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친구로 지내는 오랜 날들 내내, 나는 루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 내가 정말로 어떤 앤지 그 애가 알게 될까 봐 겁이 난다. 루트를 사랑해서, 그리고 그 애가 너무도 강한 아이라서 나는 그애의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나는 여전히 나다. 내게는 이스테드가데를 벗어난 미래에 대한 꿈이 있지만, 루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거리에 매여 있어서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 애와 같은 부류인 척하면서 그 애를 속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그 애에게 빚을 지고 있고, 이 사실은 두려움과 희미한 죄책감을 불러 와 내 마음을 괴롭힌다. 결국, 그빚은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 훗날 내 인생에서친밀하고 오래 갔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끼치게 될 바로 그 방식으로. - P62
내가 어머니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자 어머니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음, 있지, 첫 아이는 임신 기간이 두 달을 넘지 않는 법이야." 그런 다음어머니는 웃었고, 에드빈과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점이 어른들의 가장 나쁜 점같다.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오면서 저지른 잘못된 혹은 무책임한 행동을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다른 사람들을 그토록 성급하게 판단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심판대에 세우지는 않는다. - P81
아버지가 곧 도착할 거라서 그들은 서둘러야 한다. 어머니는 반짝이는 스팽글이 수백 개나 박힌 검은 튈로 한껏 치장한 채 서 있다. 스팽글들은 어머니의 덧없는 행복만큼이나 쉽게 떨어져 내린다. 그들이 막 문을 나서려는데 퇴근한 아버지가 집에 도착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노려보고는 말한다. "하, 허수아비 할망구 같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고 아버지를 그냥 미끄러지듯 지나쳐 에스테르를 바짝 뒤따라간다. 자기가 한 말을 내가 들었다는 걸 아는 아버지는내 맞은편에 앉아 아버지 특유의 온화하고 우울한 눈으로 자신 없는 표정을 짓는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아버지가 어색하게 묻는다. "밤의 여왕이요." 나는잔인하게 대답한다. 바로 이 사람이 언제나 우리 어머니의 즐거움을 망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 ‘디틀레우’이기 때문이다. - P85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들이야." 아버지는 경멸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시들은 현실하고 아무 관련이 없어." 나는 현실을 좋아해 본 적도 없고, 현실에 관해 쓰지도 않는다. 내가 헤르만 방의 「길가에서」를 읽고 있으면 아버지는 두 손가락 사이에 그 책을 끼워 들어 올리고는 온갖 싫은 티를 다 내며 말한다. "이 사람이 쓴 건 아무것도 읽어선안 돼.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정상이 아니라는게 끔찍하다는 건 나도 안다. 정상인 척하려고 애를 쓰느라 나도 나름의 고생을 하고 있다. 그래서 헤르만 방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되레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열람실에서 나는 그 책을 마저 읽고 마지막 부분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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