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전, 어느 문화센터에서 수필 강의를 듣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첫 수업 때 신입 수강생이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초보자의 마음으로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겸손하게 말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최대한 나를 낮추고 싶었던 게 내 의도였다. 그런데 그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기소개'의 인사말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초보자의 마음으로 열심히 배우겠다는 말은 이미 초보자가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초보자는 아니지만 초보자의 낮은 자세로 임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아마 나는 문학의 초보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미 몇 년 동안 소설, 드라마, 추리소설, 시 등의 강의를 들었고 습작도 해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초보자가 아니라는 뜻을 담은 말을 실수로 했을 뿐이다. 그래서 ‘겸손하기도 힘든 거구나’하고 생각했다.
말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2.
대중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이다. 거기서 팔십 세쯤으로 보이는 노인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했다.
“새댁은 젊어서 좋겠다. 돈보다 좋은 건 젊음이야.”
“저, 새댁 아닌데요.”
“내 눈엔 젊으면 다 새댁으로 보여.”
그렇겠구나. 노인이 되면 노인이 아닌 사람은 다 젊어 보이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노인의 짧은 말에서 어떤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돈보다 좋은 건 젊음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노인은 가난하게 살지 않았거나 지금 가난하지 않을 것 같다, 라는 것이다. 가난하게 산 사람은 또는 현재 가난한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고생한 사람은 돈이 좋은 거라고 말했을 것이다. 젊음은 누구나 한때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돈은 그렇지 않으니까.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말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3.
누군가가 멋진 가방을 삼십만 원에 샀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할 수 있다.
“멋진 가방을 싸게 잘 샀네.” 또는 “멋진 가방이지만 왜 그렇게 비싸.”
이런 반응에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가방의 가격을 짐작할 수 있다. 삼십만 원보다 훨씬 높은 가격의 가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가방이 싸 보일 수 있고, 삼십만 원보다 훨씬 낮은 가격의 가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가방이 비싸 보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 사람의 경제적 형편까지 추측해 볼 수 있다.
말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4.
최근 김어준 저, <닥치고 정치>를 읽었다. BBK, 삼성 기업, 이명박 대통령과 여러 정치인들 등에 대한 놀라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그런 것들보다 저자의 남다른 통찰이 돋보이는 대목, 정치인 ‘조국’에 관한 글이었다.
(조국은) 공부 잘하고 잘생긴 아이로 칭찬받으며 성장했을 것이고, 그 경쟁에서 항상 선두에 있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위해 직접 나서기까지 했고 또 하고 있으니까. 그런 삶을 통해 자신의 몸에 스며든 애티튜드가 있을 텐데, 그게 그런 문장(그의 글을 말함) 뒤에 자리하고 있다고 느껴버리는 거지. 사실 조국 정도면 스스로 대견해하고도 남지. 그 정도 남자가 어디 흔한가.
그런데 대중이 정치인 조국에게서 그런 걸 느껴버리면 조국은 조국만의 가치를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고. 진보는 자기가 가진 게 당연해선 안 되는 거거든. 누구도 가진 게 당연한 사람은 없는 법이고. 그러니까 조국이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진 자산 때문에 대중 일반에게 야기할 수밖에 없는 모종의 박탈감, 그것까지 감지하고 배려할 정도의 섬세한 대중 감수성, 그게 부족하다. 물론 조국은 억울하겠지. 하지만 어떡해. 가진 게 죄지.(웃음)
- 김어준 저, <닥치고 정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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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란 정치인이 ‘진짜 오만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읽힌다’는 글이다.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느껴질 수 있는 애티튜드가 지속적으로 유포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말(또는 글)을 객관화할 수 있는 ‘섬세한 감수성’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표현 방식으로 말하면, 말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