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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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림원이 2006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터키의 오르한 파묵을 선정하면서 밝힌 선정 이유는 이러하다. “고향 이스탄불의 우울한 영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문화간 충돌과 얽힘에 대한 새로운 상징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파묵의 소설은 세편 정도 읽은 것 같다. <하얀성>, <검은책>, <내이름은 빨강> 우선 <하얀성>. 읽은 지 2~3년은 된 것 같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안타깝다.

 

다음은 <검은 책>. 이건 작년에 읽어서 내용은 대충 기억이 난다. 어느날 갑자기 없어진 마누라를 찾아다니는 어떤 변호사의 이야기다. 집나간 마누라의 이복오빠도 역시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그는 유력한 일간지의 유명한 칼럼작가다. 마누라의 행적을 추적하는 변호사는 나중에는 자신이 실종 칼럼작가를 대신해 신문에 칼럼을 기고한다. 칼럼 중에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루미에 대한 칼럼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일부 남아있다. 칼럼은 루미와 그의 영적 스승이자 동지인 샴스 타브리즈와의 관계를 동성애로 해석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읽는 내내 몹시 복잡한 미로 속을 헤매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두운 동굴속에서 더듬더듬 길을 찾는 느낌. 뭐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다. 결국 집나간 마누라를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실종 마누라를 찾느냐 못찾느냐가 문제가 아닌 그런 소설이다. '고향 이스탄불의 우울한 영혼을 더듬더듬 탐색하는' 소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내 이름은 빨강>. 이 세편 중 제일 재미있다. 오랜 전통과 관습을 고수하려는 이슬람 세밀화가들이 베네치아에서 건너온 이교적이고 충격적인 새로운 화풍에 반응하고 갈등하는 말하자면 문화간의 충돌과 얽힘에 대한 이야기다. 인상적인 장면은 전설로 남아 인구에 회자될 세밀화의 대가가 되기를 욕망하는 화원장 오스만이 스스로 장님이 되기 위해 황금 바늘로 제 눈을 찌르는 장면. 으으으...

 

파묵의 노벨상 수상에도 이런 저런 말들이 있다. 어느 해인들 없었겠나. 동네 미인대회를 해도 뒷말이 무성하게 우거지는데, 하물며 노벨상임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파묵의 수상에 그의 정치적 언행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슬람 세계에서 살만 루시디에게 내려진 처형명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작가일뿐만 아니라 터키에서는 금기시되고 있는 쿠르드족 및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난한 최초의 작가이기도 하다. 노벨상 수상 한해 전인 200510월 파묵은 스위스의 한 잡지와의 회견에서 우리는 아르메니아인 100만명과 쿠르드인 3만명을 학살했다.”고 말했다. 이 발언으로 터키의 조야가 분노의 도가니로 들끓고 보수주의자들은 파묵을 매국노 혹은 배신자로 규탄했다. 하지만 파묵은 다음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파묵은 터키정부로부터 국가모독죄로 기소되었지만 국제적 여론 때문에 기소는 중지되었다.

 

<소설과 소설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이다. 찰스 엘리엇 노튼 강연이라고 파묵 이전에는 보르헤스, 칼비노, 에코 등이 강단에 섰다고 한다. 노벨문학상 + 하버드대 = 관심 폭발. 이런 공식이 성립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하버드대학교에서 강의한 강연록이라고 하니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용은 별 것 없다. 소설을 읽는 사람들의 독서 방식 ,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소설 쓰기의 관계, 소설의 캐릭터, 플롯 등에 대하여 그냥 쉽게 쓰여져 있다. 소설의 형식이나 작법에 대한 전문적인 글은 아니다. 책 뒷표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문화의 변방 터키에서 고전을 통해 독학으로 소설을 써온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들려주는 소설 창작의 비밀’ “어쩌면 지금 나는 직업상의 비밀을 너무 많이 털어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작가협회에서 제명당 할 지도 모르겠군요아시겠지만 문구 중 앞에 나오는 소설창작의 비밀 운운은 과장과대 광고이고, 뒤에 나오는 직업상의 비밀 운운은 파묵의 농담이다.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벨상 수상작가의 하버드대 강연인데 어찌 소출이 없겠나. 파묵이 어린 시절부터 무척 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을 알았고, 작가가 된 이후로 수십년 동안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성실하게 고독한 작업에 매진하는 그 모습이 바로 작가 지망생들이 파묵으로부터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요것이 바로 파묵이 들려주는 소설 창작의 비밀인 것이다누군가 말했듯이 역시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궁뎅이로 쓴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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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5-01-16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묵의 눈을 읽었는데, 엄청 진보적인 작가라 놀랐어요. 터키가 굉장히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국가라 파묵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눈은 터키가 정치적으로 이슬람으로 확고하게 다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파묵을 다시 생각하고 터키를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작가였어요. 전 종교적인 나라인 터키나 인도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터키는 파묵때문이라도 가 보고 싶은 나라가 되었어요.

붉은돼지 2015-01-17 08:48   좋아요 0 | URL
지금은 순수박물관을 보고 있습니다. 눈도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저도 터키에 한번 가보고 싶은데 특히 이스탄불은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카지노 - 세계 카지노 문화 기행
아사다 지로 지음, 구보 요시테루 사진, 이선희 옮김 / 이레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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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이나 <러브레터>, 혹은 <칼에 지다> 같은 책을 쓴 아사다씨가 유명한 노름꾼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책을 보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고, 말하자면 본업이 도박이고 부업으로 생계를 위해 소설을 쓴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건 사족인데 본인은 철도원, 러브레터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고 영화도 보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 같은 책을 쓴 어쩌고 저쩌고’하며 마치 읽어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말을 하는 것은 좀 거시기 하다는 생각도 얼핏 든다. 그래도 <칼에 지다>는 무척 감동깊게 읽었다.   

 

허영만의 <타짜> 같은 만화를 보면 별별 해괴하고 신기한 기술을 습득한 노름의 달인들이 등장하고 도박에 미쳐 말그대로 패가망신한 인사들의 이야기가 무시로 등장하는데, 손가락이 짤리고 손목이 짤리고 그래도 다른 손으로 화투를 치고..으이이 노름이란 왠지 잘못 발을 들여놓으면 헤어나오기가 죽기보다 어려운 몹시 깊고 위험한 수렁같다는 생각이다. 타잔영화를 보면 그 용맹하다는 사자도 호랑이도 허우적거리며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은 허망하게 빠져 죽고야 마는 그 무시무시한 늪말이다.  

  

심심하지 않게 연예인들의 해외 원정 도박, 인터넷 도박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얼마전에도 해외 원정 도박으로 물의를 일으킨 모 연예인은 정말 웃기지도 않은 구라를 치며 링겔꼽고 병원에 들눕어 있기도 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무엇을 하며 사는지 혹 패가망신에 근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그 연예인의 경우는 물론 도박도 문제지만 상황에 대처하는 진지하고 솔직하지 못한 자세가 더 문제가 된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 선생도 그렇게 도박을 즐기셨다고 하는데 소생은 일전에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처음 듣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어쨌든 역시 놀랍다. 도선생 같은  대문호께옵서 노름이라니....선생의 소설 <노름꾼>이 노름빚에 몰려 쓴 책이라고 하니 미처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리얼리티야 말해 무엇하리오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의 전체적인 흐름은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아사다씨는 나름 절제하면서 도박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 수렁으로 빠져들지 알 수 없으니 항상 조심하면서 또 한번씩 뒤도 돌아보면서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물론 아사다씨 본인이 더 잘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술에 비유하자면 한번 마셨다하면 두주불사 그리하여 인사불성 고주망태가 되도록 퍼마시는 것이 아니라 빈티지 와인이나 질 좋은 위스키를 혀끝으로 맛을 음미하고 코를 킁킁 향을 맡아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홀짝 홀짝마시는 그런 주법을 권하고 싶다. 조금 쫀쫀한 것도 같지만 그래야 그 좋은 카지노도 오래 즐기면서 패가망신도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 것이 아닌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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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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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다. 벌써 제목에서부터 뿡뿡 풍기는 냄새가 그러할진대 그 쓸쓸함 속에는 약간의 따스함이랄까 나른함이랄까 뭐 그런게 또 있다. 삶이란 게 본시 쓸쓸하고 스산하여 말하자면 바람부는 벌판에 홀로 서있는 형상일 것인데, 여기서 문득 생각난다. 왕국의 깃발은 찢어져 날리고 고색창연한 궁궐 앞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긴 머리카락를 날리며, 하얀 치마를 펄럭이며 홀로 서 있는 로한의 왕녀 에오윈. 몹시도 쓸쓸해 보였었다. 이게 무슨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린지. 쓸데없는 소리는 각설하고, 어쨌든 그러할진댄 어느 누구에게도 삶이란 결코 헛되고 또 헛된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스티븐슨은 열심히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앞길이 구만리 장천을 날으는 젊은이들은 남아있는 날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천년만년백만년 생이 영원할 것만 같다. 남아있는 날들을 걱정하는 사람은 늙은이뿐이다. 우리의 스티븐슨도 인생의 황혼기 인생의 저녁이 되어서야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남아있는 나날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영화에서 - 하도 오래전에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띄엄 띄엄 본 것이라 기억이 정확하다고는 할수 없다 - 스티븐스가 회상하는 지난날에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환이 상당 당당 부분, 아니 대부분이었던 것 같았는데, 오늘 읽어본 소설에서는 그런 느낌은 조금 약하고 다분히 비유적으로 또 스쳐 지나가듯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븐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또 사랑을 얻어 결혼했다면 최고의 집사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인생의 황혼기에 스티븐스는 문득 품위를 지닌 최고의 집사가 되지 못한 회한에 가슴 아파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미 살아온 날들은 항상 최선이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남아있는 나날들도 의미가 있고 희망이 있다. 

 

스티븐스가 수도없이 강조하는 ‘품위’란 말을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단어. 신독. 이른바 선비정신의 정수이기도 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 홀로 있을 때조차 스스로를 삼간다는 말이다. 혼자 있으면 누구나 풀어지기 마련이고 남들 앞에서는 부끄러워서 감히 하지 못하는 별별 해괴하고 괴상망측한 짓을 혼자 있을 때는 몰래 하기도 하는데, 낮 퇴계와 밤 퇴계가 다르다는 이야기도 말하자면 퇴계같은 선비에게도 신독은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혼자있을 때 벌거벗고 깨춤을 추든 방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냄비에 똥을 싸든 자기가 즐겁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뭐가 어떻단 말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품위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가 일본인인 것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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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시선 -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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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신화야 누구나 좋아한다. 물론 혹자 중에는 별 시덥지않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대충적으로다가 재미있어 한다. 사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재미있다. 야리꾸리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별별 괴상한 짐승과 호색한 신들과 영웅들과 미녀들이 등장하고, 말하자면 드라마틱한 드라마의 연속이다. 상징과 은유의 바다요 상상력의 보고라 할만하다. 

반면 과학과 철학은 대충적으로 어려운 학문이다. 요즘은 쉽게 쓰여진 대중적인 관련도서들도 많이 나오고는 있지만 어쨌든 과학이나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다는 생각이 우선적으로다가 먼저 든다. 소생이 어릴 때는 장래 희망에 과학자라고 당당하게 적는 어린이들도 많았는데 요즘은 거의 없지 싶다. 철학은 뭐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번 슬쩍 보기만 해도 땡땡하게 굳어버리는 뱀대가리 메두사, 수간으로 태어났다가 영웅 테세우스의 몽둥이에 맞아 죽은 소대가리 미노타우로스, 어줍잖은 수수께기로 사람들 놀리다가 똑똑한 오이디푸스에게 걸려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스핑크스, 공자앞에서 문자쓰다가 - 물론 잘 쓰기는 했는데 - 뒤지게 귀싸때기 맞고 피 본 아라크네, 영화 마네킹의 모델 피그말리온, 등등 신화는 그 속의 무수한 상징과 은유를 다 해석하고 풀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야기 그 자체로서 무척이나 재미있는데, 그 재미있는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풀이한 본 책은 소생같은 문외한이 읽기에도 별 재미도 감흥도 없다. 그래도 혹시 신화의 철학적 해석에 관심있는 분들은 일독을 하시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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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속의 세상, 세상속의 교회>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 홍성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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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말을 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 교회에 대하여 호의적인 비기독교인은 거의 없다고 소생은 생각한다. 감히.(이건 순전히 소생 혼자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생 주위의 분위기가 대체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기독교에 존경할만한 목사님이나 신자들이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 이유는 이 책에도 나오지만 우선 교인들에 대한 비교인들의 기대치가 무척 높은 점을 들 수 있겠다. 똑같은 짓을 해도 교인이 하면 아~ 저 사람은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행동을..쯔쯔쯔...,어쩌고 저쩌고....이리 되는 것인데, 이리 되는 원인은 교인에게도 일부 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항상 사랑과 용서라는 너무나 좋은 말을 입에 붙이고 다니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기란 어려운 법이다. 말씀만 익은 이가 되기 십상인 것이다.    

 

다음은 기독교의 배타성을 들 수 있겠다. 요즘은 개신교에서도 석가탄신일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화기애애하게 관용적으로 흐르고 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하느님이 진실로 우주를 창조하고 만사를 주관하는 유일신이라면 플랜카드를 내걸 것이 아니라 유일신을 영접하지 못하고 진실에 눈 어두운 이교도를 궁휼히 여겨 진심으로 전도해야 마땅할 것이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자꾸 옆길로 빠지려는 자식을 가르치는 부모의 마음으로 말이다. 불교야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종교이고, 고승대덕들 중에는 날이 몹시 추워 불알이 얼얼하게 얼면 도끼로 목불木佛을 쪼개 장작을 만들어 태워서리 언 불알을 데우는 스님도 있다고 했으니 야소 탄생을 축하하여 곡차라도 한 잔 할 수 있겠지만 야소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일신을 인정하지 않는 이교도를 대량으로 양산하게 되는 수괴로서의 석가모니 부처의 탄신은 그리 축하할 만한 일은 아닐 것인데 ‘축석가탄신’ 플래카드를 내붙이는 것은 어찌 보면 기만적인 통일전선전술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중세처럼 기독교왕국도 아니고 뭐 어디서 오합지졸일지언정 십자군을 끌어 모을 수도 없는 세상. 이성과 합리와 관용이 나름 득세하고 판치는 계몽주의 인본주의 시대에는 잠시 수그려 있자는 전술.   

 

교인들의 언행불일치야 사람살이가 다 그런 것으로 널리 양해될 수 있는 것이겠고,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갖는 배타성은 어찌보면 사랑이라는 계명보다 더 강력한 흡인력으로 작용하여 오늘날 득세의 원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아마도 세계에서 신자가 가장 많은 종교는 유일신교인 기독교(천주교 포함)와 이슬람교일 것이다.     

 

2.
과거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나 조성기의 <야훼의 밤> 같은 소설을 무척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지고 있는 의문들. 정비석의 <산정무한> 식으로 말하자면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라 할 것인데, 고작 60~70년 찰나지간의 인간 생애에 실수든 뭐든 어쨌든 한 순간의 결정으로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고 죽은 후에 억만겁년 영원의 시간을 불구덩이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닌가. 살아생전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죽는 순간에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천국에 들 수 있고, 반대로 평생 정직하고 타인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았더라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니 이 무슨 황당한 이야기란 말인가. 알수 없는 일. 아~ 어찌 신의 높고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으리오.   

 

3.
1장 <교회속의 세상>, 2장 <비전과 욕심>, 3장 <진보와 보수>는 비기독교인이 볼 때 무릎을 ‘딱’ 치면서 ‘맞다! 말 잘한다.’ 라고 할만한 깊이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다. 나름 교회에 관심있는 비신자들이 교인 혹은 교회를 욕하는 내용들이 총망라 되어 있다. 근100여년의 일천한 개신교의 역사에 비해 한국 개신교의 양적 팽창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배고프다고 한번에 너무 많이 처먹으면 속에 탈이날 수 있느니, 키도 한번에 너무 크면 허벅지가 트고, 경제도 그렇지만 급속한 성장에는 그늘이 있기 마련. 4장 <콘스탄티누스>, 5장 <16세기>, 6장 <중세의 이단>은 교회의 역사와 교리에 대해 너무나 많은 공부가 되었다. 특히 6장은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6장의 제목 <중세의 이단- 먼저 실험을 시작한 사람들>이라는 제목도 유의미하다. 이단이란 것이 교리를 멋대로 해석하여 도덕적 윤리적으로 타락해버린 사악하고 괴상한 집단이 아니라 부패한 기존 기독교에 대항하여 일종의 개혁적이고 진지한 실험을 용감하게 감행했던 선구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4~6장은 언제 시간내어 다시 한번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다. 7~9장은 한국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이나 실험적 대안 등에 대하여 작가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한 내용이다.   

 

4.
이건 사족인데, 한권의 책을 읽다가 그 책 속에서 또 다른 책을 발견하는 것은 말하자면 가외의 즐거움으로, ‘엔도 슈사쿠’라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깊은 강>같은 책을 썻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구입해서 서재에 모셔두고는 있는데, 이 엔도 슈사큐가 <숙적>이라는 책을 지었다고 한다. 그 내용인 즉슨 소생이 무척이나 좋아라하는 일본 전국시대 이야기로, 그 유명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이야기인데, 엔도 슈사쿠 만한 작가가 쓴 역사소설이라는 점에서 몹시 기대가 되어 즉시로 알라딘에 검색했는데 마침 또 중고시장에 저렴하게 나와 있는 넘이 있어서 두권(1,2권임)을 언능 주문했다. 그런데 이 ‘숙적’이 이 책에서 언급된 이유는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 때문이다.(엔도 슈사큐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니시에게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이야기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아시다시피 이건 전32권짜리다, 소생은 이걸 두 번 읽었는데 무척 재미있더라나)를 보면 두 사람 다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히데요시 사후에 가등은 도쿠가와편에서 서고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아들 편에 서서 싸우지만 고니시보다는 가등에게 보다 호의적이고, 저간의 복잡미묘한 사정이야 많겠지만 어쨌든 가등은 결론적으로는 히데요시를 배반해서 잘먹고 잘살아 지금도 일본 구마모토에 가면 그의 동상이 늘름하게 서 있고 가등의 본거지인 구마모토 성은 일본3대 고성의 하나로 소생도 가봤는데 볼만한 곳이더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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