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다양한 식품·농업 문화들은 그러나 모두 공통적으로 세 가지 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 첫 번째는 다양성이다. 자연은 동일성이나 획일성을 거부한다. 자연세계는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분투하는 세계이다. - P66

식품 및 농업의 문화적 다양성은 자연의 방식과 생물다양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단 하나의 정신세계와 종자, 영농방식, 식사에 대해 획일성을 강요하는 것은 식민주의와 화석연료에 기반한산업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연적 속도보다 1,000배 빠른 속도로 생물들을 멸종으로 몰아가면서 지구에 6번째 대멸종이라는 위협을 가져오고 있다.
두 번째는 되돌림의 법칙이다. 땅으로부터 얻은 만큼 되돌릴 때 영양물질과 물의 생태 사이클이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순환의 경제에 모든 생명이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식민주의와 함께 성장한 추출주의와 탄소문명은 자연의 생태적 사이클을 교란시켜 생태적 위기, 사막화와 물부족, 기아와 빈곤을 초래했다.
세 번째 원리는 자연이 준 선물을 함께 나누어 쓴다는 것이다. 생명은상호연결성에 기초하고 있는 그물망이다. 자연의 어떤 일부도 하나의 종(種)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식품은 생명의 그물을 직조하는 통화(通貨)이므로, 공유재이다. 생명의 운행원칙에 따르는 패러다임 속에서 식품은 상품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식품체계가 수세기 동안 존속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이 놓아준 생명의 길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에는 유기농업, 퍼머컬처, 생명역동농업, 자연농법 등 농생태학이라고 분류되는 다양한 생태농업 방식들로 이 원리들이 실천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 P67

가짜 농업의 세 단계 - 화학물질, GMO, 빅데이터

산업농이 온갖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은 이제 많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한때에는 화학물질로, 이후에는 GMO를 통해서,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빅데이터를 가지고 농기업들은 계속해서 가짜 농사와 가짜 식품의 미래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 - P71

흙은 필요 없다는 착각이 늘어났다. 인공비료가 식량생산을 증대하고, 땅이 농업에 부과하는 모든 생태학적 한계를 없애줄 것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그러나 합성비료가 토양 비옥도와 식량생산을 감소시켰고 사막화와 물 부족, 기후변화에 기여해왔다는 증거는 날마다 쌓여가고 있다. - P72

유기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식물 생장에서질소의 역할을 최초로 밝혀낸 과학자이다. 기업들은 그의 연구를 곧바로 응용했다. ‘성장촉진제‘라고 이름 붙여진 질소비료를 외부로부터 투입하는 신산업이 생겨났다. 리비히는 자신의 과학적 발견이 왜곡되는 것에 분개하여 <농업 리사이클링에 대한 탐구》(1861)라는 책을 썼다. 그것은 상업계의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사이비 과학이 과학적 진실을 왜곡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진정한 과학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과학계의 관례대로 진실을 알리고 퍼뜨리기만 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진실이 공정한 기회를 갖게 만들려면 먼저 거짓말들을 무너뜨려야한다는 것을 나는 마침내 알게 되었다."
그가 깨뜨리고자 했던 거짓말은 (유기물을) 땅으로 되돌리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영양분을 추출해내면서 높은 산출량을 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 P72

EAT 보고서는 ‘채식‘이라는 가면을 쓰고 산업적으로 생산된 가짜 식품을 옹호한다. 화석연료를 태워 제조된 합성 질소비료가 기후위기, 대양의 데드존, 토양의 죽음에 크게 기여해온 현실을 외면하고, 유기농법과 농생태학이 붕괴된 질소 사이클을 바로잡기 위한 지속가능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질소 및 인의 사용처를 재배치"할 것(즉, 제3세계에서 화학물질을 계속해서 확대 사용)을 권고한다. - P77

지구와 인류를 파국으로 데려오는 데 일조해온 장본인들이, 이제 우리의 건강과 지구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고도로 산업화된 독성 식품을 우리에게 먹이기 위해 힘을 합치고 있다. 세계를 부양하고 지구를 구하려면 화석연료와 화학물질을 농업에서 제거해야 한다. EAT 보고서는 지속 불가능한 산업적 식품체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방안이지, 결코 지구와 인류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특히 이 보고서는 무엇보다 자유와 지속가능성의 근간이 되는 다양성과 민주주의라는 생명의 근본적인 원리를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 P78

몬산토의 군사적이고 반자연적 정신세계의 눈으로 보면 생물다양성은골칫거리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수익을 내려면 단작(單作)이 기본이다. 생물다양성은 가장 독성이 강한 제초제, 글리포세이트를 사용해서 박멸해야 할 것이 된다. 그것을 위해서 농작물은 글리포세이트에 내성을 갖도록 유전자 조작하고, GMO만 살아남게 하고 나머지 모든 식물은 고사시켜야 한다. 몬산토는 이렇게 식품 및 약품의 원천이 되는 식물과 토양을 몰살시켜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빼앗았다. GMO 대두를 ‘식물성‘의 ‘건강한 가짜 고기‘로 선전하는 것은 소비자들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미래를 빼앗아가고 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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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이상의 하루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하루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일본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던데. 그녀가 애매하게 뇌까렸다. 그때 하루오가 던진 농담은 이런 것이었다.
말하자면,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어딘지 다른 하루오이다 - 라고. - P66

결혼 후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나는 자꾸 밖으로 돌았고, 아내는 그런 나를 견디지 못했다. 절반 이상의 나는 어디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건 아마도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P72

보통의 경우 일상은 주체가 고정된 자리에서 세계와 맺는 관계들로 주조되는 데 비해, 여행은 일상을 타자화한 채 낯선 자리에서 편입되는 새로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상의 시간이 주체만의 한정된 경험으로 어떤 세계를 일군다면 여행의 시간은 오랜 기간 축적되어온 주체 중심의 세계를 잠시 소거함으로써 인식의 자리를 넓힌다. 즉 여행은 차이‘의 실감을 통해 삶을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 P89

그러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내일 죽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부질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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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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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젋은작가상 대상은 정지돈 작가의 건축이냐 혁명이냐. 정지돈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이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다 한국에 들어와서 살았다는 정도만 알았고,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건축사로 일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는 자세한 사항은 몰랐다. 후장사실주의자라는 타이틀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작가의, 마치 소설인 듯, 기사인 듯 모를 소설이다?(소설이 아니다?). 이구의 인생을 따라가는 한편의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다. 젋은작가상이라는 취지에 맞게 전통적인 서사방식이 아닌 신선하고 독특한 구조와 전개방식의 이 소설에 많은 심사위원들이 손들어 준 것 같다(물론, 만장일치는 아니다). 작가의 말에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참고했다는 책, 문헌, 기사, 방송 등등이 언급된 것을 보고 놀랐다. 장편도 아닌 이 짧은 단편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고 공부하다니, 소설에 대한 사랑인가? 다시 정지돈 작가의 소설을 읽어볼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직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한 심사위원의 말처럼, 나도 아직 정지돈 작가의 진가를 알아내지 못한 독자이기 때문에(그러므로 더 읽어봐야 하나??). 수상작품 중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소설은 김금희 작가의 조중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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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1 1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가장 핫한 작가 정지돈!
햇살님 덕분에 2015년 젊작품집 찜!👆^^

햇살과함께 2021-12-11 13:27   좋아요 2 | URL
스캇님은 소화가능 하실 듯^^ 정지돈 작가님 말씀도 잘 하시고 적당한 사투리가 벤 허스키 보이스가 매력적^^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반복되었던 잘못된 선택, 착각, 부질없는 기대, 굴복이나 패배 따위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지. 그녀는 항상 그게 용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는 그게 용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곤 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때때로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삶이, 그녀 앞에 놓인 삶이 버둥거림의 연속이고, 또한 기도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더이상 기도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 제발 내가 또다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게 도와주세요. 그녀는 얼마나 자기 자신이 기도를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던가.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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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마주앉은 사람의 피부 한 겹 아래까지 닿을 듯 꼿꼿한 시선이 있었고 말로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답게 동굴 안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있었으며 주목과 주시 속에서 살아온 사람 특유의 피로한 윤기가 지우다 만 분장처럼 얼굴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 P122

추석이면 아버지는 집에 온 나를 데리고 뒷산으로 나갔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를 걸으며 그래서 너는 변하지 않는 거니? 언제 변할 건데? 하고 한 점도 변함없이 기다리는 어조로 묻는 아버지의 지친 목소리를 들으면 당장 늑대로 변해 아버지 앞에서 닭의 목을 물어뜯으며 피를 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시간들을 종합해보면 내게는 모두의 앞에서 나를 분명히 밝힌 경험이 영원한 회한으로 남지는 않았다. 문이 열린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용기보다는 침묵이, 대담함보다는 소심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 나였으므로 더욱 그랬다. - P126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에는 그 모든 것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네가 신의 말씀을 들으며 자라났고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대학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었고 네가 네의 신에 대해 갖고 있던 불편하지만 온전히 떠날 수는 없다는 태도가 관계되어 있었다. 네가 가진 형제들과 내게는 없는 형제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너의 교회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했던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고 내 동료들이 너의 교회 같은 교회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하는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기 위해 너의 경제적 도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능 사실이 관계되어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내가 품는 감정이 관계되어 있었다. 네가 나를 위해 포기한 것들이 나를 건드리는 방식이 관계되어 있었고 그런 나를 보는 너의 표정이, 무엇보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도달하는 침묵의 농도와 빛깔, 어떻게 해도 건너갈 수 없는 그 여울의 세찬 물살이 관계되어 있었다. - P146

커밍아웃이나 퀴어활동을 통해 퀴어로서의 자기인식을 수행하는 것이 퀴어담론의 핵심적 장치이긴 하다. 하지만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한채윤의 지적처럼, 커밍아웃을 개인의 선택 문제로 인식하는 순간 차별의 사회·역사적 맥락은 사라진다. 딸기는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고 싶어하는 루카에게 딸기만을 "유일한 시민"으로 삼는 세계에 살도록 요구한 것, 즉 퀴어세계에서만의 안존을 강요하는 것이 또다른 ‘클로젯팅(벽장 안에 가만히 숨어 있기)‘일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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