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양성 VS 획일성
가만 생각해보면 땅 덩어리와 인구수, 수도권의 장악력, 대중매체의 파급효과, 단결심의 탁월한 재능등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결국)'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을 미덕의 가치로 택한 듯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잦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식의 애국논리일 터이고 열강의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의 눈치보기'를 국가적 전략으로 삼은 史적 이력도 무시하지는 못할 성 싶다. 거기다 반 세기만에 이룩한 경제발전, 급성장의 파생효과로 빠른 속도, 빠른 수용에의 경쟁적 습관마저 生의 차별화 전략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나같은 반 아나, 반 디지털 세대에게 이 현상은 솔직히 따라가기 벅찰 정도이다. 나는 90년대 PC통신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시대에 들들들 전화모뎀으로 밤새도록 채팅하고 학교에선 졸면서 강의듣던 세대였다. 일주일에 한 번 발행되는 학보를 우체국에 가서 몇백원 짜리 우표에 물풀로 친절히 붙여 남자친구의 학교에 곱게 보내주던 여학생이었다. 그 시절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 며칠 공교롭게도 휴일을 맞아 집중적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느낀 것인데, 기술의 발달은 한 사람의 운명을 가뿐하게 거스를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2. 비주류 VS 주류
미투데이와 트위터를 사용해보니 세상 돌아가는 방향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내가 느끼기에 (미투데이는 아직인 것 같고)이들은 어엿한 여론 생산 및 확산, 나아가 조작 및 창조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듯하다. 모르긴 해도 이번 학기 논문으로 '트위터의 사용이 개인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택한 사람들이 부지기수 아닐까. 나는 사십대이고 드라마에 열광하는 아줌마이고 학원을 끊지 못하는 학부형이다. 내 주변에 (내 세대이거나 윗 세대로서)집에서 살림하면서 트위터로 세상을 확인하는 여인들은 거의 없다. 미투데이로 차승원이나 공효진의 한마디에 친구인척 덧글다는 주부도 없다. 기껏해야 딸의 성화로 백청강에게 (그것도 딸의 손가락으로)한 표의 문자투표 정도만 행할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새로운 매체와 기술이 가져오는 혜택을 버린 것인가 그것으로 공유하게 될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것인가. 내 생각에 자발적으로 기술을 택하지 않았다는 자의식은 그들안에서만 유효하다. 두 세계에 걸쳐있는 내가 보기에 그들은 세상의 메인에서 비껴간 비주류이다. 물론, 이때 자발적 비주류가 타의적 주류에게 어떤 열등감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대게 중산층 이상이고 세상돌아가는 일에 크게 관심이 없다. 세상은 이미 자기위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매체도 활용을 위해 구입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새것이고 비싸니까 교체하여 들고 다닐뿐이다. 우리 세대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밀려 나가고 있다.
#3. 이외수 VS 그외 수
피부로 느끼건대, 트위터에는 이외수 작가를 팔로잉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 두 부류로 나뉜다. 나 역시 그의 단문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종달새처럼 날아와 하루를 기분좋게 하는 것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여지껏 그의 글에 두번 답글을 남겼지만 물론 그가 보지도 않겠지만 내 트윗창에는 버젓이 남아 있다는 것이 무슨 교류의 흔적같아 기분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그가 한마디 남긴 글은 오분 후 바로 실시간 포털 뉴스로 대량 확대 및 재생산 된다. 예를 들어 오늘처럼 "몸은 늙었으되 마음은 젊게 살겠습니다. 요!" http://twtkr.olleh.com/oisoo 하고 재미난 사진까지 첨부하면 그 사진은 금방 네이버에 올라온다. 어떤 경우 바로 실시간 검색어에 상위권을 장식하기도 한다. 트위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인터넷은 할테니 곧 이외수 작가가 어떤 한마디를 했는지 죄다 알게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글을 작성하시는 것인지 전혀 상관없이 글을 올리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어떻게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정도가 맞을 것이다. 대단한 영향력이다. 연초에 그의 단문으로 이루어진 에세이를 읽고는 제발 이제는 이런 책을 내시지 말았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소설을 준비중이시란다. 내일 새벽에도 그로부터 감성적인 트윗이 날아 오기를.
#4. 타인과 세상 VS 소설과 작가
< 최인호, 한수산, 박범신을 비교할 수 있는 귀한 소설집 >
타인들에 둘러 쌓여 있을땐 그렇게도 타인이 안보이더니, 요즘 홀로 은둔하면서 타인들은 뜻밖에도 항상 나와 같이 숨을 쉰다. 어제 최인호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덮고 많이도 쓸쓸했다. 곧 리뷰를 쓸 작정이다. 리뷰를 손대기에 참 무서운 작품이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 비슷한 시기에 베스트 셀러 작가로 대중에 지지를 듬뿍 받았던 한수산의 <타인의 얼굴>을 찾아서 읽었다. 문장이 좋아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 소설은 약 이십 년 전에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내 좁은 식견으로 문단에서 현대문학상이 가장 보수적인 듯) 중년의 제자가 은사의 투병소식을 듣고 찾아가는 내용이 퍽이나 감각적인 회상의 고통으로 느껴지며 작가는 그 고통의 기록을 자전소설화 하였다. 비슷한 느낌으로 박범신 작가가 떠올랐다. 이제 이분들은 환갑을 지나 문단의 공로작가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들 계시다. 나는 이제 이분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또 한명의 거장, 황석영의 소설을 어쩔 수 없이 읽게 될 것 같다. (아니 읽어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그들이 지켜온 무엇에 조금이라도 예의를 차리는 일이 아닐까. 이들의 공동된 주제는 주로 그렇게까지 죽도록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아직도 낯설은 세상, 낯설은 타인, 그보다 더 낯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얄궂고도 애틋한 삶의 신비이다. 타인을 바라보면서 몰랐던 자신을 깨닫게 되는 무섭고도 안타까운 사연들이다. 죽는 날까지 깨달아야 하는, 아니 깨달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동물의 피곤을 연민으로 노래한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이 공간으로서 타인을 향한 외부세계의 조명이었다면 한수산의 <타인의 얼굴>은 자신 속에 숨어있는 타인의 내면세계, 또 다른 자아의 발견이다. 이 또 다른 나가 세계 밖으로 탈출 한 것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이다. 오늘은 <타인의 얼굴>의 마지막을 읊조리며 내 안의 나를 위로하고 싶은 날이다.
" 병든 자아와 정상적인 자아가 아냐. 수없이 많은 내가 내 속에 있어.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자아와 싸웠던가. 때로는 두려웠던 나. 때로는 슬펐던 나. 때로는 그의 병듦을 보며 살아있는 자신이 기뻤던 나도 있었어. 그의 무너져 가는 몸을 보며, 건강에 조심해야지 하고 쥐가 천장을 갉아대듯 속삭인 나도 있었어. "
"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빗발을 뿌려 그의 구두를 젖게 했다. 그는 우산을 바람쪽으로 기울이며 걸음을 빨리했다. 비는 모래알 같이 뿌려댔다. 골목에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사막 같았다. 비를 맞고 있는 집과 나무와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골목을 바라보았다. 사막. 순간 그는 자신 속에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고 느꼈다. 어떤 모습의 그도."
작가는 말한다. '삶은 모아나가는 것도 쌓아가는 것'도 아니라고. '그것은 자신의 몫으로 받아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씩 써나가는 나날'이었다고. 누구나 단 한번의 평생을 살 뿐이라고. 그 한평생의 내 몫을 잘 지켜내는 것이 결국 삶이라는 뜻일까. 내 몫의 크기는 이미 주었지만 그 몫의 질만큼은 스스로 정하고 싶었는데. 어제오늘, 나는 그 몫의 질도 내 몫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내 몫은 무엇일까. 남은 생 동안 어쩌면 이것들을 깨우친 작가들처럼 매번 낯설은 것들을 겨우 낯익게 만들며, 혹은 어쩔수 없이 낯익어지며 또 낯설은 것을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닐까.
처음에 세상에 나올때 그토록 낯선 세상이었으니 돌아갈 그 곳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제, 나는 스마트 폰이 낯익은 세상이 되었다.
다음엔 무엇이 낯설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슬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