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김현주 [비누거품 아래, 죄와 부채] - 178페이지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19세기 독일 출신의 헝가리 의사. 그의 이름은 비록 생소하나 생전의 주장은 오늘까지 혁혁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것은 손을 씻자는 것. 산모 4명 중 1명이 산욕열로 숨질 만큼 출산 자체가 위험인 시절, 염소액에 손을 씻고 산모를 돌봐야 한다는 주장은 발표 당시 미친 주장 취급을 받았다. 제멜바이스는 정신병자로 몰려 병원에 감금됐다가 세균에 감염되어 사망하고 만다. - P165

니체는 지혜의 이름으로 주는 선물의 역설적인 의미를 설파하면서 선물을 주는 행위가 진정한 결실을 얻으려면 이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우회로를 남겨 놓았다. "제대로 주는 것이 제대로 받는 것보다 얼마나 더 - P172

어려운 것인지 배웠겠지. 그리고 근사하게 베푸는 것, 그것이 일종의 비결(art), 그것도 선의의 마지막, 더없이 교활한 장인의 비결이라는 것을."이처럼 선물을줄 때의 관대함이 받는 이에게 부채감으로 남는 것을막으려면 대단한 고려와 기술이 필요하다. 이를 가장교활히 행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예술이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예술은 무해해 보이는 외양에 허를 찌를 교활한 기술을 감추고 세상에 나온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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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가난하게 늙어서 스스로를 돌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오랫동안 활동적으로 살아왔던 사람이 갑자기 존엄과 정체성을 잃고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버려지고 소외된 다른 노인들과 함께 시설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 P120

마르틴 베크는 집을 둘러보면서 한없는 슬픔을 무지근하게 느꼈다. 서랍과 수납장을 다 열어보았다. 기본적인 가재도구 외에는 별것 없었다. - P128

사크리손은 풀이 죽었지만 기어이 염세적인 한마디를 보태고야 말았다. "세상에 확실한 건 없는 법입니다." - P204

에이나르 뢴의 방은 쿵스홀름스가탄의 경찰 본부 건물 뒤편에 있었다. 그 방 창문으로 바깥의 땅에 난 거대한 구멍이 내다보였다. 머지않아 그곳에서 국가경찰위원회의 거인 같고 번지르르한 건물이 솟아나서 시야를 가릴 터였다. 경찰은 스톡홀름 중심부의 초현대적 거대 건물에서 사방팔방으로 촉수를 뻗어 실의에 빠진 스웨덴 국민들을, 적어도 국민들 중 일부를 철통같이 붙잡을 터였다. 좌우간 온 국민이 이민을 가거나 자살을 할수는 없을 테니까. - P240

마르틴 베크는 1971년 4월 운명의 날에 벌어졌던 일을 찬찬히 분석해볼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진작 그때 자신이 도덕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잘못 행동했다는 결론을 내린 뒤였다. 자신이 이 결론에 다다르기 한참 전에 똑같이 생각했던 동료가 적어도 한 명 이상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신은 바보처럼 굴다가 총에 맞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더 높고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될 판이었다. 마르틴 베크는 화요일 저녁에 자신의 상황을 숙고했다. 하지만 다시 베스트베리아의 사무실에 앉자마자 그 생각은 그만두었다. 대신 수요일 내내 혼자 사무실에 앉아서 무심하되 냉정하리만치 체계적인 태도로 스베르드 사건에 집중했다. - P262

어느 순간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앞으로 일에서 최대한으로 바랄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상태, 즉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혼자서 타당한 방식으로 사건을 처리해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 P262

콜베리는 새 손목시계를 보았다. 세탁기에 넣고 돌렸던 것과 같은 메이커에 같은 모델이었다. 콜베리는 두어 시간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허기가 지기 시작한 차였다. 어디서 읽었는데, 살을 빼려는 사람은 덜 먹되 자주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조언의 뒷부분만큼은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 P300

삼 년 동안 모니타는 스톡홀름 남부 교외에 있는 화학 공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이혼하고 딸과 둘만 남자 근무시간이 더 짧고 급료도 낮은 교대 업무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절망한 나머지 모니타는 다음에 뭘 할지 생각하지 않은 채 충동적으로 일을 그만두었다. - P322

가끔 밤중에 책을 읽기에는 너무 피곤하고 잠들기에는 너무 초조해서 거실과 부엌을 무작정 오락가락할 때면 금방 미칠 것만 같았다. 조금만 긴장을 풀면 벽이 와르르 무너지고 광기가터져 나올 것 같았다.
모니타는 자주 자살을 생각했다. 절망과 불안이 너무 날카로울 때 오직 아이를 위해 자살을 참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P325

토요일과 일요일이 못 견디게 공허하게 느껴진 것은 전날의 근거 없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는 초조했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갇힌 기분이었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일요일에는 심지어 증기선을 타고 마리에프레드까지갔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밖에서도 여전히 갇힌 기분이었다. 자신의 삶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았고 왠지 이 사실을 예전처럼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니 다수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 P389

문득 승진에 관한 끈질긴 소문이 떠오르자, 그는 전에 없이 심란해졌다.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 십오 개월 전 그 순간까지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그것, 즉 책상에 매여 있어야 하는 업무를 받는 것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최소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이 좋았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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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을 쓰는 일에서 싫은 점은 아무것도 누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문에서는 그저 애를 태울 수 있을 뿐이다. 독자에게 ‘당신은 이제 멋진 여행을 즐길 것입니다, 멋진 인물들과 멋진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할 수는 있지만 정확히 왜그런지는 말하면 안 된다. 따라서 서문은 ‘나를 한번 믿어보세요‘ 하는 명제나 다름없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만약 이 이야기를 읽어볼 생각이라면, 당신은 멋진 여행을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한번 믿어보세요." - P7

셰발과 발뢰를 생각하면, 뛰어난 작가인 리처드 프라이스가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누군가 프라이스에게 범죄와 수사의 영역을 거듭 시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문한 때였다. 프라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탐정 이야기를 즐겨 쓰는 것은, 하나의 살인 사건 주변을 오래 맴돌다 보면 그 도시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 P9

"다이어트는 어떻게 되어가?"
"괜찮아. 오늘 아침에 0.5킬로그램 빠졌어. 104킬로그램에서 103.5킬로그램이 됐지."
"그러면 시작한 뒤로 10킬로그램밖에 안 찐 거네."
"8.5킬로그램이야." 콜베리는 자존심이 상한 말투였다.
콜베리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속 투덜거렸다.
"아주 끔찍해. 이 프로젝트 자체가 자연에 어긋나는 거야. 군은 웃기만 하지. 보딜도 그렇고, 그나저나 자네는 어때?"
"좋아." - P41

경찰관으로 스물여덟 해를 산 덕에 익힌 기술 중 하나는 보고서를 읽으면서 반복과 사소한 세부 사항을 재빨리 걸러내는 능력이었다. 그 속에 어떤 패턴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능력도. - P48

두 순경도 대번에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크바스트모는 그것이 꼭 부취 같더라고 보고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썩은 고기에서 나는 악취와 똑 닮았더라고 했다. 냄새를 찬찬히 추적한 결과-이 또한 크바스트모의 표현이었다―두 순경이 다다른 곳은 한 층 위의 집 문앞이었다.

초보적인 실수가 저질러졌다. 당연히 부검은 경찰로부터 아무런 단서도 듣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져야 했다. 법의학 전문가에게 추정 사망 원인을 알려주는 것은 의무 위반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처럼 법의학자가 젊고 미숙할 때는 더 그랬다. - P58

마르틴 베크가 말했다. "태만이 제일 나쁜 죈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용서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당신은 부검의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릇된 선입견에 기초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게다가 두 순경에게 이것이 간단한 사건이라는 착각을 심어주었죠. 당신이 안에 들어가서 쓱 둘러보기만 하면 충분한 것처럼. 당신은 범죄 여부를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 뒤, 사진 한장 찍어두지 않고 시신을 옮겼습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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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박정호 [얼굴을 잃지 않는 대화] - 159페이지

모두 처음 보는 얼굴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내가 학생들의 하관과 마스크 모양새를 줄곧 동일시했음을 깨달았다. 한 학기 수업을 ‘대면‘으로 진행했건만, 학생들의 얼굴 절반을 똑같은 형태의 마스크에서 유추해 바라본 것이다. 마스크 뒤 얼굴을 노출한학생들도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학생들은 식사를 마치자 서둘러 마스크를 다시 썼고, 얼굴이 절반쯤 부재한 일상의 편안함으로 되돌아갔다. - P147

우리는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자기 얼굴이 눈, 코, 입이 달린 단순한 살갗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려고 애쓴다. 그래서 우리는 ‘맨얼굴‘은 진짜 얼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낯에서 자아를 확립하려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 P148

사람(person)을 뜻하는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는 인간이 가면을 ‘통해 (per)’ 어떤 ‘목소리를 내는(sonare)‘ 존재였음을 보여 준다. 가면에 순종하는 삶만 정당한 삶으로 허용되었다. 그래서 역할에 소홀한 사람은 자기 배역을 포기하고 가면을 벗어던지는 인물로 취급당했다. 가면에 생긴 흠집만으로 타인의 목숨을 뺏거나 자기 목숨을 끊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 P149

사람들 사이의 미시적 상호작용을 예리하게 파헤쳤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에 따르면 현대의 개인들은 신에게 등을 돌린 이래로 서로 ‘성스러운 존재‘로 마주해야 할 의무를 진다. 과거의 신이 독점했던 신성함을 현대의 개인들이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는 의례에 참여하는 것처럼 조심성을 가지고 자신의자아와 타인의 자아를 숭배해야 한다. 현대인은 숭배받는 신이자 동시에 그 신을 숭배하는 신자로서 만나기에 서로 각별히 존중하는 의례를 연출해야 한다. 이 의례에는 낯선 타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지 않는 예의 바른 무관심, 어깨너머로 들려온 친구들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는 마음 씀씀이도 포함되지만, 그보다더 섬세함을 요구하는 의례는 분명 얼굴을 마주 보고 이루어지는 매일매일의 구두 상호작용일 것이다. - P151

얼굴을 보호하려면 선물을 주고받듯이 대화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얼굴은 사고팔거나 훔치고 빼앗는 물건이 아니다. 얼굴은 선물처럼 건네받고 답례해야할 자아상이며, 대화는 얼굴을 말에 실어 나르는 수레바퀴를 굴리는 일이다. 대화 속에서 말은 증여의 사이 - P152

클을 따라간다. 사업상의 거래든 일상의 사교 관계든아니면 길거리에서 낯선 이와의 마주침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이제 당신이 말할 차례입니다‘라는 소리 없는 암시, 발언권을 서로에게 부드럽게 넘겨주는 선물의 정신은 우리 모두를 대화의 장으로 이끄는 초대장이다. 이렇듯 경직된 근육을 풀어 주듯이 대화가 오가려면 주의 깊게 마련된 증여의 리듬 규칙이 필요하다. 리듬 규칙은 대화 당사자들에게 동조 압력을 행사한다. 나와 상대 모두 이 압력을 인식하고 느껴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자연스럽게 장단을 맞추는 말을 구사할 수 있다. - P153

대면 상호작용 의례로서 대화는 메시지의 즉각적 교환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마르셀 모스가 말했듯 무언가를 주는 것은 나 자신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말을 줌으로써 나를, 나의 얼굴을, 그리고 얼굴로 표현되는 신성한 자아를 준다. 아무리 사소한 대화라고 해도 상대방은 내 말에 실려 오는 나의 얼굴을 받고, 이어서 자신의 얼굴도 내게 내놓는다. - P153

그렇지만 선물 주고받기가 마냥 반가운 일이 아니듯 대면 상호작용이 골치 아픈 일로 여겨질 때도 흔하다. 얼굴을 마주한 상황이 마치 서로의 존재를 저당 잡는 구속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얼굴과말을 단번에 분리하는 기술로 계속 도피하고 있다. 교내 포털 사이트를 통한 출결 이의 신청, 화상 수업 중 카메라 끄기, 키오스크 주문과 문 앞 배송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순환시키는 증여의 부담에서점점 더 벗어나고 있다. 이를 그저 환영해야만 할까. 내 얼굴을 싣지 않은 말 한마디가 결국 타인의 얼굴을 무시하는 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 P154

나와 타인의 비대칭성, 다시 말해 둘 중 누군가 한발 먼저 물러나는 용서 혹은 사죄의 정신 또한 나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대화 윤리의 핵심이다. 나의 성스러운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사소한 모욕이나 비방을 너그러이 눈감아 주는 것은 내가 먼저 나를 줌으로써 나와 타인의 얼굴 모두를 성스럽게 만드는 선물 기술에 속한다. - P155

프로필은 팔리는 얼굴을 지향한다. 얼굴이 팔린다는 말은 이제 망신을 뜻하지 않는다. 현대의 개인들은 점점 더 팔리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 경쟁한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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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박세진 [패션 역주행에 대처하는 법] - 65페이지
4장 임소연 [K-성형수술의 과학] - 84페이지
5장 안진 [왜 TV에는 백인만 나올까?] - 103페이지
6장 이민 [전시되지 않는 몸들의 삶] - 124페이지
7장 정희원 [지속가능한 몸 만들기] - 141페이지

2015년 프랑스 국회는 지나치게 마른 모델을 패션쇼에 세우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통과시켰다. 영국에서는 광고표준위원회의 주도 아래 패션 광고에서 너무 마르거나 어려 보이는 모델을 규제했고 실제로 2015년 이브 생로랑의 여름 광고, 2016년 구찌의 겨울 광고가 방영 금지되기도 했다. 이 위원회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비롯해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달하거나 특정한 체형을 강요하는 광고도 금지했다. - P61

자기 몸 긍정주의는 마른 모델은 틀리고 플러스 사이즈는 옳다거나 노출은 악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사실 타인의 생긴 모습, 몸집, 착장, 패션이 내면에 관해 알려 주는 정보는 거의 없다. 문제는 입고 있는 옷에 전통적 성 역할이나 인종적·문화적 편견 같은 잣대를 들이대 실질적 압력이 생기면서 발생한다. 어떤 사람은 편안한 옷을 입어야 능률이 오르지만 또 어떤 사람은 몸을 압박하고 불편한 옷을 입어야 에너지를 얻을 수도 있다. 이는 각자의 맥락에 따라 다를 뿐이다. 어떤 몸 상태가 좋은지, 어떤 패션이 좋은지는 스스로가 찾아가야 할 영역이다. 생각해 보면 패션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각자 다르기 때문에 재미가 있고 의미가 생긴다. - P62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쌍꺼풀 수술은 근대화와 냉전이라는 이중의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처음 쌍꺼풀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한국전쟁 시기 미군과 함께 내한한 미국의 군의관 데이비드 랠프 밀라드로 알려져 있다. 밀라드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쌍꺼풀 수술을 해 준 한국인 남성 통역사는 ‘째진 눈’이 음흉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어서 ‘둥근 눈‘으로 바꾸고 싶어 - P73

했다. 또 미군과 어울리던 일부 한국 여성들은 서양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자 쌍커풀을 원했다. 북미 유대인들이 유대인 특유의 코를 코카서스 백인처럼 바꾸려 코 성형을 했듯이 그 당시 한국인은 백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눈을 교정했다. ‘믿을 수 없는‘ 아시아 현지의 통역사, 미군과 결혼한 ‘전쟁 신부‘는 냉전이 만든 존재들이다. 쌍꺼풀 수술이 만든 둥근 눈은 아시아인이라는 타자를 서구 백인들에게 덜 위협적인 존재로 바꾸어 주었다. - P74

한국인의 성형수술 전면에 있던 인종주의와 근대화 논리는 점차 흔적을 감췄다. 1990년대 말 서울 강남을 거점으로 성형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2000년대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류 열풍이 일면서 성형수술이 추구하는 이상은 백인 여성의 표준 얼굴에서 한국 여성의 예쁜 얼굴로 바뀌었다. - P75

이상적인 얼굴의 비율을 상세하게 정의하는 인체계측학의 작업은 성형수술의 발전에 날개를 달았다. 인종을 바꾸는 것처럼 보이는 성형 기술이 외모 개선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다. ‘아시아인은 백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더 아름다워지고 싶을 뿐‘이라는 간단명료한 설명은 성형수술이 사회병리적 현상이거나 인종주의의 도구라는 혐의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다. 이른바 인종’과학’의 출현이다. - P78

성형수술의 실천에서 인종은 평균의 문제인 동시에 과도합의 문제다. 지나치게 한국인다운 얼굴이라면 그평범함을 이유로 성형수술을 권유받는다. - P79

매력적인 여성의 얼굴에서 인종적 차이는 거의 없다. 인종적 차이가 눈에 띄는 것은 세 인종의 평균적인 얼굴에서다. 사진계측 분석이 잡아낸 아름다운 여성의 공통적인 특징은 ‘눈과 눈 사이의 간격이 멀고 턱이 작은’ 얼굴이다. 그야말로 인종을 초월한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탄생이다. 이제 미인은 국제적으로 통하는 기준이자,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의학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자질이다. - P81

‘째진 눈이나 뭉툭한 코, 앞으로 튀어나온 턱‘은 왜 미인이 아닌가? 디지털 인체계측학을 활용한 과학 지식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짜 과학은 아니다. 오히려그런 설명을 해 주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다. 이처럼 ‘왜’를 말하지 않는 과학의 속성은 "모든 근거 있는 믿음의 밑바탕에는 근거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로 표현된다. - P83

"예전에 우리 애를 보면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싫어하고 그랬죠. 근데 우리들의 블루스」가 방송되고 나서 사람들이 우리 애 보고 귀엽대요. 은혜는 달라진게 하나도 없는데………… 늘 같은 모습이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은혜를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요즘 우리는 참 이상하고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어요."

「우리들의 블루스」가 만든 마법일까. 다운증후군 배우 정은혜 씨의 어머니는 드라마 출연 전이나 후나 딸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그를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감정이 달라졌다고 했다. - P90

교양 프로그램 피디로서 나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으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재현된 대상은 원형과 사뭇 다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를 배치하고 재구성하여 이야기를 입히면, 제작자가 실제라고 믿는 이미지가 구축된다. 이런 의도하지 않은 왜곡은 때때로 대상을 정형화하는 오류를 낳기도 한다. - P91

실제로 편견은 고정관념과 같은 인지적 요소보다 호감과 같은 감정적 요인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주목할 점은 편견을 강화하는 감정적 요인이 강한 적대감 같은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무지와 정보 부족, 낮은 접근성으로 생기는 불안과 불편함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잘 모르고 많이 접하지 않은 낯선 대상에 대해 편견을 강화한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그 편견을 호감이라는 정서로 전환시켰다. - P92

한국의 TV 방송 프로그램에서 외국인들은 인종과 출신 배경,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스테레오타입으로 묘사되어 왔다. 이주노동자는 사고, 죽음, 불법의 표상으로, 결혼이주여성은 한국의 가족주의를 존속시키는 희생적 여성상으로 그려졌다. 반면 백인은 지적이고 문화 수준이 높은 동경의 대상으로 재현된다. 선행 연구들은 미디어가 인종을 서열화하고, 이중적 인종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 P93

스테레오 타입이란 용어를 개념화한 미국의 정치사상가 월터 리프만은 『여론』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머릿속의 그림"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중요한 점은 그 그림이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라 미디어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 P94

한국을 사랑하는 백인에 대한 한국 시청자의 호감은 새롭지 않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국뽕 콘텐츠에서 재현되는 외국인의 모습은 7년 전 연구에서 도출한 백인의 정형화된 이미지와는 미묘하게 다르다. 한국문화에 격렬하게 공감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지나치게 과장되어 우스꽝스러워 보일 때도 있다. 이것이 백인이 텔레비전에서 타자화되는 방식이다. 인종적 서열화로 백인과 비백인의 위계가 설정되어 비백인이 열등하게 타자화된다면, 국뽕을 채우려 백인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백인 또한 타자화된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더 멋지게 내보이기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 P101

옷을 "사회적 피부"라고 정의한 인류학자 테런스 터너는 인간이 삶의 단계와 사회적 역할에 따라 사회적 주체로서의 - P116

자신을 연행(perform)하는 데 규범과 코드에 맞는 옷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많은 여성들이 기성복 표준사이즈 체계가 편협하고 차별적이라는 점을 경험으로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표준 사이즈에 자신의 몸을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고 애쓴다. - P117

그때의 심증을 지지하는 사회적 현상은 여전히 도처에 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뼈 빼고 다 빼 드립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본 일이 있다. 퍼스널 트레이닝업체의 광고였다. 이런 괴기스럽고 말도 안 되는 목표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문구로 쓰인다. 더 아연실색할 일은, 마른 몸매를 추구하는 사람 중 종아리 근육을 위축시키는 종아리 퇴축술 같은 시술을 받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보행에 필요한 종아리근육은 매끈한 ‘일자 다리‘가 중요한 여성에게 부기를 가라앉히고 없애야 할 ‘종아리 알‘로 인식된다. 이는 외모에 대한 그릇된 신념 체계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자기만족을 향후 50년 이상 지속될 근골격계의 불균형과 교환하는 극도로 비대칭적인 거래가 아닐 수 없다. - P130

사람들의 노화 궤적을 관찰한 장기 연구들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나이 드는 사람은 젊어서부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만들고 지킨 이들이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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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0-12 0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있어 보여요
표지가 심플하니 역주행, 참신성!

각 챕터, 주로 어떤 자료로 꾸려졌는지 직접 봐야겠네요 소개 감사드립니다 햇살과함께님^^

햇살과함께 2022-10-12 12:21   좋아요 1 | URL
역시 ‘외모‘에 관한 이야기라^^
이번 호는 다른 ‘한편‘ 호에 비해 어렵지 않고 재밌네요.
한편 한편이 너무 짧아 늘 아쉽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