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은 이제 거의 다 맞춰졌다. 내 서툰 손가락으로 맞춰보려했을 때 끝내 안 되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레베카 이야기를 꺼냈을 때 프랭크의 태도는 어딘가 어색했다. 비어트리스는 머뭇거리는 듯하면서도 부정적이었다. 공감과 슬픔으로만 받아들였던 침묵이 실은 수치심과 당혹스러움에서 나온 것이었다니. 돌이켜 생각해보니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스스로의 벽을 깨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걸까. 그리하여 진실 앞에 눈감아버리는 아둔함은 얼마나 높고 거대한, 뒤틀린 장벽을 쌓게 되는 것일까. 나도 바로 그런 행동을 했다. 마음속에 잘못된 그림을 그리고 그 앞에 그저 앉아만 있었다. 진실을 알아내려는 용기가 없었다. 내가 한 걸음만 나아갈 수 있었다면 맥심은 넉 달전, 아니 다섯 달 전에 이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을 텐데. - P429

전과 똑같은 나였지만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점이 있었다. 불안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웠던 것이다. 더 이상 레베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좋았다. - P443

때때로 이런저런 말도 했다. 더 이상 우리 사이에 그림자는 없었다. 침묵했던 순간은 침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주변 상황이 그토록 암울한데 어쩌면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묘한 행복이었다. 내가 꿈꾸거나 기대했던 행복은 아니었다. 홀로 있는 시간에 상상했던 행복은 아니었다. 열정에 들뜨거나 급박함이 어려 있는 행복은 아니었다. 그것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행복이었다. 서재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우리는 이야기하거나 서로를 애무하지 않을 때면 어두운 밤하늘을 내다보았다. - P448

그 순간 맥심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에 처음으로 내 쪽을 본 것이다. 그 눈길에서 나는 작별의 의미를 읽었다. 마치 떠나가는 배 위에서 항구에 선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길 말이다. 그의 곁에, 그리고 내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어깨를 건드리기도 하겠지만 우리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바람도 세고 거리도 멀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말을 하거나 서로의 이름을 부르거나 하지 않는다. 배가 항구를 떠날 때까지 그는 내 눈을, 그리고 나는 그의 눈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 P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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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페이지 이후 대반전~!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두 번 다시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차를 마시며 내 쪽을 보고 미소 지었고 손잡이에 걸쳐져 있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 미소는 내가 얻어낸 보상이었다. 재스퍼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 보상이듯이 말 잘 듣는 개라면 만족하고 엎드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재스퍼가 되었다.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핫케이크를 한 장 집어 반으로 나눈 뒤 개들에게 주었다. 뭘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온몸의 기력을 소진한 듯 피곤했다. - P182

프리스가 식당을 나간 틈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즈를 가져오는 척하며 찬장 쪽으로 갔다. 그냥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나는 살짝 콧노래까지 불러야 했다. 멍청하고 병적인 행동, 신경쇠약 환자가 할 법한 행동이었다. 내가 원하는 정상적이고 행복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P186

하찮은 작은 일들,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지만 내게 있어 레베카는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난 정말이지 레베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맥심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며 함께 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그것 말고 아무런 바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늘 머릿속에 꿈속에 레베카가 찾아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가 맨덜리의 손님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레베카가 다니던 곳을 걷고 쉬던 곳에 몸을 누이는 손님. 안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손님. 말 한마디 한마디, 물건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내게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 P211

"당신은 참으로 이상한 행동을 했어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당장 부인을 불러 ‘자, 이걸 복원할 수 있는지 알아봐요‘라고 말하면 그만이오. 조각을 긁어모아 서랍 안에 감추다니. 그건 안주인다운 처신이 아니오. 아까도 말했지만 견습 하나 할 짓이지."
"전 견습 하나 다름없는 존재예요. 여러 면에서 그렇죠. 아마 그래서 제가 클래리스와 잘 지내는지 몰라요. - P220

"당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됐소."
"아녜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야지요. 그렇게 생각하죠? 우린 행복하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 손을 잡힌 채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목이 타들어가고 눈이 충혈되었다. 오, 하느님, 이건 마치 막이 내려지기 직전 두 배우의 모습 같잖아. 나는 생각했다. 이제 연극이 끝나면 관객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분장실로 가는 건가. - P225

맥심이 무사히 도착한 것을 확인했고 비스킷으로 배도 채웠으니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듯 해방감이 느껴졌다. 수업도 숙제도 없는 토요일을 맞이한 어린애처럼 말이다. 그런 날이면 애들은 내키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 낡은 스커트에 편한 신을 신고 이웃에 사는 친구와 신나는 술래잡기를 해도 좋다.
나도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맨덜리에 온 이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맥심이 런던에 갔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 자신도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가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지 않았나. 그런데 이토록 마음이가볍고 발걸음도 경쾌해지며 잔디밭을 가로질러 뛰어다니고 뒹굴고 싶은 아이 같은 기분이 되다니. 나는 입가의 비스킷 가루를 쓱쓱 닦으며 재스퍼를 불렀다. 날씨가 너무 좋아 기분이 이렇게 좋은걸 거야...... - P232

젊었을 때의 할머니는 어땠을까? 키 크고 잘생긴 부인이 주머니에 설탕을 넣고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채 마구간을 누비는 모습이 그려졌다. 꽉 졸라맨 허리에 목깃이 높게 달린 옷을 입었겠지. 2시까지 마차를 준비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는 다 지나가버린 일이었다. 할머니는 벌써 40년 전에 남편을 그리고 15년 전에는 아들을 떠나보냈다. 마침내 죽음이 찾아올 마지막 날까지 간호사와 함께 이 벽돌집에서 살아야 한다. 노인들의 심정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아이들이 어떤 두려움과 희망, 믿음을 가지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어제까지 아이였으니 기억이 생생한 것이다. 하지만 눈이 먼 채 숄을 두르고 저렇게 앉아 있는 맥심의 할머니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 걸까? 비어트리스가 하품을 하며 연신 시계를 보는 것을 알까? 우리가 그저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찾아온 것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자, 이걸로 석 달 동안은 양심의 가책을 안 받아도 돼‘라고 혼잣말하리라는 걸 알까?
가끔은 맨덜리를 떠올릴까? 내가 앉는 식당에 앉았던 것을 기억할까? 할머니 역시 밤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셨을까?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채 그저 조용하고 파리한 얼굴로 소소한 통증과 소소한 불편만 느끼는 것일까? 햇살이 따뜻하면 기뻐하고 바람이 차면 질색하면서? - P283

"처음 만났을 때 당신 얼굴에는 특별한 표정이 있었소. 지금도 그 표정이 있지.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그건 내가 당신과 결혼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요. 방금 당신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동안에는 그 표정이 사라졌소. 뭔가에 밀려난 거요."
"뭔가라니요? 그게 뭔데요?" 나는 또다시 물었다. - P312

오후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여행 짐을 다 싸고 열쇠까지 채운 뒤 출발을 기다릴 때처럼 말이다. 나는 뒤따라오는 재스퍼나 다를바 없이 허둥거리며 이방 저방을 오갔다. - P319

비어트리스는 말을 맺지 않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올케가 너무 딱하게 되어 어쩌나 올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
"제가 알아야 했어요." 나는 멍하니 비어트리스를 바라보았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알아야 했어요."
"아니야, 올케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우리 중 아무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었는걸. 그래서 그저 다들 충격을 받은 거야.너무 뜻밖의 일이라 맥심은………."
"네, 맥심은요?" - P334

내가 내려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대는 통에 비어트리스의 동정심이 사그라진 모양이었다. 나는 꽁무니를 빼고 만 것이다. 비어트리스는 이해 못 할 것이다. 나와는 다른 신분에 속해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존심이 있다. 나와는 다르다. 비어트리스가 나 같은 일을 겪었다면 아마 벌써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가 손님들을 맞았으리라. 자일스 옆에 서서 미소 지으며 악수를 했으리라. 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게는 자존심이 없으니까. 신분이 다르니까. - P338

맨덜리에서 내가 치른 첫 파티, 아니 처음이자 마지막 파티를 떠올려보면 가장무도회라는 커다란 캔버스가 아닌, 각각 동떨어진 작은 부분들만 기억이 난다. 기본 배경은 수많은 얼굴로 이루어진 흐릿한 바다였다.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또 영원히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은 단조로운 왈츠 음악도 있었다. 똑같아 보이는 남녀가 똑같은 미소를 짓고 똑같은 춤을 추며 차례로 눈앞을 지나갔다. 계단 아래에 맥심과 나란히 서서 늦게 도착한 손님들을 환영하는 내 눈에는 다들 보이지 않는 줄에 끌려 팔다리를 움직이고 빙빙 도는 꼭두각시 같았다. - P344

얼음 그릇을 떨어뜨리던 로버트의 모습도 기억난다. 임시로 고용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로버트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을 때 프리스가 지었던 표정도 난 로버트 곁으로 가서 말해주고 싶었다. ‘네 기분을 알아. 이해할 수 있어. 난 너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었거든‘이라고 눈빛은 서글프더라도 안간힘을 다해 미소 짓던 느낌도 생생하다. 다정한 비어트리스는 파트너의 팔에 안겨 춤을 추면서도 내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용기를 불어넣으려 애썼지. 손목에서는 팔찌가 쩔렁거리고 베일은 뜨거워진 이마에서 계속 미끄러졌다. 기운을 짜내 자일스와 함께 온 방을 돌아다니며 춤추던 내 모습도 보인다. 걱정하는 빛이 그대로 드러나는 선량한 눈으로 내게 다가온 자일스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나를 이끌며 춤추는 것은 말 한마리를 끌고 다니는 것만큼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 P346

레베카, 레베카, 늘 레베카가 있다. 집 안을 걸을 때나, 어딘가에 앉을 때나,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꿈꿀 때조차도 레베카를 만나게 된다. 레베카의 겉모습까지 알게 되었다. 길고 가는 다리, 작고 좁은 발, 나보다 넓은 어깨, 능숙하게 움직이는 두 손 레베카는 그손으로 꽃꽂이를 하고 모형 배를 만들고 시집 속표지에 ‘맥스에게 레베카가‘라고 썼다. 달걀형의 작은 얼굴에 피부는 하얗고 검은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고 했지. 좋아하는 향수 냄새도 안다. 그 웃음소리와 미소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있어도 그 목소리는 구별해낼 것 같다. 레베카, 레베카. 어느 한순간도 레베카를 벗어날 수 없다.
내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듯 레베카도 날 벗어날 수 없겠지. - P361

그때로부터 스물네 시간이 흘렀다. 드레스 때문에 온갖 괴로움을 겪고 시달린 시간이었다. ‘깜짝 놀라게 될 거예요‘라고 했던 내 말을 떠올리니 못 견디게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내 걱정과 달리 맥심이 떠나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테라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침착했다. 내가 아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간밤에 계단 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맥심은 멀리 가버리지 않았다. 그는 저 해변 어딘가에 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 P390

나는 홀로 나갔다. 재스퍼가 소리 내어 물그릇의 물을 마시고 있었다. 나를 보자 녀석은 꼬리를 흔들었고 다 마신 후에 겅중겅중 달려와 앞발로 내 치마를 건드렸다. 나는 재스퍼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테라스로 나가 앉았다.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고 나는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해묵은 내 두려움, 수줍음, 열등감 같은 것들은 이제 다 극복해내야 했다. 지금 실패하면 영원히 실패할 것이 뻔했다. 또 다른 기회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아프게 눌렀다. 그렇게 푸른 잔디밭과 테라스의 꽃봉오리를 바라보며 5분 정도 앉아 있었을까.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설 대령이 분명했다. 맥심에게 소식을 전하고 가버린 것이다. 나는 일어서서 천천히 홀을 가로질러 서재로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벤이 주었던 고둥이 잡혔다. 나는 그걸 꼭 쥐었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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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6-30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엄청 재밌죠!! >.<

햇살과함께 2022-07-01 11:40   좋아요 0 | URL
네~! 초반엔 이 것도 분위기만 내는 고딕소설인가?? 걱정하며 읽었는데, 중반 이후 몰입감 짱입니다!! 넷플릭스 영화도 봐야겠어요
 

행복은 획득하는 소유물이 아닌, 생각의 문제이고 마음의 상태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절망의 순간은 찾아온다. 하지만 시계로 잴 수 없는 시간이 영원으로 치달을 때 나는 그의 미소를 보면서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함께 걸어간다는 것, 어떤 의견 차이도 우리 사이의 장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 P11

하지만 부인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구역을 마구 짓밟고 돌아다니는 머리 나쁜 염소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민망한 마음에 나까지 얼굴이 붉어졌다. - P27

"텅 빈 집은 꽉 찬 호텔처럼 고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둘 다 냉정한 장소라는 거죠." 그는 다시 망설였다. 나는 그가 드디어 맨덜리 이야기를 하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그의 입을 막았고 결국 그는 성냥불을 불어 끄면서 의지의 빛도 꺼버렸다. - P42

그는 또 라일락을 좋아하냐고 물었던 것 같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선 라일락나무는 침실 창가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향기가 강하다면서 부지런한 현실주의자인 누님은 맨덜리에는 향기가 너무도 많다고, 그래서 취해버릴 수밖에 없다고 그에게 불평한다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가진 인생 최초의 기억은 하얀 화병에 꽂힌 커다란 라일락 가지가 내뿜는 향기였던 것이다. - P51

첫사랑의 열병이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은 참 다행이다. 시인들이 어떻게 찬양하든 그건 분명 열병이고 고통이기 때문이다. 스물한 살의 나이는 용감하지 못하다. 겁이 많고 근거 없는 두려움도 많다. 쉽게 까지고 상처를 입어 가시 돋친 말 한마디를 견디지 못한다. 중년을 바라보면서 탄탄한 갑옷을 입은 지금에야 가시에 찔린 사소한 상처 같은 것을 가볍게 넘기고 곧 잊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남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오래도록 남아 고통스러운 낙인이 되고 어깨 너머 뒤돌아본 눈길 하나가 영원히 기억에 꽂히고 마는 것이다. - P56

곧 부인은 혼자서 침대칸에 앉아 떠나겠지. 그와 나는 호텔 식당에 앉아 미래를 계획하며 점심을 먹을 것이다. 대모험의 시작인 것이다. 부인이 가버리고 나면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함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해줄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는 시간이 없었다. 또 그런 말은 아무 때나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눈길을 들어 거울에 비친 부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마음을 고쳐먹고 행운을 빌어줄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고 용기를 북돋아줄 모양이었다. 하지만 부인은 모자 아래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계속 미소만 지었다. - P98

"물론 왜 그가 너랑 결혼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설마 그가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빈 저택의 공허함이 괴로운 나머지 그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까지 온 거야. 네가 들어오기 전에 자기 입으로 그 얘기를 하더구나. 도저히 혼자서는 거기서 살 수 없다고 말이야………" - P98

나는 맥심 팔에 몸을 기대고 그 소매에 얼굴을 묻은 채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내 손을 톡톡 치면서 비어트리스와 이야기를 했다.
‘이건 내가 재스퍼를 대할 때와 똑같잖아.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나는 재스퍼처럼 굴고 있어. 그는 생각날 때마다 나를 어루만지고 그럼 난 기분이 좋아지지. 그는 내가 재스퍼를 좋아하듯 나를 좋아하는 거야‘ - P158

비어트리스는 내 손을 잡고 얼굴에 살짝 입을 맞췄다. "잘 있어요. 내가 무례한 질문을 너무 많이 했다면 잊어주고. 하지 말아야 할 말도 많이 해버렸네. 맥심도 말하겠지만 내가 워낙 생각 없이 떠드는 편이어서요. 아까도 말했지만 올케는 정말 내 예상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비어트리스는 날 가만히 바라보더니 휘파람을 불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레베카와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에요."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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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 아이 블루? 곰곰문고 101
브루스 코빌 외 지음, 조응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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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체성의 다름에 고민이 있거나, 아직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 있는 10대들이 주인공인 청소년 퀴어 단편 소설집이다. 이 책은 그런 청소년들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야˝ 라고, ˝너도 곧 받아들이게 될 거야˝ 라고 말해주며 용기와 응원의 손길을 내미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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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은 우산의 투명 비닐 밖에 펼쳐진 축축한 회색 풍경을 바라봤다. 모자가 필요한 날씨다. 검정 야구모자와 헤어 젤. 로빈은 둘 다 쓰지만, 오늘 같은 날씨에는 뭘 해도 소용이 없다.
"바보같이 외모 걱정을 왜 해? 생각만 바꾸면 비의 생명력이 내 것이 되는데!"
로빈의 엄마가 늘 하던 말이다. 로빈이 궂은 날씨를 싫어하는 마음과 거의 비슷하게 엄마는 폭풍우를 좋아했다. - P65

누군가 걱정을 하면, 로빈의 아빠는 "좋은 일이 일어날 확률도 50퍼센트지"라고 말하곤 했다. 로빈의 엄마는 그 말을 정말 좋아했다. 요즘 아빠는 그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나머지 50퍼센트의 불행이 닥쳤을 때도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 믿기는 힘들다. 그래도 시벨을 자기 의지로 거부한 건 잘한 일이었다. 경험을 쌓고 싶지만 아무한테나 목매달고 싶진 않았다. - P84

위니는 토미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내가 네 아빠라면 좋겠다."
"우리 서로 아빠가 되어 주면 되지."
둘은 서로에게 엄마이기도 했다. 늘 서로 밥은 먹었는지, 옷은 따뜻하게 입었는지 챙겨 주었다. 한번은 토미가 위니에게 스케이트보드 기술을 가르쳐 주다가 말했다.
"넌 내가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아들이야."
위니는 그 말이 너무 좋았다. ‘사랑해‘라는 말보다 더 좋았다. - P9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은 인종도 성별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아." - P99

"우리 엄마가 그 사람들 편을 드는 건 그 사람들도 권리가 있어서래. 너도 들었잖아. 우리 아빠랑 결혼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 편을 드는 거야."
"네 아빠랑 결혼한 거랑 무슨 상관인데?"
이번에는 내가 짜증이 났어.
"우리 아빠 흑인인 거 까먹었냐?"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마리아를 바라보고는 다시 바다로 고개를 돌렸어. 작은 파도들이 우리가 앉아 있는 바위 쪽으로 살며시 다가오고 있었어. 마리아가 말했어.
"아, 그런 거였구나."
"우리 엄만 상관 안 할 거야." - P124

로이스 라우리 Lois Lowry
나는 1937년에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에서 살았고, 중학교는 도쿄, 고등학교는 뉴욕, 대학교는 로드아일랜드에서 다녔습니다. 결혼하면서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코네티컷, 사우스캐롤라이나, 매사추세츠, 메인을 돌아다니며 생활하다가 1979년에 이혼하고 난 뒤로는 보스턴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의 일상은 아주 평온합니다. 주중에는 도시에서 살고, 주말은 시골에서 보냅니다. 나는 책과 꽃, 개, 영화, 음악을 좋아합니다. 같이 사는 남자는 유머 감각이 넘치며 해리 트루먼을 영웅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내게는 아들과 딸이 둘씩 있는데, 이제는 모두 다 컸습니다. 넷 다 눈이 파랗고 혈액형이 Rh 음성입니다. 그리고 모두 유머 감각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닮은 점은 그게 전부입니다. 둘은 곱슬머리이고, 둘은 아닙니다(한 아이는 한때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셋은 기혼인데 그중 하나는 두 번째 결혼입니다. 한 아이는 아직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하나는 공화당원이고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둘은 아이가 있고, 하나는 앞으로 부모가 되고 싶어 하며, 하나는 절대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는 장애인이고, 둘은 운동을 좋아하며, 하나는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입니다.
나는 사람들 저마다의 차이를 존중합니다. 1994년 뉴베리상 수상작인 <주는 사람 The Giver>에도 이러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 P144

모든 시선이 애브너에게 꽂혔다. 그러고는 바로 록시와 나한테로 옮겨 왔다. 선생님이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우리가 늘 강조하는 거 잊지 않았지? 누구도 억지로 커밍아웃할 필요 없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신할 필요도 없다는 거." - P165

"캐런, 그날 일……… 미안해."
"나도, 엄마한테 화내서 미안해. 그래도 에이즈에 대해선 엄마 생각에 동의할 수 없어. 그건 나한테 중요한 문제야. 그렇지만 뭐, 엄마에게도 엄마 생각을 말할 권리는 있는 거니까."
"아냐, 내 생각이 잘못된 거라면 고집해선 안 되지. 요 며칠 책을 찾아봤는데, 나 자신이 좀 부끄러워지더라. 내가……… 애초에 내가 왜 사회복지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잊어버리고 산 것 같아. 그동안 난 동성애라는 것이 좀 거북했어. 그런데 이제는…………." - P175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형이 나한테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친해지고 싶을 뿐이야. 내가 볼 때 넌 참 매력이 많은 애인데 지금은 아주 혼란스러운 것 같아."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동안 널 지켜봤으니까. 시작은 늘 그래, 마이클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먼저 알게 되더라고."
"뭘 알게 된다는 거야?"
월트는 그저 웃기만 하더니 마이클을 보면서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마이클은 가슴속에서 비상벨이 울리는 걸 느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월트 옆으로 갔다. - P199

나도 그래. 나도 다른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거 좋아해 보려고 했거든. 그러면 애들이 날 좋아해 줄 것 같아서. 근데 아무리 해봐도 유치한 파티에 가는 거랑 쇼 프로그램 보는 건 너무 싫어."
베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랑 나는 남들하고 다른가 봐."
마이클은 눈물이 가득 고여 앞을 가렸지만 가까이 다가가 베키를 와락 끌어안았다.
"베키야, 사랑해."
마이클은 한없이 고마운 마음에 가슴이 벅찼다. 베키를 지켜주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순간은 베키가 마이클을 지켜 주고 있었다. - P203

실라가 내 팔에 손을 얹자 내 마음 한가운데에서 다시 실라의 손길이 느껴졌다. 내 마음을 저 깊은 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실라가 불쑥 자신이 아니라 나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테리야, 너도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할 거야."
이 말이 매기 없이 농구 캠프에 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실라는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밖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용기만 낸다면 얼마든지 따라 들어갈 수 있게. - P227

앨런 하워드
나는 거의 평생을 오리건주에서 살다가 1990년에 남편 척과 함께 미시간주의 캘러머주로 이사를 왔습니다. 딸이 넷 있는데, 지금은 다 자랐습니다. 그중 셰일리라는 딸이 레즈비언입니다.
부모 노릇을 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레즈비언 정체성을 찾아 헤매던 셰일리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달리기>의 주인공처럼, 난 딸아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에서 도망치려고만 했습니다. 딸이 레즈비언인 게 창피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에서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려면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딸은 자신을 찾기 위해 용기를 냈습니다. 비겁한 엄마를 두었는데도 말입니다. - P228

오솔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하던 데이비드는 이상하게 날아갈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앨런과 헤어지면 허전함이 밀려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어떤 충만감과 깊은 만족감이 느껴졌다. 데이비드는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앨런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 P265

대화는 사실 추한 거짓말들뿐이었다. 여자 몇 명을 꼬셨고, 몇 명이 넘어왔는지 등등. 피트와 리 둘 다 거짓말에 능숙한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둘을 부추긴다. 사실 이 대화는 남자든 여자든, 스트레이트든 게이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빈칸은 알아서 채워 넣으시길. 운이 좋은 애들은 곧 성숙해져서 이따위 거짓말이 필요 없어진다. 강인한 애들은 애당초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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