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일하러 나갔고, 오빠는 학교에 있었다. 그러니 어머니는 내가 거기 있는데도 혼자였고, 내가 완벽하게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수수께끼 같은 마 - P7

음속에 있는 아득한 고요함은 아침이 다 지나고 어머니가 보통의 주부들처럼 이스테드가데에 장을 보러 나가야 할 때까지 계속되곤 했다. - P8

그 책에 실려 있는 모든 노래는 주제가 비슷하고, 어머니가 그것들을 부르는 동안 나는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을 때의 어머니는 자기 바깥의 어떤 방해물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래층에서 사람들이 싸우고 말다툼하기 시작해도 어머니는 듣지 못한다. 아래층에는 기다란 금발머리를 땋아 내린 라푼젤이아직 자신을 블루벨 한 다발에 마녀에게 팔아 버리지는 않은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왕자는 우리 오빠인데, 그는 자기가 머지않아 탑에서 떨어져 눈이 멀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른다. 판자에 못들을 탕탕 두들겨 박는 오빠는 가족의 자랑이자 기쁨이다. 그게 남자아이들의 역할인 반면, 여자아이들은 그저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을 뿐이다. 여자아이들은 다른 누군가가 부양해 주어야하며, 다른 무엇도 바라거나 기대할 수 없는 처지다. - P19

"아이가 혼자 깨친 거예요. 저희 잘못은 아니죠." 나는 어머니를 올려다보고는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이해한다. 어머니의 키는 다른 여자 어른들보다 작고,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보다 젊으며, 우리가 사는 구역 바깥에는 어머니가 두려워하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언제든 우리 둘이서 그 두려움을 함께 마주하게 되면 어머니는 나를 배신할 것이다. 우리가 거기 그 마녀 앞에 서 있는 동안, 나는 어머니의 손에서 주방용 세제 냄새가 난다는 것도 알게된다. 나는 그 냄새가 몹시 싫다. 우리가 여전히 완전한 침묵에 잠긴 학교를 떠날 때, 내 마음은 그 순간부터 나머지 평생 동안 어머니가 내 안에서 불러일으킬 혼돈으로 가득 찬다. 분노와 슬픔, 연민이 뒤섞인 그것. - P27

생활 보호를 받으면 투표권이 상실되었지만, 어쨌게 우리는 굶주린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내 뱃속은 언제나 뭔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경험을 통해 절반의 굶주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딱딱해진 페이스트리와 커피만으로 며칠씩 때우다가 더 잘사는 집의 문가에서 흘러나오는 저녁 식사 냄새를 맡을때 느껴지는 허기였다. 내가 먹던 페이스트리는 책가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담으면 25 외레였다. - P34

한번은 내가 "비탄’이 무슨 뜻이에요, 아버지?"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막심 고리키의 작품에서 발견한 그 표현이 몹시 마음에 들었었다. 아버지는 말려 올라간 콧수염 양 끝을 쓰다듬으며 그 단어에 대해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 P36

"그건 러시아어에서 온 단어야. 고통과 비참함과 슬픔을 뜻하는 말이란다. 고리키는 위대한 시인이었지." 나는 기쁨에 차서 말했다. "나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곧바로 얼굴을 찡그리더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여자는 시인이 될 수 없어!" 상처받고 화가 난 나는 다시 내 안에 틀어박혔고, 그러는 동안 어머니와 에드빈은 그 터무니없는 생각을 비웃었다. 나는 다시는 누구에게도 내 꿈을 털어놓지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고는 어린 시절 내내 그 맹세를 지켰다. - P37

하지만 그런 지름길을 모른다면 당신은 어린 시절을 견뎌야만 한다. 매 시간 그 속을, 그 절대로 끝나지 않을 시절 속을 터덜터덜 걸어가야만 한다. 오직 죽음만이 당신을 거기서 해방시킬 수 있기에 당신은 오랜 시간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어느 날 밤에는 죽음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한다. 그때 죽음은 당신의 눈꺼풀이 다시 열리지 않도록 입맞춤해 줄 하얀 로브 차림의 친절한 천사가 된다. 또 나는 이런 생각도 한다.
결국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면 어머니가 지금 에드빈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좋아해 줄 거라고 말이다. 내 어린 삶은 나를 짜증스럽게 하는 만큼이나 어머니도 짜증스럽게 하는 까닭에, 우리가 함께 있으면서 행복할 때는 오직 어머니가 그것의 존재를 갑작스럽게 깜빡할 때뿐이다. - P48

어린 시절은 캄캄한, 지하실에 갇힌 채 잊혀 버린 작은 동물처럼 언제나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추운 날 나오는 입김처럼 당신의 목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그것은 가끔은 너무 조그맣고, 또 가끔은 너무 크다. 정확하게 딱 맞는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을 벗어던진 뒤에야 당신은 그것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고, 마치 극복한 병처럼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어른들 대부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행복했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그들 자신은 정말로 그렇게 믿을지도 모른다. - P51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그들이 간신히 시절을 잊는 데 성공한 거라고 생각한다. - P52

우리는 어디로 방향을 틀더라도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맞부딪히고단단하고 뾰족한 모서리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입는다. 그 일은 수많은 상처들이 우리를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 놓은 뒤에야 멈춘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이 있지만, 그 각각의 모양은 완전히 다른 것 같다. - P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