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주말이 다가 옵니다. 남부지방엔 비가 내린다죠. 비가 오려는지 어깨가 쑤신다던 어머니가 생각나요. 저는 벌써부터 비소식에 마음이 다 쑤십니다. 일기예보가 이쑤시개처럼 그곳만을 쿡쿡 찌르고 가는 것 같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제부터 금요일에 아예 대놓고 청승을 떨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저는 며칠 전 어느 지인으로부터 ‘진정성이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처음엔 농담처럼 웃어 넘길 수 있었는데 글쎄 진.정.성.이라는 세 글자가 자고나도 영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 것입니다. 사연인즉슨, 저는 최근에 자주 방문하던 카페에 제가 올린 글들을 모조리 삭제를 한 적이 있는데 바로 그 삭제이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1. 진.정.성.

유일하게 온라인상에서 (그래도 활발하게)활동하던 카페였습니다. 오프라인 모임에도 나갔었고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도 몇 명 사귀었죠. 그곳에서 저는 리뷰는 물론, 제 개인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고 저는 그것에 별다른 특별함을 느끼지 않아왔습니다. 사적으로 써내려간 제 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는지(얼굴보고 만나면 안그런데 글로만 만나면 울컥증이 도져서요) 알게 모르게 일 년 사이 제 글을 좋아라 해주시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저는 누군가가 저의 리뷰를, 저의 일상과 생각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고 느껴졌어요.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요. 지금도 누구신지는 물증은 없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글도 그 범위에 포함될 성 싶지만요) 가만 생각해보니 운좋게도 리뷰대회에 잇달아 선정되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점이후 부터였던 것 같아요. 카페를 방문하는 분들은 대부분 온라인 서점에서 서재활동을 하거나 문학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었어요. 늘 하는 이야기지만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우연히 카페에서 제 글을 보고 온라인 서점에서 그들끼리 대화가 오가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누구라고 콕 집지는 않았지만 저는 (앞뒤 정황상) 자격지심에 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 적도 있구요. 사람의 심리가 간사한 것이 좋은 이야기는 당연해 보이고 나쁜 이야기는 가슴에 박히더군요. 그 중에서도 ‘기를 쓰고 리뷰대회 일등을 하려고 악착같이 구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혼자 잘나서 다른 사람의 글을 무시하는 사람’, ‘출판사에서 편애하는 사람’, ‘표절했다고 신고하는 사람’등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았을 땐 제 스스로 어떻게 해야할 지 방향을 정해야 했습니다. 암튼,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저는 최초에 제가 뭐라고 떠든 말과 글이 어떻든 원인이 되어 흘러 흘러 각색되고 재구성된다는 결론을 얻었고 (이상하게도 옛날에 올린 글들이 조회수가 늘어난) 1년간 카페에 올린 글들을 눈물을 머금고 사정없이 지워버렸어요. 가슴에 축구공만한 무언가가 휙 하고 지나가더군요..그러나, 포스트를 삭제했다고 제가 그 카페를 탈퇴할 생각은 없었기에 저는 닉네임을 바꾸고 그냥 참여없이 한달 동안 짝사랑만 했습니다. (아무런 글도 올리지 않았더니 저를 공격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바뀐 닉네임으로 두어 개 덧글을 달았는데....저를 알고 있던 카페분이 그 닉으로 단 덧글에선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빨리 예전으로 돌아오라고 충고와 위로를 해주셨어요. 그말을 듣자 바보처럼 눈물이 나더군요. 그분은 제가 닉네임을 바꾸고 조용히 지내던 이유를 조금은 짐작하고 계시던 분이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고마운 마음에 서운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더라구요.

진정성. 진정성. 며칠째 입안에서 맴돌던 단어를 읊어 봅니다.

저는 궁극에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스스로 글을 잘 쓴다는 생각때문은 아닙니다. 책 많이 읽는 분에 비하면 저는 독서량도 많지가 않습니다. 일차적인 건 세상에 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본능이구요. 세상이 그런 나를 좀 알아주었으면 싶어서입니다. 리뷰를 쓰기 시작한 것도 기왕 읽은 책 리뷰쓰면서 글공부나 해보자는 속셈이 반 이상이었어요. 만약 리뷰써야 하는 책이 ‘담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면 그래, 이번엔 ‘담배’에 대해 공부해보고 ‘담배’에 대해 내가 아는 건 다 써보자, 뭐 이런 식이었어요. 그렇게 써낸 리뷰니 비록 수상은 못하더라도 나중엔 (따로 하기 힘든)담배공부는 했다는 소중한 기록이 되더군요. 그런데 그 방법이 떡밥에 걸리는 확률이 많아지자 저 친구는 무슨 각종 리뷰대회만 좇아 다니는가보다, 싶었나 봐요. 어떤 분은 저에게 이제 제발 리뷰 그만 쓰고 당신의 글을 쓰라고, 손잡고 충고하신 분도 있어요. 눈물이 핑 돌 정도로요. 할 수 있다고요.


#2. 복.수.심

리뷰대회 참가를 의식적으로 줄이고 소설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나이에 그걸 어딜 가서 합니까. 소설이 쓰고 싶다고 앉은 자리에서 술술 나오는 것도 아니구요. 막상 무언가 해보려 하니 덜컥 두려워지더군요. 작법이나 테크닉보다는 마음가짐을 다지고 싶었는데 그런 제 맘을 알았는지 좋은 책을 알게 되었어요. 이 책은 소설 창작기술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의 태도를 말하는 책입니다. 총 분량도 175p이기에 저는 숨가쁘게 갈증을 풀듯 앉은 자리에서 벌컥 벌컥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그냥 좀 서러운 마음에 그 마음 잘 안다는 선생님이 호호 해주시는 것 같은 책입니다. 내용도 쉽고 예로 들어주신 문장들도 하나같이 뇌리에 쏙쏙 박히는 매력적인 책입니다. 이승우 작가는 <깊은 밤, 기린의 말>을 통해 사실 가장 어렵고 지루한(?) 소설을 쓰시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가르치시는 건 달랐어요.

글의 요지는 작가라는 사람들이 타고난 유전자로 천재처럼 어느 날 갑자기 신들린 듯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끊임없이 읽고 쓰고 고쳤기 때문에 소설을 잘 쓸 수 있게 된 것이라는 말씀이었어요.  재능 이전에 소설을 쓰고 싶고 쓸 수 밖에 없는 글감, 사연과 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저는 원래 문학에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쪽에 속했고, 개인적으로 사연이 많다(?)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니 저에겐 천금같은 소식이었죠.

그 많은 조언중에서도 제 심장을 강타한 문장은 ‘지상에 견고한 집이 있는 사람은 상상속에 허구의 집을 지을 필요가 없’고 ‘불만과 의혹, 욕망과 의도가 말을 만들고 소설을 쓰게’ 하는 것이라며 이청준 작가는 그것을 ‘복수심’이라고 칭했다는 말씀이었어요. 언젠가 박완서 작가가 세상에 복수하려고 글을 썼다는 인터뷰가 퍼뜩 기억이 났습니다.


“ 현실의 질서에는 자신이 굴복하고 실패 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번에는 그 세계가 거꾸로 자신에게 굴복해올 수 밖에 없도록, 그 세계 자체를 아예 자기식으로 뒤바꿔 놓을 수 있을 어떤 새로운 질서를 음모하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자기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이지요.”

이청준, 「지배와 해방-언어 사회학 서설3」, 『자서전들 쓰십시다』, 2000, 열림원
-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中에서 , 이승우 38 p


맞습니다. 복수심. 복수심. 복수심. 진정성처럼 눈물이 핑 돌았지요.



 

그리고 저는 소설의 종착지로 어울리는 책, 2011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집어 들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공지영작가의 글을 꾹꾹 눌러서 읽어 보려구요. 작년에 박민규 작가가 수상할땐 벌써 1월달 부터 읽어 놓고선 이번엔 좀 늦었어요. 잘은 모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상문학상은 여느 문학상보다 형식이나 기법이 독특한 작품들이 대상으로 수상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문학적 사건, 실험적 도전에 더 의미를 두는 상인 듯해요. 이번 작품도 기법이 독특했거든요

청승맞지만 저는 공지영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와 작가의 자선작인 <진지한 남자> 를 지나 ‘나를 울게 만든 수많은 독자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는 수상소감을 읽고는 결국 울어버렸습니다. ‘나를 울게 만든 수많은 독자’ 그 부분에서 눈물이 터져 나오더군요. 공지영 그녀야말로 지난 시절 숱하게 저를 울게 한 작가였습니다. 저도 그 중 한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틀림없이 저도 그중 한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치 수상을 제가 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특이한 건 이 작품의 화자는 바로 공지영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설을 보지 못했어요. 이런 소설을 자전소설이 아니라 사소설이라고 하더군요. 수상작들 중에서 대놓고 자기 이야기인 소설은 기억 나지 않아요. 소설 내용에 자기 작품과 실제 경험이 버젓이 등장하는 소설을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왔습니다. 화자와 주인공, 작가가 일체하는 소설. 제가 느끼기에 문단을 향한 일종의 자존심의 표현이라고 생각을 했어요.(누가 뭐래도 난 내 방식대로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뭐 이런식의) 공지영 작가는 대중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그동안 사실 문단에서 (비슷한 연배인 신경숙, 은희경 작가보다)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잖아요. 속된 말로 문단이 원하는 바 대로 가지 않았지요. 그런대 이번에 오히려 그 독자적인 길의 끄트머리에, 맨발로 글목을 돌게 된 그 막바지에 그간의 성취를 인정해주는 것이니 본인은 얼마나 기쁘면서 또 서러웠을까...싶었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공지영은 친구에게 “어쨌든 한 인간이 성장해 가는 것은 운명이다”라는 문장을 문자 메시지로 보냅니다. 마치 제가 문자를 띵똥하고 받은 것 처럼 심장이 저릿했습니다. 작가 친구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래, 그런 친구가 없다면 내가 되어줄까, 뭐 이런 기특한 생각도 해보구요. 대충 제목도 글목을 도는 것이 아니라 길목을 도는 것이라 보았었건만, ‘글목’은 ‘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작가가 만든 언어입니다. (완전, 맨발로 돌았다는 거 아닙니까.) 저도 언젠가 이렇게 맨발로 나신인 채로 내가 쓴 글이 모퉁이를 돌아 가는 길목에서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편의 소설은, 그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까지의 그 작가의 삶의 총체다’라는 이승우 작가의 말을 그대로 실현한 작품입니다.



초심을 알려주는 책과 그것의 완성도 높은 결정판을 확인하는 책을 가만히 껴안습니다. 어쩐지 그 중간은 제몫일 듯하네요. 그 중간을 열심히 채워 나가는 것 만이 진정성과 복수심을 해결하는 길인 것 같아요.  

 

이번 주말은 진정성과 복수심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사랑해'말하고 나면 더욱 사랑하게 되듯이 이렇게 적고나니,

진정으로 복수하고 싶습니다...언젠가는 말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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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1-06-10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복수에 성공하는 날, 그 소설을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한사람 2011-06-11 08:12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언젠가 제가 소설쓰면 읽겠다고 하신 분들 다 기억하고 있을 께요 ㅋ

달사르 2011-06-1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감동이에요.. 중간 정도 읽다가 감동, 이라는 말을 먼저 뱉고 싶어서 댓글 달아놓고! 다시 읽어갑니다. ^^

한사람 2011-06-11 08:01   좋아요 0 | URL

부끄~

달사르 2011-06-10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요..한참..나중에 시간이 흘렀을때요. 그때, 지금의 아픔이 오히려 한사람님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매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픔은, 그런게 아닐까..생각이 들어요. 그런 일들이 없었으면 '복수'는 지금보다는 더 늦게 시작되기도 할테니까요. 그런 일들 덕분(!)에 한사람님이 '복수'를 더욱 간절히 원하고 꿈꾸며, 또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거니까요.
소설같은 리뷰라고 했던 제 말이 한사람님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참, 이 포스팅을 읽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내립니다..ㅠ.ㅠ 저녁 모임 있는뎅..ㅎㅎ (참, 여기는, 남부 지방..)

한사람 2011-06-11 08:10   좋아요 0 | URL

모두 잘 쌓아 놓았다가 넘쳐서 감당할수 없을때 저절로 써졌으면 좋겠다는
무지막지한 바램을 갖고 있어요 ㅋ

이제 소설같은 리뷰가 아니라 그냥 소설을 써야 할텐데...ㅠ.ㅠ

참 여긴, 오늘도 비가 안올거 같아요...소식만 요란했던거 같아요 ㅋ

루쉰P 2011-06-1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한사람님을 공격한 사람들은 더럽고 비열한 인간들이라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라고 할까요? 전 인간들의 그런 습성들이 참으로 더럽다라고 많이 느끼고 제일 싫어하는 인간들입니다. 쳇! 결국에는 한사람님의 리뷰를 부러워하고 질투하니까 자신들의 이유로 합리화를 시키는 것이 아닐가요! 리뷰대회에 당선되기 위해 글을 쓴다고요. 자신들은 그렇게 리뷰대회에 한 번도 당선을 하지 못하니까 그런 말들을 늘어 놓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진심으로 쓴 글이 그런 저급하고 더러운 무리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절대 신경 안 쓰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정말 존경하는 루쉰 선생도 글만 쓰면 한사람님을 괴롭힌 그런 무리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쉰 선생은 절대 지지 않고 그들이 만든 세상이 절대 평온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더 이를 악물고 쓰셨죠. 개인적으로 한사람님의 글을 보며 많은 것을 느끼는 저로서는 그런 저급한 인간들이 한사람님을 괴롭혔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네요.
그리고 한사람님의 말씀처럼 결국 리뷰도 자신이 쓰시고 싶어하는 소설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소설만 딱 쓴다. 전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리뷰로 쓰고 또 쓰고 하시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징검다리를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 생각을 해요. 절대 힘 빠지지 마시고 더 많이 많이 써 주세요. ^^ 화이팅!!!

아 한사람님 리뷰를 읽다가 혈압이 올라가 버린 것 같아요. -.-

아 그리고 이달의 당선작에 마리리뷰랑 마이페이퍼가 선정 되셨더라구요. 2관왕 완전 축하 축하드려요. ㅋ

한사람 2011-06-11 09:25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읽고 ..어쩐지 바로 덧글을 달수가 없었어요.
누군가가 제 아픔에 공감하고 같이 혈압 올라갈수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게 고맙고 또 한편, 제가 속으로는 이런 답글과 격려를 바라고 속내를 풀어 놓은 것이 아닐까..
실은 저도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는 그들 몰래 상처를 받은 것이 었거든요..(그럼 저 역시 그들과 다를건 없는 뻔한 인간이기에 ㅠ.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는 고마와 하지 않지만, 가지지 못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속으로 부럽고 그것으로 잘되는 사람이 샘나고 ..혹시라도 내가 비슷한 재능이 있다면
더욱 속상하게 생겨먹은 거 같아요

그런데 언젠가 부터 쌓고 혼자서 감당하고, 일절 무응답하고..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태도가 그리 좋은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 밝힌 진실은 안 밝혀진다...이것이 요즘 깨달은 진리입니다

루쉰님의 말씀이 얼마나한 위로가 되었는지..설명할 길이 없네요..감사합니다..
(참, 이달의 당선작이요, 제 생각엔 그거 타는 분들이 거의 정해져 있다는 생각 ㅋ 당선작이 아니고 보상금 같다는 ..암튼, 루쉰님도 축하드려요 ! )




루쉰P 2011-06-12 09:51   좋아요 0 | URL
흠..그래도 그들과 우리는 다릅니다. 루쉰 선생 왈 '악에 대한 분노는 신성한 분노'라고 하셨거든요.

루쉰 선생의 글에 힘을 받으셨다니 저도 힘이 나서 더 정확하게 써 드리자면

"그들이 아무리 유언비어를 퍼트려 중상하고 음모를 꾸며 함정에 빠뜨리려 해도 볼 줄 아는 사람이 보면 바로 한눈에 알아채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는 빗나가고, 공연히 그들 자신의 비열함과 몰인격을 폭로할 뿐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한사람님의 길을 가셨으면 합니다. 진정성은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믿어요. ^^ 저도 부끄럽게 이달의 당선작을 탔는데..완전 부끄럽기만 할 뿐이에요...

stella.K 2011-06-1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열심히 한사람님의 글을 읽어 온 것은 아닌데,
가끔은 한사람님의 글 때문에 자극 받게되는 글이 있어요.
이번에도 그러네요.
서재활동 하시면서 정말 말 못할 어려움이 많으셨군요.
그에 비하면 저는(아무 것도 아니라고는 말 못 해도) 약한 것 같구요.
재주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시기도 많이해 공격도 많이 받고, 고난도 많은 법이죠.
그런데 제가 볼 때 한사람님은 꾹꾹 눌러 글을 쓰시는 몇 안되는 분 중 하나십니다.
저 자신도 가끔 느끼지만 장난삼아, 또는 지잘난 맛에 글을 쓰는 경우도 많거든요.
물론 그 사람에게 진정성이 없느냐면 그렇지도 않으리라 봅니다.
진정성은 항상 들어나면 진정성이 떨어져 보인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너무 들어나지 않아도 문제고.ㅋ 암튼 진정성은 그런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습작을 하다 때려 치우는 것이 다반삽니다.
그건 인내심이 부족해서도 이지만, 제가 쓰는 소설 거의 대부분이 사소설(제가 생각하는)이걸랑요.ㅋ
그걸 쓰다보면 좀 복수심과 쾌감이 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쓰면 쓸수록 기운이 빠져요.
상대를 너무 못되게 쓰는 건 둘째치고, 이 글이 혹여 출판됐을 때 내 이야기 썼네 하고 나중에
머리끄덩이 붙잡고 싸울 사람, 말하자면 복수를 당할까봐 못 쓰죠.ㅎㅎ
근데 더 중요한 건, 내 글을 봐주고 진정으로 평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러지 못해 이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이건 나중에 정리해서 저도 글을 써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중년이 주말을 이기는 방법치고 너무 쌈빡하고 멋지잖아요!
나이들어도 뭔가를 끊임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확실히 축복 같아요.^^

한사람 2011-06-11 14:02   좋아요 0 | URL

덧글에 늘 솔직하고 진심어린 마음을 놓고 가셔서
저는 스텔라님과 그동안 덧글정이 쌓였나봐요 ㅠ.ㅠ

전에 제 서재가 조용하고 남들이 잘 몰라서 좋다고 하신 말씀 기억해요 ㅋ
저두 예전에 저만 아는(?) 이웃님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유명해져서
많이 알려진 이후로는 초심을 잃고 보이기 위한 글로 바뀌어 지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분도 그런 자신을 몹시 자책하는 분위기 였구요, 결국
어느 시점에 다 접으시더라구요..

상처도 안받고..집착도 안하고..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진정성도 잃지 않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죠,,,?

한겨례에 실린 스텔라님 글을 보고
저도 울컥할 만큼 좋았어요..
언젠가 제 이웃님들도 비슷한 마음으로 제 소식에 같이 기뻐해 주실 날을 기다려요^^

늘 감사해요~

2011-06-11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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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 17: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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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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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 17: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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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5 2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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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5 23: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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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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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1-06-1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공지영씨 작품만 딱 봤었는데~ 감동적이었어.

한사람 2011-06-15 23:31   좋아요 0 | URL

그 뒤에 <진지한 남자>도 어쩐지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는 ㅋ

보물선 2011-06-16 10:17   좋아요 0 | URL
여성작가들 글은 확실히 자신을 더 많이 투영하는 것 같아.
<진지한 남자>는 예전에 어디 딴데서 읽었던 작품이야.
나두 공작가를 은근 좋아하네? ㅎㅎ
암튼...

그래서 여성작가들이 신변잡기 소설이니 머네 많이 비평의 화살을 받는데
사실 그게 또 재미있잖아. 그리고 진솔해 보이잖아~
다 그 작가만의 고유의 스타일을 인정하면 나름 독특하고 멋진거라 생각해. 난.

한사람 2011-06-16 10:19   좋아요 0 | URL

맞아~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ㅋ
쫌 좋아하는데? ㅋㅋㅋ
아니 기억하는데??

십년도 더 되었구만 ㅋ

2011-06-16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6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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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0: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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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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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1-06-1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중년이 뭐냐? 중년이~
당신이 왜 중년이야??
애들이 보면 중늙은이 뭐 이렇게 생각들지 않겠어??
요즘의 중년은 60대야. 60대.
앞으로는 저 타이틀, 쓰지 마삼ㅎㅎㅎㅎ
혹시 쓰고 싶으면~ 꽃중년! 뭐 이정도쯤은^^ ㅋㅋㅋ

한사람 2011-06-16 10:21   좋아요 0 | URL

나도 중년은 싫어요..
그냥 그 싫어 죽겠는걸,
아무리 봐도 내 이야기 같지 않는 그 단어를
외우듯이 몸에 꾸욱 박아서
익숙해져 보려고..

그래야 정말 중년이 되었을때 덜 아플까봐 ㅠ.ㅠ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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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유월이다. 내가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유월은 언제나 항쟁의 계절이었다. 우리 민족은 3월엔 독립을 4월엔 혁명을 5월엔 운동을 6월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6.10 민주항쟁이 내가 고등학교 때 일어난 역사적 그 날이었다면 그로부터 꼭 24년 후, 그러니까 강산이 두 번하고도 반 정도 바뀐 시간이 흘러 다시 또, 유월인 것이다. 세월로 치자면 꼭 나 같은 군대 안간 여학생이 재수(再修)없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한창 알아보고 있을 만큼의 시간인 것이다. 우리는 성장했을까?, 하는 비약적인 질문이 눈앞을 가린다. 공교롭게도 2011년의 유월은 대선을 일 년 반 남긴 시점에 때 아닌 ‘반값 등록금’ 투쟁으로 팽팽하게 긴장된 시국을 맞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마치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이 책은 젊은이여 일어나라, 분노하여 항거하라, 며 독자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절묘하고도 기가막힌 타이밍이다.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시민들은 통닭과 피자 등의 간식거리를 현장 지원한다고 하는데 이 책은 그 곁에서 몇몇 진보인사로 보이는 누군가가 열정적으로 나누어 주기에 딱 안성맞춤인 책인 듯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앉은 자리에서 마음이 동하게 되는 선동의 성격을 가졌고 드물게 짧은 관계로 그 자리에서 바로 덮을 수 있다. 오래 가르치지 않으면서 진부하지도 않다는 장점을 지녔다. 유럽에선 4500원(커피 한잔 값)에 이 책을 마치 집회 팜플랫처럼 구입하고들 있다한다. 저자의 나라 프랑스 역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이 책이 사르코지 보수파 정권에 저항해 사회당을 지지하자는 코드로 읽히고 있다 한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어딜가도 거리로 뛰어들게 하는 매력을 지녔으니 말이다.

  먼저 이 짧은 책의 구성은 저자인 스테판 에셀의 원고 분량 삼십여 페이지와 저자와의 인터뷰, 조국 교수의 추천사, 그리고 옮긴이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더해 90 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헤르타 뮐러를 소개하는 샘플북, ‘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의 분량이 111 페이지이다. 공짜인 샘플북보다 짧은 이 책은 물론 커피 한잔하면서 가볍게 넘겨볼 수 있는 최상의 미덕을 가졌다. 그런데 이 책을 제 무게만큼 가볍게 후식처럼 곁들이고 말기엔 어쩐지 내키지가 않는다. 책 덮은 다음이 문제인 책인 것이다. 저자는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지, 물어 보는 것만 같다. 책을 덮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 책을 읽었다는 ‘인증식’이었다.(나는 다른 책에선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조국 교수는 이 책을 저자의 공개유언(저자는 현재 93세 이므로)이라 칭했는데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은 독자의 서명을 요구하는 공개선언서쯤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아파트 부녀회장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하철 역 개통이나 고층건물 반대등의)서명을 요구하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실제로도 유엔 세계 인권 선언문(1948)을 작성하신 분이니 훌륭한 대 국민 유인물로도 손색이 없었다. 나도 당신의 선언서에 동참하겠다는 사인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다음엔 기회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증을 하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일어섰고 집에 돌아와 뒤늦게 정치, 사회면의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나로선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무어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 비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독일 출신 프랑스인으로서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가 출신이다. 영화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인물이 아직까지 생존해 목소리를 드높인다는 소식자체가 놀라웠다. 그런데 내가 감명받은 사실은 그의 역사적인 生의 이력이나 극적인 정치 활동, 혹은 이 책에 소개된 분노의 논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이토록 오래 (그것도 열정적으로)살아온 비결은 다름 아닌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 때문이었다는 명쾌한 대답이었다. 참고 사는 인생이 미덕이며 나이 들면 화 낼 일도 없어진다는 논리에 익숙한 나로서는 뜻밖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작가들은 얼마 전 어디서 조사한 통계치에 따르면 연예인의 자살이 증가하기 전까진 단연 수명이 짧은 직업으로 1위를 고수한 대표적 단명 직업이다. 스테판 에셀을 보고 아흔 넘어 생존한, 그것도 마지막 순간까지 원고를 교정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을 떠올렸다. 평화주의자 러셀도 작가치고는 자주 분노하는 인물이 아니었나 해서다. (분노하는 작가가 오래산다는 통계치를 기다린다)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우리 문단의 대표적 분노작가 조정래작가는 백수를 꼭 하셔야 한다. 격변의 21세기를 모조리 겪어온 93세 정치가의 입에서 마땅히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고 나아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씀은 분명 가슴을 두드리는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사십대의 어느 진보측 교수가 ‘젊은이여, 분노하라’고 목소리 높여 선동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모진 고문도 받고 수용소에서 몇 번 죽을 뻔도 하고 기적인지 운명인지 여기까지 살아왔지만 나는 한 평생 분노한 일에 정당한 참여를 하였으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대답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말씀이었다.  

  이 분의 논리는 간단하다. 1940년대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그 시기 레지스탕스 운동의 기본 정신은 다름아닌 ‘분노’였다고 말한다. 레지스탕스(résistance)는 ‘저항하다’ (résister)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즉 정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하는 것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에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분노를 촉발’해 마땅한 것이며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만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므로 분노하여 참여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시민의 의무라 말한다. 팔짱끼고 나몰라라 돌아서는 것이 아니고 분노에 참여할 때 우리는 진정한 투사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역사의 흐름을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논리이다. 저자는 스승인 사르트르로부터 이러한 ‘참여’를 배웠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삶을 되찾았느니, 이젠 그 삶을 걸고 참여해야 했다.”고 적었다. 이 사람의 참여는 절대 모든 일 다 하고 남는 시간에 우아하게 행하는 선택적 활동이 아니라 어떤 불의의 순간에도 공평하게 목숨을 담보로 의지를 각인하겠다는 필사의 말씀이다. 비슷한 형태로 살아 내온 시절을 목숨걸고 증언하는 작가가 있듯이 그는 다시 찾은 삶을 목숨같이 걸고서 앞으로 한평생 분노할 일에는 가만있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던 것은 아닐까.  

  조국 교수도 언급했지만 스테판 에셀이 말하는 분노는 개인적인 억울함에 감정적으로 격분하는 성질의 분노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선 목소리 큰 사람이 상대를 이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 개인 분노의 표출은 간혹 폭력을 야기하기도 한다. 또 어떤 오래된 분노는 묻지마 범죄로 발전하기도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분노는 불의를 보고 참는 것이 아닌 비분강개의 마음, 즉 공공의 불의를 보고 일으키는 분노로서 공분(公憤)이나 의분(義憤)을 뜻한다. 공적인 일로 느끼는 분노에 창조적인 저항의식을 기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정당한 분노 표출의 행위로서 비폭력적인 ‘평화적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을 뜻한다. 내 마음부터 폭력의 의지를 없애고 상대집단의 폭력을 뛰어넘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대집단이 갑자기 무차별 물대포라도 쏘아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폭력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저자는 어느 집단이건 우월한 무력으로 점령당한 입장에서는 비폭력 적인 대응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그렇다고 같이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것이 아니라(대응할 수도 없고 대응은 결과가 뻔하기에) 무엇보다 희망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공에 대한 비폭력 호소가 바로 비폭력적인 희망을 암시한다 말하는 듯했다. 억울하게 맞아 죽어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은 다소 철학적으로 들리기도 했고 허탈한 결론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결론은 희망만이 답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평생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그래도 분노하였을 때 결과는 달라져 있었다 주장하는 듯했다. 조금씩 천천히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분노했기 때문에 발전하지 않았느냐 반문하는 듯 했다. 자칫 폭력 때문에 긍정적인 결과를 비껴가면 그만큼 역사는 정의로와 지는데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뜻이 아닐까.


“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격분’이라고 한다면, 폭력이란 도저히 용납 못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내린 유감스러운 결론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이해한다면, 테러리즘이 격분을 표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격분은 부정적 표현이다.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되며,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   -31P



  저자가 말하는 ‘사회정의와 공공선의 실현을 위한 정당한 분개’는 ‘진정 행복하려면 제때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논리적인 시너지를 일으키며 우리의 오늘을 돌아보게 만든다. 저자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사회단체나 국제 기구, 조합의 일원으로서 분노에 참여하라 독려한다. ‘투표하지 않는 자는 암묵적인 찬동자’이며 비난보다 못한 최악의 태도, 무관심이라는 묵인 열차에 편승하는 일이라 일갈한다. 이 책을 덮고 나는 우리의 등록금 이슈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연대를 이루어 분노를 행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아직 분노가 어떤 형태로 가시화되지만 않았지 우리들 모두는 분노를 쌓고 쌓아 그것을 암덩어리 키우듯 세포화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면서 자연 개혁야권이나 시민단체, 청년연합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던 나의 가슴에 슬몃 손을 대 보았다. 억누르고 참는 것은 이미 생활속 습관이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분노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며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팽배해진 결과였다. 범국민적인 풍경으로서 24년 전 유월의 거리에서도 나는 분노하기에 여물지 않은 가슴이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분노라는 열매가 한번도 맺어진 적 없이 시들어버린 꼴이었다. 지금의 분노는 냉소적 가슴으로 자체진화한 것이었다.  마치 익지도 않고 시어버린 김치처럼. 결국 나는 (가장 안좋은 케이스로)내 자신에 분노했다.

  문득,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1991년) (하필이면) 지금처럼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했다가 백골단의 집단구타로 맞아 죽은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무엇에 맞았는지 강가에 버려진 그의 시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우리 시대 독재의 영원한 상처로 남았다. 그런데 나와 같은 나이의 젊은이가 미래를 펼치지 못하고 정권의 방망이에 목숨을 잃었지만 나는 그때도 분노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변명을 하자면 분노는 올바르지 않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세뇌 당해온 학습의 효과였다. 그는 하늘에서 아직도 분노의 눈동자를 감지 못한 것은 아닐까.

  등록금이 일 년에 천 만원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땐 그래도 방학 때 놀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바짝 하면 다음 학기 등록금은 간신히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등록금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도 생겨났다.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은 등록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학생이 열심히 스펙을 쌓고 취업 및 유학준비를 하고 있을 때 (등록금을 마련하느라)세 내 개의 알바에 치여 공부할 시간이 없을 것이므로 장학금을 놓치게 된다. 어학연수나 답사여행, 인맥 쌓기는 제쳐두고서라도 그나마 학교라도 계속 다닌다면 그 학생은 운이 좋은 것. 생계형 휴학은 우리 시절 배낭여행만큼이나 흔한 레파토리가 되었다. 이는 곧 기회의 분배에 따른 불평등을 초래하고 기득권층은 더욱 견고한 기반을 쌓게 되는 연쇄적인 원인이 된다. 이 고통은 대학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IMF 사태와 금융위기, 조기은퇴에 내몰린 베이비 붐 세대는 자녀들의 등록금을 해결하느라 전혀 노후를 준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노후에 생활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로 평균수명만 늘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대학이라도 나와야 사람구실을 할 것 아니냐는 어느 상인의 넋두리는 대학이라도 못나오면 사람구실을 할 기회마저 박탈당한다는 우리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계급과 지위를 전복하는 기회가 아니라 그 격차를 확대 재생산하는 핵심통로가 되었다.

  나는 ‘반값등록금’ 논란의 이면엔 대학생을 중심으로 이처럼 물려있는 한국사회의 양극화, 기회균등의 부조리, 고령화 사회에 대한 불안 등의 복합적인 쟁점들이 함께 투사된 분노라는 생각이다. 이제와 깨달은 것이지만 분노를 쌓으면 결국 암밖에 더 걸리나. 늘어만 가는 중장년층의 암 발생율은 어쩌면 평생 불의를 보고 쌓아온 분노의 객관적 결과일지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비록 분노의 거리에 동참할 순 없다 할 지라도 저자가 말한 창의적인 저항은 꾸준히 실천해 볼 생각이다. 이 책에서 저항이 바로 창조라는 말씀은 가장 문학적이었고 인상깊었다. 그 두 번째 시도로 나는 리뷰를 작성했고 이 리뷰를 내가 아는 사람들과 나를 아는 사람들과 공유하는데 앞장서고 싶다. (첫 번째는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일 터이니)

  이제는 웃으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분노해야 행복해진다는 말씀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곧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 새겨둘 터이다. 당신도 나와 함께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할 생각은 없으신지.  

   

 

<덧붙임>




 

 

 

 

 

 

 

 

 

 

 

 

 

   <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 Angelnus Novus, 1920 >

  스테판 에셀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을 언급하며 이 그림을 좋아했던 벤야민이 남긴 비평(역사철학 테제, 1940)을 소개했다. 벤야민은 이 그림의 천사를 ‘역사의 천사’로 보고 폐허에 무너져 내리는 파국에 경악하며 그 잔해들을 다시 결합하려고 하지만 천국으로부터 ‘진보’라는 강풍이 불어오기 때문에 날개를 접을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역사의 천사’는 미래쪽으로 떠밀려 가는 형국이라 말했다. 벤야민은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폭풍'을 밀어내고 있는 천사를 보았다고 말이다. 오늘날 (내 수준에서)이 그림을 보고 벤야민의 깊은 사유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천사가 새로운 천사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벤야민을 언급한 스테판 에셀이야말로 이 그림처럼 천진난만해 보이는 진보의 천사가 아닐까 싶다. 평생 희망이라는 날개를 접을 수 없었던 오래된 의지를 느끼게 된다. 우리 역시 강풍에 굴하는 날개가 아닌 강풍에 의지해 미래를 기약할 희망의 날개가 절실한 시점이다. 분노로 진보의 시동을 걸어 희망의 날개를 멈추지 않는 천사. 떠밀리고 짓밟혀도 오직 미래를 위해서만 날아가는 천사, 이 책의 천사는 그렇게 우리에게 날개 하나를 살며시 달아준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날개를 접지 않는 일이 아닐까. 이 그림을 보라, 이미 날개는 펴져 있지 않은가.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

-2009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곳 주민의 삶을 증언하면서, 스테반 에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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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09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하라는 책을 사놓고 누가 리뷰를 썼는 궁금해서 검색했더니 이렇게 좋은 리뷰를 읽게 됐네요. 안녕하세요? 이렇게 신뢰를 무릅쓰고 놀러와 글을 남깁니다. 리뷰 한 줄 한 줄이 진지하게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과 같아 경청하며 읽었습니다. 너무 좋은 리뷰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올 께요 ^^ 비와서 좀 깜깜하지만 즐거운 오후 되세요. ^^

風流男兒 2011-06-0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잘 읽었습니다.
불만을 불필요하게만 느껴오던 저에게도 참 많은 의미를 던져주네요.
특히나 오늘 불만과 저항, 그리고 에 대한 글들을 읽게 되니,
일하는 중간중간에도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지금의 상황을 보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제대로 된 불평과 불만이 맞는 것 같아요.
진실한 서평 덕분에 소중한 떨림 받아갑니다.
씐나는 오후 보내세요.

멋진빤스 2011-06-0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06-09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분한세상 2011-06-0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화제가 되자 계훈제 선생님이 떠오르더군요.
안녕하세요? 훌륭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의로운 분노가 만연한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똘레랑SUE 2011-06-09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직 <분노하라>를 구입하진 않았지만 빨리 읽고 공감하고 싶네요- 시사적인 시선까지 다 공감하며 갑니다 :)

달사르 2011-06-10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월이 되면 가슴이 뛰었던 적이 있었는데..언제였나..가물거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텔레비젼에서 반값등록금투쟁을 보면서, 성공했으면 좋겠다..생각하는 그 정도네요. 이제.
'분노하라'는 말과 내용에 시들어가는 피가 좀 덥혀지는 듯? ^^

posbaedar 2011-07-24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고에서 읽었는데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분노해야 하는 이유. 분노보다는 가만히 구경만하는 저 같은 사람은 뭔가가 해야 한다는 공감을 업더라고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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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인호를 찾아서

 
내가 아는 작가 최인호는 가장 많은 작품이 영화화된 작가이다.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작품만 해도『별들의 고향』(이장호 감독, 1974),『적도의 꽃』(배창호 감독, 1983),『고래사냥』(배창호 감독, 1984),『깊고 푸른 밤』(배창호 감독, 1984), 『겨울 나그네』(곽지균 감독, 1986)등 대부분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에서 ‘고래사냥’과 ‘겨울 나그네’는 정확하게 내 청소년 시절의 스크린을 관통한 작품이다. 주로 이장호, 배창호등 스타감독이 연출하고 안성기, 장미희, 이미숙등 당대 톱스타가 열연해 각종 영화제에서 단골로 상을 가져간 작품이기도하다. 내 기억으론 당시 배창호와 안성기, 그리고 최인호의 조합은 곧 대 흥행공식을 의미했었다. 그러니까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 질 경우 상업성은 보장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부분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가 많았고 주로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인데다가 배경은 도시였기에 그들은 예술적, 퇴폐적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인호라는 이름 석자는 분명 영화와 소설 모두 주류의 시스템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대중소설가였고 작가로서 그 이름은 성인의 영역에 있다고 판단한 내가 그의 작품을 문학으로 만나볼 기회는 없었다. 그냥 그 이름만으로 잘 알고 있는, 어영 부영 읽었다고 생각되는 유명한 작가들 중 한사람일 뿐이었다. 동시기를 살아 내온 작가들 중에 한수산, 박범신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최인호는 심지어 문학인이 아니라 영화인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분명 작가와도 모종의 독서 인연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는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주로 역사소설을 집필했기에 내 관심분야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한 작가였다. 그런 그가 암투병 중에 전작소설을 완성했다는 소식은 처음부터 굉장히 설레는 뉴스였다. 은연중에 소식을 보고는 이제는 소설을 못 쓰시겠구나, 그런 섣부른 생각을 했기 때문에.(놀라웠다) 나도 몰래 그를 병들은 늙은이 취급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출간소식은 감동이었고 그동안 그의 소설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나로선 세월의 오래된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최인호라는 작가에 대한 미안함과 최인호 문학의 낯설음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지난주 그의 초기 작품 <타인의 방, 1971>, <깊고 푸른 밤, 1982>이 실려 있는 소설집을 빌려와 뒤늦게 읽어 내려갔다. 아니 <타인의 방>을 읽지 않고서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타인의 방>은 40년 전 ‘70년대를 상징하는 공간적 은유’라 불리던 그 시대 문제작이었다. ‘타인의 방’의 공간배경은 도시를 대변하는 아파트이며 (부재중인)아내를 포함해 안방과 거실에 놓여진 낯선 사물들의 전시관이다. 소설 속 자아가 40년 후 그 방을 잘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지금에서야 그 방을 나올 수 있었다는 작가의 증언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우연히도 지금의 내 나이만큼 이었다는 것도 나로서는 그냥 넘기고 싶지 않은 우연에 속했다. 또 <깊고 푸른 밤>은 제 6회 이상 문학상 수상작(1982)이면서 얼마 전 쎄시봉 콘서트로 세간에 많이 회자된 가수 이장희를 소설 속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기도 하다. 아련한 내 기억속의 ‘깊고 푸른 밤’은 단연 장미희와 안성기의 자동차 본네트(보닛)위 로맨틱한 정사신이었다. (다른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내가 성인이 되고난 후 보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깊고 푸른 밤’은 소설속의 밤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소설 속의 밤은 절대 육화된 로맨스의 밤이 아니었다.(얼마나 창피하던지) 그런데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들 중에는)30년 동안 나처럼 ‘깊고 푸른 밤’을 한국 영화의 80년대 에로틱한 밤의 대명사로 여겨온 독자들이 많을 듯하다. 깊고 푸른 밤은 소설 속 ‘그’가 마리화나를 피운 후 걸어 내려간 해변에서 밀려오던 검은 파도와 그 파도로 자신의 분노가 누그러지던 그날 밤의 암울한 미래를 상징하는 내면의 밤이다. 두 작품 다 급속한 현대사회에서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자체가 답이 되는 소설이기에 과거 최인호의 문학 연장선상에서 그들은 이번 소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속한 곳이 어디이며 그곳에서의 나는 누구인지 묻는 것은 최인호의 오래되고도 끈질긴 질문방식이 아니었을까. 두 작품은 충분히 오늘의 소설을 낯설게 하지 않는 일등공신이었고 모르고 넘어갔으면 리뷰를 쓰는 것 조차 어려웠을지도 모를 정도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 깊고 푸른 밤 -  1984, 배창호 감독, 안성기 장미희 주연 >

 
  <타인의 방>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공간에서 누군가와 친구가 되기로 한다.


지난 여름은 행복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것을 입으로 중얼거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 행복했었지. 행복했었구 말구.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소리에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좀 무안해졌고 부끄러워졌으므로 과장해서 웃어 젖혔다.

방안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둠과 어둠이 결탁하고 역적모의를 논의한다. 친구여, 우리 같이 얘기합시다. 방 모퉁이 직각의 앵글 속에서 한 놈이 용감하게 말을 걸어온다. 벽면을 기는 다족류 벌레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옷장의 거울과 화장대의 거울이 투명한 교미를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는 어둠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벽이 출렁거린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방 벽면 전기다리미 꽂는 소켓의 두 구멍 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친구여, 귀를 좀 대봐요. 내 비밀을 들려줄게. 그는 그의 오른쪽 귀를 소켓에 밀착한다. 그의 귀가 전기 금속부품처럼 소켓의 좁은 구멍에 접촉된다. 그러자 그의 온몸이 고급 전기난로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몸에 스파크가 일고, 그는 온몸에 충만한 빛을 느낀다.  
- 타인의 방 / 1971


  이렇듯 도시에 떠밀려 자신이 속한 공간과 대화를 트게 된 소설 속 자아가 <타인의 방>을 뛰쳐나와 <깊고 푸른 밤>의 해변에서 발견한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거센 파도에 의해서 바다를 건너 밀려온 죽은 시체처럼 바위위에 쓰러져 누웠다. 그를 낯선 땅으로 유배시켜온 파도들은 서둘러 물러가고 갓 도착한 빈손의 파도들만 그를 사로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제야 줄곧 그의 마음속에 끓어오르던 분노의 불길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보았다. 파도에 의해서 밀려온 낯선 뭍으로의 망명이 그의 분노를 잠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가 살아온 모든 인생, 그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삶들, 그가 소유하고 잃어버리고 허비했던 명예와 허영, 그가 옳다고 믿었던 정의와 법,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배반당했던 그의 욕망, 끊임없이 추구하던 쾌락과 성욕, 그가 한때 가졌고 버렸던 숱한 여인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무참하게 얻어맞고 마침내 처절하게 패배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처절하게 패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분노는 참따랗게 재를 보이면 소멸되었다.  
- 깊고 푸른 밤 / 1982

 
  살면서 자신의 실패와 추락을 물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사실 심리적인 또 다른 패배를 불러온다. 심리적인 상처는 보이지 않는 분노를 쌓게 하고 사람은 결국 그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온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 한수산은 막살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어느 완벽주의자 교수의 분노를 <타인의 얼굴>이라 호칭, 환유했다. 자신의 은사가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가 확인한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두려움과 혼란, 무력에 빠진 노란 얼굴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싸워. 정상적인 자아와 병든 자아가 이십사 시간을 싸워. 이게 나야. 내가, 두 개의 내가 살아있어. 내가 나를, 정상적인 자아가 병든 자아를 두 시간만 재워놓자. 그러면서 잠이 들어. 여덟시에 깨우자. 그러면서 살아. 병든 자아를 달래서 약을 먹이고, 병든 자아에게 사정해가며 물도 몇 모금 먹고......”

- 타인의 얼굴 / 1991

  나는 췌장암에 걸린 교수가 하루는 ‘그 사람이 뭔데 나보다 이십 년을 더 살아.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다가도 ‘뛰어내릴까. 그래서라도 죽는 게 낫지 않나. 딱 죽는 약이 있으면 먹을까도 싶고.’ 하는 혼란이 어쩐지 침샘암에 걸려 투병중이었다는 작가의 고통과 겹쳐졌다. <타인의 얼굴>에서 교수의 마지막 얼굴을 확인한 그는 그의 죽음이 슬프기도 하지만 자신은 아직 살아있다는 기쁨을 느끼는 자신과 건강을 조심해야지 하는 자신도 자신 속에 살아 있었음을 확인한다. 결국 수많은 자아와 싸우는 자신만 존재할 뿐 어떤 자아도 실체로서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인공의 사막같은 깨달음은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준다. 내가 믿고 있었던 내가, 내가 알고 있고 상대가 알고 있는 나라는 자아는 어쩌면 원래의 나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자아에는 원래 원형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최인호의 얼굴은 소설 속 타인과 더불어 그 어디에도 있으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는 없었다. 최인호를 따라가는 것은 낯익은 줄 알았던 작가, 낯익어만 보였던 소설과 조우해 낯선 타인과도 같은 내 자신을 만나는 귀한 시간은 아니었을지.


스위치를 찾아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덮고 나서 나는 만 하루 동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슬프고 쓸쓸한 감정에 속했지만 그대로 모두 받아들이긴 힘들었던 것 같다. 타자화된 소설은 많이 힘겨웠고 아프게 느껴졌다. 작가가 손톱과 발톱이 빠져가며 원고지를 작성했다는 소식때문 이었는지 기나긴 투병의 현장에 같이 동참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날을 받아놓은 말기암 환자의 병문안이라도 간 채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온 기분. 밤새도록 그의 고통을 확인한 후 숨죽이며 맞이하는 다음날 아침. 그런데 막상 시간에 떠밀려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 그렇지만 어서 빨리 현실로 복귀해 남은 생을 허비하지는 말아야지 하는 야릇한 다짐. 아픈 사람 위로하러 갔다가 미안하게도 내 아픔만 위로받고 돌아가는 염치없는 심정...객관적으로 나는 멀리 떨어진 한명의 살아있는 독자에 불과했다. 그것은 어쩌면 발이 짓무르고 피가 배어 나와도 어떻게든 마지막을 향해 걷고 뛰어가는 마라토너의 엄숙한 주행을 기다리며 지켜보는 시간이었달까. 그러니 그의 완주는 소설의 결말과 상관없이 눈물이 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니체는 ‘자신이 가진 힘의 4분의 3 정도의 힘으로 작품이나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충고한 바 있다. 너무 완벽하게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기울여 완성한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의 긴장과 고통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흥분일 수도 쾌감일 수도 불쾌감일 수도 있지만 절대 느긋한 여유를 전해주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최인호는 모두를 쏟았다.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아마도 가진 것의 이상을 쏟지 않으면 처음부터 완주가 불가능해 보여서 였을지도 모른다. 좀 더 가지고 여유롭게 마친 자의 여유라고는 털끝만치도 확인할 수 없었던 이 소설은 분명 지금까지 마주한 소설에서 느끼지 못한 고통의 낯설음, 불쾌한 이질감을 제공했다. 그것을 차마 감동이라 하기엔 내 스스로가 주제넘어 보였다.(감동이라 말하면 안된다) 후배 소설가 김연수는 발문에 최인호의 계속하여 쓰고자 하는 힘이 소설가인 자신을 구원한다고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소설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고개를 숙였다. 작가로서 소설을 쓸 수 밖에 없는 운명이야 어느 작가도 피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이번 운명이 유독 잔인하게 느껴졌던 건 왜일까.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절벽에서 자신인 자신과 타인인 자신을 합체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죽는 날까지 분열되지 않겠다는 자기 맹세는 아니었을까. 다시 출발하고 싶다는 의지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곧 죽음을 이기는 일이라 생각한 냉철함은 독자로서 속편한 구경거리는 아닌 것이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구원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 바통을 이어받은 독자는 이제부터 균열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토요일 7시에 시작해 월요일 8시 14분에 막을 내린다. 특이하게도 첫 문장은 <POWER ON> 이고 마지막은 <POWER OFF>이다. 어떤 장치에 전원이 들어와서 그것이 꺼지는 사이, 즉 기계가 작동되고 있는 운영시간은 꼭 2박 3일간의 주말에 놓여있다. 주인공 K가 금융회사의 차장인 것으로 보아 이 시간은 샐러리맨의 달콤한 휴식시간에 해당한다. 누가 파워 스위치를 켜고 누가 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건 이 소설이 그 꿀맛같은 주말동안 시간단위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매 순간 숫자로 표시된 시각과 K, H, MS, JS등으로 기재된 출연진,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회, 인문학적 용어들은 이 작품을 절대 친근하게 바라볼 수 없도록 객관화 하고 있었다. 全 소제목은 8시 15분, 9시 53분과 같은 식이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공간은 아무리 바뀌어도 큰 변별력이 없어 보였다. 거대한 지하창고나 광활한 사막이 배경인 듯 거실과 안방, 부엌, 카페, 극장, 병원, 지하철, 버스등은 현장감을 가지지 못한 채로 관념상의 의식적 공간에 머물렀다. 설계용어로 표현하자면 3D 이미지를 평면적인 도면으로 찍어 눌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POWER ON>의 의미도 처음엔 인식하지 못했다. 사람인지 기계인지 아니면 이야기인지 그것이 그동안 작동되어 왔다는 것을 소설의 마지막에 알려주므로(깨닫게 되므로) <POWER OFF>가 된 후라야 그전에 파워가 들어왔다가 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깨우침을 알려주는 강력한 신호가 아닐 수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 전까지 아침이면 기계처럼 일어나 출근을 하고 로봇처럼 업무를 수행하고 밧데리가 방전된 채 퇴근을 하던 반복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무언가의)파워가 켜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 파워신호는 자아의 분출과도 같은 자발적 내면의 신호인 것이다. 그 내면의 신호가 켜지자 아이러니 하게도 외부의 모든 신호는 정전이 된다. 아니 결국 방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2박 3일간의 파워여행을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한 내면여행으로 테마를 설정하신 듯했다. 가이드도 없고 목적지도 없고 물론 동반자도 없이 처절하게 외로와 보이는. 내가 보기에 이 여행의 목적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 같진 않았다. 누구라도 일단 파워스위치가 켜진 이상 그 여행은 떠날 수 밖에 없는 여행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왜 여행을 떠났는가가 아니라 왜 여행을 떠날 수 밖에 없었나, 가 맞는 질문이 아닐까. 떠나는 건 절대 자발적 의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소설 속 <POWER ON>은 자동사의 위치가 아닌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내가 아닌 타인, 타인으로서의 또 다른 자아가 스위치를 실행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 자아는 원래의 나일 터이니 알고 보면 범인은 나이기도 한 것이다. 파워 스위치를 누가 켰는지, 이것은 이 소설에서 숨겨진 복선이자 작가의 은밀한 힌트이기도 했다.


육체를 찾아서


그 사람이 다름 아닌 K의 모습이 투영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K는 필요이상의 시간을 소비하였다. 거울 속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21p


  누구나 한번쯤 거울속의 자신이 전에 없이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 낯설다는 느낌은 기존에 자신이 생각하는 원형이 있어야 가능하다. 즉 기준점이 있어야 그와 다르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거울을 보기 전엔 누구나 그 전까지 뇌에 입력된 자신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보면 매일 거울을 본다고 가정했을 때 원형의 이미지는 사실 매일 갱신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사람은 거울을 볼 때마다 조금은 달라진 타인으로서의 자신을 매번 확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다만 점진적인 (타인으로서)자신의 변화를 자각할 수 없을 뿐인 것이다. 내가 모르고 있다고 내가 달라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 작가는 물론 이처럼 서서히 노화된 외양으로서의 변화를 스스로 감지한 주인공을 말하진 않았다. 문학은 일차적이고 시각적이지 않다. 주인공 K가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하는 순간은 누구보다 정확한 자신의 모습일 때였다. 통시적이라기 보다 공시적인 시각이다. 금융회사의 모범적인 직장인으로서 매주 한번 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정신과 의사 친구를 두었고 지식인으로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자기원칙이 분명한 주인공이 자신을 타인으로 인식한 최초계기는 거울 속 나신이었다. 기계작동의 시작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사내였던 것. 그날 아침 ‘그 누구도 작동하지 않는 자명종이 스스로 울린 것’처럼 K는 누군가 자신의 옷을 벗겨낸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위의 파워논리에 비추어 볼 때 옷도 타인인 자신이 벗겼을 확률이 백 프로다)

  리뷰를 시작하면서 느낀 것인데 거울 속 나신으로서 자신의 모습은 거짓없는 진실, 순수를 추구했던 육신, 새롭게 시작하고픈 욕구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의지, 절망의 늪으로 빠져버리고 싶은 충동, 허물어진 육체를 가학하고 싶은 욕망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주제넘지만 나는 이 장면을 병든 작가가 자신의 현재 육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고통스런 시점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욕실에서 시작된 알 수 없는 불안은 대체로 낯익은 존재들에 대한 낯설은 느낌이었다. 낯익은 아내, 낯익은 딸, 낯익은 강아지, 낯익은 친구에서부터 낯익은 공간, 낯익은 풍경까지. 기존에 자신과 관계하며 자신을 알던 모든 사람은 가면을 쓴 존재로 인식되고 강아지마저 자신을 낯선 침입자로 취급한다. 심지어는 죽었다는 장인이 버젓이 살아나 처제의 결혼식에 나타나고 사람들은 누가 누군지 모르는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1인 다역 배우로 인식되기까지 한다. 달라진 것이 있었다면 전날 밤 아내와의 (결혼 후 처음으로)섹스에서 발기가 되지 않은 것과 친구와 술자리 후 잃어버린 휴대폰이었다. 거울 속 나신, 발기하지 않은 성기, 잃어버린 휴대폰, 이 세 가지 단서는 남성으로서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과 관계되어 있는지를 말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그러므로 간밤에 잃어버린 휴대폰의 행방을 찾아 나서는 길은 곧 주인공이 잃어버린 타인과의 관계를 찾아 나서는 길이었으며 그 길에서 만난 모든 여인은 바로 발기되지 않은 주인공의 성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우연히 마주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심리적, 물리적으로 그를 유혹하는 육질의 존재로 출연했다. (아내와의 습관적인 섹스에서 발기가 되지 않았던) K는 자신이 카페와 주차장, 극장 등의 공공장소에서 뜻밖에 관음증적인 쾌락이나 일시적인 성욕에 사로잡힐 수 있는 인물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내용상 상당부분 K가 남성으로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순수소설의 수위보다는 좀 높게)관능적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었다. K는 누구보다 고상하게 아닌 척 하면서 자신의 남성을 육체로만 확인하고 싶었던 사람인 것이다.(이 의문이 해소되는 것은 소설의 말미이지만) K의 은폐된 욕망은 기존 소설에서 낯익은 서사였지만 그 추구 형태는 무엇보다 낯설었다. 술집에서 만난 나비 문신의 여인은 카페에서 노출증의 여자로 변신하고 그 여자는 TV속의 아나운서로 순간 이동한다. 15년간 살을 맞대온 자신의 아내는 친구 H의 아내와 동일 인물이었다. 아내는 잃어버린 휴대폰 동영상에 저장된 정사신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누이 JS는 예전에 탤런트였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지만 폭식증에 걸려 거구가 되버렸고 K는 그 육체의 낯설음 속에서도 낯익은 정욕을 느끼고 만다. 이 작품속의 여성은 자신의 아내로, 혹은 누이로, 혹은 친구의 부인, 혹은 길거리 스치는 익명의 여인으로 신분과 역할을 바꾸었지만 K가 확인한 건 (누가 되었건)그 순간 자신이 항상 살아있는 남성이었다는 자각이었다. K는 육체적 욕망을 가진 여성에게서는 숨막히는 악취를 느끼는 다시 말해 자신은 굉장히 도덕적인 남성으로 생각하는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균열은 이러한 인지부조화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자신이 모르고 있던 자신을 비교하는 수사로 작가는 대상인 여성의 육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나는 이것이 투병으로 스러져가는 한 남자의 보잘 것 없는 육신에 대한 生의 악착같은 가학이라는 생각을 했다. 작가는 소설을 쓰고 마치기 위해 퇴화된 육체인 손톱이 뽑히는 고통을 감내해야했지만 그 고통은 오히려 소설을 마치게 하는 심리적 보상체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암에 걸려 집필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 때문에 새로운 육체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소설, 즉 자기안의 타인과도 같은 자신이 쓴 소설을 당당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 일 것이다. 이 과정은 평생 소설쓰는 낯익은 행위일지라도 이번만은 유독 낯선 작업 시간을 제공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 과정은 본인은 이제 남성으로서 성기능이 끝나버려 더 이상 남성의 의미가 쇠퇴한 육신일지라도 (자기안의 타인으로서)육화된 감각만은 더욱 생생히 살아남아 자기안의 (죽어가는)남성을 괴롭히고 자극하던 고통의 시간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최인호 작가가 소설속 여인의 육체를 찾아가는 일은 결국 자신의 육체, 새로운 생명을 찾아가는 일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육체를 신대륙처럼 발견하는 일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으로 부활하는 일은 아니었을까.


영혼을 찾아서

 
작가는 K에게 일어난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어제 새벽 2시쯤 서해 앞바다에서 진도 5.6 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뉴스로 부연했다. 지진의 원인은 ‘지하의 단층 밑에 축적되었던 고압상태의 마그마가 저항이 약한 해구를 공격함으로써 일어난 것’이라 분석했다. 이 책에서 지진이 일어난 시점과 K의 세상이 낯설어진 시점은 동일했고 소설은 일정한 속도로 각자의 붕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K는 무언가를 찾아 나설수록 계속하여 낯익은 존재가 낯설게 등장하는 현실에 놓이게 되는데 K의 현실과 서해 앞바다에 발생한 지진은 무슨 인과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소설의 시공간이 깊어질수록 지진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가장무도회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더욱 바빠 보였다. 처제와 결혼해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새신랑은 낯선 카페에 어느 불량 커플로 등장하고 유일한 혈육인 누이 JS가 재혼한 현재의 남편은 다름 아닌 장인이기도 했다. 다양한 역할의 복제인간은 끊임없이 K의 기존 인맥관계를 비집고 불청객처럼 불쑥 등장하곤 했다. 결국 지층밑에 축적된 K의 마그마는 이러한 외부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성인방에서 7만원을 주고 달의 요정 세일러문과 가벼운 키스와 스킨쉽’을 나누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이 현상을 작가는 제 3의 입체공간으로서 ‘섀도박스’이거나 ‘같은 부품들을 종횡으로 배열하고 이들을 그물 모양의 도선으로 연결한 회로’, 즉 매트릭스라 명명한다. 혹은 ‘안쪽과 바깥 쪽의 구별이 없으며 좌우의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단일 경계를 갖추고 있고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성을 지닌’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고 말한다. K는 그런 뫼비우스의 띠를 기어 다니는 개미이며 ‘같은 곳을 되풀이해서 돌고 있는’ 환상방향의 주체로서 ‘링반데룽’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엔 이렇듯 사회적으로는 낯익지만 소설에선 낯설어 보이는 여러 용어들이 제 3의 언어처럼 자주 등장한다. K는 ‘이 모순된 가상현실의 이중성은 누군가에 의해서 180도로 뒤틀린 왜곡된 현상’이라 믿었다. 예를 들면, 아내는 ‘어딘 가로부터 하달되는 초월자의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하게 되어 있는, 그렇게 설계된 로봇이며, 세뇌된 인간이며, 사람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딸’이라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자신은 그대로인 채로 변하지 않았지만 외부 세계, 타자들만 약속이나 한 듯이 변했다는 논리이다. 개인적 견해지만 소설에 차용된 사회학적 용어들은 너무 빈번해 혼란을 야기했다는 생각이다. ‘섀도박스’나 ‘매트릭스’, ‘뫼비우스의 띠’들 중 어느 하나만 밀고 나가셨으면 K가 처한 현실이 더 입체적으로 (두렵게)느껴졌을 것 같다. 사고의 배경을 옮겨 다니는 것이 나로선 피곤했고 관념상에 머무르게 했다.

  작품 후반부에 K는 이 모든 현실이 누구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지를 따져 묻고는 사고의 방향을 타인에게서 자신으로 선회한다. K의 이러한 사유는 우리 사회에 성형으로 모두 얼굴이 같아졌기 때문에 자신이 그 사람의 고유한 정체성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자기 변호와 그래도 자신 주변의 복제인간은 ‘입으로는 정의를 부르짖으며 행동으로는 부패와 뇌물과 타락과 위선과 구제불능의 권위와 야합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보다는 훨씬 양심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내 탓이오, 하는 자기 반성과는 달라보였다. 그는 진짜가 아닌 복제인간들을 통해 사람의 정신을 치료하며 가장 가깝다는 친구 H가 실은 보통사람보다 더 정신병 환자이며 섹스 중독자이며 위선적인 인물임을 깨닫게 되고 사람은 한 가지 얼굴로도 얼마든지 두 가지 이상의 인격으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 확인한 것이다.


         ‘모든 의혹의 출발점에는 K 스스로가 K 가 아닐 수도 있다는 대전제가 먼저 선행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가상현실에서 바뀐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신임을 깨달은 K를 설명하는 작가의 언어는 ‘분열된 또 다른 자기 자신의 생령을 보는 심령현상’, 즉 이위 일체로서 도플갱어였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K를 모범적인 금융인 K2와 집창촌 포주의 기둥서방 K1으로 분열시키셨던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K1이 ‘불운한 인생을 살아온 전과 5범의 범죄자’라 할지라도 악의 상징이라 칭할 수 없으며 K2가 ‘단 한 번의 경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무죄한 사람’일지라도 선의 상징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K1과 K2가 동일한 사람이듯이 우리 안의 선과 악은 동시에 공생하는 타인들이라고. 결국 K가 그토록 헤매 다녔던 방황의 여정에서 자신의 합체를 이룬 곳은 ‘선’과 ‘악’이 만나는 지점, 그 영혼의 절반이 서로를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나라는 사람의 영혼은 누구보다도 고귀하거나 순결한 것이 아니고 누구라도 선하고 악할 수 있는 공평한 만남의 결실이었다. 그 자명한 진실을 깨닫기 위해 K는 타인이기도 한 또 다른 K를 찾아 나설 수 밖에 없었고 진정하고 온전한 K가 되기 위해선 타인인 K를 확인하고 그를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들어있는 실재였다. 삶은 그렇게 내 속에 들어있는 무수한 타인을 만나러 찾아가는 그래서 그를 만나고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끝없는 여정인 것이었다.

  우리는 보통 (나를 포함해)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의심없이 인격수준이 어느 이상은 될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 친인척, 학교 선후배, 같은 직장 동료 등등, 내가 아는 범위 내의 사람들은 내가 기대하는 수준의 인간성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착각을 한다. 이 착각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상대에 (허락없이)실망을 하고 놀라움에 호들갑을 떨고는 한다. 나는 내가 그다지 인격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는 나 혼자 잘나서 내부에서 일어난 깨달음이 아니고 상대인 타자에 의해 촉발된 내 반응에 따르는 결과였다. 어떤 상대는 지금껏 모르고 있던 나를 알게 해주는 (자아)발견의 슬픔이 된다. 즉 내가 그동안 쌓아온 내 인격의 보유량은 절대 내 스스로 측정, 평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번 소설을 덮으면서 더더욱 사람은 특별히 선한 사람도 없고 특별히 악한 사람도 없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언제든 선해질 수 있고 또 언제든 악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더해진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내가 생각했던 나보다 선한 타인이 내 안에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런 타인이라면 아마도 서늘하거나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만약 내 안에 악한 타인을 언젠가 만난다 하더라도 너무 많이 놀라지는 않으련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악한 타인도 나라는 사실을 수용하고 비로소 온전히 합체된 그 순간에 더욱 의미를 찾아 볼 작정이다. 이번 독서는 근래 만난 소설중에는 많이도 힘들었다. 힘든 만큼, 내가 발견한 소중한 에너지가 있다. 그것은 내 안의 못난 나, 내 안의 비겁한 나보다 더 진실되게 악하고 못된 나를 인정하는 용기였다. 인정하고도 원래의 나라고 생각하는 선한 나와 동일시 하였다. 말로만 인식하다 그 실체를 온몸으로 확인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실체는 타고난 악이기 때문에 반드시 선과 대치되는 갈등의 순간을 초래할 것이다.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들인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나를 십분 이해해준다. 이 작가는 이런 나를 살포시 안아준다. 부디 당신도 언젠가 당신 속의 타인에 무릎꿇고 그를 아프게 인정하길 바란다. 쉽지 않지만 당신과 나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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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0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이 분의 책을 아직도 못 읽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책이 그렇게 많은데...ㅠ
영화화 된 것도 그렇게 많은데, 이 분은 통속소설을 쓴다는 이미지가 있어
선뜻 마음이 안 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박범신도 그랬거든요.
하긴, 내가 읽은 한국 소설가가 얼마나 된다고...
책 표지가 마음에 들어요. 난 이런 게 좋드라.^^

한사람 2011-06-08 12:44   좋아요 0 | URL

이번 작품은 완전 관념적이더군요
통속을 그렇게 객관적으로 풀다니 ㅋ

저는 참 좋았습니다.
소설이 지극히도 우울한 것만 제외하면요..

달사르 2011-06-08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익음과 낯설음이 섞이는 느낌입니다. 최인호. 낯익은 이름이지만 한 편의 소설도 읽지 않은 소설가. 낯익음을 가장한 낯설음일까요. 낯설음을 눈치채지 못한 낯익음일까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번 신간은 최인호의 또 다른 새로운 소설, 로 받아들이는게 낫겠군요.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하는..

한사람 2011-06-09 00:51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망측한 생각이지만, 작년에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가 출간되었을때 그 책이
마지막이 아니길 저도 모르게 바래었거든요(투병중도 아니신데...)

아직 한창이신 나이니..더 오래 활동하셔서
이처럼 낯설어도 뻐근한 소설을 마니마니 출간하셨으면 합니다..

달사르 2011-06-10 18:02   좋아요 0 | URL
이 동네는..땡스투라는게 있네요? 뭐지? 하면서 눌러봤다가 그 기능을 알았어요. ^^ 앞으로는 책 살때 저거를 누르면 되는거로군요. ^^

음..저는 리뷰에 언급하신 전작소설..이 뭔지 몰라서 출판사에 아시는 분께 여쭤봤더랬어요. 히. 그 뜻을 알고나니 작가님이 새로이 보이더군요. 요새는 전작소설이 드물다지요?

한사람 2011-06-10 21:45   좋아요 0 | URL

저는 거의 모든 작가들이 연작이 아닌 전작의 형태로 소설을 쓰시는 줄 알았어요
요즘은 매체가 다양해 연작이 대세이니 그게 중요한 사건인가봐요

저는 땡스투 한번도 안해봤는데....
달사르님 많이 아세요 !
 

 

 

#1. 다양성 VS 획일성 

가만 생각해보면  땅 덩어리와 인구수, 수도권의 장악력, 대중매체의 파급효과, 단결심의 탁월한 재능등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국)'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을 미덕의 가치로 택한 듯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잦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식의 애국논리일 터이고 열강의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의 눈치보기'를 국가적 전략으로 삼은 史적 이력도 무시하지는 못할 성 싶다. 거기다 반 세기만에 이룩한 경제발전, 급성장의 파생효과로 빠른 속도, 빠른 수용에의 경쟁적 습관마저 生의 차별화 전략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나같은 반 아나, 반 디지털 세대에게 이 현상은 솔직히 따라가기 벅찰 정도이다. 나는 90년대 PC통신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시대에 들들들 전화모뎀으로 밤새도록 채팅하고 학교에선 졸면서 강의듣던 세대였다. 일주일에 한 번 발행되는 학보를 우체국에 가서 몇백원 짜리 우표에 물풀로 친절히 붙여 남자친구의 학교에 곱게 보내주던 여학생이었다. 그 시절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 며칠 공교롭게도 휴일을 맞아 집중적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느낀 것인데, 기술의 발달은 한 사람의 운명을 가뿐하게 거스를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2. 비주류 VS 주류

미투데이와 트위터를 사용해보니 세상 돌아가는 방향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내가 느끼기에 (미투데이는 아직인 것 같고)이들은 어엿한 여론 생산 및 확산, 나아가 조작 및 창조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듯하다. 모르긴 해도 이번 학기 논문으로 '트위터의 사용이 개인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택한 사람들이 부지기수 아닐까. 나는 사십대이고 드라마에 열광하는 아줌마이고 학원을 끊지 못하는 학부형이다. 내 주변에 (내 세대이거나 윗 세대로서)집에서 살림하면서 트위터로 세상을 확인하는 여인들은 거의 없다. 미투데이로 차승원이나 공효진의 한마디에 친구인척 덧글다는 주부도 없다. 기껏해야 딸의 성화로 백청강에게 (그것도 딸의 손가락으로)한 표의 문자투표 정도만 행할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새로운 매체와 기술이 가져오는 혜택을 버린 것인가 그것으로 공유하게 될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것인가. 내 생각에 자발적으로 기술을 택하지 않았다는 자의식은 그들안에서만 유효하다. 두 세계에 걸쳐있는 내가 보기에 그들은 세상의 메인에서 비껴간 비주류이다. 물론, 이때 자발적 비주류가 타의적 주류에게 어떤 열등감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대게 중산층 이상이고 세상돌아가는 일에 크게 관심이 없다. 세상은 이미 자기위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매체도 활용을 위해 구입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새것이고 비싸니까 교체하여 들고 다닐뿐이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밀려 나가고 있다.  

   

#3. 이외수 VS 그외 수

피부로 느끼건대, 트위터에는 이외수 작가를 팔로잉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 두 부류로 나뉜다. 나 역시 그의 단문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종달새처럼 날아와 하루를 기분좋게 하는 것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여지껏 그의 글에 두번 답글을 남겼지만 물론 그가 보지도 않겠지만 내 트윗창에는 버젓이 남아 있다는 것이 무슨 교류의 흔적같아 기분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 남긴 글은 오분 후 바로 실시간 포털 뉴스로 대량 확대 및 재생산 된다. 예를 들어 오늘처럼 "몸은 늙었으되 마음은 젊게 살겠습니다. 요!" http://twtkr.olleh.com/oisoo 하고 재미난 사진까지 첨부하면 그 사진은 금방 네이버에 올라온다.  어떤 경우 바로 실시간 검색어에 상위권을 장식하기도 한다. 트위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인터넷은 할테니 곧 이외수 작가가 어떤 한마디를 했는지 죄다 알게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글을 작성하시는 것인지 전혀 상관없이 글을 올리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어떻게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정도가 맞을 것이다.  대단한 영향력이다. 연초에 그의 단문으로 이루어진 에세이를 읽고는 제발 이제는 이런 책을 내시지 말았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소설을 준비중이시란다. 내일 새벽에도 그로부터 감성적인 트윗이 날아 오기를.  

   

#4. 타인과 세상 VS 소설과 작가


토끼와 잠수함 타인의 방 굴뚝과 천장 타인의 얼굴 - 10점
최인호.박범신 외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 최인호, 한수산, 박범신을 비교할 수 있는 귀한 소설집 >

타인들에 둘러 쌓여 있을땐 그렇게도 타인이 안보이더니, 요즘 홀로 은둔하면서 타인들은 뜻밖에도 항상 나와 같이 숨을 쉰다. 어제 최인호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덮고 많이도 쓸쓸했다. 곧 리뷰를 쓸 작정이다. 리뷰를 손대기에 참 무서운 작품이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비슷한 시기에 베스트 셀러 작가로 대중에 지지를 듬뿍 받았던 한수산의 <타인의 얼굴>을 찾아서 읽었다. 문장이 좋아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 소설은 약 이십 년 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내 좁은 식견으로 문단에서 현대문학상이 가장 보수적인 듯) 중년의 제자가 은사의 투병소식을 듣고 찾아가는 내용이 퍽이나 감각적인 회상의 고통으로 느껴지며 작가는 그 고통의 기록을 자전소설화 하였다. 비슷한 느낌으로 박범신 작가가 떠올랐다. 이제 이분들은 환갑을 지나 문단의 공로작가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들 계시다. 나는 이제 이분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또 한명의 거장, 황석영의 소설을 어쩔 수 없이 읽게 될 것 같다. (아니 읽어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그들이 지켜온 무엇에 조금이라도 예의를 차리는 일이 아닐까. 이들의 공동된 주제는 주로 그렇게까지 죽도록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아직도 낯설은 세상, 낯설은 타인, 그보다 더 낯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얄궂고도 애틋한 삶의 신비이다. 타인을 바라보면서 몰랐던 자신을 깨닫게 되는 무섭고도 안타까운 사연들이다. 죽는 날까지 깨달아야 하는, 아니 깨달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동물의 피곤을 연민으로 노래한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이 공간으로서 타인을 향한 외부세계의 조명이었다면 한수산의 <타인의 얼굴>은 자신 속에 숨어있는 타인의 내면세계, 또 다른 자아의 발견이다. 이 또 다른 나가 세계 밖으로 탈출 한 것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이다.  오늘은 <타인의 얼굴>의 마지막을 읊조리며 내 안의 나를 위로하고 싶은 날이다.  

타인의 얼굴 - 10점
한수산 외 지음/현대문학

" 병든 자아와 정상적인 자아가 아냐. 수없이 많은 내가 내 속에 있어.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자아와 싸웠던가. 때로는 두려웠던 나. 때로는 슬펐던 나. 때로는 그의 병듦을 보며 살아있는 자신이 기뻤던 나도 있었어. 그의 무너져 가는 몸을 보며, 건강에 조심해야지 하고 쥐가 천장을 갉아대듯 속삭인 나도 있었어. " 

"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빗발을 뿌려 그의 구두를 젖게 했다. 그는 우산을 바람쪽으로 기울이며 걸음을 빨리했다. 비는 모래알 같이 뿌려댔다. 골목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사막 같았다. 비를 맞고 있는 집과 나무와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골목을 바라보았다. 사막. 순간 그는 자신 속에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고 느꼈다. 어떤 모습의 그도."  

 

작가는 말한다. '삶은 모아나가는 것도 쌓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그것은 자신의 몫으로 받아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씩 써나가는 나날'이었다고. 누구나 단 한번의 평생을 살 뿐이라고. 그 한평생의 내 몫을 잘 지켜내는 것이 결국 삶이라는 뜻일까.  내 몫의 크기는 이미 주었지만 그 몫의 질만큼은 스스로 정하고 싶었는데. 어제오늘, 나는 그 몫의 질도 내 몫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내 몫은 무엇일까. 남은 생 동안 어쩌면 이것들을 깨우친 작가들처럼 매번 낯설은 것들을 겨우 낯익게 만들며, 혹은 어쩔수 없이 낯익어지며 또 낯설은 것을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닐까.  

 

처음에 세상에 나올때 그토록 낯선 세상이었으니 돌아갈 그 곳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제, 나는 스마트 폰이 낯익은 세상이 되었다.  

다음엔 무엇이 낯설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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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6-06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점점 이런 기계에서 멀어져 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정말 나이 들었구나 싶어요.
거의 매일 페이스북에서 친구 찾기 이메일 오는데 친한 친구도 없지만
하기도 싫고, 하면 뭐가 좋은지도 모르겠고. 이러고 살아요.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하겠죠?
그래도 뭐, 폴 오스터 같은 작가는 핸드폰도 잘 안 쓴다는데
그런 거 보면 기죽을 필요 없겠죠?ㅋㅋ

한 사람님 덕분에 제가 모르는 소설 많이 얻어가요.
또 언제 저런 책이 나왔데요?^^

한사람 2011-06-06 17:03   좋아요 0 | URL

카카오톡을 보면서 느낀건 '아, 이사람도 이제 스마트폰 샀구나'
트위터 보고 느낀건 이 사람도 트위터 하는구나
미투데이 보고 느낀건 어머, 이 사람도 이런걸? 이었어요...

위에 소개한 소설집은 나온지는 5.6년 되었구요.
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70년대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감수성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 소설 읽고는 지금의 김영하, 김연수, 하성란, 신경숙, 조경란이 나온거 아닌가 싶어요..

cyrus 2011-06-06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마트폰 구입한지 두 달 남짓 지난거 같아요, 처음에 저도 기계치라 서툴렀는데 이제는 거의
스마트폰을 통한 맞춤식(?) 생활에 적응이 되어가요. 그런데 정보통신 기술이 하루 자는 사이에 발달되고
기술 정보도 워낙에 광범위해서 아직은 스마트폰의 정체를 완벽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요..^^;;


한사람 2011-06-06 21:51   좋아요 0 | URL

아..저는 아직까지는 '맞춤식 생활'이 아니라 맞추어 가는 생활을 하고 있어요.
간단한 확인은 컴퓨터 켜고 인터넷 접속 안해도 되니까, 편하더군요 ㅋ
그런데 전화많이 하는 사람은 불편할 것 같기도 하다는..

무엇보다 세상의 끈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그 전보다는 더 들었어요

달사르 2011-06-07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대단하세요. 트위터 하시는군요. 미투데이는 뭔지 모르겠어요.
앗. 피씨통신도 하셨더랬어요? 와우~ 전, 그것도 뭔지 모르고 살았네요. ^^

글을 읽다가 마지막에 나온 타인 시리즈, 캬..입니당. 저는 '타인'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낯설음이 싫으면서도 또 좋아서..저 책들이 땡깁니다~욧! ^^

한사람 2011-06-07 19:36   좋아요 0 | URL

히히, 달사르님과 제가 성향이 비슷한가 봅니다.
오늘 오후에 이외수 작가님이 저를 팔로우 해주셨습니다...흑흑흑
아무나 해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핑 돌만큼 고맙고 반갑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열심히 살아야지, 뭐 이런 초등학생 같은 생각을 다 했다는 ㅋㅋㅋ

어느 철학자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다지만
그 지옥을 자기 속에 고스란히 담아 놓은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지옥일 겁니다..

나중에 트위터 하게되면 꼭 아뒤 주세요^^

달사르 2011-06-08 23:46   좋아요 0 | URL
ㅎ 넵! 다음에 하게 되면요. ^^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 기술효과

어제는 제 인생에 있어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우연하게도 휴대폰이 고장나는 바람에 스마트폰으로 기기를 교체하면서 마치 그에 따른 제 실제 인생도 교체된 듯한 하루였거든요.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술과 매체의 발달이 삶의 패턴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의 시간에 충성스럽게 의지하도록 하는 것에 실은 어떤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스마트폰과 그를 이루는 운용방법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든 것에 순응하는 제 자신도 놀라웠어요. 마치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온 사람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학습되어온 기술 수용에의 이성적, 감성적 집단효과라는 생각입니다. 누가 더 먼저고 나중이냐의 차이지 결국은 사회변화 시스템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현대인의 숙명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선택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비교의 권리가 무의미했어요. 그냥, 강물이 흘러가듯, 이렇게 또 여름이 성큼 다가오듯.  

 

#2. 기술진화 

인문분야의 평가단 활동이 세번 째 달에 접어 들었어요. 처음 책들의 무게와 텍스트의 밀도에 짓눌려 후회를 하던 시간도 지나고 저는 요즘 논리를 정리하는 과정이 조금은 즐거워졌습니다. 서평쓰고 나서 혼자 소설과 다르게 보람도 느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냥 스스로 숙제를 잘 제출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된 것이죠. 이곳은 아무도 평가해주지 않잖아요. 객관적인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저는 누가 뭐라하든 저 스스로 털고 난 느낌이 가장 정확하다고 믿습니다. 글을 잘써냈다는 것이 아니고 책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시간들에 보람을 느낍니다.  

 

6월은 예상보다 더울듯 합니다.  

이번달이 가면 상반기가 가는 것이네요.  

더, 힘을 내어 보겠습니다. 서평 쓰는 기술자로서 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술 문화 칼럼니스트' 이면서 세계적인 IT 전문지 《와이어드》 공동창간자 케빈 켈리의 『기술의 충격』을 소개받았습니다. http://goo.gl/zZqyh   속세에서 스마트폰도 트위터도 쓰지 않는다는 케빈 켈리가 어떻게 기술을 옹호하는 책을 쓰게 되었을지가 홍보 키워드입니다. 문장이 너무나 매력적이서 어려워보임에도 불구하고 도전의지를 불태우는 군요.  언뜻 보기에 기술의 발달이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가장 인간적인 과정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요. 무엇보다 그 과정이 전개되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기술을 옹호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 생각합니다. 기술은 옹호하거나 반대해야할 성질의 팩트를 함의하고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 선택권은 전무하다고 봅니다. 기술을 외면할수록 외려 더 인간성을 잃어갈수도 있다는데 동의합니다. 다스리고 가꾸어야 할 문제인 것이죠.

" 모든 생각이나 기술이 동등하지는 않다. 어리석은 이론, 잘못된 답, 멍청한 착상도 분명히 있다. 변변찮은 기술에 대한 적절한 반응은 기술을 중단하거나 아무 기술도 안 내놓는 것이 아니다. 더 낫고 더 호혜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

기술이 원하는 것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나는 이 촘촘해지는 기술들의 그물 속에서 나를 인도할 기본 틀을 찾아냈다고 느낀다. 기술의 눈을 통해 우리 세계를 바라본 결과 기술의 더 큰 목적을 조망할 수 있었다. "

 

  바라건대, 이 책을 읽었다고 더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이 책이 강하게 끌리는 이유는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더 이상 낙관하지 말자는 경고성의 메시지 일 것입니다. 즉, 불안의 시대에 어떻게 하면 불안을 떨칠 수 있느냐가 아닌, 이러저러 했기 때문에 지금 불안할 수 밖에 없음에 대한 인식과 인정에 대한 논리인 것이지요. 불안은 자타공인 기정사실화로서 이 책의 전제조건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류의 책은 과거를 통한 미래 준비에 해당하는 지혜로운 인문서적입니다.  

목차와 내용을 훑어보니 꽤 거시적입니다. 세계는 당연하면서도 나에게 와닿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불안해도 다같이 인정하는 시간은 늦어질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번 독서를 통해 느리게 인정하는 최소한의 실천을 해볼까 합니다.

 

  

 이 책은 생각을 잘하기 위한 합리적 사고의 방법과 그 하위 실천개념으로서 말하기, 글쓰기를 기술적으로 가르치는 책입니다.  

" 합리적 사고를 구성하는 세 개의 축이 있다. 이것은 여러분이 합리적 사고를 해나가기 위해 항상 초점을 맞춰야 하는 세 요소들이며, 또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세 요소들이기도 하다. 첫째는 당신이 진정으로 느끼고 말하고자 하는 바이며, 둘째는 당신의 생각이 옳은 이유고, 셋째는 당신의 생각이 틀린 이유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합리적 사고의 지식들은 이런 줄기로 구조화되어 있다. "

 

논리학을 이루는 논증방식을 소개하고 그것을 학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므로 서평하는 입장에선 꽤 유용한 책이기도 합니다. 요즘들어 느끼는 것인데 책임있는 서평은 내가 생각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완성하는 글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물론 그 논리가 틀리거나 협소할 순 있지만 틀리더라도 논리를 완성해 가는 과정은 바로 논리적 사고를 끝없이 확대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인문분야 서평을 쓰면서 내가 생각하는 바, 즉 내 사고에 대해 사고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 책에도 우리가 사고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논리의 완성은 결국 나와 상대 사고의 완성이기도 한 것이죠.  

재미있는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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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6-0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건 여담이지만 저도 스마트폰으로 기기 변경을 한 뒤 뭔가 세상이 바뀐 느낌이 들더군요. 저야 거의 텍스트를 읽는데 사용을 하는 편이지만..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언제 어디서든 넷에 접속을 할 수 있다는 그런 느낌이 저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더라, 라고 말하면 좀 과장이려나요ㅎㅎ

한사람 2011-06-04 09:12   좋아요 0 | URL

아...저도 어디서든 접속할수 있다는 편리함이 가장 큰 변화라 느꼈습니다.
이것이 어디서든 접속해야 하는 지배적 강박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이틀 사용하고 느낀건,
내 의지란 이 세상에서 무의미하다, 그런 생각 ㅋ

자유가 칸트 식으로 말하는 자율이 되어야 할텐데...뭐 그런 생각

두렵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