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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이올린 ㅣ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21년 7월
평점 :

천재와 광인의 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책의 서두에 나오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이름을 접하는 순간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검은 바이올린>의 주인공 요하네스 카렐스키의 영혼도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1795년 31세의 요하네스 카렐스키는 대혁명의 와중에 서 있었다. 5살 때, 처음 집시로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요하네스는 2년 만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거듭나게 된다. 천재란 것인가. 아무런 노력도 없이, 마치 유년 시절의 모차르트처럼 타고난 재능을 그저 악보에 옮기면 되는 것이었던가. 대장금처럼 홍시맛을 기가 막히게 구별해내는 그런 능력의 보유자는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여행에 돌입한다.
우리는 이런 천재 탄생 전설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순간, 천재는 적당한 광고와 어느 정도의 프로파간다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무언가(음악 같은 특별한 재능에, 어린 나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를 지닌 누군가의 퍼포먼스에 신기해하고 기꺼이 비용과 시간을 지불한 준비가 되어 있다. 여기서 18세기 말, 그것도 대혁명기의 근대적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단초를 엿보게 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정상의 순간에서 요하네스는 지극히 외로웠다. 이것 또한 그보다 앞선 천재들의 숙명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다. 이십대의 나이에 페르시아와 이집트, 인도(당시까지 알려진 세계의 전부)까지 정복하면서 모든 것을 이룬 청년 알렉산더가 결국 회의에 빠져 계속된 정복전쟁과 폭음으로 건강을 해치지 않았던가. 글렌 굴드가 그랬던 것처럼 연주여행 대신 요하네스 역시 다른 것이 하고 싶었다. 그것은 오페라 작곡이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자 그는 보통의 연주자가 되고 말았다. 비범한 재능이 어떻게 소멸되는가에 대한 막상스 페르민식 고찰이라고나 할까.
여기까지가 천재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일반론이라면, 다음 무대는 보다 극적이다. 프랑스에 대적하는 반혁명전쟁 와중에 31세의 요하네스에게 징집통지서가 날아든다. 혁명과 전쟁은 요하네스 같은 예술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요하네스는 툴롱 포위전과 방데미에르 13일 쿠데타에서 두각을 드러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지휘 아래 이탈리아 원정에 참가한다.
정말 놀라운 변신이 아니던가. 예술가에서 당시 유럽 최강이라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는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상대로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의 기치를 내세운 그랑 아르메의 일원으로 한니발 이래 알프스를 넘은 전설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페르민 작가는 이런 역사적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고, 연주자 요하네스의 극적인 변신을 유도한 걸까?
그것은 자연스레 다음 무대로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소설적 장치였다고 판단된다.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 원정대는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천년 공화국 베네치아를 점령한다. 그리고 그 전에 벌어진 전투에서 요하네스를 치명상을 입고 전사의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는 “검은 천사”를 만난다. 검은색 그러니까 ‘느와르’는 요하네스 삶의 후반부를 장식하게 될 숙명이었다고나 할까.
부상당해 베네치아에 남게 된 요하네스는 그곳에 크레모아 출신 바이올린 장인 에라스무스를 만난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말처럼, 소싯적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요하네스와 그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 노장인 에라스무스의 만남은 새로운 서사의 진행을 위한 예비가 아니었을까.
요하네스가 자신의 오페라의 천상계의 목소리를 담고 싶어 했다면, 장인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만든 바이올린에 그 소망을 이루고자 했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지닌 천재들은 각자 다른 영역에서 인간 소망의 기쁨이라는 유사 이래 우리 인류가 추구해온 이상의 구현을 위해 돌진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천재적 열정에서 한 번 삐끗하면 광기로 추락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약관의 나이였던 에라스무스(르네상스 시대 최고 지식인의 이름과 같다는 점에 주목한다)는 베네치아 페렌치 공작의 주문으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능가하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에 도전한다. 그것은 마치 신의 영역을 도전하는 미약한 피조물 인간의 부질없는 노력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페렌치 공작의 딸이자 프리마돈나 카를라가 등장하게 되고, 점점 느와르로 채색되어 가던 서사는 비극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검은 바이올린>은 탐미적인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짧은 단락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이 지닌 흡입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강렬한 빛에서 출발해서 그라데이션이라는 삶의 과정을 통해 죽음을 상징하는 느와르(black)로 행진해 가는 서사가 보여주는 힘에 매료되어 버렸다. 에라스무스가 검은 바이올린을 만들어내는 순간에서는 메리 셸리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창조해내는 그 순간이 연상되기도 했다. 신의 영역인 창조에 도전하는 인간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로 읽힐 수도 있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색채삼부작 가운데 두 번째인 <검은 바이올린>을 읽기 전에 마지막인 <꿀벌 키우는 사람>을 먼저 읽었는데, 과연 막상스 페르민은 색채의 주술사라고 평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룰 수 없는 꿈에서 우리를 끌어 내어 다시 현실 세계의 제 자리로 환원시키는 기술도 탁월했다. 환상과 꿈 그리고 광기라는 불협화음에 가까운 삼박자를 절묘하게 조율하면서 색채로 독자를 현혹시키는 그런 재주에 감탄할 수 밖에. 이제 색채 삼부작의 마지막 <눈>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