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마주앉은 사람의 피부 한 겹 아래까지 닿을 듯 꼿꼿한 시선이 있었고 말로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답게 동굴 안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있었으며 주목과 주시 속에서 살아온 사람 특유의 피로한 윤기가 지우다 만 분장처럼 얼굴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 P122

추석이면 아버지는 집에 온 나를 데리고 뒷산으로 나갔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를 걸으며 그래서 너는 변하지 않는 거니? 언제 변할 건데? 하고 한 점도 변함없이 기다리는 어조로 묻는 아버지의 지친 목소리를 들으면 당장 늑대로 변해 아버지 앞에서 닭의 목을 물어뜯으며 피를 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시간들을 종합해보면 내게는 모두의 앞에서 나를 분명히 밝힌 경험이 영원한 회한으로 남지는 않았다. 문이 열린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용기보다는 침묵이, 대담함보다는 소심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 나였으므로 더욱 그랬다. - P126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에는 그 모든 것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네가 신의 말씀을 들으며 자라났고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대학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었고 네가 네의 신에 대해 갖고 있던 불편하지만 온전히 떠날 수는 없다는 태도가 관계되어 있었다. 네가 가진 형제들과 내게는 없는 형제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너의 교회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했던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고 내 동료들이 너의 교회 같은 교회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하는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기 위해 너의 경제적 도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능 사실이 관계되어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내가 품는 감정이 관계되어 있었다. 네가 나를 위해 포기한 것들이 나를 건드리는 방식이 관계되어 있었고 그런 나를 보는 너의 표정이, 무엇보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도달하는 침묵의 농도와 빛깔, 어떻게 해도 건너갈 수 없는 그 여울의 세찬 물살이 관계되어 있었다. - P146

커밍아웃이나 퀴어활동을 통해 퀴어로서의 자기인식을 수행하는 것이 퀴어담론의 핵심적 장치이긴 하다. 하지만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한채윤의 지적처럼, 커밍아웃을 개인의 선택 문제로 인식하는 순간 차별의 사회·역사적 맥락은 사라진다. 딸기는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고 싶어하는 루카에게 딸기만을 "유일한 시민"으로 삼는 세계에 살도록 요구한 것, 즉 퀴어세계에서만의 안존을 강요하는 것이 또다른 ‘클로젯팅(벽장 안에 가만히 숨어 있기)‘일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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