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박정호 [얼굴을 잃지 않는 대화] - 159페이지

모두 처음 보는 얼굴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내가 학생들의 하관과 마스크 모양새를 줄곧 동일시했음을 깨달았다. 한 학기 수업을 ‘대면‘으로 진행했건만, 학생들의 얼굴 절반을 똑같은 형태의 마스크에서 유추해 바라본 것이다. 마스크 뒤 얼굴을 노출한학생들도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학생들은 식사를 마치자 서둘러 마스크를 다시 썼고, 얼굴이 절반쯤 부재한 일상의 편안함으로 되돌아갔다. - P147

우리는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자기 얼굴이 눈, 코, 입이 달린 단순한 살갗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려고 애쓴다. 그래서 우리는 ‘맨얼굴‘은 진짜 얼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낯에서 자아를 확립하려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 P148

사람(person)을 뜻하는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는 인간이 가면을 ‘통해 (per)’ 어떤 ‘목소리를 내는(sonare)‘ 존재였음을 보여 준다. 가면에 순종하는 삶만 정당한 삶으로 허용되었다. 그래서 역할에 소홀한 사람은 자기 배역을 포기하고 가면을 벗어던지는 인물로 취급당했다. 가면에 생긴 흠집만으로 타인의 목숨을 뺏거나 자기 목숨을 끊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 P149

사람들 사이의 미시적 상호작용을 예리하게 파헤쳤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에 따르면 현대의 개인들은 신에게 등을 돌린 이래로 서로 ‘성스러운 존재‘로 마주해야 할 의무를 진다. 과거의 신이 독점했던 신성함을 현대의 개인들이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는 의례에 참여하는 것처럼 조심성을 가지고 자신의자아와 타인의 자아를 숭배해야 한다. 현대인은 숭배받는 신이자 동시에 그 신을 숭배하는 신자로서 만나기에 서로 각별히 존중하는 의례를 연출해야 한다. 이 의례에는 낯선 타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지 않는 예의 바른 무관심, 어깨너머로 들려온 친구들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는 마음 씀씀이도 포함되지만, 그보다더 섬세함을 요구하는 의례는 분명 얼굴을 마주 보고 이루어지는 매일매일의 구두 상호작용일 것이다. - P151

얼굴을 보호하려면 선물을 주고받듯이 대화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얼굴은 사고팔거나 훔치고 빼앗는 물건이 아니다. 얼굴은 선물처럼 건네받고 답례해야할 자아상이며, 대화는 얼굴을 말에 실어 나르는 수레바퀴를 굴리는 일이다. 대화 속에서 말은 증여의 사이 - P152

클을 따라간다. 사업상의 거래든 일상의 사교 관계든아니면 길거리에서 낯선 이와의 마주침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이제 당신이 말할 차례입니다‘라는 소리 없는 암시, 발언권을 서로에게 부드럽게 넘겨주는 선물의 정신은 우리 모두를 대화의 장으로 이끄는 초대장이다. 이렇듯 경직된 근육을 풀어 주듯이 대화가 오가려면 주의 깊게 마련된 증여의 리듬 규칙이 필요하다. 리듬 규칙은 대화 당사자들에게 동조 압력을 행사한다. 나와 상대 모두 이 압력을 인식하고 느껴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자연스럽게 장단을 맞추는 말을 구사할 수 있다. - P153

대면 상호작용 의례로서 대화는 메시지의 즉각적 교환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마르셀 모스가 말했듯 무언가를 주는 것은 나 자신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말을 줌으로써 나를, 나의 얼굴을, 그리고 얼굴로 표현되는 신성한 자아를 준다. 아무리 사소한 대화라고 해도 상대방은 내 말에 실려 오는 나의 얼굴을 받고, 이어서 자신의 얼굴도 내게 내놓는다. - P153

그렇지만 선물 주고받기가 마냥 반가운 일이 아니듯 대면 상호작용이 골치 아픈 일로 여겨질 때도 흔하다. 얼굴을 마주한 상황이 마치 서로의 존재를 저당 잡는 구속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얼굴과말을 단번에 분리하는 기술로 계속 도피하고 있다. 교내 포털 사이트를 통한 출결 이의 신청, 화상 수업 중 카메라 끄기, 키오스크 주문과 문 앞 배송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순환시키는 증여의 부담에서점점 더 벗어나고 있다. 이를 그저 환영해야만 할까. 내 얼굴을 싣지 않은 말 한마디가 결국 타인의 얼굴을 무시하는 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 P154

나와 타인의 비대칭성, 다시 말해 둘 중 누군가 한발 먼저 물러나는 용서 혹은 사죄의 정신 또한 나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대화 윤리의 핵심이다. 나의 성스러운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사소한 모욕이나 비방을 너그러이 눈감아 주는 것은 내가 먼저 나를 줌으로써 나와 타인의 얼굴 모두를 성스럽게 만드는 선물 기술에 속한다. - P155

프로필은 팔리는 얼굴을 지향한다. 얼굴이 팔린다는 말은 이제 망신을 뜻하지 않는다. 현대의 개인들은 점점 더 팔리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 경쟁한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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