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들은 아픈 상태에서도 수천 번 자기 경험을 곱씹고재해석하며 성장했다. 이들은 가정폭력 혹은 성폭력의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를 고발하고 뭔가를 바꿔보려 한 생존자이다. 이들은 스스로 이상을 감지하고 제 발로 병원을 찾아간다. 이들은 돌봄이 필요하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돌봄을 제공해 왔다. 이들은 도움받는 위치에만 머무는 것을 불편해한다. 이들은 온전히 자신의 언어로 말한다. 의사와 상담사를 포함한 누구에게도해석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말이다. 이야기에는 모순과 혼란이 있다. 진공 속 피해자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내가 만난 여자들을 우울증, 불안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같은 딱지를 붙여 구분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이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옹호자이고 싶다.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 - P6

정신의학 교과서에서 남성의 우울은 여성의 우울과 달리 성호르몬보다는 사회문화적 요인으로 설명된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 역시 성호르몬을 갖고, 또 특정한 생애 주기를 경험하지만,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의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데에 주요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의학에서 표준이 되는 몸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몸이 표준이 될 때 아픈 것, 병리적인 것, 비정상적인 것은 남성 몸 바깥에 놓인 것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우울과 같이 병리적인 상태를 설명할 때 그 원인은 남성의 ‘정상‘적인 몸이 아닌, 그를 힘들게 한 외부적 요인, 곧 사회문화적인 조건에서 찾아진다. 반대로 여성의 우울은 그 원인이 여성의 ‘비정상‘적인 몸 안에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곧 여성이 아픈 것은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이다.
여성이 겪는 질병의 원인은 왜 자꾸만 여성의 몸, 그중에서도 성호르몬 등 생식기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될까. 나는 남성을 표준으로 두고 의학 지식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분석할 때, 그들을 둘러싼 온갖 사회·문화·경제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생식기 위주로 사유해 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남성 지식인은 여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생식기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 P24

아픈 사람이 호소하는 고통이 몸에서 시작됐는지, 아니면 마음(도대체 거기가 어딘지?)에서 시작됐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왜 그렇게 의학적으로 판명하기 어려운 질환을 가진 사람은 유독 여성, 노인, 빈곤층 등에 더 많은 것인지 질문할 필요는 있다. 마야 뒤센베리 Maya Ducenbery는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2019, 한문화)에서 "여성과 사회적 빈곤층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더 많이 보인다면 이는 아마도 의학이 이들 계층의 증상을 탐색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 P28

신체형 장애는 특히 여성, 가난한 사람, 시골에 거주하는 사람 등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더 흔하게 나타난다. 대부분의 환자가 여성이다. 신체형 장애는 상당히 문제적인데 우선 환자가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대단히 뿌리 깊은 여성혐오의 역사, 미친년의 역사가 깃든 장애이다.
우선 신체형 장애는 과거 히스테리아hysteria로 불리던 질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흔히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말할 때의 그 히스테리이다. 히스테리아는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히스테라hystera에서 유래한 말로, 자궁의 이동을 의미한다. 여성이 광기를 보이는 이유를 자궁이 몸속을 돌아다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 P29

미국의 과학사학자 마크 미칼레Mark s. Micale는 히스테리아를 일컬어 "남성이 그 반대의 성에게서 찾은 불가사의하고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극적인 의학적 은유"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 P30

진단명보다도 마음에 남은 건 다음과 같은 기록이었다.

부적절한 정서, 내면적 우울감에 비해 표정이 밝고 과도한 사회적 미소

떠올려 보았다. 수 개월간 계속된 불면증과 우울, 불안에 지친 마음을 안고 방문한 정신과 진료실 안에서도 본능적으로 얼굴에 웃음을 띠던 때를, 낯선 이 앞에서 내 감정 상태가 그를 불편하게 할까 봐 초조했던 마음을. 그리고 이러한 불일치가 의무기록에 쓰일 만큼 병리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놀랐고 어쩐지 수치스러웠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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