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3)
대엽을 무기로 고사리는 폐름기말의 대멸종을 버티며 중생대를 자신의 시대로 맞을 준비를 한다. 더불어 고사리류는 엄청난 진화방산을 해낸다. 커다란 잎으로 광합성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키운 덕분이다. 마치 영국이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생산으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것처럼 고사리는 고생대 말과 중생대 초의 식물계의 패권을 차지한다.
(30)
그런데 은행나무는 생물분류상 은행문 은행목 은행과 은행속 은행종일뿐 아니라 놀랍게도 은행문에
속하는 유일한 생명이다. 그의 가까운 형제들은 2억 7천만 년 전 페름기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중생대를 거쳐 번성하다가 신생대가 되자 모두 멸종해버리고 은행나무 하나만
남게 된 것이다. 신생대 이후 은행나무의 형제들은 화석으로도, 살아
있는 개체로도 보이지 않는다.
(43)
중생대 전반을 거쳐 확연한 지상 생태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겉씨식물의 경우 가장 살기 좋은
곳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았을 것이고 그곳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데 굳이 꽃을 피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점점 높은 산 위로 올라간 식물이다 건조한 지역으로 이동한 식물들은 살기 위한 시간과 진화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들은 좀 더 효율적으로 번식을 해야 했고 하나의 꽃가루도 하찮게 여기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짧은 우기에, 혹은 짧은 여름에 재빠르게 번식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애써 수정한 씨앗이 이런 건조하고 추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투쟁의 결과가 꽃이고 배젖이다.
(59-60)
딱정벌레부터 한 번 살펴보자. 곤충 중에서도 가장
많은 종수를 차지하는 딱정벌레목의 곤충은 현재 알려진 수만 35만여 종이다. 이는 곤충 전체로 봤을 때는 40%, 동물계 전체를 봤을 때 25% 가량을 차지하는 수치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종까지 염두에
두면 약 500~800만여 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방아벌레, 잎벌레, 바구미, 풍뎅이, 곰보벌레, 물방개, 물진드기, 물맴이, 딱정벌레 등 다양한 곤충들이 딱정벌레목에 속한다. 두 번째로 종류가 많은 나비목에는 약 18만 종, 세 번째로 다양한 종수를 자랑하는 벌목에는 약 15만 종이 기록되어
있어 이들 셋이 종을 합치면 전체 곤충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96)
이로써 피부는 기체 교환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를 내려놓게 되었다. 단순한 세포막이었던 시절부터 가져왔던 임무가 사라지자 피부는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역할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단단한 각질이 생겨 피부를 감싸기 시작했으며, 털이나
깃털이 나면서 외부의 온도변화로부터 몸 내부를 보호하는 역할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어떤 피부에는
땀샘이 만들어지면서 보다 능동적으로 외부의 온도변화에 대응했다.
(130)
바다에 살기 시작한 이후 고래의 조상은 점점 덩치가 커진다.
가장 큰 이유는 체온 때문이다. 바닷물은 공기보다 체온을 빨리 뺏어간다. 체온을 보존하는 것이 바다에서 살기로 결정하는 순간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특히 고래는 어떠한 조건에서도 항상 일정한 체온을 유지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포유동물, 즉
정온동물이었다. 몸 전체에 두꺼운 피하지방을 둘러 체온은 유지하는 것은 불가결한 선택이었고, 이로 인해 덩치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커진 덩치는 부피 대비 표면적을
줄여 체온이 손실을 방지해주었다. 추운 극지방에 사는 생물들이 덩치가 커진 것도 같은 이유다. 바닷속에서 사는 시간이 많은 펭귄이나 물개, 바다사자 같은 생물들도
육지의 친척들에 비해 덩치가 크고 피하지방층이 두렵다.
(136)
처음에는 물속까지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점점
건조해지는 환경에서 육식동물이건 초식동물이건 먹이를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한 선택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초식동물은
덩치가 더 크고 무리를 잘 지어 다니는 동물들이 얼마 남지 않은 식물들을 휩쓸고 가면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었을 것이고, 육식동물은 먹이로 삼을 초식동물이 줄어드니 경쟁이 더 치열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던 동물들이 바다에 다다랐고, 썰물 때 물이 빠진 갯벌이나 모래사장에서 물때를
못 맞춰 발이 묶인 물고기를 먹거나 조개를 깨먹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초식 동물은 바닷가에서 소금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염생식물을 처음 먹어 봤을지도 모른다. 육식동물이건 초식동물이건 그렇게 조금씩 물속의
먹이를 먹으며 물속 먹이 사냥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168)
날개를 만들기까지의 고된 과정을 생각하면 이들이 스스로 원해서 날개를 가졌을 가능성은 없다. 드넓은 대지 위에 자신의 몸 하나 편안하게 누일 곳이 없었던 생명, 가는
잠이 들다가도 풀숲을 뒤척이는 작은 기척에 화들짝 놀라 큰 눈을 굴리며 사방을 살피던 생명, 먹이를
구하러 다니다가 천적의 냄새에 쪼르르 도망가던 생명. 이런 생명들이 나무를 타고 나무 위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새의 비상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234)
뱀은 몸이 가늘고 길다. 이런 몸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허파도 대단히 좁고 길게 진화해 왔다. 많은 종류의 뱀에서 왼쪽 폐는 퇴화되어버리기까지 했다. 땅속으로 들어가니 사지도 소용이 없었다. 뱀의 앞발과 뒷발은 조금씩
퇴화되어 줄어들다가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네 다리가 사라지고 난 뒤 대신 긴 척추를 얻었다. 수백 개에서 많게는 천 개가 넘는 척추가 뱀들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기어
다니고, 땅속을 헤집고 다닐 수 있는 힘이다.
(237-238)
뱀이건 도마뱀이건 땅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지상의 생태계에서 자신이 누리던 역할과
지위를 빼앗겼기 때문일 것이다. 벌레를 잡아먹자니 포유류의 선조들이 훨씬 더 빠르게 사냥을 해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다른 작은 동물을 잡아먹고 살지니 지배파충류에서 진화한 공룔 중 덩치가 비교적 작은
이들에게 밀려난다. 변온동물이라 밤에는 움직이기가 힘들고 낮에는 다른 동물과의 경쟁이 버겁다. 그래서 갈 수 밖에 없었던 곳이 바로 흙 속이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포식자를
피해 땅속으로 숨어, 흙 속을 헤매는 다른 벌레를 먹으며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252)
어디 비단 벌거숭이두더쥐뿐일까, 무족영원도, 뱀도, 두더지를 비롯한 포유류도 흙 속으로, 땅속으로 들어간 모든 생명은 하나도 빠짐없이 지독한 과정을 겼었다. 팔다리를
없애고, 눈이 멀고, 모습을 완전히 바꾸는 긴 세월에 걸친
진화를 버텨내고 이겨냈다. 그 결과로 땅속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냈다.
기껏해야 선충이나 지렁이 정도가 최상위 포식자였던 지하세계에 새로운 생태계를 구성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와 자연의 경계를 넘어간 생물들에 의해 지구는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생태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257)
익숙한 환경과 삶에서 내몰린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인간의 선조 역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미 나무를 타기에 적합하게 진화한 앞발로는 초원에서 사족보행을 할 수 없었다. 우리의 숲 친척인 고릴라와 침팬지 등은 손등은 땅에 대며 걷는 이른바 ‘손등걷기’를 한다. 손등걷기는 숲에서 잠시 걷는 것에는 괜찮을지 모르나 초원에서
천적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때 걷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무를 타기에 적합한 손으로 오랜 기간
초원을 걷기가 힘든 일이었다.
(259)
이들은 강가로도 갔다. 강바닥에 묻혀 있는 조개를
파내어 먹었다. 손에 쥔 돌을 내리쳐 조개의 껍데기를 부수고 알멩이를 먹었다. 바닷가에서도 마찬가지로 조개를 먹었다. 무리를 짓기 시작한 후에는
다행히 웬만한 포식자들은 가까이 접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류의 선조들은 하루 종일 힘들게
먹이를 찾아 헤매야만 했다. 숲 속에선 손만 뻗으면 있던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헤매야만 했다. 숲 속에선 손만 뻗으면 있던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이젠 발품을 팔아 강가로 가야했고, 숲으로 잠깐 들어갔다가도 잽싸게 나무 열매를 따고는 숲 속 원숭이 떼를 피해 도망쳐야 했고, 사자 무리를 만나도 도망을 쳐야 했다. 숲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험한 날들이었다. 밤이 되어도 안식은 없었다. 숲에서는 밤마다
나무 위에 모여 포식자를 피할 수 있었지만 허허벌판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야행성 포식자를 피해 선잠을 자야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될 때까지 먹이를 구해 사방을 돌아다니고, 포식자들을 피해 다니는 삶이 계속되었다.
(267)
이런 인간의 탈출은 기존의 생태계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이 개척한 곳마다 기존의 생태계는 배제된다. 농경지를 일구면 그 곳에 살던 식물들이
사라지고, 식물과 함께 살던 동물과 균도 함께 사라진다. 도시를
세우면 숲이 사라지고 숲과 함께하던 동물들이 사라진다. 도로를 놓으면 도로 양쪽으로 자유롭게 오가던
동물들은 고립된다. 항구를 만들면 그 주변의 생태계가 파괴된다. 인간의
영역이 확장될수록 기존에 존재하던 지구 생태계는 줄어든다. 인간의 탈출은 이제 인간의 공습이 되었고, 한정된 지구에서 생태계는 지구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이후 최초로 영역이 축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273)
생태계 내에 강력한 경쟁자가 생기면 경쟁에 진 생물종은 생태계의 경계까지 쫓기고 되고 그 곳에서
새로운 생태계로 자리를 옮기든가, 아니면 종 자체가 사라지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나 강력한 경쟁자인 인간의 등장은 생태계의 모든 종들을 경계로 몰아붙이는 것도 모자라, 모든 생태계를 파괴해 나가며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기회까지 차단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생물들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멸종해 나가고 있다. 지난
역사 속의 5대 멸종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멸종이었던 폐름기 대멸종보다도 더 빠르게 생명종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번성하는 종은 인간이 선택한 몇몇 가죽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도시에서 살도록 진화한 특정한 생물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