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비현실적으로 잘생기긴 했다. 얼굴이 정말 하얗고, 뭘 먹고 자랐는지 키도 정말 컸다. 떡 벌어진 어깨에 작은 얼굴이 조화롭게 어울릴 건 또 뭐란 말인가. 가끔 그런 인간들이 있다. 신이 여러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눠 주어야 할 것들을 실수로 몰아준 것같은 인간들, 공부도 잘하고 집도 좀 살고 목소리도 달콤하고 노래도 곧잘 하는데 얼굴까지 훌륭한 사람.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좀 얄미운 사람. - P9

바닥은 말 그대로 냉골이야. 정말 추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게 어떤 건지 몸소 알게 돼. 조금 자다가 다시 깨고 조금 자다가 다시 깨기를 반복해. 그러다가 잠이 몽땅 달아나 버리면 새벽의 한기 속에서 눈을 떠. 그러면 바로 코앞에 내가 저지른 일이 보여. 내가 저지른 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다가와. 눈을 질끈 감고 잘못했다고 아무리 외쳐도 잘 사라지지가 않아. - P51

엄마는 늘 내게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나는 늘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 허덕인다. 엄마가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걸 알지만, 나는 한 가지 질문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왜 엄마는 나를 믿지 못할까. 나를 치켜세우는 듯한 엄마의 말 아래로 흐르는 더 큰 욕심과 내 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왜 나는 매번 느끼고야 마는 걸까. "네가 하고 싶은 거 해야지."라는 엄마의 말은 내 귀에 이렇게 들린다. "단, 성적이 좋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 P58

실습생들은 모두 페란을 존경해. 페란과 마주치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말이지. 한 실습생이 간신히 용기를 내 질문했어.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입니까?"
페란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짐작이 가니? 이 문장을 필사하는 이순간에도 발끝부터 전율이 올라온다.
"모방하지 않는 것이죠."
되돌아보면 나는 그동안 늘 남을 모방해 살아왔던 것 같아. 한 번도 나답게 살지 못했어. 나다운 모습이 어떤 건지 관심조차 없었지. 만약 내가 단단히 중심을 잡고 살았다면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수 있었을까? - P80

이 상상 놀이를 시작한 뒤로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 여기에서 가장 힘겨운 일이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는 거거든. 시간이 빨리 흐르는게 어떤 의미인지 이곳에 들어온 적 없는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엘불리를 알게 되고 조셉을 만난 덕분에 요즘 나는 천국에 잠깐 들어온 기분이야. - P82

"미래를 바꾸는 것도 좋지만 난 어떤 미래가 오든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인생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잘 헤엄치는 사람. - P90

"개학날 네가 내 이름 기억해 줬잖아."
아름은 책상에 올린 팔에 한쪽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너 공부 잘하잖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건 고마운 게 아니라 미안해할 일이지. 같은 반이었는데도 넌 내 이름 몰랐잖아."
말문이 막혔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이렇게 말문이 막힌 적은 없었는데, 아름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너 그거 병이야."
"뭐?"
"모든 사람한테 사랑받아야 하는 거. 아니, 미움이나 무관심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다는 그 마음." - P105

아름의 말이 사실인 걸까. 아름이 혼자 다니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라 아름이 우리 반에서 내 가치를 몰라주는 단 한 사람이라 걸렸던 걸까. 다른 아이들처럼 아름에게도 인정받고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걸까.
아름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아름은 나를 이토록 예리하게 간파할 수 있었을까. 때로는 나 자신을 열렬히 탐구하는 일이 무색할 만큼 나를 단번에 간파하는 상대방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옛 성인들이 타인의 존재를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거울처럼 나를 비춰 주고 나의 음습한 부분에 빛을 비춰 주는 사람에게 숨기고 싶은 나의 일부분을 들켜 버리는것. 필요한 과정이겠지만 적잖이 당황스럽고 적잖이 불쾌한 일이다. - P107

연약한 마음을 잘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지? 모든 사람이 다 강해지기만 하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그렇지만 이곳에서 나는 강해지자고 많이 읊조려. 나는 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종교도 없지만 이곳에서는 매일 기도해. 어떤 신이든 들어 달라는 마음으로. 내 잘못을 똑똑히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싸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여기를 나가도, 여기보다 더 무섭다는 사회에서도 잘 견딜 수 있게 강인함을 달라고. - P110

녀석에게 무슨 말을 더 해 주고 싶었느냐고? 조금 더 기다려 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 조금 더 기다리면 미안함과 죄책감과 후회와 원망이 파도처럼 몰려들 거라고. 나도 그랬으니까. 죽 도망만 다녔기 때문에 더 큰 폭풍이 되어 몰려들 거라고. 그 폭풍에 알몸으로 맞서는 건 죽을만큼 힘들겠지만, 견디다 보면 폭풍은 언젠가는 잠잠해진다고. 그러니이 악물고 견디라고. 내가 안다고. 온몸으로 겪어 봐서 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었어. - P114

그 좁은 곳에 갇혀 있는 동안 깨달았어요. 나 자신을 가장 괴롭힌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걸. 내가 나의 이미지, 평판, 외적인 평가에 휘둘리는 동안 내 안의 진짜 나는 외롭고 힘들었다는 걸, 완벽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잡다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고, 그 잡다한 생각을 하느라 정작 중요한 생각을 할 기운이 없었다는 걸. - P137

"시 쓰는 거야."
아름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시? 시인이 되고 싶은 거야?"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어. 다만 내가 아는 건 시가 좋다는 거야.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완전해지거든."
완전해진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저 한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그 단어에 담긴 여러 의미와 형상이 열매처럼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 ‘완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동주 생각이 났다. 영화가 끝났을 때 동주가 기다란 몸을 쭉 펴는 모습이 생각났고 물을 마실 때 움직이던 동주의 목울대가 생각났고 내 손을 잡은 동주의 보드랍고 따뜻한 손이 생각났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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