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증언하다 보면 여러모로 외로워진다. 나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성으로서 내가 겪은 폭력을 증언해 왔으나 종종 아득해졌다. ‘피해자‘로 호명되는 순간, 내가 가진 다른 정체성들은 빠르게 사라진다.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사건만큼이나 나 자신 또한 납작해지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료하게 나뉘고 선과 악의 구도가 명확해질수록 또다시 외로워진다. 내가, 아니 우리가 겪은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모순적인 두 가지 상태를 동시에 얻으려 애쓰고 있다. 피해를 인정받되,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이것이 내게 고통이었음을 말하되, 나를 무너뜨릴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음을 말하기. 별일이 있었으되, 별일이 아니었음을 드러내기. - P161

나는 사람들이 명료해지기보다 함께 흔들리길 바란다. 연루되길 바란다. 선 긋고 피해자와 자신을 분리하는 대신 자신이 이미 선 안에 있던 존재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이것은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 세상에 많은 좋은 것들이 그렇듯 더 보람찰 것이다. - P162

주디스 허먼 Judith Herman은 그의 책 『트라우마』(2012, 열린책들)에서 성인기에 외상을 경험하면 이미 형성된 성격이 파괴되지만, 아동기에 외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성격이 파괴되는 것만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 P172

여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일대일 로맨틱 연애 서사의 해로움을 절감했다. 우리는 한 사람과의 로맨틱한 사랑에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한다. 애인은 성적으로 매력적이면서도, 부모처럼 헌신적으로 날 돌보아 주어야 하고, 친구처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일관적으로 지속되길 바란다. 사랑의 열정은 무척 달콤하고 짜릿한 것이지만 금세 사라지고 흘러가 버리며, 사실 바로 그 속성 때문에 달콤하고 짜릿하다. - P182

사랑을 받는 일은, 사랑을 주는 이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곁에서 사라지면 멈춰진다. 사랑을 주는 일은, 우리 마음안에 타인을 향한 사랑이 남아 있는 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외로워지지 않는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 마음산책)에서 신형철이 썼던 글을 인용하며 이번 장을 마무리하고 싶다.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이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P186

이삼십 대 여성은 도대체 왜 우울할까. 시민건강연구소 젠더와건강연구센터 김새롬 연구활동가(예방의학 전문의)는 "이삼십 대 여성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 사이의 균열이 가장 큰 세대, 그래서 추락하기도 쉬운 세대"라고 봤다. - P191

그러나 반복되는 가난은 공동체가 베푸는 호혜마저 두렵게 만든다. 호혜를 되돌려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도 정말 돈이없을 때는 타인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갚을 수 없을 같았다. 또한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에 그 상황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한 달 뒤, 두 달 뒤를 바라볼 수 있는 비상금이 쌓인 후에야 조금씩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가난은 일상의 모든 부분에 침투한다. 필요한 소비에도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삶을 개선해 보려는 모든 시도를 주저앉힌다. - P215

"지하철 1호선에서 화가 난 할아버지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 참 나 말고도 아픈 사람이 많다. 나만 되게 힘든 줄알았는데, 아프고 힘든데도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구나.’ 특히 앞 세대를 보면 더더욱 느껴요. 아빠들이 그렇게 술 마시고 뭐 부수고 그러잖아요. 저 사람들이 참 외롭고 아프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분노하는구나….
불안이나 결핍이 오래 쌓이면 망상이나 피해의식이 심해지죠. 분노도 강해지고, 어떤 사람은 분노로, 어떤 사람은 무기력으로, 양극단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여자들 나와서 행동하잖아요. 혜화역 시위에서 목소리 내잖아요. 폭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이 쌓였구나 싶어요.
항상 생각하지만 여자들이 똑똑해요. 지금 이삼십 대가 병원에 찾 - P221

아가고 심리 상담하고 책 찾아보고 하는 것이 ‘내게 문제가 생겼다‘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만큼 예민한 촉이 있기 때문이에요. 부정적으로 기사화되는 게 많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치료는 빨리 시작할수록 좋은 건 맞으니까요. 자기 가정사나 사생활도 거리낌 없이 쓰잖아요. 그런 용기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죠.
어떻게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될 것인지, 스스로를 컨트롤하면서 자립할 수 있을지 고민해요. 그럴 때 부모에게도 의지해 보고, 남자친구나 회사에도 의지해 보지만 ‘결국에 다 소용없구나, 내 주관대로 살아가야지‘ 하고 가장 먼저 깨우치는 사람은 이삼십 대 여성인 것 같아요."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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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마음 알겠다.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경상도 쪽으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이런 경우가 엄청 많아요. 딸, 딸, 딸, 아들 이런 집도 많고요. - P147

합격했을 때 선생님이 전화 주셨는데 다른 가족들이 진짜 펄쩍펄쩍 뛰면서 환호성을 지르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 순간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허무하고 앞이 깜깜해지더라고요. 친척들이 집에 다 모여서 잔치를 했거든요. 그것도 기쁘지 않은 거예요. 아무 자원도 없는 상태에서 교사용 문제집 얻어서 풀고 그랬거든요. 나는 혼자서 외롭게 공부했는데, 사람들은 그게 자기들의 기쁨인 것처럼 저러고 있네. - P153

"할머니는 가족들이랑 계속 잘 지내보라고 하는데 알 바인가요? 제 인생 아니잖아요, 사실, 도망치는 것도 용기다. 피할 수 없으면 피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서라도 피해라. 도망치는 것도 반복과 요령이 필요한 거니까 많이 배워두라고,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니까 갖다 버려라. 이 말이 하고 싶어요." - P155

사람들은 스캇 펙이 정의한 사랑의 개념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한다. 그 정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 사회 대부분의 가정에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 셈이기 때문에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서운 것이다. 따라서 학대나 모욕을 좀 당하더라도 그것이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니라고 믿게 만드는, 잘못된 사랑의 개념을 고수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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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신앙이라는 체계가 진짜 다 뛰어넘을 수 있잖아요. 인간 사회의 모든 고통들을 다 해석할 수 있고, 그 해석의 권위가 나한테 주어지니까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여성들에게 해석의 권위를 주는 종교도 흔치 않잖아요. 보통 하나님은 아버지이니까요." - P121

사람이 새로운 삶의 태도와 사고방식을 갖기란 매우 어렵다. 사람들은 낯선 행복보다는 익숙한 고통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 P131

"우울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이 질문을 들은 여자들은 두가지 이유로 난처해했다. 첫째, 우울증의 시작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정신과에서 우울증을 진단받은 순간? 깊은 슬픔을 느낀 순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구나 살아가며 슬픔과 좌절을 느끼는데, 당최 어느 정도를 병리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울은 대체 어느 순간부터 ‘우울증‘이 되는 걸까? - P133

우울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전혀 분화되지 못하고 한데 뭉쳐 나를 난도질하는 상태이다. - P137

"열아홉 살 때까지 내 인생에서 엄마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회두가 너무 중요했어." - P138

이 말을 꼭 하고 싶어. 믿을 만한 병원을 찾아서 6개월 이상 꼭 치료를 받아보세요. 저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나아졌어요. 용기를 내서 가보세요." - P139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감정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감정을 수용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P141

아빠는 그저 미워하기만 하면 된다. 엄마 또한 미워하기 쉬운 대상이지만, 엄마의 경우는 이해가 가기 때문에 더 힘들다. 엄마를 향한 감정은 복잡하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도 엄마에게 가장 이해받고 싶지만, 엄마와의 대화는 늘 평행선을 달린다. 계속 시도하고 계속 좌절한다. 내 고통을 말하면 엄마는 자신의 고통을 말한다. 엄마 역시 내게 이해받기를 원하고 내게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려 하기도 한다. - P144

다 크고 난 뒤에 왜 이렇게 내가 정신적으로 힘든가 많이 생각을 해보거든요. 아이 때… 애기들 말도안 되는 떼쓰잖아요. 그런 것처럼 누군가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져 본 경험이 없었던 것 같아요.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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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메이어는 우울증‘이라는 진단 역시 아주 미국적인, 독특한 형태라고 말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느낌을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공개하고 마음의 고통을 의료 문제로 보는 성향을 지닌 것은 미국인이 유일하다고 지적한다. 다른 문화에서는 대체로 내적 고통에서 도덕적·사회적 의미를 찾기 때문에 공동체 내의 어른이나 영적 지도자들을 찾아가지 공동체 밖의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우울증을 호소하는 여성 중에서 연령대가 높을수록 무속신앙 등을 찾는 이들이 많다. 특히 정신과를 찾아가는 일을 어려워하거나, 찾아갔더라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 실망한 경우 무속신앙에 의지하는 경우가많다. - P55

진단은 해방인 동시에 억압이다. 진단은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리, 현실과 환각, 진짜 고통과 가짜 고통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진단은 미스터리했던 증상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나와 같은 사람을 찾게 해준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심지어 나조차도 승인하지 않았던 고통을 인정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멋대로 규정하고 낙인찍는다. 수치심을 준다. 삶을 재단한다. 과거를 멋대로 해석하고 현재의 정체성을 건들며 미래를 예언한다. - P62

이렇게 보면 우울증 환자가 많아졌다는 것은 실제로 병을 앓는 환자가 많아진 것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 우울한 상태를. 병리적인 것으로 인식하면서 의학적 틀을 적용해 우울 증상을 이해하고 치료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기존에는 의학적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증상들이 의학적 문제로 정의되는 과정을 ‘의료화 medicalization’라고 부른다. 우울증은 알코올의존증, ADHD, 출산, 비만과 더불어 대표적인 의료화 사례이다. - P74

당사자에게 진단이란 나의 우울이 병이냐, 병이 아니냐 하는 문제라기보다 누군가 나의 고통을 알아주는가, 알아주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고통을 계속해서 호소하는데도 반응하지 않는 사회에서 오래 홀로 버티던 사람에게 누군가의 ‘알아줌‘은, 그것이 설령 신자유주의 시대 감정 관리의 결과이며 다국적 제약 회사의 자본주의적 책략이라 할지라도 소중한 것이다. 증상만 나아진다면, 고통만 경감된다면 무엇인들 못 할까?
‘알아줌‘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어쩌면 전부이다. 누군가를 죽고 살게 한다. - P78

의사는 약효가 나타나기까지 2주 정도 걸린다고 했다. 혈액는 내의 리튬 농도가 일정 수준 이상 높아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기다리는 2주 동안 죽을 맛이었다.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2주를 버티라는 것인지. 산소도 빛도 부족한 심해에서 무척이나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점차 감정의 진폭이 잦아들었다. 효과가 있었다. 솔직히 그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마치 평생 초고도 근시로 살던 사람이 라식 수술을 하고 처음 눈을 뜬 기분이랄까. 배신감도 느꼈다. 모두가 이렇게 살았다고? 이렇게 인생이 쉬웠다고? 태어나서 처음느껴보는 평온함이었다. - P85

현대인이 겪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 속에서 우울증을 분석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20세기 말 정신의학에서 형성된 우울증의 질병 개념은 당시 사회에서 올바르게 받아들여지는 개인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울증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무력한 사람들의 질병이다. 이들은 정신의학에서 정의하는 정상성의 기준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 P102

지현은 병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관리 잘하는 우울증 환자‘ 이상의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병원에 가면 대부분 저를 다독였던 것 같아요. 무리하지 말라고요. 그러면 저는 제 한계를 정해놓게 돼요. 그럴 때면 먹고 자고 배설이 잘되는 상태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평생을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 텐데. 내가 가진 불안장애나 우울증이 어떤 면에서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대단한 야심을 부리는 건 아닌데. 어떤 시도를 하고 싶을 때 병원에서는 리스크가 있으니까 그걸 말리죠. 더 안 좋아지면 어떡하려고요, 이렇게요. 임파워링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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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들은 아픈 상태에서도 수천 번 자기 경험을 곱씹고재해석하며 성장했다. 이들은 가정폭력 혹은 성폭력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를 고발하고 뭔가를 바꿔보려 한 생존자이다. 이들은 스스로 이상을 감지하고 제 발로 병원을 찾아간다. 이들은 돌봄이 필요하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돌봄을 제공해 왔다. 이들은 도움받는 위치에만 머무는 것을 불편해한다. 이들은 온전히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 의사와 상담사를 포함한 누구에게도해석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말이다. 이야기에는 모순과 혼란이 있다. 진공 속 피해자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만난 여자들을 우울증, 불안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같은 딱지를 붙여 구분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옹호자이고 싶다.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 - P6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남성의 우울은 여성의 우울과 달리 성호르몬보다는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설명된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 역시 성호르몬을 갖고, 또 특정한 생애 주기를 경험하지만,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의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데에 주요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의학에서 표준이 되는 몸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몸이 표준이 될 때 아픈 것, 병리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은 남성 몸 바깥에 놓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울과 같이 병리적인 상태를 설명할 때 그 원인은 남성의 ‘정상‘적인 몸이 아닌, 그를 힘들게 한 외부적 요인, 곧 사회문화적인 조건에서 찾아진다. 반대로 여성의 우울은 그 원인이 여성의 ‘비정상‘적인 몸 안에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곧 여성이 아픈 것은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이다.
여성이 겪는 질병의 원인은 왜 자꾸만 여성의 몸, 그중에서도 성호르몬 등 생식기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될까. 나는 남성을 표준으로 두고 의학 지식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분석할 때, 그들을 둘러싼 온갖 사회·문화·경제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생식기 위주로 사유해 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남성 지식인은 여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생식기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 P24

아픈 사람이 호소하는 고통이 몸에서 시작됐는지, 아니면 마음(도대체 거기가 어딘지?)에서 시작됐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왜 그렇게 의학적으로 판명하기 어려운 질환을 가진 사람은 유독 여성, 노인, 빈곤층 등에 더 많은 것인지 질문할 필요는 있다. 마야 뒤센베리 Maya Ducenbery는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2019, 한문화)에서 "여성과 사회적 빈곤층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더 많이 보인다면 이는 아마도 의학이 이들 계층의 증상을 탐색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 P28

신체형 장애는 특히 여성, 가난한 사람, 시골에 거주하는 사람 등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더 흔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환자가 여성이다. 신체형 장애는 상당히 문제적인데 우선 환자가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대단히 뿌리 깊은 여성혐오의 역사, 미친년의 역사가 깃든 장애이다.
우선 신체형 장애는 과거 히스테리아hysteria로 불리던 질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흔히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말할 때의 그 히스테리이다. 히스테리아는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히스테라hystera에서 유래한 말로, 자궁의 이동을 의미한다. 여성이 광기를 보이는 이유를 자궁이 몸속을 돌아다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 P29

미국의 과학사학자 마크 미칼레Mark s. Micale는 히스테리아를 일컬어 "남성이 그 반대의 성에게서 찾은 불가사의하고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극적인 의학적 은유"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 P30

진단명보다도 마음에 남은 건 다음과 같은 기록이었다.

부적절한 정서, 내면적 우울감에 비해 표정이 밝고 과도한 사회적 미소

떠올려 보았다. 수 개월간 계속된 불면증과 우울, 불안에 지친 마음을 안고 방문한 정신과 진료실 안에서도 본능적으로 얼굴에 웃음을 띠던 때를, 낯선 이 앞에서 내 감정 상태가 그를 불편하게 할까 봐 초조했던 마음을. 그리고 이러한 불일치가 의무기록에 쓰일 만큼 병리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놀랐고 어쩐지 수치스러웠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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