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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박에스더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평점 :
당신은 왜 하필 여성인가
이 책은 나름 조직생활의 처절한 부조리를 겪은 현직 아줌마의 세대 공감형 에세이가 아니다. 전직 방송국 보도부 기자 출신 고학력 인텔리 여성의 신랄한 사회비평이다. 그것도 통계조사와 학문적 연구가 아닌 본인 경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주가 된다. 엄연한 사회과학분야의 사회비평 장르에 속하는 책을 왜 굳이 애증의 에세이라 했는지 의아스러웠지만 아시다시피 한국사회에선 이런 말을 여성이 줄기차게 해대면 잘 안 먹힌다. 같은 여성은 혼자만 잘난 척한다고 뒤 돌아서 쓴웃음 짓고 남성은 앞에선 대단하다 놀랍다 맞는 말이다 추켜세우다가도 속으로는 그래봐야 소용없지 중얼 거릴지 모른다. 그래서 추측컨대 아마 이 책을 읽는 남성 독자들은 이 책에 대해 대놓고 비판하진 못할 것 이고(특히 배운 남자들은 속으로 뜨끔해도 포용의 아우라를 잃지 않으려 애써 콘트롤 할 것이고) 여성독자들은 지지는 보내겠지만 마음으로 공감하지는 않을 듯 하다.(배운 여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 혼자만 흥분한다 싶어 그러나 나는 그렇게도 못한다 싶어 적당한 열패감을 느낄 것이므로) 양쪽 다 잘 알아 들었다, 정도가 상위반응이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라디오 방송진행으로도 유명하다 들었는데 이른바 이빨과 필력에 있어선 내공이 상당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떤 부분 여자 김어준, 여자 강준만, 여자 진중권의 뉘앙스가 감지되기도 한다. 진보가 논리에 집착한다는 꼭지는 거의 김어준의 주장 여자버전으로 인식되었다. 공감 가는 잡설과 시원한 직설과 이해갈 만한 독설이 치우치지 않게 그야말로 절묘한 배합으로 섞여 들었다. 그래서 아니, 그러다 보니 조금 진부해지는 보수적 아우라도 느껴진다. 뭐랄까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끄집어내어 치고 나가다가 끝에 가서는 나는 그리 잘난 사람이 아니다는 식. 어차피 잘나왔던데 끝까지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이게 죽어도 맞다고 생각한다고 할 것이지 왜 갑자기 중용의 가치로 꼬리 내리는 것인지 그게 좀 아쉬웠다.(나는 가장 짜증나는 것이 자기는 *나게 공부해서 일류대에 서울대 대학원에 미국연수까지 다녀왔으면서 꼭 학벌을 철폐하자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사회생활 한다고 모든 걸 친정 어머니에게 일임하고 당신 남은 인생 *빠지게 부려먹어 놓고 이제와 - 다 성공 하고나니 - 이제부턴 좋은 딸 되는 거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하는 여자들이다. 생각하고 말하는 건 누가 봐도 좌파구만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그저 나일뿐이다 하는 좌파알레르기 있는 사람들이다. 참, 하나 더 교육이고 정치고 직업이고 사랑이고 뭐고 모든 예를 들어 비교할 때 꼭, 미국을 드는 사람들이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괄호 안이다. 글의 맹점은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이게 다인 것 같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이게 다는 아니다.)
특히 미국을 집중적으로 예로든 중간부는 필요이상으로 반복과 부연이 많아 지루하기까지 했다. 처음엔 같은 세대이고 내가 절감하는 비슷한 문제들을 대놓고 지적질하고 있어서 머리말 읽을 때까지는 그렇지, 그거야, 하면서 기대감이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책을 덮고 이상하게 불쾌해지는 마음이 무엇일까 나는 한 이틀 고민해야 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밝히기 싫어서 할 말은 많은데 꾹 참았다. 그러는 동안 별수 없이 나는 저자가 지적한 그 부분에 정확히 안착되어 살아가는 사람 이었구나를 깨우쳤다. 지금 심정은 꼭 동네 아줌마들이랑 낮에 실컷 막장 드라마 작가와 작품과 공영방송의 상업성을 적나라하게 욕하다가 돌아와 밤에 다시 채널을 그 드라마에 고정시키는 기분이다. 어떤 영어학원 원장 욕을 더 없이 해놓고서 그 학원이 합격률이 높다고 슬그머니 등록하고 오는 기분이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고 부끄러운 마음이지만, 이유는 저자가 여성이라는데 있는 듯하다. 그것도 같은 시기에 태어나 같은 문제 풀고 그 시험점수로 대학에 붙었고 또 비슷한 시기에 직장에 들어가 조직의 쓴맛과 남자들의 구차한 맛과 사회의 더러운 맛을 똑같이 느꼈던 여성. 그렇지만 그 개성 강하다던 x세대도 이제는 배나온 학부모가 되어 이 나라의 교육현실을 한탄하며 그저 피 끓는 모정으로 쯪쯔 거리고 있는 사십대 여성.(엊그제까지 삼십대였던 ㅠ) 특히, 출산과 육아, 맞벌이의 억지스러운 현실에 할 말 많은 여성. 너만은 나같이 살지 말아라하시던 어머니의 무지막지한 희생을 업고 조직에서 인정받아 역시 한 여자의 행복은 다른 여자의 불행이 필수적이라는 원칙에 가만히 입다물어온 여성. 아마 어린 시절 고무줄하면서 ‘무찌르자 공산당’ 아니면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같이 부르던 노래도 똑같았을 여성. 이 연대감 질펀한 동지의식이 나는 왜 불편했을까. 나는 왜 저자의 결론이 불쾌하게 들리는가. 김어준이 닥치고, 정치나 하라고 떠들 땐 열렬한 지지를 보냈고 강준만이 책 내었을 땐 열화와 같은 리뷰를 썼고 진중권이 신간 냈을 땐 뜨자마자 구입했건만. 얼마 전 남인숙 작가의 여자가 남자를 분석한 글에는 가슴으로 공감했으면서 왜 이 저자는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안 좋게 느껴지는 것인가 말이다. 왜 하나같이 맞는 말만 하는데도 선뜻 박수가 나오지 않는 것인가.
나는 이 책을 읽고 잘못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내 생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책 덮고 지배적으로 떠오른 생각 중 또 하나. 저자는 과연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중 일반이 아니라 정치인과 고위관료, 여성이 아닌 기득권 층의 중년남성으로 생각되었다. 특히 저자가 인터뷰 해온 이른바 뱃지나 별이 달린 사람. 라디오 인터뷰 한번 하는데 아랫 것 열 댓명이나 데리고 다니는 윗 사람. 공중파 인터뷰 좀 하겠다는데 대본 검열 들어간 후 지들이 직접 질문 적어주며 짜고 치는 고스톱 방송 하게 만드는 청와대 사람. 중요한 사안은 꼭 여지를 남겨두고 답하거나 이쪽이냐 저쪽이냐 물으면 꼭 경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자기 입장위주로 지식과 정보만 전달하는 정치인. 뭐, 아무래도 저자는 직업상 남성을 만날 일이 더 많았을 것 같아 그들에게 할 말이 많은 것으로 보였다. 이렇듯 저자가 주로 남성을 비판하고 있는데 나는 왜 기분이 나쁜가. 이 묘한 아이러니는 참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러니까 말 안하고 사는 우리(?)만 바보 같고 따지지 않는 나만 불의에 눈감고 사는 비겁한 사람 같은 이 씁쓸한 기분. 이 무슨 삐뚤어진 피해의식이란 말인가. 누구도 쉽게 하지 않는 말을 하면 용기 있다 박수는 쳐주지 못할 망정 그럼 그동안 그거 다 받아내고 지켜본 우리는 이 현실이 좋아서 그런 줄 아느냐고 왜 당신만 혼자 정의로운 척하고 온갖 부조리를 다 파헤치는 양 잘난 척 이냐. 맞는 말만 하면 다 맞는 것이냐. 그냥 있어도 잘난 줄 충분히 아는데 꼭 이렇게 나머지(?) 동료들을 물 먹이고 혼자 정의로와야 겠느냐..... 꼭 지금 저자와 같이 직장생활하는 라이벌이나 되는 것 같다. 완전 많은 여성들을 대신해서 총대를 매었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내가 봐도 말이 안된다. 그러니까 이건 90년대 직장 다닐 때 플랫폼이다. 조직에서 여직원 모임에 나가지 않기로 유명했던 나로선 대국민적 호소를 앞세운 이런 식의 내밀한 페미니즘엔 함께 동조할 수 없다는. 만약 공론화 하고 싶다면 차라리 여성 공동의 목소리로 솔직할 것이지 대한민국이나 사회 운운하지 말라는. 저자는 여성의 평등을 외친 것이 전혀 아니건만 어쨌든 나는 똑같이 조직사회의 쓴 맛을 보아도 남성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므로 결국 페미니즘의 영역 어딘 가에다 저자를 분류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끼리 페미니즘 주장하면 왕따다) 그러니까 여성의 적은 여성이 맞다. 여성을 차별하는 건 여성이 더 하다. 나는 내가 남성이었다면 이 여성이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이고 혹시 그녀가 남성이었다면 나 역시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니까.
나는 대한민국에서 나만 특별한 교육을 받고 색다른 음식을 먹고 다르게 살아오지 않았기에 분명 나같이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책을 대하는 나의 심리를 분석할 수 있다면 왜 우리가 이 모양인지 알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그 분석은 이 책에 모조리 다 있다고 말씀 드린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같은 여성이 이런 주장하는 게 기분나쁜 자의식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유 같은 건 묻지 말라구
박 에스더 기자는 이 땅의 권위주의, 군대문화, 배타주의, 단일가치, 민족주의 가 우리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았다.(물론 이렇게 구분지어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다섯 가지가 올림픽 오륜기 처럼-아니 아우디 엠블렘처럼 -적절히 엮여있다) 그리고 그 기원을 장구한 역사속의 유교적 이념, 장유유서의 전통으로 보았다. 엉성하고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상당부분 디테일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성공한 여성들은 대개 완벽주의자다. 사소한 부분에서도 남성에게 지적질 안당하려고 발버둥치다 보니까...) 그러다 보니 반복되는 주장이 많은데 여튼 핵심은 우리의 상하 위계적 문화를 관통하는 핵심코드를 권위주의적 문화로 보고 이와 친척인 군대문화가 사회조직의 일반문화로 정착된 것을 애통해 한다. 조금이라도 차지하게 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배타주의가 만연되어 있고 이념적 분단국가의 특수성 때문에 흑백논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오랜 세월 단일 가치를 주입하고 강요해왔기 때문에 다양성이라고는 사회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푸념한다. 단일민족을 강조하여 앞으로는 민족적 우월감을 고취시키고 뒤로는 민족의 번영을 위해 개인의 보편적 인권을 희생시켜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다보니 전통과 현실과의 괴리로 생기는 위선이 경쟁력이 되어 도덕은 있는데 그건 그냥 교과서에나 나오는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고 현실에선 뒤돌아 호박씨 까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면서도 모피반대나 동물보호, 낙태법, 10대 성문제, 장애인 인권, 동성애같이 민감한 문제는 답이 있는 것도 알고 무엇인지도 빤히 알면서(혹은 자기도 분명 의견이 있으면서) 다수는 반응이 없다. 우리 사회는 모든 담론이 진보냐 보수냐 혹은 성장이냐 분배냐, 수도권이냐 지방이냐 같이 대립된 가치위주로만 모아지고 무슨 대세가 아니면 이슈로 환기되지 않으면 토론의 주제로 끼지도 못한다.
저자는 그동안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상식적 규범들에 대한 의심을 좀 터놓고 시끄럽게 공론화하자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원래 시끄럽고 과정이 피곤한데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최소한 문제제기는 해보자고 말한다. 정이 전면 부정되고 반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합이 되는데 우리는 그 무엇도 제대로 반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고 말이다. 우리는 안전이나 안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교화된 국민으로서 본능적으로 죄의식을 느낀다. 갈등은 곧 사회불안이요, 파업은 경제불안, 시위는 정국불안 식으로 마치 우리가 불안한 틈을 보이면 금방이라도 김정일 아들이 광화문에 폭탄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다시 하나가 되어 뭉치자 얼마나 지겹게 들어왔던가. 우리는 정부가 막강한 공권력을 가지고 시민을 억압하는 건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현상이라 떠들면서 롯데마트가 통큰 치킨으로 소비자와 상인간의 논쟁을 불러 왔을 땐 청와대 정무수석이 트위터 한마디로 정리하는 식의 일방적 간섭을 명쾌하게 해결했다고 말한다. 각종 분쟁을 한 방에 해결해주는 전방위적으로 커다란 정부, 절대자 같이 카리스마 넘치는 제왕적 대통령을 그리워한다. 저자는 우리가 한번도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기본적인 자유와 보편적 인권을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자유민주주의적 원리가 실현되는 사회를 체험해본적도 만들어 본적도 없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는 방송국이라는 조직에서 겪었던 일, 학창시절, 서울대 대학원 시절, 미국 연수 시절, 라디오 진행자 시절에 겪었던 에피소드와 만난 사람들을 예로 들며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했으나 마지막 결론은 의외로 싱거웠다.(물론 자신은 결론내지 않겠다고 했다)
“사랑하면 동거해. 결혼이 부담되면 혼자 살아. 애는 낳고 싶을 때 낳아.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아이는 혼자 키우는 게 아니잖아. 사회가 같이 키워 줄거야.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 니까”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회.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데 근본적으로 한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문화가 진정한 민주주의라 결론 맺는다. 그러니까 너나 나나 다 똑같아야 하는 그 ‘같은’ 하나를 버리고 각자 ‘다른’ 나를 택해서 살 수 있는 그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자고 말한다. 하나 되는 대한민국은 필요 없다. 이미 우리는 하나였고 하나이기 때문에 이제부턴 좀 서로 달라도 그 다르다는 걸 문제 삼지 말자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산다. 아... 너는 너 나는 나 이유 같은 건 묻지 않는다...톰보이... 나는 왜 이 옛날 광고가 생각나는 것인지...내가 90년대 뭔 세대라 그런 것인지.
남들 때문에 사는 나라
박 에스더 기자만큼이나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대한민국에 대해 결론내린 진단서는 한마디로 ‘남의 눈에 죽고 남의 눈에 사는 나라’이다. 우린 어렸을 적부터 내 눈보다 남들 눈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남들 다 가는 대학, 남들 다 낳는 아이, 남들 다 하는 결혼... 남들 보기 창피하지 않냐, 남들이 뭐라 생각하겠느냐, 남들은 그렇게 안 산다, 우리도 남들처럼 떵떵거리고 좀 살아보자, 우리가 남이가 등등등. 옷 살 때도 남들 눈에 안 띄게 무난한 걸 고르고 전자제품, 가구 살 때도 남들이 제일 많이 구입하는 걸 사고 남들이 재밌다고 하면 맛있다고 하면 영화보고 식당 간다. 어디 나갈 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옷 고르고 머리하고 액세서리 하는 건 기본이고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중형차를 사고 남들이 가봤다고 하니까 제주도 가고 남들이 다 스마트폰 쓰니까 나도 쓰는 식이다. 남들이 죽는 걸 보니 나도 죽을 수 있겠다 싶다. 남들이 다 읽는다고 하니까 덩달아 읽는 바람에 가끔 의아한 책이 베스트셀러도 되고 하는 것이다. 남들이 대체 누구고 얼마나 대단하길래 우린 사는 동안 그 남들에게 쪽팔리지 않게만 살면 마치 그런대로 잘 살았다고 생각도 하는 것 같다. 당신에겐 내가 남이고 나에겐 당신이 남이니 결국 우린 거기서 거긴데 한국 사람에게 ‘남들’은 흡사 초등학교 때 잊을만하면 한번 씩 와가지고 온 학교를 환경미화광장으로 만들어버리는 대머리 장학사나 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남들’은 그렇게 실체가 없다가 가끔 무슨 일이 터지면 갑자기 재판을 하기도 한다. 바로 너무나 잘나고 똑똑하고 돈도 많고 외모도 우월한 특정 유명인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재빠르게 단결하여 그들을 평가하고 단죄하기도 한다. 이 집단적 감시문화는 개인의 사생활이고 인권이고 절대 봐주는 법이 없어 꼭 누구 하나 죽어나가야 그제서야 그럴 줄 몰랐다고 잠잠해지는 특성이 있다. 그러다가 이 ‘남들’도 다 같이 진심어린 한마음이 되어 모두 같은 옷을 입고 하나의 목적으로 소리 높여 외칠 때가 있다. 바로 4년마다 한번 열리는 월드컵 땐 잘 교육받아온 공동체 운명의식으로 인해 그 남들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마법이 시행된다. 그러니까 그 남들은 결국 우리와 하나였던 사람들, 같은 마음이었던 사람들이니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나 비슷한 당신이고 친구고 동료에 불과하다. 내가 그런 것처럼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내가 자신들과 똑같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남들 만큼은 사는 한국인이 되기 위해선 저자의 말처럼 일생동안 숙제만 하다 인생 다 보내게 된다. 남들이란 혹시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가상의 인위적인 집단에 불과하지 않을까. 만약 손가락질 하는 남들이 있다면 그건 내가 그 남들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도 그럴 것이라 짐작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내가 타자를 평가, 감시, 단죄안하면 되는 문제이다.
진심으로 남들 때문에 있지도 않은 남들 눈치 보느라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건 오늘날 우리네 생존의 의미가 모두 경쟁과 성공 프레임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성공의 문, 그 1차선은 좁아 죽겠는데 달려온 사람은 수천만이니 그런 것일 테다. 내가 살려면 나 아닌 누군가가 밀려나야 하고 패배해야 되는 서바이벌의 체제 속에선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다. 정말로 남들도 나 잘되는지 어쩐지 나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창궐하고 있는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라. 누군가 눈물을 흘려야 내가 웃을 수 있다. 이제 탈락의 쓰라림 같은 건 그저 매일 지겹게 보게 되는 cf 속 한 장면과 다름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올라간 일등은 그 행복이 얼마나 유지되는 것일까. 우린 집단적으로 생존의 의미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어쩌면 우린 아직 민주주의 나라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내게 다른 대한민국이란 일등 혼자만 웃게 되는 나라, 이긴 사람 혼자만 다 가지는 나라, 그렇게 지독하게 올라갔으면서도 끝까지 행복하지 못한 나라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이 보다 낫다고 생각된다면 가차 없이 지금 가진 것을 나누는 나라, 나누고 사는 게 행복이고 보람이고 목적이 되는 나라, 그래서 지금 나누어 받았지만 나도 언젠가 있는 사람이 되면 그들보다 더 많이 나누겠다고 다짐하는 나라이다. 그걸 특별한 선의로 생각해 자랑도 생색도 칭찬도 하지 않고 다 같이 자연스럽게 당연히 일상이 되는 나라이다. 그게 생존이고 성공이 되는 나라다.
나 어렸을 때 학교에서 응원가로 ‘잘 살아보세’ 이런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그 어린 목소리로 (다른 노래도 얼마든지 많은데)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이렇게 목청 높여 청군, 백군을 응원했다. 그 노래가 가끔 생각난다. 옛날에 못살아서 잘 살자는 게 아니고 이제는 좀 같이 잘 살아보자고. 또 하나 그렇게 운동회를 많이 하고 죽자고 응원했어도 내가 언제 청군이었고 백군이었는지 그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고 이겼는지 졌는지 그런 것도 기억 안 난다. 그냥 이기면 좋았고 졌어도 그때뿐이었다. 내가 이긴다고 저쪽편이 죽는 건 아니었다. 상대편이 이겼다고 내가 실패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한쪽의 승리가 다른 한 쪽의 좌절과 절망이 되지 않았던 그때가 그립다.
지금 졌더라도 다음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가난해도 언제든지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서 저자가 말하는 소수인권의 문제들이 여간해선 화두가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 개개인들이 단일가치를 추구하는데 익숙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다수가 아닌 것들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꼭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고 자칫하다간 나도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추락하면 다시는 못 올라올 것 같은 불신 때문은 아닐까. 혹시 재수 없고 운 없어 추락하더라도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줄 수 있다는 믿음만은 잃지 않는 나라를 기대한다. 그렇게 잡은 남들의 손이 다시 내 마음의 온기를 채워줄 것이라 믿고 싶다. 글쎄, 나는 각자 생긴 대로 살자는 저자의 ‘차이’ 프로젝트도 좋지만 지금 우리에겐 재산도, 행복도, 사랑도, 웃음도, 그리고 고통과 상처와 실패도 좀 나누는 나라, ‘같이’ 떠안는 나라가 되었음 좋겠다. 남들 때문에 못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 때문에 살게도 되는 나라, 아니 남들이 나보다 더 힘이 되고 믿음이 되는 나라, 그런 남같지 않은 남들의 나라에서 좀 살아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좀 잘되길 바란다. 만약 안 된다면 나는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 부디 잘되어서 내 편견을 좀 깨뜨려 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