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실한 숙련공

"계속 그렇게 별나게 굴면," 어머니는 말한다. "너 절대 결혼 못 한다." "어차피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걸요." 멍하니 앉은 나는 사실 그 절망적인 대안을 떠올리고 있지만, 대답은 다르게 한다. 나는 어린 시절에 내가 두려워했던 것을 하나 떠올린다. 착실한 숙련공. 나는 숙련공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부감도 없지만, 미래의 모든 밝은 꿈을 가로막는 건 ‘착실한‘이라는 단어다. 그 단어는 비 내리는 하늘처럼 온통 회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스며 나오는 밝은 햇빛을 느낄 만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만 가서 자야겠다. 알겠지만 우리 일찍 일어나야 돼. 잘 자렴." 어머니는 문가에 서서 인사를 건넨다. 의혹과 상심으로 물든 모습. 어머니가 사라지자 나는 커피포트를 치우고 부고를 다시 읽는다. 그의 이름 위에 검은색 십자가 표시가되어 있다. 그의 다정한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고, 목소리가 들린다. "2년 있다가 다시 와요, 학생." 단어들 위로 눈물이 떨어지고, 나는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날일 거라고 생각한다. - P22

"크로그 씨네 건물이 헐렸어." 내가 말한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니?" "아니." 루트는 청년의 어깨 너머로 말한다. "그리고 그건 나랑은 개뿔 상관없는 일이야." 그들은 서로의 품속으로 다시 파고들고, 나는 그들을 지나 마당을 가로지른다. 나는 단지 뒤채의 계단을 오르다가 내가 태어난 이곳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문득 이곳이 참을 수 없게 느껴지고, 이곳의 모든 기억들이 어둠과 슬픔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사는 한, 나는 외롭고 이름 없는 삶을 살아갈 운명에 처해 있다. 세계는 내 어떤 부분도 인정해 주지 않고, 내가 모서리 하나를 겨우붙잡을 때마다 내 손아귀를 슬쩍 빠져나간다. 사람들은죽고, 그들 머리 위의 건물들은 헐려 나간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지속되는 건 오직 내 어린 시절의 세계뿐이다. 거실로 올라와 보니 언제나와 똑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다. 아버지는 자고 있고,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흰머리는 사라졌는데, 어머니가 극비리에 머리를 염색했기 때문이다. - P48

신념 때문에 시련을 겪은 나는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마치 잔 다르크나 샤를로트 코르데처럼, 나 역시 세계 역사에 이름을 새겨 넣을 한 명의 젊은 여성이 된 것 같다. 그러기에는 시 쓰는 속도가 너무 느리기는 하지만, 뭐 어쨌든 말이다. 나는 허리를 똑바로 펴고 고개를 높이 든 자세로 계단을 올라가고, 상처 입은 존엄을가득 품은 채 들어선 거실에서는 아버지가 세상을 향해 등을 보인 자세로 누워 자고 있다. 왜 이렇게 집에 일찍 왔느냐고 묻던 어머니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그 일자리는 좋은 자리였고, 끊임없이 직장을 바꾸는 여자와 결혼하려는 남자는 아무도 없다는 식으로 말을 이어 가며 점점 화를 낸다. 어머니는 이번에는 나를 지지해 주지 않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깨어나도록 큰 소리로 목을 가다듬고 식탁에서 약간의 소음을 낸다. 드디어 아버지가 깨어난다. - P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