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을 산책하다가 좋은 글을 줍다> 두 소설의 명문장


어느 날, 첫사랑인 사람으로부터 오랜만에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면 우린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만약 이것을 소설로 쓸 경우, 전화를 받는 사람이 상대의 전화목소리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경쾌한 목소리로 말한다면 이건 가짜다. 실지로 그런 대상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면 아마도 우린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멎을 것처럼 긴장되어 말을 더듬거나 침묵으로 그냥 멍하니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 긴장감은 뜨거운 감정에 비례할 것이다.


경험한 것처럼 쓸 때 리얼하다


만약 길을 가다가 그리워하던 사람을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는 어떨까. 갈등 없이 반갑게 달려가서 말을 건넨다면 이건 가짜다. 가짜가 아니라면 속마음을 감추기 위한 연기일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린 아마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글을 잘 쓰려면 직접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경험한 것처럼 쓸 수 있을 만큼 상상력이 탁월해야 할 것이다. 내가 명작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도저히 경험하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글’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혹시 책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연애소설부터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명작의 연애소설을 읽으라고 하고 싶다.



무릇 천지만물을 살피는 데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고, 사람을 보는 데에는 정보다 묘한 것이 없으며, 정을 살피는 데는 남녀 간의 정을 살핌보다 진실한 것이 없다. 18세기 문인 이옥의 말이다.

고미숙 저,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중에서.




18세기 문인 이옥의 말에 따르면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남녀 간의 정을 살피는 것이 으뜸이란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꼭 해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은 직접 연애를 해 보는 것. 만약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면 연애에 관한 책이라도 읽어서 남녀 간의 정을 살펴봐야 한다.


소설은 결과를 보여 주는 게 아니라 과정을 보여 주는 것


소설에서 “그 두 사람은 이별하였다.”라고만 쓴다면 얼마나 재미없고 싱거운가. 이런 식으로 쓴 글을 읽으면 독자 입장에서 어떤 감응도 일어나지 않으니 아무런 감동도 없다. 다음은 내가 뽑은 명문장이다. 두 연인의 이별장면이다.



니나는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내리려 했던 섬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배가 멎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릴 때 그 선객은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섬을 바라보면서도 선장에게 항로를 섬 쪽으로 돌려 달라고 하기 위해서 종을 흔들지 않는다. 눈에 안 보이는 팔이 그를 붙들고 있고 그는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배는 계속해서 가고 섬은 대해의 한가운데에 그냥 떠 있다. 그 섬에는 다시는 어떤 배도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다.


니나는 갔다.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이별을 하고 싶지 않지만 이별을 꼭 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 풍경이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질 글이다. 이런 글은 읽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소설에서 중요한 건 그들이 이별했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밀한 묘사는 필수다.



1

책 소개



<생의 한가운데>는 린저의 대성공 작품으로서, 특히 그 형식의 참신성에 의해서 매우 찬탄을 받았다. 이 작품 속에서 린저는 이야기, 보고, 일기, 편지, 회상, 여주인공의 창작 등 여러 형식을 서로 섞어서 한 개의 새로운 형식을 낳고 의식적이고 기술적인 문체 구성을 시도하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자이며 남성적인 명성을 지닌 소설가이며 동시에 여성적인 매력으로 풍요하게 장식된 ‘니나 부슈만’이다. 니나를 통해서 린저는 현재의 지성 계급에 속하는 여자가 자기의 의식 세계를 주위와의 분쟁 속에서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였다.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옮긴이의 말 중에서.




우리가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확 뒤집어 놓는 글은 좋은 글이다. 다음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의심하게 만드는 기회를 주는 글이다.



만약에 신이 나를 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행복 속에서도 선량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현명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솟아온다. 그리고 도대체 현명이 행복이나 선보다 나은가 하는……


그리고 왜 도대체 인간은 고뇌를 통해서만 현명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도대체 원하지도 않는데 현명해져야 하는 것일까?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현명함’과 ‘행복’과 ‘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리석게 살더라도 행복한 게 나은가, 불행하더라도 현명한 게 나은가. 꼭 현명해져야만 선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을까. 아는 게 힘일까, 모르는 게 약일까. ‘현명함’과 ‘선’, 둘의 가치 중에서 무엇인 먼저인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 있기는 한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은 없는 게 아닐까.


일찍이 R. 타고르는 “자기의 존재에 대하여 끊임없이 놀라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사람이란 매우 가변적이고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십 년 전의 ‘나’와 다르고 또 십 년 뒤의 ‘나’와도 다를 것이다. 현재의 ‘나’만 해도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이 여러 면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 성격만 해도 적극적이면서 소극적이고, 사교적이면서 비사교적이고, 활발하면서도 생기가 없고, 명랑하면서도 어두운 일면이 있다. 그래서 어느 한 가지로 나를 표현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가 많다.


작가는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람은 몸을 굽히고 자기 자신 속을 들여다보면 수백 개의 나를 볼 수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도 참 자기가 아니야. 아마 그 수백 개를 다 합치면 정말 자기일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적어도 믿고 있어. 그렇지만 우리는 이 수많은 자기 중에서 다만 하나만, 미리 정해진 특정의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야.

루이제 린저 저, <생의 한가운데> 중에서.




이승우 저, <생의 이면>이란 소설에도 이와 같은 글이 있다.




나는 내 자신이면서 나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하나의 단순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나 또한 그 수많은 나 가운데 하나의 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중에서.






2

책 소개  



모든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의 자전적인 기록이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은밀함이다. ...... 이 소설은 자전적이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작가의 말 중에서.





다음은 <생의 이면>에서 내가 뽑은 명문장이다.



그 여러 개의 층들은 왜 있는가,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그 수많은 층들이 맡은 역(役)은 무엇인가, 대답은 너무 뻔해서 싱겁다. 그것은 왜곡하기 위해서이다. 감추기 위해서이다. 19의 층은 18의 층을 감춘다. 20의 층은 19의 층을 왜곡한다. 그것들은 서로를 감추고 왜곡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나는 내 취사선택되고 검열된 기억 속의 과거로 들어가는 것의 무의미함을 안다.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 그 위에 어떤 색칠을 하고 어떤 형태를 그려내는 것은 현재의 나이다. 과거란 결국 인상(印象)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중에서.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이고 그 위에 어떤 색칠을 하고 어떤 형태를 그려내는 것은 현재의 ‘나’라는 것에 공감한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기억이란 믿을 것이 못 된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5년 전 싸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싸웠던 이유와 그 과정에 대해 말할 경우 두 사람의 말이 각각 다를 수 있다.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관해 지금 말하는 내용과 10년 뒤에 말하는 내용이 다를 수 있다. 어떤 것을 취사선택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또 (시간이 흐른 뒤엔)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란 희미한 밑그림’에 불과하다.



왜곡된 진실이라 하더라도 진실일 수 있을까? 물 속에 비친 찌그러진 달, 색안경을 쓰고 보는 푸른 달, 그리고 암스트롱이 찍어 보낸 필름 속의 달, 그것들을 달이 아니면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해라고 말할 것인가, 꽃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것들은 달이 아니지만 달이다.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인 것. 우리의 검열 받은 기억 속의 과거가 그러하다. 그것들은 한낱 인상에 불과하지만, 그 인상을 조작된 것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중에서.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일뿐만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물 속에 비친 찌그러진 달, 색안경을 쓰고 보는 푸른 달, 그리고 암스트롱이 찍어 보낸 필름 속의 달”과 같이 보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므로 입은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진실이 아닌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하고.


여기에 소개한 <생의 한가운데>와 <생의 이면>은 몇 번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명작소설이다. 이 두 소설은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고, 사색적인 글이 많고, 작가만이 알고 있는 생의 비밀을 포착하여 매력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많이 닮았다. 마치 한 사람이 두 작품을 쓴 것처럼 느껴진다.


두 권의 책을 통해서 두 작가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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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생의 한가운데>와 <생의 이면>이란 두 소설이 공통점이 많아서 놀라며 읽은 기억이 있다. 오랜 전에 읽었던 책들인데, 요즘 다시 꺼내 보고는 좋은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부분을 소개하고 싶어 이 글을 썼다(나는 좋은 문장에 연필로 밑줄을 긋는 버릇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이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란 없으며 그저 다양한 변주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이 중복되어 있음을 발견하는데, 그것도 독서의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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