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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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리를 하지 못한다. 대신 설거지는 누구보다 잘한다고 자부한다. 이젠 거의 머신 수준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사 분담이라고 해야 하나. 고무장갑 따위는 사용하지 않는다.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하면 뽀드득 감촉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첫 부분을 읽고 나서 한 일주일 정도 묵혔다가 다시 집어 들었는데 발동이 금방 걸렸다. 주인공은 25세의 요리사 링고(린코). 산촌에 사는 엄마 루리코 여사의 곁을 떠나 십년 만에 연인 알리바바에게 배신당하고 할머니가 물려주신 메이지 시대의 겨된장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마 고향은 그런 곳인가 보다. 언제라도 돌아가도 누군가 반겨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엄마 루리코 여사와는 사이가 좋지 못한 편이다.

 

지난 십년 동안 여러 가지 요리를 배우고, 또 할머니가 차려 주시는 음식에 대한 사랑의 추억을 품은 링고 양은 고향 산촌에서 나는 재료로 식당을 차릴 계획을 세운다. 서먹한 루리코 여사가 부탁한 옛 친구 구마 씨는 링고의 좋은 친구이자 조력자로 활동한다. 이동수단을 제공해 주기도 하고, ‘달팽이 식당을 개업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당연히 1호 손님은 바로 구마 씨였다. 무언가 거창한 요리를 대접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딸과 도망간 아르헨티나에서 온 시뇨리타가 만들어 주던 카레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구마 시는 부탁한다.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링고 씨의 요리가게가 빛을 발하게 되는 석류 카레가 그렇게 탄생한다.

 

2호 손님으로 어린 시절 무섭기만 했던 검은 상복의 미망인 할머니 그리고 3호 손님으로는 고등학교 커플이 차례로 등장한다. 곤조와 프로 정신으로 무장한 자영업자답게 링고 씨는 하루에 한 손님만 받는 원칙을 세운다. 그리고 사전 면담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요리를 선택한다. , 초기 손님 중에 후계자와 선생님 커플도 있었던가. 생각 같아서는 모든 케이스를 다 소개하고 싶으나 나의 기억력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고백한다.

 

달팽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사랑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달팽이 식당이 순탄대로를 걸을 것 같았지만, 소문이 나는 만큼 시기 질투하는 인간들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머리카락(?) 테러를 당하기도 하지만, 링고 씨는 꿋꿋하게 위기를 돌파해 간다. 말이 필요없다, 면담을 통해 상대방이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알게 된 다음부터 상상력을 가미한 요리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게다가 약간의 신파 한 숟갈까지 곁들이니 어찌 책이 재밌지 아니한가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원수 같았던 네오콘 아재에게 재료가 없는 긴급 상황에서 오차즈케를 만들어 대접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그동안 얼어붙었던 관계의 해빙이 시작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약간은 동화풍인 것 같기도 하고. 동네 꼬마 고즈에가 데려온 거식증 토끼의 입맛 살리기 대작전도 좀 작위적인 면이 없진 않았지만 나름 괜찮았다.

 

링고 씨가 품은 출생의 비밀 그리고 루리코 여사의 첫사랑과 불치병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렇게 애써 빌드업을 해놓고 무너뜨린단 말인가. 신파가 지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모든 게 다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결국 오가와 이토 작가는 삶의 모든 순간을 담담하게 맞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요리에 실어 날린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실연도, 또 나를 창조해준 부모와의 숙명적인 이별도. 다만 그 모든 순간에 솔루션으로 등장하는 매개가 바로 요리라는 점에 쿵하고 방점을 찍는다. 루리코 여사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엘메스 역시 해체되어, 자신의 늦깎이 사랑의 결실인 피로연에 참석한 이들의 입을 즐겁게 해준다. 우리가 먹는 것들은 모두 대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땅에서 나고 자란 것이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사실 루리코 여사를 잃은 링고가 그랬던 것처럼, 실의에 빠졌을 때는 모든 게 귀찮기 마련이다. 평소에도 해먹지 않을 요리를 먹을 자신이 없을 것 같다. 그럴 적에는 인스턴트식품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삶의 모든 순간에 요리가, 음식이 등장하는 것처럼 링고 씨가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도 역시나 요리였다. 조금은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산비둘기 요리를 하는 장면은 좀 그렇더라.

 

말미에 수록된 <초코문>은 스핀오프 스타일의 이야기로 좀 간지러운 느낌이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서사의 전개는 좀 진부하게 다가왔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작가의 요리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평가해주고 싶다. 링고 씨가 꼴랑 십년 만에 그렇게 전 세계 요리를 마스터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긴 하지만. 책 읽는 동안, 즐거웠다. 그거면 됐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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