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메이어는 우울증‘이라는 진단 역시 아주 미국적인, 독특한 형태라고 말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느낌을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공개하고 마음의 고통을 의료 문제로 보는 성향을 지닌 것은 미국인이 유일하다고 지적한다. 다른 문화에서는 대체로 내적 고통에서 도덕적·사회적 의미를 찾기 때문에 공동체 내의 어른이나 영적 지도자들을 찾아가지 공동체 밖의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우울증을 호소하는 여성 중에서 연령대가 높을수록 무속신앙 등을 찾는 이들이 많다. 특히 정신과를 찾아가는 일을 어려워하거나, 찾아갔더라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아 실망한 경우 무속신앙에 의지하는 경우가많다. - P55

진단은 해방인 동시에 억압이다. 진단은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병리, 현실과 환각, 진짜 고통과 가짜 고통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진단은 미스터리했던 증상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나와 같은 사람을 찾게 해준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심지어 나조차도 승인하지 않았던 고통을 인정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멋대로 규정하고 낙인찍는다. 수치심을 준다. 삶을 재단한다. 과거를 멋대로 해석하고 현재의 정체성을 건들며 미래를 예언한다. - P62

이렇게 보면 우울증 환자가 많아졌다는 것은 실제로 병을 앓는 환자가 많아진 것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 우울한 상태를. 병리적인 것으로 인식하면서 의학적 틀을 적용해 우울 증상을 이해하고 치료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기존에는 의학적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증상들이 의학적 문제로 정의되는 과정을 ‘의료화 medicalization’라고 부른다. 우울증은 알코올의존증, ADHD, 출산, 비만과 더불어 대표적인 의료화 사례이다. - P74

당사자에게 진단이란 나의 우울이 병이냐, 병이 아니냐 하는 문제라기보다 누군가 나의 고통을 알아주는가, 알아주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고통을 계속해서 호소하는데도 반응하지 않는 사회에서 오래 홀로 버티던 사람에게 누군가의 ‘알아줌‘은, 그것이 설령 신자유주의 시대 감정 관리의 결과이며 다국적 제약 회사의 자본주의적 책략이라 할지라도 소중한 것이다. 증상만 나아진다면, 고통만 경감된다면 무엇인들 못 할까?
‘알아줌‘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어쩌면 전부이다. 누군가를 죽고 살게 한다. - P78

의사는 약효가 나타나기까지 2주 정도 걸린다고 했다. 혈액는 내의 리튬 농도가 일정 수준 이상 높아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기다리는 2주 동안 죽을 맛이었다.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2주를 버티라는 것인지. 산소도 빛도 부족한 심해에서 무척이나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점차 감정의 진폭이 잦아들었다. 효과가 있었다. 솔직히 그 이상으로 충격이었다. 마치 평생 초고도 근시로 살던 사람이 라식 수술을 하고 처음 눈을 뜬 기분이랄까. 배신감도 느꼈다. 모두가 이렇게 살았다고? 이렇게 인생이 쉬웠다고? 태어나서 처음느껴보는 평온함이었다. - P85

현대인이 겪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 속에서 우울증을 분석하는 연구들도 있다. 이러한 연구들은 20세기 말 정신의학에서 형성된 우울증의 질병 개념은 당시 사회에서 올바르게 받아들여지는 개인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울증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무력한 사람들의 질병이다. 이들은 정신의학에서 정의하는 정상성의 기준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 P102

지현은 병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관리 잘하는 우울증 환자‘ 이상의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병원에 가면 대부분 저를 다독였던 것 같아요. 무리하지 말라고요. 그러면 저는 제 한계를 정해놓게 돼요. 그럴 때면 먹고 자고 배설이 잘되는 상태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평생을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 텐데. 내가 가진 불안장애나 우울증이 어떤 면에서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대단한 야심을 부리는 건 아닌데. 어떤 시도를 하고 싶을 때 병원에서는 리스크가 있으니까 그걸 말리죠. 더 안 좋아지면 어떡하려고요, 이렇게요. 임파워링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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