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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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다. 벌써 제목에서부터 뿡뿡 풍기는 냄새가 그러할진대 그 쓸쓸함 속에는 약간의 따스함이랄까 나른함이랄까 뭐 그런게 또 있다. 삶이란 게 본시 쓸쓸하고 스산하여 말하자면 바람부는 벌판에 홀로 서있는 형상일 것인데, 여기서 문득 생각난다. 왕국의 깃발은 찢어져 날리고 고색창연한 궁궐 앞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긴 머리카락를 날리며, 하얀 치마를 펄럭이며 홀로 서 있는 로한의 왕녀 에오윈. 몹시도 쓸쓸해 보였었다. 이게 무슨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린지. 쓸데없는 소리는 각설하고, 어쨌든 그러할진댄 어느 누구에게도 삶이란 결코 헛되고 또 헛된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스티븐슨은 열심히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앞길이 구만리 장천을 날으는 젊은이들은 남아있는 날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천년만년백만년 생이 영원할 것만 같다. 남아있는 날들을 걱정하는 사람은 늙은이뿐이다. 우리의 스티븐슨도 인생의 황혼기 인생의 저녁이 되어서야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남아있는 나날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영화에서 - 하도 오래전에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띄엄 띄엄 본 것이라 기억이 정확하다고는 할수 없다 - 스티븐스가 회상하는 지난날에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환이 상당 당당 부분, 아니 대부분이었던 것 같았는데, 오늘 읽어본 소설에서는 그런 느낌은 조금 약하고 다분히 비유적으로 또 스쳐 지나가듯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스티븐스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또 사랑을 얻어 결혼했다면 최고의 집사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인생의 황혼기에 스티븐스는 문득 품위를 지닌 최고의 집사가 되지 못한 회한에 가슴 아파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미 살아온 날들은 항상 최선이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남아있는 나날들도 의미가 있고 희망이 있다. 

 

스티븐스가 수도없이 강조하는 ‘품위’란 말을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단어. 신독. 이른바 선비정신의 정수이기도 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 홀로 있을 때조차 스스로를 삼간다는 말이다. 혼자 있으면 누구나 풀어지기 마련이고 남들 앞에서는 부끄러워서 감히 하지 못하는 별별 해괴하고 괴상망측한 짓을 혼자 있을 때는 몰래 하기도 하는데, 낮 퇴계와 밤 퇴계가 다르다는 이야기도 말하자면 퇴계같은 선비에게도 신독은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혼자있을 때 벌거벗고 깨춤을 추든 방구석에 쭈구리고 앉아 냄비에 똥을 싸든 자기가 즐겁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뭐가 어떻단 말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품위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가 일본인인 것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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