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끝끝내 여자라는 것 - P9


여자하기와 짐승하기, 아시아하기는 이미 나에게 와있었으나 여행 이전에는 알 수 없었다. 이들의 부재하는 듯 존재하는 속성은 시 텍스트에서 시가 재현의 지연을 통해 결국 하나의 시적 구성체로서 드러내고야 마는 ‘시성詩性‘처럼 소리 없는 포효와 같았다. 이미 도래해 있었으나 알 수 없었던 것, 그것의 발자국 내딛음이 곧 부재의 운동이 되는 것, 미지가 되는 것. 설인처럼, 죽은 시인처럼, 부처와 쥐처럼 존재하는가 하면 부재하고, 부재하는가 하면 존재하는 것. 미지이면서 괴물이고, 괴물이면서 안개인 것. 그리고 유령인 것. 그러나 분자적이면서도 연결망인 것. - P15


이 책의 전반부는 티베트의 눈의 여자, 인도의 쥐, 후반부는 붉음의 이미지로 가득한 곳들이다.

책의 내용에 맞추어 책의 내지도 전반부는 흰 색, 후반부는 붉은 색을 사용했다.


시인의 언어는 어렵다. 추상적이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은 읽어보지 않았는데, 읽어보고 싶은 생각과 읽어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동시에 드는... 어제 도서관 신간코너에 있던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를 만지작 거리다 내가 이걸 소화할 수 없을거야 하며 집어오지 않았다.


근원적이고, 원천적인, 날 것 그대로의 감각과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곳.

특히, 인도는 쥐와 똥과 시체가루와 먼지와 오물 등 온통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다.

그 날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은 무엇인가. 고산병을 겪고 쥐가 들끊고 오물 범벅인 거리를 걷고, 성추행과 구걸과 호객행위를 거쳐가야 그곳. 집보다 탑이 많은 곳. 가난과 배고픔과 낙심과 절망과 슬픔과 죽음이 사방에 묻어 있는 곳.


시인에게 이 '여행하기'는 '시하기'이며, '여자하기', '짐승하기' 끝끝내 '아시아하기'라 말한다.


장소도, 시점도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은 여행기,

여자인 것을 짐승인 것을 아시아인인 것을 깨닫는 여행기,

'여자하기'도 '짐승하기'도 '아시아하기'도 어렵다.


















김혜순 시인 하면 지난 달에 읽은 최승자 시인의 <아이오와 일기>의 이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그런데 베릴은 온몸의 모든 부분을 다 떼버리고 남은 그 두 발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IWP 사무실에 잠깐 들렀을 때 그녀는 그 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검지와 가운뎃손가락으로 두 발이 걸어가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시의 마지막구절은 "It was…………/a trampled face/my own"이었는데 베릴은 그것을 "Its a sudden shocking stop"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대부분의 여성 시가 꽃이나 기타 아름다운, 장식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네 시는 파괴적이고 쇼킹하다. 이건 칭찬으로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그녀는 언제나 공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페미니스트 소설가이다라고 말하고 모든 것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보는 버릇을 갖고 있다. 그녀는 내 시도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게 분명하다. 시창작자로서보다는 시 번역자로서의 즐거움이 더 컸다. 어쨌거나 내가 번역한 시가 그들에게 얼마큼 통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리고 그들이 나이든 한국 여성 시인들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언젠가 김혜순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원로 여성 시인이 무슨 상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추천을 위해서 김혜순과 내 시집을 어렵사리 구해 읽었는데, 김혜순의 시집을 펼쳐보니 첫 페이지부터 이놈 저놈 소리가 나오고 최승자의 시집을 펼쳐보니 첫 페이지부터 웬 배설물(그 시인은 차마 똥이라는 말도 발음하지 못하고 배설물이라는 단어로 대치했다) 타령이 나오는가, 그래서 자기 낯이 뜨거워져서 추천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나누면서 김혜순과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더랬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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