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독서괭님에게 댓글
달았듯이 이 책 6월 30일에 다 읽었는데(읽기 마감 지키기^^) 바쁘다는 핑계로 쓰질 못했다. 물론 100자평을 간단하게 남길 수도 있지만 이 책에 대해선 300자 정도(평은 아니고 끄적거림)는
남기고 싶어서 미루다 보름이 지나서야 끄적거린다. 이미 내 뇌 속에서 대부분 사라진 듯.
이 책 처음 읽은 때가 2016년
12월이다. 인생 처음 읽은 페미니즘 관련 책이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한다>이다. 그 책을 읽고 이 세계가 더 궁금해져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과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연달아 읽었다. 16년 미투 운동이 나에겐 페미니즘 읽기의
시작이었다. 물론 가벼운 책들만 읽었지만.
나에게도 여성으로서의 불합리, 불평등, 불공정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버리는 방향으로 살았다. 특히나, 남초 전공과 남초 회사에 다니며 더 남성에 빙의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화장실에서 울지언정 상사나 동료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내 경상도 백그라운드와 내 성격과 이런 환경이 복합적으로 나를 형성하여 나는 지금도 남성들과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 내가 편안하다고
느끼는 것이 실재가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쉽게 깨어지지 않겠지만.
<남자처럼 일하고 여자처럼
승리하라>, <공주를 키워주는 회사는 없다>, 20대
때 이런 책을 읽었다. 본부장이나 팀장이 여성 직원에게 나눠 준 책들.
<페미니즘의 도전>을 처음 읽었을 때 유시민의 조개론을 처음 알게 되었고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부분이 너무 충격으로 다가와서 이 책의 다른 내용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였다(물론
몹쓸 기억력이 가장 큰 원인). 유시민이나 박원순은 (안희정은
다르지 않을 줄 알았지만) 다를 줄 알았다. 정치나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에 대해 무지한 나는 진보 지식인에게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한번, 그 이후 미투에서 계속 충격, 박원순에서 정점을 찍었다. 남편에게 화냈다. 세상 믿을 남자XX
하나 없구나. 부끄러움을 아는 XXX인지, 부끄러움도 모르는 XXX인지 다를 뿐, 다 XXX 구나 하며.
요즘 유시민과 정희진에 대해 북플에서 언급되고 있던데.
이 책을 읽은 후 유시민은 멀리 했다. 물론 그 전에도 2권 밖에 읽진 않았고, 내가 멀리해도 베스트셀러 작가님에게 티도 안나지만.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앞으로도 읽지 않을 것 같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머리말이 진짜 좋은 책이다. 머리말은 반복해서
읽어봐야 한다.
물론 요즘은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에서 선생님이 알아서 반복해 주신다.
그러나,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수밖에 없는 일이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 지식은 목격에 관한 것입니다. 특정한 것을 안다는 사실은, 설명 가능성의 의미를 변화시킵니다. 목격은 언제나 해석적인, 우발적인, 예약된, 속기 쉬운 참여입니다. 목격이란 증언하는 것이고,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 것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입니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더욱이 편안할 수는 없다. 다른(alternative)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 P29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된다. - P37
고통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권태다. 고통은 변형되어야 하되 잊혀서는 안 되고, 부정되어야 하되 지워져서는 안된다. 죽음이라는 사실(fact)은 육체적으로 우리를 파괴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idea)은 우리를 구원하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성차별을 당하는 것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은 없다. 여성이라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열등감과 분노, ‘불평불만‘은 새로운 인식, 즉 실천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 P47
<정희진의 공부>를 들으며 이 책을 다시 읽어 보니, 정희진 선생님의 관심 분야나
생각, 주장이 이 책이 처음 나온 2005년 이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 놀라웠다.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은 발전이 없고 정체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생님은
무려 18년 전에도 지금 <정희진의 공부>에서 이야기하는 사유를 가지고 계셨단 말이다. 물론 그 이후
더 깊게 확장되었겠지만 맥락이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위안부
등 여성의 성노동과 국방에 대한 관심은 그때부터 시작되어 여전한 관심분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에서 3부 성매매와
군사주의에 대해서는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것 같다. 다시금 읽어봐야 할 부분이다. 지난달 소개해 주신 <동맹의 풍경>을 읽어보아야 겠다.
(*) 이번 달 정희진의 <공부>에서 언급한 많은 얘기 중에서 만해 한용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신 부분이 너무 좋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용운 시인, 시집 <남의 침묵>, 시
[님의 침묵]과 [나룻배와
행인], [알 수 없어요]에 대한 얘기. 고등학교 야자 때 공부하기 싫으면 문학 교과서의 시를 다른 교과서 내지에 베껴 쓰곤 했는데 그때 가장 좋아했던
시가 [님의 침묵]이었다.
시를 학교에서 너무 분석적으로 답정너로 배워서 시를 안좋아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나는 교과서에
나온 시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