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무엇을 참작할지가 전적으로 판사에게 맡겨져 있으며, 이 재량권을 악용하는 경우 견제 장치가 전무하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정상참작감경은 재벌이나 권력자 피고인을 위해 기능하이 되어 상하의 베이스까고, 성범죄 가해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는다. 판사들의 재량은 강자, 다수자, 가해자를 위해 발휘된다. - P115

이제 한국 판사들이 쥔 강력한 무기인 정상참작감경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판사들은 정상참작감경이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 시민들을 지키기 위한 무기, 특별법의 남발로 인한 형벌 불균형을 조정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무기가 지키는 대상은 피해자, 약자, 소수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판사들 손에 쥐어준 그 무기의 주인이 판사가 되는 것이 합당한가? 입법 미비, 양형기준 미설정,
수사 과정 문제 등 외부로만 책임을 돌리는 판사들에게 자발적 변화를기대할 수 있을까? 권한은 빼앗기기 싫고 책임은 외부로 돌리면서 언제까지 그 무기의 주인으로 서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그저 무지몽매한 시민들 때문인가? 판사들은 그 무기의 주인이 아니다. 그 무기는 시민들이 판사들에게 빌려준 것이다. 따라서 무기를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진짜 주인’이 그 무기를 찾을 것이다. - P121

‘보낼 수 있지만 안 보낸다.’
2020년 7월 6일, 세계 최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사이트의 운영자 손정우를 미국에 송환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재판부(서울고법 형사20부: 강영수, 정문경, 이재찬)의 입장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이렇다. 또 ‘재량‘이다. 그동안 디지털 성폭력 범죄자들을 선처해왔던 한국 법원의 재량이 이번에 또 반영되었다. 재판부는 법대에서 엄중한 목소리로 "면죄부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범죄인에게 적극적 수사 참여를 독려했지만, 법원의 선언은 틀렸다. 법원은 늘 그렇듯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예비) 범죄자들에게는 아무리 악질적인 디지털 성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이 약한 한국에서 재판받을 수 있으며, 몇 년(징역) 살겠다는 각오만 하면 수억 원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한국 법원이 디지털 성범죄를 양산한다고 비판받는 이유다. - P129

그러나 이것으로 한국 법원이 정말 변했다고, 변하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위험하다. 시민들의 사법 감시가 소홀해지면 법대 위의 그들은 언제든 변화 전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변화의 가능성은 백래시backlash를 부르기 마련이며, 그런 의미에서 변화를 위한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실제로 나는 2019년 말, 연대 활동 중단을 계획하면서 주변에 백래시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당시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반성폭력 운동이 여론의 형성과 오프라인 시민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지는 중이었고, 입법적 보완을 포함해 수사와 재판 등 형사사법 절차의 전반에서 변화의 요구가 힘을 얻고 있었다. 물론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기는 여전히 힘이 부족했기에 가능성을 열어둔 것에 불과했지만, 그 가능성이 바로 가해자-강자-다수자를 움직일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 P144

2022년 5월 2일, 미국에서는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50년 만에 뒤집으려는 대법원 다수의견 1차 초안 전문이 공개되었다. "미약한 추론으로 이뤄진 ‘로 대 웨이드‘ 사건은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며, 두 사건(나머지 하나는 1992년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 판례)은 임신중지 문제의 국가적 해결로 이어지기는 커녕 논란을 악화시키고 분열을 깊게 만들었다"는 게 초안의 주요 내용이었다. 긴즈버그Ruth BaderGinsburg 대법관의 사망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합류하면서 보수색이 짙어진 연방대법원이 50년 전으로 역사의 시계를 돌리려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2022년 6월 24일, 결국 연방대법원은 대법관 9명 중 5명의 다수의견으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했다. 심지어 보충의견을 통해 피임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동성혼(로런스 대 텍사스), 동성 성관계(오버게펠 대 호지스) 등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도 재검토해야한다고 주장해 역사적 후퇴를 선언했다. - P145

"현재 형사사법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2010년 성폭력 피해를 입은 후 만나는 전문가들마다 내게 한 말이었다. 왜 피해자인 내가 수사·재판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가 좁은지, 어째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지 물으면 내가 당사자가 아니니 당연하다고 했다. 난 범죄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로부터 회복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왜 당사자의 지위에 있지 못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분과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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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비현실적으로 잘생기긴 했다. 얼굴이 정말 하얗고, 뭘 먹고 자랐는지 키도 정말 컸다. 떡 벌어진 어깨에 작은 얼굴이 조화롭게 어울릴 건 또 뭐란 말인가. 가끔 그런 인간들이 있다. 신이 여러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눠 주어야 할 것들을 실수로 몰아준 것같은 인간들, 공부도 잘하고 집도 좀 살고 목소리도 달콤하고 노래도 곧잘 하는데 얼굴까지 훌륭한 사람.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좀 얄미운 사람. - P9

바닥은 말 그대로 냉골이야. 정말 추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게 어떤 건지 몸소 알게 돼. 조금 자다가 다시 깨고 조금 자다가 다시 깨기를 반복해. 그러다가 잠이 몽땅 달아나 버리면 새벽의 한기 속에서 눈을 떠. 그러면 바로 코앞에 내가 저지른 일이 보여. 내가 저지른 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다가와. 눈을 질끈 감고 잘못했다고 아무리 외쳐도 잘 사라지지가 않아. - P51

엄마는 늘 내게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나는 늘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 허덕인다. 엄마가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걸 알지만, 나는 한 가지 질문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왜 엄마는 나를 믿지 못할까. 나를 치켜세우는 듯한 엄마의 말 아래로 흐르는 더 큰 욕심과 내 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왜 나는 매번 느끼고야 마는 걸까. "네가 하고 싶은 거 해야지."라는 엄마의 말은 내 귀에 이렇게 들린다. "단, 성적이 좋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 P58

실습생들은 모두 페란을 존경해. 페란과 마주치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말이지. 한 실습생이 간신히 용기를 내 질문했어.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입니까?"
페란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짐작이 가니? 이 문장을 필사하는 이순간에도 발끝부터 전율이 올라온다.
"모방하지 않는 것이죠."
되돌아보면 나는 그동안 늘 남을 모방해 살아왔던 것 같아. 한 번도 나답게 살지 못했어. 나다운 모습이 어떤 건지 관심조차 없었지. 만약 내가 단단히 중심을 잡고 살았다면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수 있었을까? - P80

이 상상 놀이를 시작한 뒤로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 여기에서 가장 힘겨운 일이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는 거거든. 시간이 빨리 흐르는게 어떤 의미인지 이곳에 들어온 적 없는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엘불리를 알게 되고 조셉을 만난 덕분에 요즘 나는 천국에 잠깐 들어온 기분이야. - P82

"미래를 바꾸는 것도 좋지만 난 어떤 미래가 오든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인생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잘 헤엄치는 사람. - P90

"개학날 네가 내 이름 기억해 줬잖아."
아름은 책상에 올린 팔에 한쪽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너 공부 잘하잖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건 고마운 게 아니라 미안해할 일이지. 같은 반이었는데도 넌 내 이름 몰랐잖아."
말문이 막혔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이렇게 말문이 막힌 적은 없었는데, 아름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너 그거 병이야."
"뭐?"
"모든 사람한테 사랑받아야 하는 거. 아니, 미움이나 무관심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다는 그 마음." - P105

아름의 말이 사실인 걸까. 아름이 혼자 다니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라 아름이 우리 반에서 내 가치를 몰라주는 단 한 사람이라 걸렸던 걸까. 다른 아이들처럼 아름에게도 인정받고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걸까.
아름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아름은 나를 이토록 예리하게 간파할 수 있었을까. 때로는 나 자신을 열렬히 탐구하는 일이 무색할 만큼 나를 단번에 간파하는 상대방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옛 성인들이 타인의 존재를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거울처럼 나를 비춰 주고 나의 음습한 부분에 빛을 비춰 주는 사람에게 숨기고 싶은 나의 일부분을 들켜 버리는것. 필요한 과정이겠지만 적잖이 당황스럽고 적잖이 불쾌한 일이다. - P107

연약한 마음을 잘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지? 모든 사람이 다 강해지기만 하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그렇지만 이곳에서 나는 강해지자고 많이 읊조려. 나는 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종교도 없지만 이곳에서는 매일 기도해. 어떤 신이든 들어 달라는 마음으로. 내 잘못을 똑똑히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싸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여기를 나가도, 여기보다 더 무섭다는 사회에서도 잘 견딜 수 있게 강인함을 달라고. - P110

녀석에게 무슨 말을 더 해 주고 싶었느냐고? 조금 더 기다려 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 조금 더 기다리면 미안함과 죄책감과 후회와 원망이 파도처럼 몰려들 거라고. 나도 그랬으니까. 죽 도망만 다녔기 때문에 더 큰 폭풍이 되어 몰려들 거라고. 그 폭풍에 알몸으로 맞서는 건 죽을만큼 힘들겠지만, 견디다 보면 폭풍은 언젠가는 잠잠해진다고. 그러니이 악물고 견디라고. 내가 안다고. 온몸으로 겪어 봐서 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었어. - P114

그 좁은 곳에 갇혀 있는 동안 깨달았어요. 나 자신을 가장 괴롭힌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걸. 내가 나의 이미지, 평판, 외적인 평가에 휘둘리는 동안 내 안의 진짜 나는 외롭고 힘들었다는 걸, 완벽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잡다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고, 그 잡다한 생각을 하느라 정작 중요한 생각을 할 기운이 없었다는 걸. - P137

"시 쓰는 거야."
아름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시? 시인이 되고 싶은 거야?"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어. 다만 내가 아는 건 시가 좋다는 거야.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완전해지거든."
완전해진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저 한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그 단어에 담긴 여러 의미와 형상이 열매처럼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 ‘완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동주 생각이 났다. 영화가 끝났을 때 동주가 기다란 몸을 쭉 펴는 모습이 생각났고 물을 마실 때 움직이던 동주의 목울대가 생각났고 내 손을 잡은 동주의 보드랍고 따뜻한 손이 생각났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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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알라딘 중고 구매

첫째가 2학기 수학 수행평가 책 사달라고 해서 알라딘 가는 김에 내 책도 구매, 2만원 이상 구매시 20프로 할인 쿠폰도 쓰고 럭키백 할인도 받고~

얼마 전에 읽은 이라영의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에 나온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구매

지금 읽고 있는 김승섭 교수의 “오롯한 당신” 좋아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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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8-21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첫째가 효자네요 ㅋ 덕분에 책도 구매하시고~!!! 우주점 구경가는거 정말 재미있는거 같아요~!!

햇살과함께 2022-08-21 13:58   좋아요 2 | URL
네~ 마침 주말 20프로 할인 쿠폰 있어서 뭘살까 고민했는데요~
 

성별정체성이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연구 참여자들은 또래집단 내에서 괴롭힘이나 따돌림을 당하거나, 교사의 혐오 발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성별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이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문제시된다는 것을 알려 준다.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가시성은 높아져도 낙인은 남아 있는 상황에서, 교사들은 성소수자에 대해 학생들과 어떻게 이야기 나눠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교사가 수업시간에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과 편견에 기반한 발언을 하는 것이 현재 한국의 상황이다. - P68

조금 있으면 성인인데, 성인 되면 좀 병원을 알아봐서 (성전환을 위한) 호르몬치료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잖아요, 여지가요. 솔직히 그걸 어떤 희망 삼아서 살고 있는데. 진짜 지금은 뭔가 바라볼 데가 있으니까 삶의 끈을 놓지 않는데. 진짜 성인이 되어서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고, 돈 쓰고 하다 보면, 제가 이걸 진짜 놔 버릴지 놓지 않을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깜깜해요. 지금은 막연한 목표가 있으니까 살고 있는데 그때가 되면 되게 진짜 가끔 이런 거 생각을 해 보면 막막해요. 적은 돈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호적정정을 제가 혼자서 진행하면 적어도 20대 중반은 지날 텐데, 호적정정에만 매달리기에 제청춘이 아깝지 않아요? - 트랜스남성 H - P69

저희 부모님은 조금 보수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굉장히 개방적이에요, 또 네 인생이고, 부모가 뭐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로서 그냥 무조건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라고 생각을 하신 거죠. 엄마도 "물론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정말 생물학적인 거고 바꿀 수 없는 거라면 네가 행복하게 살아야지. 죽는 것보단 낫잖아"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 20대 트랜스남성 M - P77

제가 많이 봤던 케이스는 어릴 때부터 티가 나서 학업을 포기하고, 그냥 이래저래 지내다가 거기서 2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첫 번째는 편의점이나 PC방 그런 데를 전전하면서 성전환 수술을 받아서 20대 중반이나 후반에 여성이 되었지만 학력도 낮고 구체적인 능력도 없는 그런 경우요. 두 번째는 업소를 가거나 아니면 조건 만남 같은 걸 하면서 그걸로 번 돈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고 생활하는 그런 경우요. 이 2가지 경우가 한국에서는가장 많은 거 같아요. - 30대 트랜스여성 D - P82

전형적인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을 갖추지 못한 경우에 패싱은 어려운 일이다. 이분법적인 성별 규범으로 인해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이 아닌 그 이외의 성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트랜스젠더는 스스로를 남성이나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이들은 또다른 성별로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중간자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 P96

트랜스젠더 중 사회활동을 하며 한 번의 예외 없이 원하는 성별로 인정받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트랜스젠더가 사회 속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게 본인의 성별정체성으로 인지되는 패싱의 과정은 이들의 외모나 옷차림, 행동과 습관이 성별정체성과 적절히 부합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문제는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인지되지 않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때로는 의연함으로, 때로는 ‘나‘를 찾아가는 연극으로 접근하고 있었지만, 패싱 과정에서 이들이 느끼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었다. - P95

이 보고서에서 의료적 트랜지션과 더불어 중요하게 살펴볼 또 다른 결과는 법적 성별정정과 관련한 내용이다. 법적으로 성별을 정정하고자 하는 트랜스젠더에게 성전환 수술 여부는 아직까지 중요한 요건 중 하나인데, 총 233명중 124명(53.2%)이 "외부 성기 수술을 받지 않은 점" 때문에 성별정정을 준비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생식능력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점"(28.3%) 역시 많은 응답자들이 부담으로 느끼는 지점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해당 보고서에서는 모든 트랜스젠더가 의료적 트랜지션을 원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성별을 정정하려고 할 때 외부 성기 수술 같은 성전환 수술을 받았는지 확인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에게 사실상 국가가 수술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P117

덴마크에서 진행된 코호트 연구는 104명의 트랜스젠더(트랜스여성 56명, 트랜스남성 48명)를 1978년부터 2010년까지 30여 년 동안 추적 관찰해, 성전환 수술을 받기 전·후의 건강 상태를 비교했다. 연구 결과, 성전환 수술을 받기 전과 후 참여자들의 심혈관계 질환과 근골격계 질환 등 신체 질환의 유병률과 사망률에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성전환 수술을 받은 이후 정신 질환의 유병율은 이전보다 줄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스웨덴의 코호트 연구에서는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를 30년 동안 추적관찰하여 이들의 사망률 및 정신 질환 발병율을 일반 인구 집단과 비교했다. 연구 결과, 트랜스젠더는 일반 인구 집단에 비해 자살할 가능성이 19.1배, 정신 질환으로 입원할 가능성이 2.8배 더 높은 것을 확인했다. - P122

넷째, 국내의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에서 다루는 주제가 매우 제한적이다. 국내에서 진행된 임상적 연구에서 다루는 주제는 주로 성전환 수술, 호르몬 관리 및 검사 등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국외에서는 트랜스젠더의 건강에 대한 다양한 임상적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가령, 트랜스젠더를 대상으로 한 HIV/AIDS와 자궁경부암 검진, 부인과 관련 연구 등이 수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는 트랜스젠더가 겪는 차별과 낙인 등 부정적인 사회 경험이 이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이러한 주제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부족하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의 건강은 앞서 이야기한 차별이나 사회적 지지와 같은 사회적 인자로부터 주요한 영향을 받을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향후 이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 - P123

성소수자 운동의 오랜 슬로건,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We Are Everywhere)‘가 말해 주듯이, 트랜스젠더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 계속해서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트랜스젠더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트랜스젠더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며, 이들의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 P125

의료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신과 진단, 호르몬 요법 및 성전환 수술을 건강보험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118개국 중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해 총 45개국에서 국가 건강보험이나 공공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한 가지 이상의 의료적 트랜지션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이 중 공공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호르몬 요법만을 보장하는 나라는 6개국, 성전환 수술만을 보장하는나라는 7개국이며, 두 의료적 조치 모두를 보장하는 나라는 총 32개국이다. 한국은 트랜스젠더의 정신과 진단, 호르몬 요법, 성전환 수술, 이 중 어떤 비용도 공공보건의료시스템에서 보장하지 않는다. 기존에 진행된 국내 연구에서는 성소수자가 정부에 바라는 주요 요구사항 중 하나로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 글에서 살펴본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비용 부담이 의료적 트랜지션의 가장 큰 장벽으로 드러났다. - P145

한국의 정신과 진단은 국제 표준인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사인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ICD)를 기준으로 하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를 따른다. 트랜스젠더가 받는 정신과 진단인 성주체성장애 역시 이와 같은 표준분류에 의거한다. 성주체성장애 진단은 과거 개인의 성별정체성을 정신장애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이에 따라 ICD-11에서는 기존에 정신 및 행동 장애로 분류되었던 성주체성장애를 성적 건강과 관련 있는 상태(Conditions related to sexual health)로 분류하고, 진단명을성별부조화(Gender incongruence)로 수정할 것이 제안되었다.
2018년6월 18일, 세계보건기구는 그 제안을 수용해 ICD-11에서 트랜스젠더 정체성 항목을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 P149

의학 전문가들은 의료적 트랜지션을 미용 목적의 성형수술이나 실험적 시술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의료보장이 필요한 의료적 조치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 트랜스젠더 보건의료 전문가 협회는 트랜스젠더 의료표준을 발간하여 보건의료 전문가에게 임상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지침에 따르면, 호르몬 요법과 성전환 수술은 트랜스젠더의 성별위화감 해결에 필수적인 의료적 조치다. 미국의학협회 또한 2008년도 결의안을 통해 의료적 트랜지션의 효과를 인정하며, 이를 공공 및 민간의료보험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 P159

2016년 기준으로, 국내 병원 및 의원 수는 64,999개이고 여기에 종사하는 의료인 수는 606,182명에 달한다. 현재 정규 의학 교육에 트랜스젠더와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트랜스젠더에게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 기관이 부족하다. - P164

"병원에서 우리를 환자로 보는 게 아니라 돈으로 보더라도, 서비스를잘하면 상관없는데, ‘너희는 우리 병원 아니면 갈 데 없잖아. 우리가 너희한테 해 주는 거야‘라는 마인드를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뭔가정말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병역 문제 관련해서 호르몬 치료를 받았던 병원에서 증명서를 받아야 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안 떼 주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들도 찔려서 뭔가 문제가 생길까봐 그런 것 같아요." (20대 트랜스여성 A) - P169

"누군가는 트랜스젠더 진료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료하는 곳은 안전했으면 좋겠고, 진료를 하는 의사도 믿을 만하면 좋겠다. 트랜스젠더인 자신이 안심하고 진료받을 수 있는 의료 기관이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당시 나는 트랜스젠더의 호르몬 치료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 친구에게 나는 트랜스젠더와 관련해 의과대학에서 배운 적도 없고, 가정의학과 수련을 받을 때도 배운 적이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친구는 "어차피 다른 의사들도 다 몰라, 어차피 다 모르는 거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공부해서 진료해 주면 좋겠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살림의원에서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 P183

안정기에 접어들고 나면, 사실 만성 질환을 관리하는 것과 동일하다. 호르몬 치료는 젊었을 때 잠깐 하는 게 아니라 50대가 되어서도 계속 필요한 치료다. 이 과정에서 많은 만성 질환이 발생할 수있고, 호르몬 치료가 흔히 성인병이라고 하는 고혈압, 당뇨, 간질환같은 만성 질환들의 발병률을 높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호르몬 치료에만 관심을 가지고, 호르몬 치료에 동반되는 다른 건강위험요인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기도 한다. 결국 교육과예방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맨날 술 줄이고 담배 끊고 운동하고 물 많이 마시라고 잔소리를 하게 된다. 이런 잔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주기적으로 의사를 만나는 건 꼭 필요하다. - P187

이렇게 화장실을 만들고 보니, 트랜스젠더만이 아닌 다른 환자들도 편하게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살림의원에는 아빠와 딸, 엄마와 아들 등 소아환자와 보호자의 성별이 다른 내원객이 많은데, 만약 아이가 뒤처리를 혼자 할 수 없는 경우라면 보호자가 동행해야 된다. 그렇다면 아빠가 딸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화장실이 남/녀로 구분되어 있으면, 어느 화장실로 가야할지 고민이 될 수 있다. 살림의원에 오는 분들은 아이를 데리고 가족 화장실로 가면 된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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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성별위화감(Gender dysphoria)
성주체성장애는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1980년에 발간한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편람》 3판(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 DSM-III)에 아동기 성주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of childhood)와 트랜스섹슈얼리즘(Transsexualism)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재되었다. 트랜스섹슈얼리즘은 이후 청소년과 성인의 성주체성장애에 대한 진단명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성주체성장애라는 진단명은 ‘장애’라는 표현으로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병리화하고, 트랜스젠더에게 정신장애라는 낙인을 추가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 P10

이에 따라, 2013년 개정된 DSM-5에서 성주체성장애는 성별위화감으로 바뀌었다. 성별위화감은 출생 시의 법적 성별과 본인이 인지하는 성별이 불일치함에 따라 생기는 불쾌감 또는 위화감을 가리킨다. 성별위화감이라는 진단명은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 자체는 장애가 아니며, 의학적인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것은 성별위화감으로 인해 트랜스젠더 본인이 느끼는 고통임을 강조한다. - P11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 줘."
-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중 - P18

연구를 하며 가장 자주 떠올린 단어는 ‘무지‘였다.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를 하는 과정은 모든 게 새로웠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단어에 익숙해지고 그 뜻을 배워야 했던 면도 있지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사람은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그 고정관념을 나는 오랫동안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로서 쓴수많은 논문에서 성별이라는 변수는 남과 여로 고정된 것이었으니까. 트랜스젠더의 목소리에는, 내게는 더없이 ‘자연스럽고 익숙한‘ 어떤 것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누군가가 살아가는 세상이 있었다. 은행에서 신원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보일 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그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나는 짐작조차 못했다. - P19

연구실 학생들과 연구를 기획하고 설문조사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할 때, 충분한 사전 검토와 고민이 없으면 그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동안 소방공무원 인권 상황 실태조사나 전공의 근무 환경조사 같은 여러 연구를 진행하면서 애초 의도했던 계획이 실패한 적은 많지만, 한 번도 구체적인 계획 없이 학생들이 막연히 궁금한 내용을 설문 문항에 포함시키도록 허용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트랜스젠더 건강에 대해서는 아직 설문조사를 진행할 만큼 당시 우리의 고민과 공부가 충분히 쌓여 있지 않았다. - P23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교수님, 이 글을 논문으로 받아 줄 학술지가 있을까요?" 학생들은 불안했던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 글에 담긴 내용이 한국 사회에 학술적으로 필요한 내용이라는 점은 확신하지? 그러면 믿고 가자. 그런 글은 학술지가 분명 알아볼 거야." - P26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다.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좀 더 준비를 하며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이 부족함을 감수하며 현재 가능한 수준에서 최선의 연구를 할 것인가? 우리의 선택은 후자였다. 만약 우리 연구가 세계의 구성원리를 파악하는 물리학 연구였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건학은 인구 집단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응용학문이다. 한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더 건강해질 수 있을지에 대해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집단은 그 공동체가 받을 수 있는 혜택으로부터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다. 현재 시스템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좀 더 방법론적으로 엄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 P29

준비해 간 연구팀 소개글과 연재글을 보여 줬을 때 매니저분은 "대학에서 연구하시는 분들이시죠?"라고 말하고는 우리의 눈을 피했다. 이혜민 선생님과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희 글이 그 정도로 이상한가요?" 매니저분은 글이 나쁜 건 아닌데 많은 분들이 핸드폰으로 보실 텐데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라고 했다. 나름 부드럽게 대중적으로 글을 쓴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연구자스러운 글이었던 것이다. - P31

2017년 3월 23일 과학잡지 《네이처(Nature)》에 우리가 진행한 크라우드펀딩을 한국 사회에서 나타난 대안적인 연구 형태로 소개한 기사가 실렸다. 한국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받지 못하고 시민들의 후원을 통해 연구를 진행했던 우리의 여정이 오히려 외국에서 인정받은 것 같았다. - P33

2016년 12월 <청소년 건강 학술지(Journal of Adolescent Health)》에 실린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와 하버드대의 공동연구였다. 10대 트랜스젠더 73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호르몬 치료를 받기 전에, 난자·정자 보관(Fertilitypreservation)을 하는지에 대해 조사한 것이었다. 아이를 갖는 것은 삶의 행복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수 있는데, 의료적 트랜지션을 시작하고 나면 자신의 난자와 정자로 아이를 갖기 어려우니 그 전에 난자와 정자를 추출해서 보관해 놓는 사람의 비율이 얼마인지를 조사한 연구였다. 연구에 참여한 73명 중 72명이 난자·정자 보관 상담을 했고, 2명은 실제로 난자·정자 보관을 했으며, 45%는 나중에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야 나는 트랜스젠더의 가족구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 P36

몇몇 분들이 "그냥 브로슈어를 보내시지, 부담스럽게 교수님이 직접 오셨어요?"라고 내게 물었다. "부담드리려고요. 도와주세요. 정말 잘해 보고 싶어요." 데이터 수집이 끝난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병원을 포함하지 않았다면 반쪽짜리 설문조사가 될 뻔했다. - P38

그러나 한국 사회는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에 대해 함부로 말한다.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체성을 두고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성적 기호‘라는 잘못된 단어로 표현하거나, 자신의 성별정체성에 따른 의료적 조치를 ‘미용성형‘이라는 말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한국의 의과대학 교육 과정과 레지던트 수련 과정에는 트랜스젠더 환자 진료에 대한 내용이 없다. 많은 트랜스젠더가 실력이 좋은 의사에게 수술받기 위해 태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태국에서 수술받고 한국에 돌아온 뒤 후유증이나 합병증이 생기면 대책이 마땅치 않았다. - P44

의료적 트랜지션을 건강보험 보장 항목에 포함시키는 결정은, 드러내 말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역사를 감당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써 온 그들에게 한국 사회가 보내는 작은 전언이 될 것이다. 당신 앞에 놓인 수많은 장벽에 무지했던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겠다고. 늦었지만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우리가 함께 감당하겠다고. 그러니 당신도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 P46

"저도 사실 법적 성별정정 때문에 수술을 한 거라서. 수술 없이도 가능했다면 저도 수술을 안 하고 정정하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어차피 생식기를 뭐 보여 주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옷으로 가리고 다니는 거고." (20대 젠더퀴어 K) - P51

"한국에 청소년 트랜스젠더가 있어요?" 2013년, 청소년 트랜스젠더 생애사 연구를 할 때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는 ‘성전환 수술을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낯설게 느끼고, ‘청소년기에도 성전환 수술을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도 어느 날 갑자기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성전환 수술과 같은 의료적 조치를 선택하고, 자신이 태어날 때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로 사회적 삶을 살게 되기까지는 긴 고민과 협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대다수 트랜스젠더는 아동기나 청소년기 - P54

에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깨닫고 형성하며 성장한다. 또한 자신의 성별정체성으로 인해 가족이나 또래 관계에서 갈등과 불화, 때론 폭력을 경험하며, 의료적 트랜지션과 법적 성별정정을 비롯해 미래 삶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 P55

연구 참여자들은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2차 성징으로 몸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혹은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나 개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 막연하게 갖고 있던 다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자기인식과 충돌하며, 불안과 불편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어린 시절 "자고 일어나면"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던 트랜스여성F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 씨의 데뷔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이 실제 존재하며 이것이 현실임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 P59

처음 생리가 왔을 땐 어땠어요? 아, 키는 망했구나 했죠. - 트랜스남성 D - P60

연구 참여자들에게 청소년기에 찾아온 2차 성징은 다른 이들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본인이 깨달았던,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을 현저하게 느끼게 되는 계기였다. 이들은 이미 어딘가 ‘달랐지만’, 몸의 2차 성징으로 인해 더욱 ‘달라졌고’, 따라서 이 차이를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한 채 현실로 소환되었다. ‘나는 누구‘라는 말을 찾기 위해 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도 성소수자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쉽지 않았다. 이처럼 자신의 성별을 둘 - P61

러싼 경합과 불협화음을 조율하고, ‘무엇이 아닌‘ 나를 넘어 ‘나는 누구다‘라는 감정을 형성하고 스스로 명명하는 행위는, 연구 참여자들이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62

주로 방과 후까지 화장실 가는 걸 다 참고 학교에서 나간 다음에 해결을 한다거나, 아니면 수업시간이라든지 아니면 체육시간 같을 때에 자유시간을 준다 그러거나 하면 그때 화장실을 이용했어요. (다른 학생들이) 화장실 안 가니까. 그런 식으로 다들 안 들어가는 시간에 해결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 트랜스여성 A - P62

중학교 때 조용히 지냈던 편인데, 그때도 상담 선생님과 말을 해 본 적이 있었어요. "제가 남자로 태어났지만, 저는 여자예요." 그렇게 얘기했어요. 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나중에 어떻게 할 거다라고 설명을 드리면서……, 제 입장에서는 설명을 잘 드린 거거든요. 근데, 선생님이 딱 한마디를 했어요. "이 개새끼……" 따졌죠. 제가……… 왜 개새끼냐고요. 그러니까 "니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내 종교는 그런 걸 허용하지 않는 종교인데, 내가 어떻게너를 이해해 줄 수 있겠느냐." 이러시더라고요. - 트랜스여성 E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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