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긴 꽃잎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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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부터 이사벨 아옌데의 책들을 읽는다. <세피아빛 초상>으로 워밍업을 한 다음, 작년 말에 사둔 <바다의 긴 꽃잎>도 내쳐 읽었다. 다음 주자는 <영혼의 집>이다. 이래서 책을 미리미리 사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구나 싶다. 이런 날들을 대비해서 미리 책들을 사둔 나를 칭찬한다.

 

책의 제목 <바다의 긴 꽃잎>은 소설의 두 번째 무대가 되는 칠레 국가를 상징한다. 북쪽으로는 아타카마 사막, 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 남쪽으로는 남극 그리고 서쪽에는 태평양 너른 바다가 버티고 있는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의 섬 같은 나라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나라의 형상을 보면, ‘바다의 긴 꽃잎이라는 시적 표현이 바로 이해가 된다.

 

1938년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 노르테역에서 심장은 멎은 어린 병사 라사로를 주인공 빅토르 달마우가 살려내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것은 죽은 라사로를 살려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메시지인가. 의대생 출신 빅토르는 음대 교수이자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 마르셀 류이스와 교사 출신 어머니 카르메의 영향을 받아 공화군 진영에 서서 지난 3년 동안 현장에서 인턴으로 활동해왔다. 빅토르와 다른 기질의 동생 기옘은 처음부터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프랑코가 지휘하는 국민전선 반군과 맞서 싸웠다.

 

테루엘 전투에서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빅토르는 후방으로 이송된다. 테루엘 전투와 에브로 강 전투에서 패배한 공화군은 내전에서 지고 있었다. 아버지 마르셀은 죽기 전에 장남 빅토르에게 어머니 카르메와 동생과 동생의 연인 로세르 브루게라를 데리고 국민전선의 보복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공화국은 모로코 출신 식민지 병사들을 앞세운 국민전선 일파의 만행을 선전했다. 하지만, 공화군 역시 거점 지역들이 국민전선 반란군에게 함락될 위기가 되면, 국민전선 포로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서로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이들이 벌인 비극의 현장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공화파 역시 프랑코 군대가 승리했을 때, 벌어질 보복을 예상하고 자진해서 망명길에 나섰다. 기옘은 전선에서 전사했고, 기옘의 아이를 가진 로세르는 추위와 기아를 딛고 노쇠한 시어머니 카르메와 함께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망명길에 나선다.

 

여기서 잠깐 스페인 내전의 실상에 대해 살펴 봐야할 점이 하나 있다. 작년말부터 읽기 시작한 앤토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 따르면 1936년 초에 있었던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했더라도, 내전은 피할 수가 없었을 거라는 예상을 읽은 기억이 난다. 좌우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던 무력 충돌은 기정사실이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공화국에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의 국민전선을 악으로, 그리고 그 반대편을 선으로 규정하는 단순한 이분법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정든 고향 땅을 떠난 스페인 아니 카탈루냐 사람들인 로세르와 빅토르는 프랑스 땅에서 마침내 무사히 재회하는데 성공한다. 좌파라는 낙인을 찍힌 패배자들은 이웃 프랑스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부에서도 말이다. 84년 전에도 여전히 난민이란 존재는 이방인이었고, 불청객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스페인 난민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졌는데 그건 라틴 아메리카의 섬으로 불리는 바다의 긴 꽃잎인 칠레였다.

 

물론 칠레에서도 난민 유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칠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파블로 네루다가 특별 영사로 등장해서 칠레에 필요한 이들만 선발하라는 본국의 훈령을 어기고 다수의 스페인 난민들을 받아 들였다. 그렇게 해서 선택받은 인원들은 위니펙호를 타고 대서양 바다를 건너 발파라이소 항구에 도착한다. 그나마 망명 스페인 사람들에게 유리했던 조건은 칠레 역시 같은 스페인어권 국가였다는 점이다. 오랜 타국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언어가 얼마나 그 사회에 동화되는데 필요한 요소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참 그전에 빅토르는 난민 조건을 보다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제수였던 로세르와 위장결혼을 한다. 의대 출신 청년이었던 빅토르는 다른 이들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칠레 사회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로세르 역시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서 초기에는 빅토르보다 더 달마우-브루게라 집안에 공헌한다.

 

소설의 두 번째 공간의 무대가 되는 칠레를 대표하는 집안으로 델 솔라르가 선택됐다. 가장 이시드로는 오로지 돈과 성공을 밝히는 전형적인 사업가로 등장한다. 도냐 라우라는 보수적인 칠레 가정을 수호하는 인물로 그리고 조력자이자 델 솔라르 집안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인디오 출신 후아나 낭쿠체오가 차례로 등장해서 서사를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집안의 장남 펠리페는 댄디 스타일의 청년으로 칠레 난민 수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나중에는 우파 진영으로 변신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딸 오펠리아는 위장결혼한 빅토르와 불장난을 벌이다가 파국적 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작가 이사벨 아옌데가 달마우 가족들을 칠레로 보내는 순간부터, 1973911일 선배 독재자 프랑코를 존경하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세계에서 최초로 선거 혁명으로 집권한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을 뒤엎은 쿠데타 시절에 과연 달마우 가족들의 생존기가 궁금해졌다. 더군다나 원래 조국이었던 스페인에서보다 칠레에서 보낸 시절이 더 많아진 빅토르 달마우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어 버렸다. 어머니 카르메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달마우 가족은 재회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아옌데의 체스 파트너일 정도로 전직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을 밀고한 사람은 바로 이웃집 여자였다. 그 결과, 예순의 나이에 가까운 빅토르 달마우는 군부에 의해 연행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됐다. 청년 시절에는 공화군 의사로 활동했던 빅토르가 노년에 이르러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잃고 수용소에 갇힌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로세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석방되고, 결국 다시 한 번 베네수엘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피노체트 군부 독재의 끝이 다가오면서 빅토르와 로세르는 칠레로 귀국한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빅토르는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로세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론 그때 가서는 진정한 사랑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남편이 심장전문 의사였지만, 정작 자기 아내의 병을 진단하지 못했다는 역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로세르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세계사적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계속되는 간난신고를 이겨낸 빅토르와 로세르의 인생역경 서사의 빌드업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사벨 아옌데가 치밀하게 구상해서 한 방에 터뜨린 서사의 힘이 느껴졌다.

 

마지막에는 궁금해 하던 마지막 퍼즐(???)까지 맞춰주는 서비스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그렇지, 바로 이 맛에 우리가 소설 읽기를 끊지 못하는 거지.

 

빅토르와 로세르의 진보적 목소리만큼이나 그 대척점에 서 있던 이시드로/펠리페와 오펠리아의 보수적 입장에도 작가는 균형감을 발휘한다. 칠레 선거혁명 당시 모든 칠레 국민들이 인민연합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자칭 입헌 군주주의자라는 펠리페 델 솔라르를 과거에서 온 혈거인이라고 풍자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들 마르셀처럼 아예 정치하고는 담과 쌓고 산 이들도 많았다. 글을 아는 모든 이들은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교육 투사였던 카르메 여사의 불굴의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실천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몸으로 보여준 멋진 캐릭터가 아닐 수 없었다.

 

이사벨 아옌데가 <세피아빛 초상>에서 19세기 칠레 근대사를 다루었다면, 이번의 <바다의 긴 꽃잎>에서는 20세기 스페인과 칠레 현대사를 연결하는 서사시에 문학적 방점을 찍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빅토르, 로세르, 펠리페나 오펠리아 같은 캐릭터들이 모두 불세출의 영웅은 아니다. 그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단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삶과 욕망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불안하고, 한 치 앞의 미래조차 보이지 않던 순간을 살아낸 이들에 대해 이사벨 아옌데는 경의를 표한다.

 

<바다의 긴 꽃잎>은 나에게 여러 의미에서 참 멋지고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새해 벽두에 만난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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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1-17 18: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옌데 그 삼부작을 중고로 드뎌 다 모았습니다.
이젠 읽기만 하면 되네요.
고수님들이 다 칭찬을 하시는 작품이라 참 기대됩니다.

레삭매냐 2023-01-18 17:39   좋아요 1 | URL
오오 다 모으셨군요 !!!

전 아직 <운명의 딸>은 못 샀네요.

<영혼의 집>은 중고서점에서 잘
사서 쟁여 두고 있답니다.

독서괭 2023-01-23 0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리미리 사두신 선견지명을 칭찬합니다!ㅎㅎ 아옌데 쭉쭉 읽어나가시겠군요. 역사 배경을 좀 알고 읽으면 더 재미날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님 남은 연휴도 즐겁게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3-01-24 23:48   좋아요 2 | URL
연휴 대비, 아니 꼭 특정 시기를 대비하지 않으셔도 미리미리 사두셔서 연휴가 즐거우신 레삭매냐님을 칭찬해. ‘미리 책들을 사둔 나를 칭찬한다‘눈 레삭매냐님의 글을 읽고 기분이 좋아져서 웃고 갑니다. ^^

얄라알라 2023-01-24 23:50   좋아요 2 | URL
칠레를 지도에서 보면 길쭉하다는 것만 알지, ˝바다의 긴 꽃잎˝이라니! 괭님 말씀처럼, 역사 배경을 알고 읽으면 더 재미도 있겠지만 큰 공부도 될 것 같습니다^^ 연휴 끝나가지 폭풍 책 욕심!

레삭매냐 2023-01-26 13:56   좋아요 2 | URL
아이고 연휴가 다 지나가서야
댓글을 달게 되네요.

너무 추버서 책도 제대로 못
읽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1-26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스페인에 빠지셨나보네요ㅎ

소설이 주는 감동, 서사의 힘. 이 맛에 소설읽기를 멈출 수가 없지요^^

레삭매냐 2023-01-26 13:57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그러합니다.

오래 전에 바르셀로나에
가보겠다고 티켓값 알아
보던 시절 생각이 문득
나네요 ^^

소설읽기, 심각한 중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