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미스터리 소설 전문 책방을 발견한다는 것은 죽지 않고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 P7

마르틴 베크가 상사의 사무실 문을 연 것은 12시 50분이었다. 휴가를 떠난 지 정확히 스물네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함마르 경감은 짧고 굵은 목에 백발 더벅머리를 지닌 풍채 좋은 남자였다. 그는 팔뚝을 책상에 붙인 자세로 꼼짝 않고 회전의자에 앉아서, 심술궂은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에 따르면 그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즉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었다. - P36

1966년 주현절 전날 밤, 맛손은 말뫼에서 순찰차로 종합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벵트 옌손이라는 사람의 집에 놀러갔다가 소란이 벌어져서 손에 자상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찰이 사건을 조사했지만 맛손이 고발을 원하지 않아 법정까지 넘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손과 크반트라는 두 순경에 따르면 맛손도 옌손도 취한상태였기 때문에, 사건은 국가금주위원회의 기록에 남았다. - P54

마르틴 베크는 경찰에 접촉하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그쪽에서 먼저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십삼 년의 경찰 경력 덕분에 그는 걸음걸이만 보고도 다가오는 남자가 경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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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의정부 설희책방

개인적인 업무 처리로 의정부 가느라 하루 휴가를 냈다. 30분도 안걸리는 업무였으나 대면이 필수라 어쩔 수 없이 의정부까지..

간 김에 그냥 오기 섭섭하니 독립서점 찾아가기!! 의정부에 독립서점 3-4군데 검색되는데, 처음 간 곳은 정기휴일도 아닌데 문이 닫혀있었다. 보통 미리 전화해보고 가는데 여행 삼아 그냥 갔으나,,, 그러기엔 날이 너무 더웠다:;;

두번째로 간 곳이 설희책방. 아파트상가 2층에 있는 아담한 책방. 지하철 망월사역 근처다. 설희는 주인장 반려견 이름. 반려견 동반 가능이다. 오늘은 설희가 없었다. 아직 초기라 책이 아주 많지는 않아서 좀더 구색을 갖추시길 바래본다.

내가 산 책은,

Mellow. 반려동물 매거진 Cat 여름호: Cat과 Dog 두 권이 나오고 여름호는 제주 특집인 듯. Dog을 보다가 작년 추석 제주풀무질에서 만난 광복이가 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사려고 하였는데, 샘플 밖에 없다고 해서 아쉽지만 Cat으로. 표지부터 그냥 사진 퀼리티가^^
황인찬 에세이: 어제 열반인님 도둑글에서 읽은.
쏜살 문고 카렐 차페크 산문집: 책방에서 커피 마시며 몇 페이지 읽었는데, 차페크 처음 읽는데 위트 있으시네^^

날도 더운데 걷다가 마을버스, 의정부경전철, 시내버스, 지하철. 온갖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더니 피곤하다. ㅋㅋㅋ 의정부경전철 처음 탔는데 인천공항 셔틀 트레인보다 작은 듯.

그래도 카페에서 열독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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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21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희가 있는 책방이라 ㅎㅎ 더운날 고생많으셨겠어요. ~ 책사진은 넘 예쁩니다

햇살과함께 2022-07-21 20:26   좋아요 0 | URL
요즘 책들이 다들 너무 예뻐서 더 사게 되는 ㅎㅎ
그래도 전 추운 날보다 더운 날 돌아다니는게 더 좋아요~
 

실바니아 자작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

말이 생긴다는 희망과 함께 열세 살이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흐르는 눈물 너머로 알렉시의 두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발다사르 실방드 삼촌을 만나러 가야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전히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물론 알렉시는 발다사르 삼촌이 나을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사실을 알고 난 뒤에 이미 몇 번 만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는 모든 것이 이전과 달랐다. 발다사르 역시 이미 자신의 병에 대해 전부 알았고, 살날이 삼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까지 알았다. 그렇게 다 알면서도 어떻게 여태까지 슬픔으로 죽거나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알렉시는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삼촌을 만나는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삼촌이 분명 머지않아 닥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텐데, 그럴 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막막했고 필경 쏟아질 눈물을 참을 자신도 없었다. - P10

당장 달려들어 목에 매달리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기력이 쇠한 삼촌이 몸을 지탱하지 못할까 봐 용기를 내지 못했다. 자작의 슬프고 부드러운눈길을 보면서 알렉시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원래 발다사르의 눈이 슬프다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조차 위로를 갈구하듯 슬픈 눈이라는, 그래도 고통을 느끼는 듯 보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렉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발다사르가 용감하게 대화에서 추방시킨 슬픔이 다름 아닌 바로 그 눈 속에 피난처를 마련한 것 같았고, 발다사르라는 사람 안에서 핼쑥해진 두뺨과 그 눈만이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 P15

이전과 똑같이 얼굴을 찌푸리느라 입을 오므리는 발다사르를 보면서 알렉시는 자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삼촌을 만나러 오면서 예상한 것, 그가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죽음을 앞두고 저속한 삶의 현실에서 영원히 떨어져나온 사람이 영웅적 의지를 발휘해서 지어 보이는 미소, 슬프고도 다정한, 천상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초연한 미소였다. 하지만 이제 알렉시는 만일 장 갈레아스가 다시 놀린다면 삼촌이 예전처럼 화를 낼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죽음을 앞두고도 저렇게 쾌활하고 여전히 극장에 가고 싶어 한다고 해서 무언가를 감추고 있거나 특별히 용기를 낸 것은 아님을, 저렇게 죽음 가까이 다가가도 삼촌은 오직 삶만을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P18

하지만 두 사람의 예를 떠올려 본 뒤에도 삼촌의 태도로 인한 놀라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유사한 다른 두려움이 생겨나서 점차 커지더니, 마침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알렉시 자신도 예외일 수 없을 하나의 진실로 이어졌다. 알렉시를 아연실색하게 한 것은 바로, 누구나 얼굴은 여전히 삶을 향한 채 뒷걸음질로 죽음에 다가간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 P19

그들은 입맞춤의 향기와 애무의 기억 속에 떠다니는 쾌락에 다시 도취되어, 자신들의 침몰하는 영혼을 보게 할 잔인한 두 눈을 감아 버린 채로 서로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들은 비탄에 젖은 자기들의 영혼을 보고 싶지 않았고, 특히 그는, 마치 회한에 사로잡힌 형(刑)처럼, 자기 손으로 처형해야 할 제물을 앞에 두고서 바로 저 제물이 자신의 격한 분노를 자극하고 있고 이제 그 분노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상상하는 대신에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래서 한순간 제물의 고통을 느끼게 되면 칼을 내리치는 팔이 떨리게 될 것임을 알았기에, 온 힘을 다해서 눈을 감았다. - P23

그들은 상대가 양심의 가책을 피할 수 있도록 서로 안심시키고자 애썼다. 점차 익숙해지면서 회한이 줄어들고, 역시 점차 익숙해지면서 쾌락도 덜 강렬해졌으므로, 발다사르가 실바니아로 돌아왔을 때쯤에는 불꽃처럼 타올랐던 잔인한 순간들은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그저 감미로운, 조금 차가운 추억으로 남았다. - P24

말을 달리는 동안 그 질주가 깨워 낸 미풍 아래 돛처럼 부풀어 오른 가슴을, 겨울의 화롯불처럼 뜨거워진 몸을 순간순간 이마를 스치는 나뭇잎만큼 싱그러운 감촉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온 뒤 차디찬 물에 담근 몸이 팽팽해지고 혹은 식사 후 소화되기를 기다리며 감미로운 긴 휴식에 젖는 동안에, 알렉시의 내면에서는 강한 생명력에 대한 찬미가 솟구쳤다. 젊은 발다사르에게 요란스러운 자부심을 부여했던 바로 그 생명력이 이제 영원히 그를 버리고 더 젊은 영혼에게 와서, 나중에는 그 역시 버리고 떠날 테지만, 기쁨을 안긴 것이다. - P26

발다사르는 자기가 평생동안 만찬에 초대하기를 가장 게을리했던 한 사람, 바로 자신과 한참 동안 단둘이 누워서 매력적인 시간을 보냈다. 불편한 몸을 단장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한 뒤 팔꿈치를 창틀에 괴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우수 어린 기쁨도 맛보았다. 발다사르는 스스로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마치 예술작품을 손질하듯이 강렬한 슬픔 속에서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쳐 온 자신의 임종 장면을, 아직까지는 그를 가득 채운, 하지만 멀어지기 시작한 탓에 흐릿하고 아름다워진 이 세상의 형상들로 채웠다. 이미 그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플라토닉한 연인이자, 누구보다 지체 높은 인사들과 최고로 영예로운 예술가들 그리고 유럽에서 제일 뛰어난 재사(才士)들 틈에서 몸소 군림하였던 살롱의 주인, 올리비안 공작부인과의 작별 인사 장면을 상상 속에서 그려 보았다. - P28

- 이제 다 나으셨습니다!
죽음을 선고받았던 발다사르는 자신이 사면되었다는 소식에 흥분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병세가 뚜렷하게 호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순식간에 찾아온 변화에 미처 익숙해지지 못했는지, 얼마 뒤 이미 쇠약해진 그의 기쁨 속으로 무언가 날카로운 불안이 파고들었다. 삶의 비바람을 피해, 주변의 애정과 강요된 안정과 자유로운 사색으로 이루어진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는 동안에 그의 마음속에 이미 죽음의 욕망이 움텄기 때문이다. 아직 제대로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단지 재차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이미 습관을 잃어버렸는데 또다시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태까지 그를 둘러쌌던 다정한 보살핌을 잃어야 한다는 전망에 막연히 공포를 느끼는 정도였다. 또한 그동안 스스로와 몇 시간이고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배들을 바라보면서 함께 대화를 - P31

나누는 형제 같은 낯선 존재를 이미 벗으로 맞이했는데, 이제 다시 쾌락에 젖느라 혹은 딴 일을 즐기느라 스스로를 잊어버리는 일은 옳지 않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흡사 자기 고향을 모른 채로 살아온 젊은이가 마침내 고향을 알았을 때처럼, 그의 심중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향수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죽음을 영원한 유배로 느꼈는데, 이제는 오히려 죽음에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 P32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시간의 책 속에 마지막 글자를 쓸 때까지, 슬그머니 지나가는구나. 우리의 모든 어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먼지로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비춰 주었다. 얼마 남지않은 촛불이여, 이제 그불을 꺼라 이제 그만 꺼라! 인생이란 기껏해야 방황하는 그림자이고, 무대 위에 주어진 시간 동안 으스대고 탄식하다가 막이 내리면 사라지는 가련한 광대인 것을. 인생이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 요란한 외침과 노여움에 가득 찬, 아무 뜻도 없는 이야기인 것을."

- 세익스피어, [멕베스] 5막 5장 - P35

발다사르의 손이 열에 달떠서 흔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심장 박동 소리처럼 깊고 미세한, 낭랑한 울림이 들렸다. 아득히 먼 마을의 종소리가 그날 저녁 너무도 투명한 공기 덕에 들판과 강을 가로질러서 충실한 그의 귀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소리이면서 동시에 아주 오래된 목소리였다. 발다사르는 하늘에서 날아오는 그 아름다운 종소리에 맞춰서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그리고 심장이 종들의 호흡을 따라 다시 가늘고 긴 숨을 내쉬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그는 멀리서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늘 자기도 모르게, 어렸을 적에 들판을 지나 성으로 돌아오던 순간의 부드러운 저녁 공기를 떠올렸다.
그 순간, 의사가 모두를 가까이 부르며 말했다.
- 운명하셨습니다. - P45

비올랑트 혹은 사교계의 삶

다음 해 여름, 비올랑트는 오노레를 떠올렸고, 그가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애정과 동시에 슬픔을 느꼈다. 기울어진 저녁 햇빛이 바다를 적실 때면 그녀는 일 년 전 오노레를 따라가서 함께 앉았던 벤치에 홀로 앉아 그가 내밀던 입술을, 반쯤 감은 그의 초록빛 눈을, 마치 햇살처럼 움직이다가 그녀에게 따뜻하고 생생한 광채를 비추던 눈길을 떠올리고자 애썼다. 막막하고 은밀하고 감미로운 밤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으로 욕망이 더 강하게 달아오르면, 자기 귀에 대고 금단의 언어를 속삭이던 오노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비올랑트는 유혹하듯 집요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채 계속 오노레를 생각했다. - P54

- 작년에 오셨던 젊은이, 오노레 씨였습니다.
-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셨다던데.
- 돌아오셨습니다.
비올랑트는 벌떡 일어섰고, 오노레에게 찾아와 달라고 편지를 쓰고자 거의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펜을 들면서 그녀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행복과 힘을 맛보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신의 순간적 기분과 감각적 쾌락에 맞춰 삶을 꾸려 가고 있다고 느꼈고, 지금껏 자신과 오노레가 서로 닿지 못하도록 가둬 두었던 톱니바퀴를 이제야 스스로 힘주어 밀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달아오른 잔인한 도취 속에서 본 오노레가 아니라 진짜 오노레가 어느 날 밤 그녀가 직접 나가서 기다리는 테라스에 나타날 듯했다.
또한 마음속에 언제나 자리 잡고 있던 낭만이기도 한,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자신의 애정을 현실과 이어 줄 길이 넓게 나 있으리라는 느낌, 그 길에서 불가능을 향해 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러니까 불가능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이 실현 가능함을 보여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P55

보통은 사랑이 처음 충족될 때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고백의 욕구가 비올랑트에게는 이렇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첫 환멸과 함께 찾아왔다. 그녀는 아직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사랑의 아픔을 겪게 되는데, 사랑때문에 아파하는 것은 사랑을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 P56

- 정말 그러실 수 있을까요?
- 하려고만 하면 뭐든 할 수 있어.
-- 하지만 그때 아가씨는 지금과 똑같은 것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 어째서?
-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 P59

하지만 그녀는 이전에 자신에게 큰 슬픔을 안겼던 로렌스가 이제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자기를 무시하던 때보다 지금의 저열함이 그녀의 마음을 더 멀어지게 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분개할 자격이 없다. 이전에 내가 그를 사랑한 까닭은 그의 영혼이 위대해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그때 이미 난 그가 저열한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랑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영혼의 위대함을 사랑하지못했다. 나는 한 인간이 저열하면서 동시에 사랑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이 식고 나면 누구나 훌륭한 인간을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그 저열한 남자를 향해 품었던 나의 연정은 참으로 이상하다. 온전히 머리에서 나왔으므로 감각에 의해 길을 잃었다는 변명 따윈 통하지 않는다. 플라토닉한 사랑은 대단한 게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머지않아 관능적 사랑이 더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P61

비올랑트가 답장을 썼다. "내가 보다 훌륭한 것에 마음을 쓰면 바로 그 훌륭함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하는 사교계 사람들이 나를 덜 좋아하니까 그래. 아, 오귀스탱, 난 권태로워."
오귀스탱이 찾아와서 권태의 이유를 알려 주었다.
- 음악, 사색, 자선, 고독, 들녘처럼 아가씨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권태로운 겁니다. 아가씨는 지금 성공에 사로잡혀 있고 쾌락에 묶여 계십니다. 인간은 자기 영혼의 가장 깊은 성향을 따라야만 행복할 수 있답니다.
- 오귀스탱은 그리 살아 보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아?
- 생각해 보았고, 그러면 살아 본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무미건조한 삶에 싫증나시기를 바랍니다. - P63

젊을 적에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지니고 있던 우아함의 절대적 지위를 누리고자 사교계에 머물렀고, 늙어서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 내고자 사교계에 머물렀다. 전부 헛일이었다. 그녀는 결국 그 지위를 잃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되찾기 위해서 애썼다. 오귀스탱은 비올랑트가사교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한 가지 힘이 있었다. 처음엔 허영심이 그 힘을 키워 냈지만, 그다음에는 바로 그 힘이 그녀의 염증, 경멸, 심지어 권태마저 무너트렸다. 그 힘이란 바로 습관이었다. - P67

어느 아가씨의 고백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대의 부재는 사라진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가장 분명하고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강렬하며 가장 충실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 P72

나는 어머니가 죽으면 곧바로 따라서 죽으리라 결심했다. 나중에 정말로 찾아온 어머니의 부재는 나에게 더 많은 쓰라린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결국 부재에 익숙해진다는 사실, 또한 그렇게 부재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이야말로 스스로 가장 쪼그라드는 가장 모멸스럽게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는 가르침이었다. - P76

강물과 나뭇잎과 하늘의 목소리가 예고해 주는 천상의 손님들은 원래 우리 스스로가 자신 안에 머물면서 정결해졌을 때에만 찾아오는 법이다. - P83

질투의 끝

오노레는 지난 일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삶을 빠르게 지나왔으니, 아침이면 벌써 그녀를 만날 오후 시간을 향해서 서둘러 갔던 것이다. 그의한나절은 서로 다른 열둘 혹은 열네 시간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두 시간 혹은 두 시간 반, 그리고 그 두 시간 혹은 두시간 반을 기다리는 시간, 또 그 두 시간 혹은 두 시간 반을 기억하는 시간으로 이루어졌다. - P98

오노레는 몽상에 잠겼다. "언젠가 내 마음이 저 여인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느껴지면,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소리 없이 그 마음을 붙잡아 두리라. 변함없이 다정하고, 한결같이 정중하리라. 내 마음속에 다른 사랑이 찾아와서 그녀를 향한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는 날이 오면, 지금 내 육체가 그녀 아닌 곳에 혼자 맛보는 쾌락을 감추듯이, 조심스럽게 감추리라." - P101

떡갈나무와 제비꽃이 축축하게 젖은 검은 흙 속에 뿌리를 내리듯, 우리의 가장 고상한 결단과 우아한 환희가 뿌리내리는 건강이라는 대지가 발밑에서 자꾸만 사라져가는 느낌이었다.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어딘가에 발부리가 걸려서 비틀거렸다. - P120

- 넌 마음속 소리에 지나치게 귀를 기울여. 나도 잠을 못 잘 때가 있지. 그런데 우리가 안 잔다고 생각할 때조차 사실은 조금씩 자고 있는 거야.

마음속 소리에 지나치게 귀를 기울인다는 말은 맞았다. 오노레는 자신을 온전히 놓아준 적이 없는, 그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아도 가끔 이곳을, 또 때때로 - P123

저곳을 파먹는 죽음의 소리를 늘 삶의 깊숙한 곳에서 들었다. 그는 천식이 심해져서 숨을 쉴 수 없었고, 가슴 전체를 고통스럽게 쥐어짜며 호흡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생명을 가리는 장막이, 우리 안의 죽음이 비켜나고 있음을 느꼈고, 숨을 쉰다는 것, 산다는 것이 얼마나무서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 P124

두 사람은 그동안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는 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마치 그들 각자의 밑바닥에 민감한 감수성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존재의 밑바닥에, 어린아이들에게나 신경 써 줘야 할 법한 그런 조심스러움에는 관심 없는 더 높은 신이 자리 잡고서 늘 진실을 요구하고 또 진실을 알려 주기라도 하는 듯, 그들은 설령 상대를 아프게 하는 진실일지라도 그대로 이야기했다. 오노레는 프랑수아즈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신을 향해서, 프랑수아즈는 오노레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신을 향해서 의무감을 느꼈고, 그 앞에선 서로를 슬프게 하거나 모욕하지 않으려는 욕망도, 다정하게 대하면서 연민을 베풀려는 더없이 강인한 진심이 담긴 거짓말도 버텨낼 수 없었다. - P126

- 죽어야 한다면, 죽고 나면 질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기 전에는? 내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질투하는 것은 오로지 쾌락이고, 나의 육신이 질투하고 있을 뿐이고,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행복은 내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바라는 것인데, 누가 제일 잘 해낼까? 내 육신이 사라지면, 영혼이 육신을 이기면, 이전에 많이 아프던 때처럼 내가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조금씩 떨어져 나오게 되면, 그래서 더 이상 미친 듯이 육체를 갈망하지 않고 그만큼 영혼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질투하지 않으리라. 그때는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리라. 육신이 아직 살아 있고 저항하는 지금의 나로서는 그것이 어떨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 상상해 볼 수는 있으니, 아마도 그것은 욕망이 사라진 무한한 애정 속에서 프랑수아즈의 손을 잡고 있던 시간, 고통과 질투가 가라앉은 그 순간과 비슷하리라. - P127

프랑수아즈는 침대 발치에 서서 눈물 흘리며 연인과 함께 사용하던 말들을 속삭였다. "나의 고향, 나의 형제." 오노레는 그렇지 않다고 깨우쳐 줄 의지도 힘도 없었기에, 자신의 "고향은 그녀 안에 있지 않다고, 하늘과 온 땅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미소지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나의 형제들"이라고 되풀이했고, 자기 눈동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프랑수아즈에게 향하는 까닭은 오로지 그녀의 뺨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에, 머지않아 닫히게 될, 이미 더 이상 울지 않는 그녀의 눈에 연민이 일었기 때문이라고 되뇌었다. 그는 의사보다 늙은 친척들보다, 하인들보다 프랑수아즈를 더 많이 사랑하거나 다르게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게 질투가 끝났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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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결핍의 다른 이름이다.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는 가득함(충만)은 삶의 꼴도 결도 아니다. 대칭은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서 제안에 있던 무언가를 뺀 나머지 모습이다. 좌우대칭은 그 가운데 가장 흔히 눈에 띄는 한 가지 모습일 뿐이다. 물리나 화학에서 나타나는 대칭은 어쩌다 그렇게 된 현상이지 스스로 뺀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나비의 두 날개로 나타나는 대칭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P149

0과 1 사이에 낀 것 치고 멈추는 것은 없다. 모두 흔들리고 끊임없이 흐른다. ‘수’도 바뀌고 물질이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톨로 뭉치고 결을 이루어 풀리는 뭇 것들 모두가 움직인다. 살아 춤춘다. 수학 공식도 물리법칙도 함께 널뛴다. 어떤 눈금이 새겨진 잣대를 들이대도 그 잣대가 잴 수 있는 것은 수의 얼굴을 지닌, 법칙의 탈을쓴 나머지일 뿐이다. - P151

나는 <철학을 다시 쓴다》에서 동일률이 어디에서 어떻게 깨지는지 밝히는 데 힘을 쏟았다. 함과 됨으로 드러나는 힘은 우리 눈에 톨의 움직임으로 밖에 드러나지 않는다. 눈보다는 귀가 조금 더 밝아서 결의 움직임을 받아들이지만, 그것도 어디에서 어디까지, 얼마에서 얼마까지라는 틈새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느끼고(감각), 알 수 있는(지각) 것은 얼마나 적은가. 작아질수록 그리고 커질수록 사람의 헤아림에서 그만큼 벗어나는 앎의 테두리가 좁아진다. 미시세계(작은 것), 거시세계(큰 것)에서 드러나는 티끌 같은 조약돌 하나 집어 들고 그것을 앎의 모두인 것처럼 뽐내고, 자랑하고, 떠들어대고, 기리는 모습은 ‘알음알이 놀이‘(지적유희)와 진배없어 보인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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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느냐, 삶이란 무엇이냐?‘
옛날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자들은 대체로 삶에 대한 소박하고도 끊임없는 호기심이 그이들의 연구 동기였다. 그 사람들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가난 속에서도 꾸준히 ‘형이상학적 꿈‘을 꾸어 왔다. 그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지도 않았고, 남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대 첨단 과학자들은 스스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꿈꾸는 ‘기쁨의 형이상학‘ 대신에 ‘슬픔의 형이상학‘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받은 느낌이다. - P127

크게 보아 지난 몇백 년 동안 과학계에는 세 차례에 걸친 큰 변화가 있었다. 뉴턴이 찾아낸 관성과 만유인력의 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그리고 양자역학이다. 하나는 일상세계의 해석에서 또 하나는 거시세계의 해석에서 나머지 다른 하나는 미시세계의 관찰에서 일어난 변화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물리 세계의 법칙들은 수학과 실험, 관찰의 ‘검증’을 거쳤다. 그러나 문제가 남았다. 상대성원리와 양자역학의 불일치다. 그 둘을 아울러 보려는 시도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불확정성원리와 불완전성정리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물리학, 수학의 ‘작업가설’로는 문제 해결이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플라톤주의와 원자론자들 이론의 통일? 글쎄, 어려울 게다. - P128

한 입으로 두 말뿐 아니라 여러 말을 할 수 있다. ‘다 비었다, 하나다, 마음이 모두 빚어냈다, 물질이다, 생명이다, 창조의 역사다, 진화의 역사다…………’ 이른바 화엄세계는 살아 있는 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자나 아원자로 살아 있든, 부풀어 오르는 우주로 살아있든, 마침내 눈에 안 보이는 점으로 사라지다가 어느 순간 ‘뻥‘ 터지든 살아 있는 놀이판이다. 그럴싸하게 꾸며 댈 수도 있다. 크게 어렵지 않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본뜨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좀팽이 과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너나들이할 수 있는 우주적 상상력이다. 안 그런가?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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