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혼 시절에 잡지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밖에 나가 무엇을 취재하거나 누구를 만나 인터뷰를 해서 기사를 썼다. 내가 활동적인 사람이라 취재하러 다니길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출근하면 나가기가 귀찮았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기사만 쓰는 날이 있는데 이런 날이 즐거웠다. 이때 정확히 알았다. 내가 비활동적이라는 것과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 시절에 작가에게서 원고를 받아 잡지에 싣기도 했는데 나처럼 취재나 인터뷰를 하지 않고 원고를 쓰는 작가들이 부러웠다. 나는 언제쯤 책상에서만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드디어 내가 책상에서만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모 일간지에 실리는 글도,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취재나 인터뷰 없이 쓰는 글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만족스러울까? 



필력이 부족함을 알기에 만족할 수 없다. 만족할 수 없음을 다행이라 여긴다. 만족하는 인생이란 내게 김빠진 사이다 같아서다. 그건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어 뚜렷한 목표 없이 산다는 걸 의미하므로. 그건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삶이므로.  



목표가 있는 자에게는 시간이 아깝고 소중하다. 노력과 시간이 쌓여야만 목표에 닿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시간의 소중함을 알 때 생을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서머싯 몸의 소설 <케이크와 맥주>를 반 이상 읽었다. 등장인물로 작가가 나오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선 흥미롭게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밑줄을 많이 그었는데 그중 몇 개 뽑아 옮긴다.




위선에 대한 묘사 :

(26~27쪽) 앨로이 키어의 가장 탁월한 특징은 진실함이었다. 무려 이십오 년간 사기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위선만큼 성취하기 어렵고 진이 빠지는 악덕도 없다. 위선은 한시도 늦추지 않는 경계심과 영혼을 초월하는 극기가 필요하다. 불륜이나 폭음과 달리 짬짬이 훈련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야 하는 작업이다. 또한 이기적인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미소에 대한 묘사 :

(82쪽)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녀의 태도에는 상대가 경계심을 풀고 마음을 놓게 만드는 솔직함이 있었다. 그녀는 생기가 넘치는 어린아이처럼 열정적으로 재잘거렸고, 반짝거리는 눈에는 언제나 황홀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나는 왠지 그 미소가 좋았다. 조금은 능청스러운 미소라고나 할까. 능청스럽다는 말에서 불쾌한 측면을 뺄 수 있다면 말이다. 능청스럽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순수한 미소였다. 어쩐지 짓궂은 미소였다. 말썽을 피우는 줄 알면서도 재미난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아이, 큰 말썽이 날 리 없다는 걸 알고 금세 들키지 않으면 스스로 그것을 털어놓는 아이의 미소였다. 물론 그때 나는 그녀의 미소에서 편안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 :

(141~142쪽) 아름다움은 황홀감이고 배고픔만큼이나 단순하다. 이러쿵저러쿵 떠들 만한 거리가 아닌 것이다. 장미 향기와 같아서 한번 냄새를 맡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것이 예술 비평이 지루한 이유다. 아름다움과 무관한, 즉 예술과 무관한 내용이라면 모르겠지만. (중략) 아름다움은 막다른 골목이고, 한번 도달하면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산봉우리다. 그것이 우리가 티치아노보다 엘 그레코에, 라신의 완전한 대작보다 셰익스피어의 불완전한 업적에 도취하는 이유다. 아름다움에 대한 글들이 너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나도 조금 끼적여 보았다. 아름다움은 심미적 본능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대체 누가 만족하기를 원하는가? 배부른 것이 진수성찬 못지않게 좋다는 말은 어리석은 자에게나 해당된다. 아름다움은 지루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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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0-11 15: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처음 한 두 번은 취재가 재밌을 수도 있지만
매번 그래야 한다면 부담스러울 것 같긴해요.
사전에 자료도 많이 모아둬야할 것도 같고.
근데 공부는 참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적성에 맞으면 일하는 보람도 있을 것 같고.
전 약간의 낮가림이 있어서...

<케이크와 맥주> 저도 함 읽어봐야할 텐데..요.ㅠ


페크pek0501 2021-10-13 12:33   좋아요 1 | URL
오랫동안 매일 출근하는 분들, 존경스럽죠. 같은 일의 반복이라 싫증도 날 만한데 말이죠. 다시 일한다면 역시 잡지사에서 일하고 싶지만 매일 출근이라는 건 여전히 싫네요. ㅋㅋ 자유기고가로 일한 적 있는데, 이건 괜찮답니다. 매일 출근이 아니라서요.

서머싯 몸의 작품은 다 좋아하지만 그중 또 한번 읽는다면 인간의 굴레에서, 가 될 것 같아요.
좋은 가을날 보내세요. ^*^

mini74 2021-10-11 17: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위선에 대한 묘사가 저도 넘 맘에 들어요 *^^*

페크pek0501 2021-10-13 12:34   좋아요 1 | URL
저도 그거 맘에 들어요. 탁월한 문장이에요.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는 시로 읽혀요.
˝아름다움은 막다른 골목이고, 한번 도달하면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산봉우리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고맙습니다. ^^

라로 2021-10-11 18: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케이크와 맥주는 보관함에 담은 지 오래되었는데요, 대신 달과 육펜스를 읽고 있어요. 아주 마음에 듭니다. 페크님도 몸의 책을 읽고 계셔서 반가운 것만 아니라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에 인사 남깁니다.^^

페크pek0501 2021-10-13 12:38   좋아요 1 | URL
반가운 라로 님, 우린 시간이 안 맞을 터이니 지금쯤 주무시는 한밤중일지 모르겠네요.
폴 고갱을 모델로 한 달과 6펜스는 두 번 읽었어요. 읽은 내용이 생각 안 나서 몇 년의 간격을 두고 두 번째 읽었답니다. 반전이 뛰어난 작품이었죠. 인간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저도 라로 님의 댓글을 보니 반갑습니다. 이미지가 산뜻한 색상으로 바뀌었네요.
여튼 서머싯 몸을 좋아하시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좋은 가을날 보내세요. ^^

새파랑 2021-10-11 19: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장에 겹치는 책이 그래도 다섯권 있군요~! 페크님 필력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페크pek0501 2021-10-13 12:40   좋아요 2 | URL
5권이나 되다니 굉장한 거죠. 저는 다른 분들의 페이퍼에 올라온 책과 많이 겹치는 일이 드물어서 제가 읽은 책이 보이면 자신 있게, 그건 제가 읽었습니다, 라고 댓글을 남깁니다. ㅋㅋ
필력. 일간지의 칼럼을 살펴보는 편인데 참 잘 쓰시는 분들이 어찌나 많은지 기죽습니다. 기죽으려고 일부러 읽고 저절로 겸손해지네요. ㅋㅋ
화창한 가을날입니다. 좋은 시간 많이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10-11 2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일이 되는 건 어려운 일 같아요.
요즘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일로 하는 건 너무 힘들겠지, 하는 생각도 해보고요.
오늘은 대체휴일이었는데, 편안한 하루 보내셨나요.
갑자기 기온이 낮아져서 차가운 날이었어요.
건강 조심하시고,
페크님, 좋은 밤 되세요.^^

페크pek0501 2021-10-13 12:42   좋아요 2 | URL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되면 좋겠어요. 저는 따로국밥인 것 같아요.
연휴를 지나고 나니 갑자기 추워져서 어제는 전기장판을 켜고 잤을 정도예요.
따뜻해서인지 잠을 맛있게 잘 잤어요.
화장한 가을날만큼 화창한 마음으로 지내기길 바랍니다. ^^

바람돌이 2021-10-11 2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생활은 너무 좋은거 같아요. 항상 페크님 글은 진심이 느껴져서 마음에 와닿아요. 그러므로 필력이 모자란다는 말은 패스합니다. ^^

페크pek0501 2021-10-13 12:52   좋아요 1 | URL
아, 바람돌이 님. 반갑습니다. 저의 진심이 느껴지신다니 기분 좋습니다. 되도록 솔직한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게 지나쳐서 옛 글- 북플에 뜨는 글-을 볼 때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내가 저런 글을 쓰다니, 하고요. 과장해서 말하면 얼굴이 화끈거려요. ㅋㅋ
그러다가, 누가 내게 그리 큰 관심이 있겠어, 하면서 스스로 괜찮다고 토닥거립니다.
패스하신 부분은 고맙게 접수합니당~~~
행복한 가을날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

희선 2021-10-12 0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래도 그때 일이 좋은 경험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제는 페크 님이 바라는 대로 할 수 있어서 잘됐습니다 늘 공부하면서 하시는군요 멋집니다

페크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페크pek0501 2021-10-13 12:50   좋아요 1 | URL
인터뷰를 하다 보면 대답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 답답하죠.
말을 잘하는 사람을 인터뷰할 땐 신이 나죠. 기사 쓰기도 수월해지고요.

현재의 저는 바라는 대로 비슷하게 되었어요. 그래도 더 잘 쓰고 싶은 희망사항이 있는 지금이 좋습니다. 대체로 자기 삶에 칠팔십 프로의 만족을 느낀다면 괜찮은 삶 같아요.
백 퍼센트의 만족이라면 김빠지죠. 더 이상 희망 사항이 없는 삶 같아서 말이죠.

저도 제가 이 나이까지 공부하며 살 줄 몰랐습니다. 좋은 가을날 보내세요.
늘 고맙습니다.^^

초딩 2021-10-14 18: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목표가 있는 삶은 시간이 소중하다! 너무 멋집니다!!!!!
완전 멋져요 ^^

그레이스 2021-10-14 19:23   좋아요 2 | URL
저도 같은 부분에서...!

페크pek0501 2021-10-16 12:02   좋아요 1 | URL
초딩 님,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페크pek0501 2021-10-16 12:02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 2021-10-16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서울은 이번에 10월 한파특보가 2004년 이후 17년 만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1-10-17 14:57   좋아요 1 | URL
한파특보 때문에 난방을 켜야 할 것 같았어요. 오늘 새벽엔요.
밤에도 춥더라고요. 며칠 전만 해도 반팔 상의를 입었는데 곧 겨울 코트를 입어야 할 것 같아요. 변덕스런 날씨네요. 올 것이 온 것이지만요...
아직 겨울은 아니니 이 가을을 만끽하자고요. 아름다운 가을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