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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로 끝이었다.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두 번 다시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차를 마시며 내 쪽을 보고 미소 지었고 손잡이에 걸쳐져 있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 미소는 내가 얻어낸 보상이었다. 재스퍼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 보상이듯이 말 잘 듣는 개라면 만족하고 엎드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재스퍼가 되었다.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핫케이크를 한 장 집어 반으로 나눈 뒤 개들에게 주었다. 뭘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온몸의 기력을 소진한 듯 피곤했다. - P182

프리스가 식당을 나간 틈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즈를 가져오는 척하며 찬장 쪽으로 갔다. 그냥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나는 살짝 콧노래까지 불러야 했다. 멍청하고 병적인 행동, 신경쇠약 환자가 할 법한 행동이었다. 내가 원하는 정상적이고 행복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P186

하찮은 작은 일들,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지만 내게 있어 레베카는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난 정말이지 레베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맥심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며 함께 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그것 말고 아무런 바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늘 머릿속에 꿈속에 레베카가 찾아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가 맨덜리의 손님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레베카가 다니던 곳을 걷고 쉬던 곳에 몸을 누이는 손님. 안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손님. 말 한마디 한마디, 물건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내게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 P211

"당신은 참으로 이상한 행동을 했어요.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당장 부인을 불러 ‘자, 이걸 복원할 수 있는지 알아봐요‘라고 말하면 그만이오. 조각을 긁어모아 서랍 안에 감추다니. 그건 안주인다운 처신이 아니오. 아까도 말했지만 견습 하나 할 짓이지."
"전 견습 하나 다름없는 존재예요. 여러 면에서 그렇죠. 아마 그래서 제가 클래리스와 잘 지내는지 몰라요. - P220

"당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됐소."
"아녜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야지요. 그렇게 생각하죠? 우린 행복하죠?"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 손을 잡힌 채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목이 타들어가고 눈이 충혈되었다. 오, 하느님, 이건 마치 막이 내려지기 직전 두 배우의 모습 같잖아. 나는 생각했다. 이제 연극이 끝나면 관객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분장실로 가는 건가. - P225

맥심이 무사히 도착한 것을 확인했고 비스킷으로 배도 채웠으니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듯 해방감이 느껴졌다. 수업도 숙제도 없는 토요일을 맞이한 어린애처럼 말이다. 그런 날이면 애들은 내키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 낡은 스커트에 편한 신을 신고 이웃에 사는 친구와 신나는 술래잡기를 해도 좋다.
나도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맨덜리에 온 이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맥심이 런던에 갔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 자신도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가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지 않았나. 그런데 이토록 마음이가볍고 발걸음도 경쾌해지며 잔디밭을 가로질러 뛰어다니고 뒹굴고 싶은 아이 같은 기분이 되다니. 나는 입가의 비스킷 가루를 쓱쓱 닦으며 재스퍼를 불렀다. 날씨가 너무 좋아 기분이 이렇게 좋은걸 거야...... - P232

젊었을 때의 할머니는 어땠을까? 키 크고 잘생긴 부인이 주머니에 설탕을 넣고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채 마구간을 누비는 모습이 그려졌다. 꽉 졸라맨 허리에 목깃이 높게 달린 옷을 입었겠지. 2시까지 마차를 준비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는 다 지나가버린 일이었다. 할머니는 벌써 40년 전에 남편을 그리고 15년 전에는 아들을 떠나보냈다. 마침내 죽음이 찾아올 마지막 날까지 간호사와 함께 이 벽돌집에서 살아야 한다. 노인들의 심정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아이들이 어떤 두려움과 희망, 믿음을 가지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어제까지 아이였으니 기억이 생생한 것이다. 하지만 눈이 먼 채 숄을 두르고 저렇게 앉아 있는 맥심의 할머니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 걸까? 비어트리스가 하품을 하며 연신 시계를 보는 것을 알까? 우리가 그저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찾아온 것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자, 이걸로 석 달 동안은 양심의 가책을 안 받아도 돼‘라고 혼잣말하리라는 걸 알까?
가끔은 맨덜리를 떠올릴까? 내가 앉는 식당에 앉았던 것을 기억할까? 할머니 역시 밤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셨을까?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 채 그저 조용하고 파리한 얼굴로 소소한 통증과 소소한 불편만 느끼는 것일까? 햇살이 따뜻하면 기뻐하고 바람이 차면 질색하면서? - P283

"처음 만났을 때 당신 얼굴에는 특별한 표정이 있었소. 지금도 그 표정이 있지.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그건 내가 당신과 결혼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요. 방금 당신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동안에는 그 표정이 사라졌소. 뭔가에 밀려난 거요."
"뭔가라니요? 그게 뭔데요?" 나는 또다시 물었다. - P312

오후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여행 짐을 다 싸고 열쇠까지 채운 뒤 출발을 기다릴 때처럼 말이다. 나는 뒤따라오는 재스퍼나 다를바 없이 허둥거리며 이방 저방을 오갔다. - P319

비어트리스는 말을 맺지 않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올케가 너무 딱하게 되어 어쩌나 올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
"제가 알아야 했어요." 나는 멍하니 비어트리스를 바라보았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알아야 했어요."
"아니야, 올케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우리 중 아무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었는걸. 그래서 그저 다들 충격을 받은 거야.너무 뜻밖의 일이라 맥심은………."
"네, 맥심은요?" - P334

내가 내려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대는 통에 비어트리스의 동정심이 사그라진 모양이었다. 나는 꽁무니를 빼고 만 것이다. 비어트리스는 이해 못 할 것이다. 나와는 다른 신분에 속해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존심이 있다. 나와는 다르다. 비어트리스가 나 같은 일을 겪었다면 아마 벌써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가 손님들을 맞았으리라. 자일스 옆에 서서 미소 지으며 악수를 했으리라. 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게는 자존심이 없으니까. 신분이 다르니까. - P338

맨덜리에서 내가 치른 첫 파티, 아니 처음이자 마지막 파티를 떠올려보면 가장무도회라는 커다란 캔버스가 아닌, 각각 동떨어진 작은 부분들만 기억이 난다. 기본 배경은 수많은 얼굴로 이루어진 흐릿한 바다였다.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또 영원히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만 같은 단조로운 왈츠 음악도 있었다. 똑같아 보이는 남녀가 똑같은 미소를 짓고 똑같은 춤을 추며 차례로 눈앞을 지나갔다. 계단 아래에 맥심과 나란히 서서 늦게 도착한 손님들을 환영하는 내 눈에는 다들 보이지 않는 줄에 끌려 팔다리를 움직이고 빙빙 도는 꼭두각시 같았다. - P344

얼음 그릇을 떨어뜨리던 로버트의 모습도 기억난다. 임시로 고용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로버트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을 때 프리스가 지었던 표정도 난 로버트 곁으로 가서 말해주고 싶었다. ‘네 기분을 알아. 이해할 수 있어. 난 너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었거든‘이라고 눈빛은 서글프더라도 안간힘을 다해 미소 짓던 느낌도 생생하다. 다정한 비어트리스는 파트너의 팔에 안겨 춤을 추면서도 내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용기를 불어넣으려 애썼지. 손목에서는 팔찌가 쩔렁거리고 베일은 뜨거워진 이마에서 계속 미끄러졌다. 기운을 짜내 자일스와 함께 온 방을 돌아다니며 춤추던 내 모습도 보인다. 걱정하는 빛이 그대로 드러나는 선량한 눈으로 내게 다가온 자일스를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나를 이끌며 춤추는 것은 말 한마리를 끌고 다니는 것만큼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 P346

레베카, 레베카, 늘 레베카가 있다. 집 안을 걸을 때나, 어딘가에 앉을 때나,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꿈꿀 때조차도 레베카를 만나게 된다. 레베카의 겉모습까지 알게 되었다. 길고 가는 다리, 작고 좁은 발, 나보다 넓은 어깨, 능숙하게 움직이는 두 손 레베카는 그손으로 꽃꽂이를 하고 모형 배를 만들고 시집 속표지에 ‘맥스에게 레베카가‘라고 썼다. 달걀형의 작은 얼굴에 피부는 하얗고 검은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고 했지. 좋아하는 향수 냄새도 안다. 그 웃음소리와 미소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있어도 그 목소리는 구별해낼 것 같다. 레베카, 레베카. 어느 한순간도 레베카를 벗어날 수 없다.
내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듯 레베카도 날 벗어날 수 없겠지. - P361

그때로부터 스물네 시간이 흘렀다. 드레스 때문에 온갖 괴로움을 겪고 시달린 시간이었다. ‘깜짝 놀라게 될 거예요‘라고 했던 내 말을 떠올리니 못 견디게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내 걱정과 달리 맥심이 떠나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테라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침착했다. 내가 아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간밤에 계단 위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맥심은 멀리 가버리지 않았다. 그는 저 해변 어딘가에 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 P390

나는 홀로 나갔다. 재스퍼가 소리 내어 물그릇의 물을 마시고 있었다. 나를 보자 녀석은 꼬리를 흔들었고 다 마신 후에 겅중겅중 달려와 앞발로 내 치마를 건드렸다. 나는 재스퍼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테라스로 나가 앉았다.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고 나는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해묵은 내 두려움, 수줍음, 열등감 같은 것들은 이제 다 극복해내야 했다. 지금 실패하면 영원히 실패할 것이 뻔했다. 또 다른 기회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아프게 눌렀다. 그렇게 푸른 잔디밭과 테라스의 꽃봉오리를 바라보며 5분 정도 앉아 있었을까.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설 대령이 분명했다. 맥심에게 소식을 전하고 가버린 것이다. 나는 일어서서 천천히 홀을 가로질러 서재로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벤이 주었던 고둥이 잡혔다. 나는 그걸 꼭 쥐었다. - P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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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6-30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엄청 재밌죠!! >.<

햇살과함께 2022-07-01 11:40   좋아요 0 | URL
네~! 초반엔 이 것도 분위기만 내는 고딕소설인가?? 걱정하며 읽었는데, 중반 이후 몰입감 짱입니다!! 넷플릭스 영화도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