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무엇을 참작할지가 전적으로 판사에게 맡겨져 있으며, 이 재량권을 악용하는 경우 견제 장치가 전무하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정상참작감경은 재벌이나 권력자 피고인을 위해 기능하이 되어 상하의 베이스까고, 성범죄 가해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는다. 판사들의 재량은 강자, 다수자, 가해자를 위해 발휘된다. - P115

이제 한국 판사들이 쥔 강력한 무기인 정상참작감경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판사들은 정상참작감경이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 시민들을 지키기 위한 무기, 특별법의 남발로 인한 형벌 불균형을 조정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무기가 지키는 대상은 피해자, 약자, 소수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판사들 손에 쥐어준 그 무기의 주인이 판사가 되는 것이 합당한가? 입법 미비, 양형기준 미설정,
수사 과정 문제 등 외부로만 책임을 돌리는 판사들에게 자발적 변화를기대할 수 있을까? 권한은 빼앗기기 싫고 책임은 외부로 돌리면서 언제까지 그 무기의 주인으로 서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그저 무지몽매한 시민들 때문인가? 판사들은 그 무기의 주인이 아니다. 그 무기는 시민들이 판사들에게 빌려준 것이다. 따라서 무기를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진짜 주인’이 그 무기를 찾을 것이다. - P121

‘보낼 수 있지만 안 보낸다.’
2020년 7월 6일, 세계 최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사이트의 운영자 손정우를 미국에 송환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재판부(서울고법 형사20부: 강영수, 정문경, 이재찬)의 입장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이렇다. 또 ‘재량‘이다. 그동안 디지털 성폭력 범죄자들을 선처해왔던 한국 법원의 재량이 이번에 또 반영되었다. 재판부는 법대에서 엄중한 목소리로 "면죄부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범죄인에게 적극적 수사 참여를 독려했지만, 법원의 선언은 틀렸다. 법원은 늘 그렇듯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예비) 범죄자들에게는 아무리 악질적인 디지털 성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이 약한 한국에서 재판받을 수 있으며, 몇 년(징역) 살겠다는 각오만 하면 수억 원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한국 법원이 디지털 성범죄를 양산한다고 비판받는 이유다. - P129

그러나 이것으로 한국 법원이 정말 변했다고, 변하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위험하다. 시민들의 사법 감시가 소홀해지면 법대 위의 그들은 언제든 변화 전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변화의 가능성은 백래시backlash를 부르기 마련이며, 그런 의미에서 변화를 위한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실제로 나는 2019년 말, 연대 활동 중단을 계획하면서 주변에 백래시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당시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반성폭력 운동이 여론의 형성과 오프라인 시민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지는 중이었고, 입법적 보완을 포함해 수사와 재판 등 형사사법 절차의 전반에서 변화의 요구가 힘을 얻고 있었다. 물론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기는 여전히 힘이 부족했기에 가능성을 열어둔 것에 불과했지만, 그 가능성이 바로 가해자-강자-다수자를 움직일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 P144

2022년 5월 2일, 미국에서는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50년 만에 뒤집으려는 대법원 다수의견 1차 초안 전문이 공개되었다. "미약한 추론으로 이뤄진 ‘로 대 웨이드‘ 사건은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며, 두 사건(나머지 하나는 1992년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 판례)은 임신중지 문제의 국가적 해결로 이어지기는 커녕 논란을 악화시키고 분열을 깊게 만들었다"는 게 초안의 주요 내용이었다. 긴즈버그Ruth BaderGinsburg 대법관의 사망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합류하면서 보수색이 짙어진 연방대법원이 50년 전으로 역사의 시계를 돌리려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2022년 6월 24일, 결국 연방대법원은 대법관 9명 중 5명의 다수의견으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했다. 심지어 보충의견을 통해 피임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동성혼(로런스 대 텍사스), 동성 성관계(오버게펠 대 호지스) 등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도 재검토해야한다고 주장해 역사적 후퇴를 선언했다. - P145

"현재 형사사법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2010년 성폭력 피해를 입은 후 만나는 전문가들마다 내게 한 말이었다. 왜 피해자인 내가 수사·재판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가 좁은지, 어째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지 물으면 내가 당사자가 아니니 당연하다고 했다. 난 범죄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로부터 회복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왜 당사자의 지위에 있지 못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분과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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