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는 몸소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 가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조언조차 구하지 않고 직접 일을 처리해버린 데 감사했다. - P15

"그럼 커피를 끓일게. 셰리는 뒀다가 여기 노인들한테 권하면서 우리 아들이 얼마나 착한지 자랑해야지. 즐거운 일은 아껴둬야 하는 법이야." - P16

커피가 끓자, 마르틴 베크는 포트를 가져와서 어머니에게 건네어 손수 따르시게 했다. 어머니는 늘 아들을 세심하게 챙겼다. 그가 어릴 때는 설거지를 돕거나 제 침대를 스스로 정돈하는 일조차 시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간단하기 짝이 없는 집안일에도 서툴다는 사실을 안 뒤에야 어머니의 배려가 얼마나 자신을 망쳤는지 깨닫게 되었다. - P18

"전 이제 괜찮아요, 어머니. 요즘은 주로 책상에만 앉아 있어요. 저도 가끔 스스로 똑같은 질문을 던지기는 하지만요."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가끔 스스로에게 왜 경찰이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 P20

"좋은 경찰은 널렸어. 멍청한 인간이지만 좋은 경찰인 사람들. 융통성 없고, 편협하고, 거칠고, 자기만족적인 타입이지만 모두 좋은 경찰들이지. 좋은 인간이면서 경찰인 사람들이 조금만 더 많다면 좋을 텐데." - P21

"그러니까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희한한 상황에 처한 거로군?" 함마르가 매섭게 말했다.
"전혀 희한하지 않은데요. 전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때가 드문걸요." 콜베리가 말했다. - P50

"그건 나도 확실히 알겠군." 콜베리가 말했다. "누가 곤란해지느냐가 문제지만."
콜베리의 고약한 성미는 외모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 P60

마르틴 베크는 셰르마르브링크에서 내려 지하철을 탔다. 붐비는 지하철과 기어가는 도로 중 어느 쪽이 더 싫은지 정할 수 없었다. 지하철은 적어도 장점이 하나 있었다. 더 빠르다는 것. 집에 서둘러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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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끝끝내 여자라는 것 - P9


여자하기와 짐승하기, 아시아하기는 이미 나에게 와있었으나 여행 이전에는 알 수 없었다. 이들의 부재하는 듯 존재하는 속성은 시 텍스트에서 시가 재현의 지연을 통해 결국 하나의 시적 구성체로서 드러내고야 마는 ‘시성詩性‘처럼 소리 없는 포효와 같았다. 이미 도래해 있었으나 알 수 없었던 것, 그것의 발자국 내딛음이 곧 부재의 운동이 되는 것, 미지가 되는 것. 설인처럼, 죽은 시인처럼, 부처와 쥐처럼 존재하는가 하면 부재하고, 부재하는가 하면 존재하는 것. 미지이면서 괴물이고, 괴물이면서 안개인 것. 그리고 유령인 것. 그러나 분자적이면서도 연결망인 것. - P15


이 책의 전반부는 티베트의 눈의 여자, 인도의 쥐, 후반부는 붉음의 이미지로 가득한 곳들이다.

책의 내용에 맞추어 책의 내지도 전반부는 흰 색, 후반부는 붉은 색을 사용했다.


시인의 언어는 어렵다. 추상적이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은 읽어보지 않았는데, 읽어보고 싶은 생각과 읽어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동시에 드는... 어제 도서관 신간코너에 있던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를 만지작 거리다 내가 이걸 소화할 수 없을거야 하며 집어오지 않았다.


근원적이고, 원천적인, 날 것 그대로의 감각과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곳.

특히, 인도는 쥐와 똥과 시체가루와 먼지와 오물 등 온통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다.

그 날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가. 고산병을 겪고 쥐가 들끊고 오물 범벅인 거리를 걷고, 성추행과 구걸과 호객행위를 거쳐가야 그곳. 집보다 탑이 많은 곳. 가난과 배고픔과 낙심과 절망과 슬픔과 죽음이 사방에 묻어 있는 곳.


시인에게 이 '여행하기'는 '시하기'이며, '여자하기', '짐승하기' 끝끝내 '아시아하기'라 말한다.


장소도, 시점도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은 여행기,

여자인 것을 짐승인 것을 아시아인인 것을 깨닫는 여행기,

'여자하기'도 '짐승하기'도 '아시아하기'도 어렵다.


















김혜순 시인 하면 지난 달에 읽은 최승자 시인의 <아이오와 일기>의 이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그런데 베릴은 온몸의 모든 부분을 다 떼버리고 남은 그 두 발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IWP 사무실에 잠깐 들렀을 때 그녀는 그 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검지와 가운뎃손가락으로 두 발이 걸어가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시의 마지막구절은 "It was…………/a trampled face/my own"이었는데 베릴은 그것을 "Its a sudden shocking stop"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대부분의 여성 시가 꽃이나 기타 아름다운, 장식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네 시는 파괴적이고 쇼킹하다. 이건 칭찬으로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그녀는 언제나 공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페미니스트 소설가이다라고 말하고 모든 것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보는 버릇을 갖고 있다. 그녀는 내 시도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게 분명하다. 시창작자로서보다는 시 번역자로서의 즐거움이 더 컸다. 어쨌거나 내가 번역한 시가 그들에게 얼마큼 통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리고 그들이 나이든 한국 여성 시인들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언젠가 김혜순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원로 여성 시인이 무슨 상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추천을 위해서 김혜순과 내 시집을 어렵사리 구해 읽었는데, 김혜순의 시집을 펼쳐보니 첫 페이지부터 이놈 저놈 소리가 나오고 최승자의 시집을 펼쳐보니 첫 페이지부터 웬 배설물(그 시인은 차마 똥이라는 말도 발음하지 못하고 배설물이라는 단어로 대치했다) 타령이 나오는가, 그래서 자기 낯이 뜨거워져서 추천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나누면서 김혜순과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더랬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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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
젊고 예쁘고 외국인이라서 피의자가 돼야 해?

수완
예쁜 건 인정하시는 거네요?
(한숨 쉬는 해준)
역차별이라고요…………. 여자 아니고 외국인 아니고
그냥 남자 한국인이었으면
팀장님, 가서 밤새 잠복하자고 하셨을 걸요?
집에는 곧바로 가는지, 누가 찾아오는 건 아닌지 본다고.
잠복이 취미잖아요, 예? 잔소리하고.

수완을 노려보는 해준. - P52

남자 성우
(소리)
당신이 먹으려고 살상하는 건 내가 뭐라고 못하죠.
근데 말이야, 내가 밥 주니까 고맙다고 선물을 하는 거라면 그럼 됐어.
진짜로.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 해준, 심장이 찌르르. - P57

수완
물론 엄마를 죽인 게 남편 죽인 증거는 아니죠,
근데 형 이런 말한 적 있잖아요.
살인은 흡연과 같아서 ・・・・・・ 처음만 어렵다.

대꾸할 시간도 안 주고 비틀비틀 술집을 뜨는 수완. - P71

수완
어, 형!
(해준이 거칠게 부축해 일으키는 동안 실내를 둘러보더니)
왜 이래, 여기?
(질질 끌려가면서 서래에게)
우리 팀장님이요, 이렇게 호구 같아 보여도 사실은 무서운 분이에요,
다음에는 서래님 꼭 잡으실 거예요. 다음 남편 죽일 땐 조심하세요.
(해준에게)
이 정도면 쉽게 말한 거 맞죠?
(밖에 나가서 소리만)
형....… 내가 진짜 존경하는데요, 딱 한가지만 물어볼게요.
저 여자, 초밥 왜 사 준 거예요? …………아, 왜 때리는데!
형 따라서 씨발 부산까지 왔는데 나한테 왜 이러는데! - P72

서래
이게 중국식이라고요?
(실망하는 해준)
맛은 좋습니다.
(안도하는 해준, 밥을 접시에 담는다)
그래서 못 자는 거예요.

해준
예?

서래
피 흘리는 사진들이 막 비명을 지르니까. - P76

해준
죽기보다 감옥을 무서워하는 놈이 살인을? 이백만 원 때문에?
지구하고 나눠 가졌으니까 백만원인데?
이 오가인, 먼 데 사는데? 경기도서 미용실 하는데?
게다가 결혼도 했는데?

서래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서래를 돌아보는 해준, 눈 피하지 않는 서래. 마주치자 무안해져서 허공으로 눈길을 올리는 해준. - P78

해준
산오야…………. 일단 내려가자…………. 가서 형하고…………

산오
아, 됐고………… 가인이한테,
너때매 고생깨나 했지만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
요렇게 좀 전해 주세요.
(여자 비명에, 잠깐 고개 돌려 지상을 내려다보더니)
안 전해 주셔도 되겠네. - P81

서래
사랑은 용맹한 행동이야.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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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에는 야간 쥐 사냥꾼이라는 직업이 있다. 시험을 치르고 선발된 준공무원이다. 그들은 높은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한 것을 자랑스레 여긴다. 그들에겐 손전등, 전선 3미터, 막대기가 지급된다. 그들은 으슥한 골목길이나 시장에서 쥐를 때려잡는다. 손전등을 비추면 쥐는 1초간 움직이지 않게 된다. 이때 시신의 손가락을 뜯어 먹고, 자는 사람의 귀를 물어가던 쥐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 쥐잡이 한 사람이 하룻밤에 큰 쥐 서른 마리 이상을 잡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날은 결근한 것으로 처리된다. - P116

폐허가 풍기는 몽환이 만개한다. 사원의 계단들을 오르내리다가 몽환에 빠졌나보다. 또 나가는 길을 잃었다. 몹시 어둡다. - P123

나는 이곳에서 내 더러운 것이 내 더러운 것을 닦는 것을 경험한다. 내 더러움에 익사하자 내 더러움이 잠시 깨끗해진다. 혹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더러워진다. 내가 사는 동안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 나는 내 안에 무한증식, 무한 사망하는 숯처럼 까만 쥐들을 거느리고 피리를 불며 식별 불가능 지대를 떠난다. 나는 이곳을 겪었는가? 다만 나의 그 무수한 쥐들 중 한 마리를 이곳에서 만났을 뿐인지도 모른다. 까만 숯처럼 쌓인 쥐들 중 어느하나가 지금 붉은 눈 두 개를 반짝 뜨고 있다. 나다. 곧 재가 될 바알간 숯이다. - P138

드넓은 초원에서 내 감각들 중 시각이 제일 먼저 어쩔 줄 몰라 한다. 거침없는 지평선을 마주한 적이 없는 나는 먼저 거리를 가늠할 줄 모른다. 멀고 먼 곳을 향하던 시야를 거두어들이면 바로 눈앞에서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배가 고픈 양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진다. 너무 굶주리거나, 너무 목이 마르면 눈에서 피가 나나 보다. - P151

속이 붉은 자두를 깨무는 순간, 으깨지며 터지는 과육과즙! 붉은 황혼 머리를 속에 담그고, 바람 선득선득한 곳에 홀로 서 있던 아가씨가 스윽 지나간 듯. 혀가 입속에서 황홀하게 뒤친다. 늦은 여름의 햇빛이 이토록 향기 나게 쫀득거리는 것을 만들어내다니. 향기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다. 향기의 발음기호 속엔 이 질감이 없다. 표현할수 없으므로 말은 필요 없다. 자두와 만난 오감이 몸을 훑고 최전방에 배치된 이 순간, 바로 예술 작품이라는 것, 그것들이 펼친 순간의 황홀을 생각한다. - P158

노래가 들린다. 사막의 세이렌이 거기서, 서, 서 노래한다. 그러나 멈추면 죽는다. 늘 출발해야만 한다. 적멸속에선 늘 출발해야 한다. 적막 속에선 늘 출발해야만 한다. 소멸 속에선 늘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막의 영에게 먹힌다. 방치된 상태를 출발함으로 겪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칠 것이다. 나는 미치기 시작한다라는 말을 몸으로 이해한다. 슬픔이 분노로 바뀐다. 그리움이 분노로 바뀐다.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풍경이있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끓는 냄비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지독히 아픈데 아직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 P172

영혼 없는 몸이 외로움을 탄다. 외로움이 물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무겁다. 외로움이 다리에도 있다. 머리에도 있다. 가슴에도 있다. 몸에서 뛰쳐나오려는, 그러나 꽉 막힌 그것을 꺼내려 기침을 하는 것 같다. 기침을하면 할수록 가슴이 막힌다. - P176

밑에서 쳐다보면 소녀가 하늘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소녀가 자라 드디어 시집가는 날.
할머니는 누구에게 시집가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머리에 옷을 덮은 그녀가 울었다. 소리 높여 울었다. 끌려가는 짐승처럼.
소녀는 남편의 남동생들과 다 결혼해야 한다고 했다.
결혼식 다음 날 남편은 돈 벌러 도시로 떠나고, 그녀는 겨울지나 남편의 둘째 동생과 또다시 결혼해야 한단다.
어두운 방에서, 남편 형제들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받으며 그녀가 그보다 더 번들거리는 버터차를 만들고 있었다. - P201

어느 것은 하기 쉽고, 어느 것은 어렵다. 밤 10시 정도까지 춤이 계속되는데 모든 주민이 노래에 맞는 모든 동작을 알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아기들도 알고 있다. 고원 사람은 말할 줄 알면 노래할 줄 알고, 걸을 줄 알면 춤출 줄 안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 모두 춤꾼들이다. - P205

이들은 결혼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혼도 없다. 아버지가 없으니 대대손손이란 말도 없고, 가부장이란 말도 없다. 남녀가 가정을 꾸리지 않으니 부부 싸움도 없다. 이들은 어머니 집에서 모두 산다. 어머니는 부엌 곁 1층에 방이 있고, 2층에는 자매들의방, 형제들의 방, 합궁의 방이 있다. 합궁의 방에는 남자가 떠나야 할 창문이 침대 머리맡에 있다. 남자가 여자의 방에 한밤중 올라오려면 90도 각도의 벽을 타고 올라야 한다. - P231

물 많고, 논 많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작지를 가진 나라가 이렇듯 억압 속에 있다니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다 연이어 모든 사물과 생물은 중력 없이 떠 있는데 내 몸만 야수처럼 중력에 갇혀 있는, 슬프고 괴이한 느낌이 몸을 뒤덮는다. - P239

경배가 지나치고, 사랑이 지나치다. 지겹다. 전 국민이 부처를 스토킹 중이다. 삶은 팽개치고 부처 얼굴만 쳐다보는 것 같다. 불교 사회주의, 불교 민족주의, 불교 국교화에 짓무른 일상을 똥처럼 뭉개고 앉아, 딱딱하고 노란 황금 얼굴만 쳐다보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 위에 국민의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욕구는 억압하고, 부처만 쳐다보도록 장려하는 군복을 입은 자들의 손길이 있다. 일상을 반추해보지 못하도록 하는 음험한 허구 기계가 가동 중이다. 그와 아울러 타 종교를 억압하는 죄의식 없는 자의식이 준동한다. 부처는 황금 마취제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오그라들어 작은 체구에 주름 가득하고, 뼈만 앙상한데, 부처는 황금 속에 익사해 영원불멸한다. 나날이 뚱뚱해진다. - P242

간혹 거리에서 분홍색 가사를 걸치고 머리를 밀어버린 여자들을 만나지만 그녀들은 승려가 아니다. 여자는 사원에 몸을 의탁해도 승려가 될 수는 없다. 단지 잡무만 본다. 남자가 1층에 있을 때, 여자는 2층에 올라갈 수 없다. 여자가 남자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건 남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원의 제단에도 여자는 올라갈 수 없다. 그럼에도 남자들은 말한다. 국립대학에는 여학생 수가 더 많고, 사미니들의 불경 지식이 더 풍부하고, 해박하다고. 그래도 사미니들에게 분홍색 옷을 입히고, 양산을 씌워 그들이 여성임을 강조하고 금기를 덧씌우는 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독재정권 아래서 살아보지 않은 자는 모른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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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원 불가능한 역동성이 이 장소를 채우고 있다. 이 길을 그대로 화면에 옮겨놓고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기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겠다고 누군가 말했다. 아마도 뛰어가는 사람이 끄는 인력거가 제일 먼저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다고 내가 대답했다. 이 길을 다 지나가면 으레 죽은 사람을 태우고, 빨래하고 목욕하는 성스러운 강이 나온다. 누구나 이 길에선 시체 가루와 똥가루로 만든 가루 열반에 들어야 한다. 나보다 먼저 환생하려는 것들이 피운 매운 가루를 몸에 축적하고 내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평온한 마음, 내 안의 평화 없이는 이 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여기는 도시지만, 나의 도시적 감수성을 버려야 걸을 수 있다. 이 도시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막연히 솟아오르기도 한다. - P86

이곳에서만큼 당당한 거지들이 세상에 있을까. 당당하게 더 내놓으래서 싫다고 하면 일순간 슬픈 얼굴로 돌아선다. 포기는 또 얼마나 재빠른지, 그 마른 몸이 슬픔의 덩어리로 돌변한다. 자기연민에 몸 둘 바를 모른다. 그러다 몇날 며칠이 흐르자 그 슬픔에 익숙해진다. 부르는 대로 주지도 않는다. 남의 슬픔에 무감각해진다. 즉각적인 좌절과 끈질긴 조름, 둘 다에 무감각해진다. - P89

영화관의 남자들이 영화의 종반으로 갈수록 흥분한다. 열광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낮에 본 한 젊은이를 생각한다. 그는 넓디넓은 뙤약볕광장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그의 옷은 모두 해졌고, 그의 바지는 벨트 부분만 조금 남아 있었다. 뼈만 남은 몸이 얼마나 더러운지 검게 번들거렸다. 그 젊은이는 왜 하필 운동장 한가운데 누워 있게 되었을까. 그는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 인생 전체를 땡볕에 방기한 채 그러고 있었다. 옆에다 슬쩍 물을 놓고 지나가긴 했지만 그 젊은이 옆에서 쏟아져 흐르는 낙심과 배고픔과 절망과 억울함의 기운은 이곳 영화관의 젊은이들과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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