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느냐, 삶이란 무엇이냐?‘
옛날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자들은 대체로 삶에 대한 소박하고도 끊임없는 호기심이 그이들의 연구 동기였다. 그 사람들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가난 속에서도 꾸준히 ‘형이상학적 꿈‘을 꾸어 왔다. 그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지도 않았고, 남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대 첨단 과학자들은 스스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꿈꾸는 ‘기쁨의 형이상학‘ 대신에 ‘슬픔의 형이상학‘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받은 느낌이다. - P127

크게 보아 지난 몇백 년 동안 과학계에는 세 차례에 걸친 큰 변화가 있었다. 뉴턴이 찾아낸 관성과 만유인력의 법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그리고 양자역학이다. 하나는 일상세계의 해석에서 또 하나는 거시세계의 해석에서 나머지 다른 하나는 미시세계의 관찰에서 일어난 변화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물리 세계의 법칙들은 수학과 실험, 관찰의 ‘검증’을 거쳤다. 그러나 문제가 남았다. 상대성원리와 양자역학의 불일치다. 그 둘을 아울러 보려는 시도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불확정성원리와 불완전성정리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물리학, 수학의 ‘작업가설’로는 문제 해결이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플라톤주의와 원자론자들 이론의 통일? 글쎄, 어려울 게다. - P128

한 입으로 두 말뿐 아니라 여러 말을 할 수 있다. ‘다 비었다, 하나다, 마음이 모두 빚어냈다, 물질이다, 생명이다, 창조의 역사다, 진화의 역사다…………’ 이른바 화엄세계는 살아 있는 우주를 가리키는 말이다. 전자나 아원자로 살아 있든, 부풀어 오르는 우주로 살아있든, 마침내 눈에 안 보이는 점으로 사라지다가 어느 순간 ‘뻥‘ 터지든 살아 있는 놀이판이다. 그럴싸하게 꾸며 댈 수도 있다. 크게 어렵지 않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본뜨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좀팽이 과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과 너나들이할 수 있는 우주적 상상력이다. 안 그런가?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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