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대한 책을 이 많은 역사적, 신화적, 생물학적, 정신분석학적, 문학적 사례 인용과 분석 - 그래서 한 문장으로 요약해봐, 하면 제대로 정리를 못하겠다. 그냥 나에게 인상 깊었던 몇 가지 언급한다.



사춘기 불안


소녀의 불안은 그녀를 괴롭히는 악몽과 그녀를 떠나지 않는 환상으로 나타난다강간에 관한 생각이 대개 강박적이게 되는 것은 그녀가 자기 안에서 은밀한 쾌감을 느끼는 때다강간에 관한 생각은 꿈과 행동 속에서 다소 분명한 많은 상징을 통해서 나타난다녀는 수상한 의도를 가진 도둑이 자기 방에 숨어들지 않았나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두려움 속에서 방안을 뒤져 본다소녀는 집안에 강도가 들었다고 믿는다침입자가 창문으로 들어와 칼로 그녀를 찌른다고 생각한다남자들은 다소 날카로운 방식으로 소녀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 P453


사춘기 시절 월경에 대한 저주, 몸에 대한 거부감, 현실에 대한 걱정과 불만,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 그 중에서도 나를 괴롭히던 불온한 상상들. 끊임없이 떠오르는 그 불온한 상상에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미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그 부분을 짚어주어 해방감을 맛보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불안하고 불안정한 미친 사춘기일 뿐이야. , 다시 10대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사춘기와 월경에 대한 파트가 가장 강한 인상을 주었다.



시지프스의 형벌


다수의 여자가 이처럼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투에서 무한히 다시 시작되는 피로밖에는 제 몫으로 가져가는 것이 없다더 특권적인 혜택을 누릴 때도 승리는 결코 결정적이지 않다주부의 일만큼 시지프스의 형벌을 닮은 것도 별로 없다날이면 날마다 그릇을 씻고 가구의 먼지를 털고 속옷을 기워야 한다이런 것들은 내일이면 다시 더러워지고 먼지가 앉을 것이며 헤져 버릴 것이다주부는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느라 지쳐 버린다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단지 현재를 영속시키고 있을 뿐이다그녀는 긍정적인 선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항해 끝없이 싸우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날마다 되풀이되는 싸움이다주인의 장화를 닦는 것을 우울하게 거부한 하인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닦아서 뭐합니까내일 또 닦아야 하는데요"라고 하인은 말했다. - P618


요리는 하면(그러나 하지 않는다) 음식이라는 결과물이 생기고, 설거지도 배불리 음식을 먹었으니 하는 것이고, 빨래도 옷을 입었으니 하는 것인데, 이 놈의 먼지, 먼지, 먼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정확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지만), 숨만 쉬어도 생기는 먼지들. 책장에, 책상에, 선반에, 옷장에 생기는 먼지를 닦을 때마다 아, 내가 시지스프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인가 푸념했는데, 또 나를 건드린 주부의 일상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2013년에 〈뉴욕매거진>의 조너선 체이트는 ‘페미니스트의 가사 노동 문제에 대한 진짜 쉬운 해결책‘이라는 짧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
집안일을 줄여라." - P205 <아내 가뭄>


"집안일은 조금 덜 하고 신경을 끊는 게 답인 유일한 정치 현안일 것이다집안일을 대하는 가장 혁신적이고 분별 있는 태도가 바로 무관심이라는 얘기다. 50년 전에는 이불보를 다리고 커튼을 진공청소기로 청소하는 일이 100퍼센트 정상적인 일이었다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얘기다하지만 청소 불평등을 해결하려면 청소 일을 분담하는 게 아니라 먼지를 아예 털지 않으면 된다." - P207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에서 뼈때리는 처방으로 집안일을 줄여라라고 했는데먼지를 외면하고 먼지에 의연해지는 굳건한 심지(?)를 가져야 하고 청소를 최소화한다주말에도 집 밖으로 나간다나간다.




철학 에세이라는 무거운 분류에 비해 생각보다 잘 읽혔다. 번역도 기여한 부분이 클 것 같다. 1권은 다소 어렵고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지만, 2권은 다양한 임상사례나 소설 인용, 생활밀착형 묘사들로 소설 읽는 것 같은 부분이 많다. 다만 너무 많은 예시와 반복적인 설명으로 약간 질리는(?) 면도 있다.


레즈비언에 대해 언급한 파트는 시대적 한계가 있을 것이며, 중산층/부르주아의 시선에서 중산층/부르주아 여성이 처한 상황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계급적 한계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또한, 방대한 수준의 현상 분석에 비해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짧은 대안 제시로 결론을 맺는다는 한계도 있다(보부아르도 인정했듯이). 그럼에도 한 인간이 여성이 되어지는 과정을 이렇게 세밀하게 처절하게 묘사한 책은 없을 것 같다.

보부아르는 여자에게 타자로 살도록 강요하는 남성 중심의 세계를 단죄함과 동시에 자신의 자유를 완성하여 스스로 자기 존재를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는 여성 주체에 대해서도 윤리적 엄격성을 보여 준다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가 지속되는 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여성의 상황에 관한 보부아르의 분석과 비판은 일관되게 이 두 층위에서 이루어진다그렇다면 보부아르와 함께 확인한 이런 비대칭적이고 불평등한 젠더 관계즉 남자에 대한 여자의 복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보부아르에 의하면 애초에 남자가 자기의 우월성을 여자에게 강요하는 데 성공했으며여자는 유사이래 남자에게 내내 종속되어 있었다앞서 인용한 것처럼 여자의 종속은 역사의 한 시점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운명처럼 보인다는 것이 보부아르의 주장이다하지만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는가? - P995


여자의 무능력과 몰락은 남자가 치부와 팽창이라는 계획을 통해 여자를 다루었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보부아르는 보고 있다그리고 이것만이 여자가 압박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역설한다어쩌면 성에 의한 노동의 구분도 양성의 우호적인 협조가 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만약 인간과 그 동류와의 근원적인 관계가 오로지 우호적인 관계라면 어떠한 노예적 유형도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따라서 보부아르는 인간의 인간 지배 현상은 객관적으로 자기의 우월성을 성취하려하는 인간 의식의 제국주의적 결과라고 설명한다인간의 내부에 타자라는 근원적 범주와 타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근원적 의지가 없었더라면 청동 도구의 발견도 여성의 압박을 초래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이다결론적으로 팽창과 지배에 대한 남자의 의지가 여자의 무능력을 저주로 변모시킨 것이다. - P998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원시 사회에서도 "공적 또는 단순히 사회적 권위는 항상 남자들에게 속해 있었다." 그는 모든 사회에서 남녀 간에 기본적인 불균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이러한 불균형은 결정적으로 남자의 생물학적인 특권, 즉 남자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여자에게 위치를 배정하기 위해 사용한 특권인 그의 완력에 근원을 두고 있다. - P1000


내가 궁금했던 왜 최초에 남성은 주체가 되고 여성은 타자가 되었나에 대해, 이정순 번역가의 해제에서 설명하기를, 결론적으로 보부아르는 인간(여기서 인간이란 남자를 얘기하겠지) 의식의 제국주의적 결과, 팽창과 지배에 대한 남자의 의지가 여자를 타자로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남자의 생물학적 특권인 신체적 차이도 언급한다. 그렇다면 태초부터 여성은 팽창과 지배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인가? 있었지만 남성보다 약해서 발현되지 않은 것인가? 없거나 약하다면, 과거보다 남성 지배의 비중이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앞으로도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인가? 여성의 지배력, 아니, 지배 욕구도 점점 강해질 것인가? 지배가 아닌 공존으로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아직 이런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페미니즘 철학 입문><페미니즘 이론과 비평>의 보부아르 부분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꺼내두었다.




















<Who? 시몬 드 보부아르>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ㅋㅋ 이런 학습만화 싫어하는데 보부아르의 생애가 궁금해서 속성으로 알기 위한 꼼수 ㅋㅋ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제2의 성>뿐만 아니라 이 책은 언급되는 책이 많아 언젠가, 죽기 전에 읽어봐야 겠다.





















보부아르가 자주 언급한 페미니스트 스탕달 책도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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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24 13: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짜 읽어도 읽어도 끝이 안나고 방대하다는 점에 공감입니다 ^^
레즈비언 부분에 대한 아쉬움, 시대적 한계에 대해서도요.

1권 읽으면서
‘왜 최초에 남성은 주체가 되고 여성은 타자가 되었나‘ 궁금했고
그에 대한 답을 <가부장제의 창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신자유주의 이후의 현재 사회에서 그 답이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당장 읽어보고자 하는 마음은 접었어요.

나머지 마저 잘 읽고 저도 글 쓸게요 :)

공쟝쟝 2023-03-24 15:43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접었대요 ㅋㅋㅋㅋㅋㅋㅋ 메롱!! 좌파의 길 수하님 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3-24 15:51   좋아요 1 | URL
읽을 책 너무 많아요 엉엉….
책먼지님 말대로 3일만 혼자, 책과 함께 있고 싶음..

공쟝쟝 2023-03-24 15:51   좋아요 2 | URL
나 … 그 3일을 잠자고 술마시는 데 다 썼어요….. 후.. ㅎ후련했는데… 다시 노동이 시작되고….

건수하 2023-03-24 15:52   좋아요 1 | URL
책은 못 읽었어도 잠자고 술마시고 충전했으니깐? 힘냅시다..!!!

공쟝쟝 2023-03-24 15:53   좋아요 2 | URL
책은 평일에 읽는 걸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03-24 16:00   좋아요 1 | URL
사장님…. (먼산)

공쟝쟝 2023-03-24 16:02   좋아요 2 | URL
노동에 매인 사장 수치스럽다… (햇살님 댓글놀이 죄송합니다 ㅋㅋ 노동외면중이라 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03-24 16:10   좋아요 2 | URL
수하님/이 책 정말 쪽수가 어찌나 안 줄던지요. 망망대해 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망망대해도 건너갈 수 있다는 자신감^^

공쟝쟝님/요즘 바쁘신 듯 하던데 잠시 쉬는 시간이시군요 ㅎㅎ
댓글놀이 좋습니다요~ 언제든 환영

다락방 2023-03-24 14: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오 햇살과함께 님, 완독하신 겁니까!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이 책은 확실히 읽어두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읽으면서 느껴지는 공감과 동의도 그렇지만 일단 읽어두면 내 안에 어떤 식으로든 새겨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여성학 책들 읽을 때에도 근육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읽느라 고생하셨고 또 다 읽으셨다니 축하드려요. 파티하세요!! ㅎㅎ

햇살과함께 2023-03-24 16:16   좋아요 2 | URL
읽는 건 지난주 토요일에 끝냈는데 이제야 몇 자 끄적끄적했네요~
파티는 지난주 토요일에 했습니다 ㅎㅎ
마음에 머리에 근육 계속 새기기 위해 다른 벽돌책도 부지런히 읽어야 겠어요~
읽을 체력을 위해 몸에도 근육을 좀 새기고요..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3-03-24 15: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축하포카드립니댜 🎉🎉🎉🎉 힘들지만 즐거운 여정이셨기를!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ㅋㅋㅋ 개인적으로 비슷한 질문에 가장 아하 💡했던 책은 거다 러너의 <가부장제의 창조>였습니다! 그 책의 결론은 …..

건수하 2023-03-24 15:49   좋아요 2 | URL
역시 그 책에 답이…
궁금해서 안되겠다 결론부분을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공쟝쟝 2023-03-24 15:50   좋아요 3 | URL
추측하셨듯 신자유주의에는 필요 없습…

햇살과함께 2023-03-24 16:23   좋아요 4 | URL
오~ 역시 <가부장제의 창조>에서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요?
답은 없겠지만 답답함은 조금 풀어줄까요? 더 답답해질까요??
솔직히 <제2의 성>은 읽고 나서 그 부분에 더 의문이 생겼달까요....
그 책은 사두었으니 곧(?)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3-03-24 18: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햇살님 완독에 이어 훌륭한 리뷰까지 쓰시다니… 부럽드아아앙 😖😖😖
여성에 관해 모든 걸 망라한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2권 좀 질린다는 말씀에 공감 ㅋㅋㅋ
가부장제의 창조는 강추 드립니다(이미 읽었다고 으쓱으쓱~)

햇살과함께 2023-03-24 22:37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도 곧 제2의 성 읽은 여자에 합류 기다립니다^^
저도 곧 가부장제의 창조 어깨뽕을 넣겠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03-24 18: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이렇게 멋지게 읽고, 멋지게 리뷰를 써버리신 햇살님!!^^

햇살과함께 2023-03-24 22:38   좋아요 1 | URL
저도 제2의 성 읽은 여자라고 으쓱거려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