치는 6년간이다. 대체로 이 시기에 학생층에 많은 독자를 갖고 있었는데, 철학, 역사, 교육, 사회, 문화예술과 관련된 지적 갈등을 풀어주었다고 평가된다.
제2기는 정치평론지적 성격이 두드러진 시기로서, 1959년에서 1962년에 걸치는 4년간이다. 이
시기는 정치적 변동이 격심해지는 시기로서, 자유당 정권말기에서
4.19 혁명과 이 박사의 하야, 민주당 정권의 탄생과 혼란, 5.16 군사쿠데타와 민주당 정권의 붕괴 그리고 군정이라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상계>는 정치정세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반독재, 반부패, 반봉건의
필봉을 휘두르면서 민주정치의 원론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였다.
제3기는 정치투쟁적 성격이 두드러진 시기로서, 1963년에서 1965년에 걸치는 2년간이다. 이
시기는 언론인으로서의 장준하 선생이 야당정치인, 반체제 민주투사, 통일운동
지도자로서 그 역할이 바뀌어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를 <사상계>쪽에서 보면 <사상계>의
중심지도력이 해체되는 시기, 공동화되는 시기라 하겠고, 이로써 <사상계>의 시대적 임무와 역할이 끝나게 되는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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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사상계>를
통해 이승만 독재에 대한 강도를 높여갔고, 당시 사람들은 <사상계>를 보면서, 이승만 독재에 대한 분노를 키워갔단다. 그리고 분노의 결정체는 4.19 혁명으로 크게 타올랐으며, 결국 백성의 무서움을 알고 이승만이 하야를 했단다. 다시 오늘날
상황이 겹쳐지더구나. 백성들의 90% 이상이 허수아비 정권에
분노를 하고 있고, 자제력을 가지고 촛불로 분노를 태우고 있는데, 허수아비는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 아직도 백성 무서운 줄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언제까지 자제를 가지고 촛불만 들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자신이 숨기고 있던 약점이 얼마나 더 들어나야 그 자리에서 물러날 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이 떨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허수아비의
약점을 꼭 쥐고, 자신에게 엄한 짓 하면 다 까발리겠다고 협박하던 그.
이젠 허수아비의 약점을 모든 백성들이 알게 되었으니, 그가 쥐고 있는 패가 사라져 버리게
된 거야. 그러면, 이제 그도 더 이상의 방패가 사라졌으니, 이제 법의 심판을 받지 않을까?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무척 기대되는구나. 아빠가 딴 데로 빠져버렸네.^^
다시 장준하 선생의 이야기를 해줄께. 4.19 혁명이 일어났지만,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혼란만 더 부추겼단다. 아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아빠는 생각한단다. 하지만,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총칼로 정리한 이가 있으니 바로 박정희였단다. 장준하는
처음에는 5.16 쿠데타를 반겼단다. 혼란스러운 정국을 정리해
주었으니… 그런데, 박정희가 정권을 찬탈할 것까지는 몰랐던
것 같더구나. 박정희의 속마음을 곧바로 알게 되고, 군정에
반대하여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단다. 독재 군사 정권은 권력을 잡고 무서울 게 없었어. 그들에게는 권력만 있는 게 아니라 총칼도 있었어. 부패 언론인으로
만드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어… 함석헌과 장준하는 같이 체포되기도 했단다. 그래서 <사상계>도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어. 이에 굴하지 않고, <사상계>는 더욱 날카로운 펜대로 바꾸었단다. 장준하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기로
하고, 감옥에 있을 때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당선까지 되었단다.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사상계>를 발행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넘겼는데, 그 이후
<사상계>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단다.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재야에서 반 독재 저항
운동을 하였단다. 박정희가 유신 헌법을 들고 나왔을 때는 박정희한테 공개 서한을 보내는 증 더 강도
높은 저항 운동을 벌였어. 끈질긴 독재를 몰아내자는 투쟁을 벌였던 장준하를 없애기로 했겠지. 그렇게 강렬하게 타오르던 장준하 선생의 투쟁불꽃은 독재에 의해 꺼지고 말았던 것이란다. 정의를 부르짖는 것이 죽음을 내놓고 해야 하던 시절이었어. 그 시절
그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만 했었는데, 최근에는
몸소 경험하게 해주고 있으니, 정말 괴롭구나. 너희들이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정의롭고 합리적인 나라였으면 좋겠구나.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도 촛불을 함께 밝혀야 할
것 같구나. 그렇게 모인 수백만 개의 촛불은 아마 밝은 미래를 밝혀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